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97화 (297/335)

0297 / 0335 ----------------------------------------------

또 다른 도약

강호가 위치한 곳은 문표의 추측대로 야구장 내부가 아니었다.

사직야구장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부산 아시아드 보조 경기장으로 장소가 이동 된다.

"후우."

강호는 팔, 다리를 곧게 펴 보이며 날숨을 깊게 내쉰다.

동료들이 자신을 찾아 나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강호는 준비운동에 전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강호의 곁에는 기성태 코치가 함께 하고 있었고, 기 코치와 강호를 제외한 세 명의 인물이 추가로 자리하고 있었다.

기 코치는 손성조 감독이 1군 사령탑으로 임명되기 전, 김민철 감독 대행 체제에서 주루코치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강호의 거친 플레이를 부상 위험이 적은 방식으로 세밀하게 변화시킨 것이 바로 기성태 주루 코치의 공로였다.

그런 기 코치의 곁에서 누군가가 강호에게 말을 건네 온다.

"발주판에 발을 고정시키고, 준비 동작이 끝나면 차려, 총성에 스타트를 하면 됩니다. 아시겠지요?"

주의사항을 알려주며 당부의 말을 건네 오는 사람은 30대의 젊은 남자였다.

그는 기 코치와 자이언츠 구단의 요청으로 대한육상경기연맹, 즉 KAAF에서 파견된 심판 요원이었다.

"네."

강호는 심판의 물음에 짧게 답하며, 육상 트랙의 출발선으로 이동한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기성태 코치와 다른 두 명의 인물들은 100미터 피니시 라인으로 급히 걸음을 옮긴다.

강호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준 심판 요원만이 신호총을 든 채로 강호의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심판 요원은 강호의 준비 동작이 끝난 것과 도착선에 기 코치 등이 이동한 것을 모두 확인한 후 큰 목소리로 신호를 준다.

"차려!"

심판 요원의 준비 신호에 강호는 허리를 곧게 세운 후 출발 자세를 잡는다.

강호의 지금 모습은 단거리 육상 종목에서 스타트를 준비하는 육상 선수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윽고 신호총의 총성이 울린다.

탕!

총성과 함께 출발선에 있던 강호가 발주판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한다.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틈이 생길 때마다 기성태 주루 코치와 주루 훈련법을 연마하고는 했다.

루상에서의 주루 훈련법은 기본이고, 지금처럼 단거리 육상 훈련법도 병행했던 강호는 심판 요원과 육상연맹의 코치가 보기에도 완성도 높은 주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프리마켓의 영향으로 시즌 동안 성장한 신장 역시 주력을 상승시키는데 미묘한 도움을 주고 있었다.

샤아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강호의 귓가로 들려온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 강호의 100미터 주력은 12초 후반 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프리마켓의 도움으로 주력을 점진적으로 성장시켜 10초대까지 성장시켰지만, 최근에는 팀이 1위 경쟁 체제에 돌입하며 일정이 바빠져 주력을 재측정하지 못했었다.

주력 스탯이 90을 넘은 이후에는 100미터 스퍼트를 측정한 적이 없는 것이다.

"피니시!"

기 코치의 목소리에 강호가 천천히 속도를 늦춘다.

피니시 라인에 대기하고 있던 기 코치와 대한육상경기연맹에서 파견된 하성태 육상연맹 코치, 부산시체육회의 박상천 본부장 모두가 본인들의 스톱워치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풀지 못한다.

그 중 가장 먼저 하성태 육상연맹 코치가 놀란 목소리로 외친다.

"27이야! 10초 27이나 된다고요!"

하 코치는 진심으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처음 기 코치의 말과 자이언츠 구단의 요청에 시큰둥했던 그였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지방 출장 일정으로 바람이나 쐬자는 생각으로 이번 측정에 동참한 것이었다.

그런데 강호의 100미터 기록을 직접 확인하고 나니 놀란 마음을 가릴 길이 없었다.

"저는 10초 26785가 나오네요. 전자 계시로 측정한 거니까 제 측정 기록이 더 정확할 겁니다."

곁에 있던 부산시체육회의 박상천 본부장이 말해온다.

그가 측정한 기록은 10초 26785.

보통 소수점 둘째자리까지 측정이 가능한 일반 스톱워치에 비해 그가 가지고 온 전자계시는 자동으로 측정되어 소수점 다섯 자리까지 표시되는 장비였다.

그러니 박 본부장의 측정 기록을 정확한 것으로 보면 되었다.

"이것 참, 아깝다고 해야겠네요."

기 코치의 솔직한 감상평이었다.

그는 강호의 주력 훈련을 직접 주관한 주루코치이지만, 강호의 주력이 이 정도까지 좋아졌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몇 달 전, 측정했을 때 강호의 주력이 100미터 10초대로 진입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국 신기록에 근접해 있는 것은 그 역시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종전에 기 코치와 함께 측정했던 강호의 100미터 주력은 10.89수준이었던 것이다.

"이건 아까운 게 아닙니다! 전문 육상 선수도 아닌데 이런 기록이라면 1년 안에 신기록 달성도 충분해요! 10.27이면 김국영 선수의 한국 신기록하고 겨우 0.04초 차이라고요."

하 코치는 마치 귀한 원석을 발견한 사람의 표정으로 그렇게 소리친다.

그의 목소리에 곁에 선 박 본부장 역시 동조하고 나선다.

"맞습니다. 이 정도 기록이면 1년 안에 한국 신기록도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백강호 선수가 올 시즌에 전성기에 들어갔으니까 향후 1년동안 신체 기능이 남다를 겁니다. 9초대 달성은 몰라도 한국 신기록은 노려볼만 합니다."

하 코치에 이어 박 본부장 역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그 때 피니시 라인을 지나쳐 트랙을 천천히 되돌아온 강호가 세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다.

"한국 신기록이요?"

강호가 묻고 있었다.

달리는 것에 집중하느라 자신의 기록이 몇 초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조금 전 박 본부장이 말했던 '한국 신기록'이라는 단어는 또렷이 들은 상태였다.

"네! 충분합니다! 주법이 완성 단계가 아니라서 주법 수정만 해도 기록이 더 올라갈 겁니다!"

하 코치는 흥분하고 있었다.

한국 단거리 육상은 1979년 서말구 선수가 수립한 10초 34의 한국 신기록 이후 무려 30년간 기록이 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2010년에 김국영 선수가 10초 23으로 기록을 단축하면서 단거리 육상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지만, 그것은 결국 국내에 국한되는 기록일 뿐이었다.

세계 기록인 9초 58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기록이었던 것이다.

"1년 입니다! 1년만 집중적으로 훈련하면 9초대도 가능할 수 있어요! 기 코치도 자메이카 연수를 다녀와서 잘 알 거 아니에요? 주법과 스타팅 기법, 호흡 동작하고 임팩트 동작 정도 수정해도 기록이 개선된다는 걸 말입니다."

한 때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역임했던 하 코치의 말이었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강호의 주법은 완성형 주법이긴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수정할 부분들이 많았다.

강호의 신분이 육상 선수가 아니라 야구 선수이다 보니 루상에서의 주루 플레이 위주로 훈련을 진행했던 까닭이었다.

"하하, 글쎄요."

"글쎄요가 아니라니까!"

하 코치는 자신의 말에 큰 반응이 없는 기 코치를 답답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그러다가 대상을 바꿔 당사자인 강호를 향해 몸을 달린다.

"백강호 선수! 나중에 전국체전에 출전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이언츠 구단에 정식 공문을 발송하겠습니다!"

하 코치는 갑자기 손을 뻗어 강호의 손을 붙잡는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기는 했지만, 강호는 침착한 어조로 거절의 의사를 밝힌다.

"전국체전이면 시즌 중에 진행되지 않습니까? 저는 야구에만 집중할 생각입니다."

강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 후 하 코치와 박 본부장의 설득은 계속되었고, 그들은 각자의 명함을 강호의 손에 꼭 쥐어주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기 코치가 팀 훈련에 강호를 참여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두 사람과 작별을 고한 것이다.

하 코치와 박 본부장이 발걸음을 돌리고, 강호와 기 코치는 사직구장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강호 너는 100미터 신기록 달성에 욕심이 없는 거야?"

걸음을 옮기던 기 코치가 강호에게 물어온다.

그는 강호가 자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자 변명하듯이 말을 이어나간다.

"대단한 일이잖아. 한국 육상 신기록자로 이름을 올리다는 게."

"저는 굳이 100미터 육상이 아니라도 한국 신기록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홈런이나 타점은 세계 신기록이기도 하고요. 열 경기 연속 홈런 기록도 세계 신기록입니다. 다른 기록 다 열거해 볼까요?"

"아니, 됐다. 충분히 납득했어."

"코치님은 제가 내년 시즌에 전국체전에 나가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그럼 최소 몇 주 동안은 팀 경기에 못 나가게 될 수도 있어요."

"하하, 나도 알고 있다. 그런 건 감독님도 원하지 않으실 거야. 그리고 자이언츠 팬들이 가만히 내버려두겠어?"

기 코치는 강호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한다.

강호의 전국체전 참가를 손 감독이 원하지 않는다는 말, 그의 말에서 강호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을 굳힌다.

'감독님이 그런 상황을 내버려두실 분은 아니니까.'

강호가 생각하는 손 감독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팀을 희생시킬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손 감독 본인에게도 적용되는 엄격한 야구 철학이었기 때문에 하성태 육상연맹 코치의 제안을 수용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10초 27이라니? 정확하게는 10초 26대의 기록이니까 정말 한국 신기록이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강호는 문득 든 생각에 작게 미소 지어 보인다.

육상연맹의 하 코치나 부산시체육회의 본부장이 자신에게 그렇게 매달린 이유. 그것을 강호 본인과 세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전력으로 뛰지 않았는데도 그 정도라면 굳이 주법을 바꾸지 않아도 신기록 달성이 가능할 거야.'

그것이 강호의 생각이었다.

강호는 조금 전 기록을 측정할 때 마지막 90미터 구간에서 조금은 속도를 줄인 것이다.

그것은 당사자인 강호 본인은 물론 피니시 라인에 기다리고 있던 기 코치와 하 코치, 박 본부장 모두가 목격한 장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육상연맹의 하 코치가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써는 전력으로 달리기만 해도 한국 신기록이 가능한 엄청난 자질을 가진 단거리 육상 유망주를 발견한 셈이니까 말이다.

"강호야, 너의 주력 측정에 내가 왜 육상연맹과 부산시체육회까지 참여시킨 줄 알고 있니?"

홀로 생각하며 걷고 있던 강호에게 기 코치가 갑작스런 질문을 던져온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달리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애써 그 질문을 하지 않고 있던 강호였다.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본다.

"왜입니까?"

강호가 되물어오자 기 코치는 진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연다.

"지금의 국내 100미터 기록은 김국영 선수가 가지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서말구 선수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기 코치의 질문에 강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서말구 선수는 김국영 선수 이전에 무려 30년 간 한국 100미터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레전드인 까닭에 육상 선수가 아닌 강호도 수차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기 코치가 서말구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일까.

강호의 그런 의문 속에 기 코치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어간다.

"서말구 선수는 육상선수 은퇴 후 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서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한 적이 있어. 들어본 적 있니?"

"네? 그게 진짜입니까?"

기 코치의 말에 강호는 놀라게 된다.

한국 단거리 육상의 전설인 서말구 선수가 자이언츠의 선수였다니.

왜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던 걸까.

"서말구 선수는 자이언츠에 입단해서 선수로 활동했지만, 1군 무대에 오른 적은 없어. 대신 당시 2군의 대주자겸 주루코치로 3년간 활동했었지. 당시 자이언츠 선수들의 주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계기이기도 해."

기 코치가 전해주는 말을 통해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도 들었다.

"그게 오늘 일하고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오늘 봤었던 육상연맹의 하 코치와 부산시체육회의 본부장, 앞으로 우리 구단은 이 두 사람과 긴밀한 협조를 진행하게 될 거야. 그게 감독님의 뜻이니까."

기 코치의 대답에 강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서말구 선수가 자이언츠 주루코치로 활동했다는 사실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니 손 감독이 그리고 있는 밑그림에 대해서 약간의 추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감독님은 벌써 내년 시즌 이후를 준비하고 계시는구나!'

강호는 손 감독의 철저한 준비성에 또 한 번 놀란다.

손 감독의 철저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팀이 정규 시즌 우승 경쟁에 돌입한 상태에서 내년 시즌을 위해 다른 기관과 협의를 진행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런 손 감독의 의지를 구단에서 수용했다는 사실도 놀라운 요소였다.

강호의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기 코치의 말 또한 이어진다.

"올 시즌 우리 팀은 강호 너를 포함해서 2군 선수들이 대거 발탁되며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어. 감독님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실 생각인 거야. 세대교체를 통해 선수들의 평균 연령이 크게 줄었으니까 그 장점을 활용하시겠다는 생각이야. 강호 너같이 젊은 나이에는 습득 능력이 빠른 편이잖아. 이때야말로 획기적인 주력 훈련을 통해서 팀 전체의 주루능력을 대폭 끌어올릴 기회인 거지."

기 코치의 대답을 통해 손 감독이 내년 시즌은 자이언츠의 뛰는 야구를 만들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대도라고 불리는 전준호 선수 이후, 자이언츠 출신 도루왕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런데 올 시즌 강호가 등장하면서 시즌 최다 도루 기록을 갱신하는 기염을 토해낸 상황이다.

손 감독은 그런 강호의 활약과 분위기에 힘입어 내년 시즌부터 팀 컬러에 새로운 색 하나를 더할 생각인 것이다.

"지금은 강호 너만 알고 있어. 내년에는 강호 너에게 많은 도루를 요구하지 않을 생각이야."

기 코치의 이어진 말에 강호는 생각을 멈추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건 왜입니까?"

물어오는 강호의 목소리에 기 코치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강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너는 우리 팀 4번 타자야. 올해는 네 개인 기록 달성을 위해서라도 그린 라이트를 허용했지만, 내년부터는 4번 타자의 역할에 집중하는 게 좋아. 그게 감독님의 생각이니까. 뭐, 그렇다고 해서 그린 라이트를 회수할 생각은 아니니까 안심하도록 해."

강호의 말에 기 코치는 그렇게 답한 후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런 기 코치의 곁으로 따라붙은 강호는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한 가지 결과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지만, 그것을 손 감독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기 코치에게 직접 전해 듣게 되자 감회가 남다른 강호였다.

'내년 시즌에도 우리 팀의 4번 타자는 나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린 강호의 거침없는 발걸음이 사직구장을 향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실제로 서말구 선수는 1984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1987년까지 선수겸 트레이너로 활동했었습니다.

1군 기록은 없지만, 자이언츠의 주력을 끌어올리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