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94화 (29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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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와 팬의 만남

깊은 고뇌 끝에 결국 히어로즈 덕아웃의 결정이 마운드에 전달된다.

덕 아웃에서 벤치의 의사를 전달받은 박동현 포수는 잠시의 망설임 끝에 투수를 향해 싸인을 낸 것이다.

그 싸인을 전달받은 선발 투수 김성수의 표정이 굳어진다.

'뭐? 승부를 보자고? 거르지 않는다는 말이야?'

싸인을 확인한 김성수 투수의 입술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승부를 위해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던지라는 싸인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김성수 투수는 88년생 올해로 32살이 되는 중견 투수로 한 때는 불펜 투수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올 시즌 팀 사정상 얼떨결에 3선발 자리를 책임지게 되었다.

'감독님은 1회에 내가 백강호에게 홈런 얻어맞는 모습을 제대로 안 보신 거야? 오늘 백강호의 타격감이 최상급이라고! 나 정도의 구위를 가진 투수가 존 안으로 포심을 밀어 넣으면 무조건 통타당하고 말 거야.'

강호와의 정면 승부를 앞둔 김성수 투수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이미 1회 말 상황에서 강호에게 투런 포를 허용한 상태였다.

그것도 초구로 선택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걷어올린 강호의 홈런이었다.

'가만히 놔뒀어도 볼이 되는 공을 홈런으로 만든 타자에게 스트라이크를 던져 넣으라니. 나더러 그냥 홈런을 내주라는 소리인가?'

김성수 투수는 덕 아웃의 의도에 의심을 품기까지 한다.

보통 신기록 수립을 앞두고 있는 상대팀 선수에게 승부를 피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도 했다.

아직 우리나라 리그에는 보편화되지 않았지만, 야구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관례화되다 시피한 문화였다.

'그런데 그건 8회 이상까지 퍼펙트 피칭을 하고 있는 투수에게나 해당되는 거지. 홈런으로 정점을 찍은 4할 대 타자에게 해당되는 관례는 아니라고!'

성수는 속으로 절규한다.

설령 신기록을 앞둔 선수에 대한 관례가 있다고 해도 그건 퍼펙트게임이나 노 히트 게임을 앞둔 투수에게나 해당되는 것이고, 타자에 관한 기록 달성의 관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백강호처럼 70홈런에 4할 타율이 넘는 타자에게 연타석 홈런을 내주면 그 경기는 시작부터 항복 선언을 한 거나 다름없어!'

그것이 성수의 생각이었다.

8회나 9회까지 퍼펙트 한 투구를 보여준 투수에게 번트를 대지 않는 것은 이미 경기가 막바지에 도달한 상태에서 지고 있는 팀이 패배를 받아들인 부분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우 3회 말이었다.

경기를 포기하기에는 이른 시점인 것이다.

'지금은 2사 주자 1루 상황이야. 거르는 게 최선이라고. 하지만 감독님이 승부를 보길 원하시다면 내 입장에서는 거부할 수 없겠지.'

성수는 결국 결론을 내린다.

올 시즌 3선발까지 치고 올라오긴 했지만, 그는 원래 불펜을 오고가며 6천만 원 수준의 연봉을 책정 받는 평범한 투수다.

어렵사리 가진 바 능력을 인정받은 시즌에서 감독의 지시를 직접적으로 거스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승부를 보자!'

마음을 다잡은 김성수 투수가 포수의 싸인에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드업 동작에 들어간다.

1루에 주자가 있는 상황이긴 해도 세트 포지션이 아닌 와인드업 동작을 준비하는 것은 그가 강호와의 승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일 것이다.

파핫!

유니폼 옷깃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김성수 투수의 역동적인 투구가 시작되고, 곧 그의 손끝을 떠난 공이 타석을 향해 빠르게 날아든다.

그 모든 과정을 응시하고 있던 강호는 순간 눈빛을 빛낸다.

'온다!'

공의 궤적을 확인한 강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김성수 투수의 초구가 존 안으로 들어오는 패스트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인지 강호의 스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감독님은 타석 위에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믿어주신다고 하셨어. 그 믿음을 실망으로 돌려드릴 수는 없어. 절대로!'

타격을 위해 이를 악문 채 배트를 돌리는 강호의 생각이었다.

며칠 전, 자신의 플레이에 전권을 맡긴다는 손 감독의 말이 강호의 스윙에 더할 나위 없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김성수 투수의 변형 패스트볼을 정확히 통타해내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었다.

딱!

호쾌한 타격음에 모든 관중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강호가 1회에 이어 또 다시 초구를 공략하고 있었고, 그 타구가 내야를 훨씬 넘어 담장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와아!"

"넘어가라! 넘어가!"

"앗!"

자이언츠 팬들의 함성 속에 외야를 가른 타구가 담장을 때리고 있었다.

터엉!

펜스를 직격하는 타구에 자이언츠 팬들의 환호는 안타까운 탄성으로 뒤바뀐다.

"아! 펜스에 맞았어!"

"넘어간 거 아니었어?"

"아니야, 안 넘어갔어. 저기 봐. 펜스 맞고 중견수 뒤쪽으로 떨어졌잖아!"

팬들은 강호의 타구가 홈런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응원의 목소리를 거둬들이지는 않는다.

강호의 타구는 담장을 맞고 중견수 근처에 떨어졌고, 여전히 상황은 인플레이 상황이었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지금의 안타로 타자주자인 강호가 3루까지 뛰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뛰어! 3루까지!"

"백강호 달려!"

팬들은 이제 강호를 향해 다른 방식으로 응원의 목소리를 토해낸다.

그런데 그 사이에는 팬들에게 낯선 얼굴이지만, 자이언츠 구단 인사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인물 한 명이 섞여 있었다.

그는 바로 자이언츠 구단의 사장인 지정만 사장이었다.

"백강호! 3루까지 달려라!"

지 사장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강호의 이름을 목 놓아 외친다.

그런 지 사장이 앉아 있는 곳은 실내 VIP석이 아니라 1루 쪽 관중석이었다.

지 사장은 기획실장인 허동준과 수행 비서만을 대동한 채 자이언츠 팬들과 섞여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지 사장의 모습은 비록 깔끔한 슈트를 입고 있기는 했지만, 영락없는 자이언츠 열성 팬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중계 카메라가 중간 중간 핏대를 세우며 응원하는 지 사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는데, 지 사장은 카메라가 자신을 찍을 때도 크게 의식하지 않으며 열성적인 응원에 동참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무지하게 신경쓰이네. 카메라가 계속 찍고 있는데 사장님은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시는 거야? 나도 같이 소리를 질러야 되는 건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앉아 있어?'

허 실장은 자신의 곁에 앉은 지 사장이 카메라가 찍고 있는 와중에도 체통을 지키지 않는 모습에 조금은 망설이게 된다.

그러다가 그라운드 위의 강호가 2루 베이스를 넘어 3루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렇지! 3루 슬라이딩!"

지 사장을 대신해 체통을 지키고 있던 허 실장마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강호에 대한 응원에 열을 올린다.

그 모습 역시 중계 카메라를 통해 고스란히 포착되고 있었고, 중계석에서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는다.

중계석의 염 캐스터는 강호의 안타가 3루타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후, 카메라에 잡히고 있는 지 사장과 허 실장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여러분은 지금 자이언츠 구단 사장님이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사직구장에 VIP용 관중석이 따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단 사장이 일반 관중석에서 자이언츠 홈 팬들과 섞여 응원하는 모습이 새롭게 느껴지네요."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응원을 하고 있는 구단 사장의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인지 염 캐스터가 허허로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곁에 앉은 안경훈 위원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허허, 저런 장면을 다보네요. 옆에 있는 분도 구단 프런트 중 한 분으로 보이는데 정말 보기 좋은 장면입니다. 구단 사장이 관중석에 앉아 팬들하고 호흡하며 팀을 응원하는데 어떻게 경기를 질 수가 있겠습니까? 참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안 캐스터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이언츠는 구단 프런트와 선수단 사이의 마찰이 워낙 심해 CCTV사찰 등으로 표면화될 정도까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올 시즌 지정만 사장이 새롭게 부임하면서 선수단과 프런트 간의 대립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당장 1루 관중석에서 팬들과 어울려 앉은 지 사장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올 시즌 자이언츠가 선두로 도약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보여주는 장면 같네요. 구단 사장이 현장에 직접 나와 허물없이 선수들을 응원하는 팀의 성적이 나쁜 게 더 이상한 거 아니겠습니까?"

안 위원의 감탄은 계속된다.

곁에 앉은 염 캐스터는 이쯤에서 지 사장이 현장을 찾은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낀다.

"TV를 켠지 얼마 안 되시는 시청자분들을 위해서 설명 드려야할 것 같네요. 자이언츠 프런트에서 경기장을 찾은 이유는 오늘 경기가 끝난 후에 자이언츠 구단의 이벤트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바로 지금 3루타를 치고 출루한 백강호 선수에 대한 행사죠. 시즌 70홈런 달성에 대한 시상식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많은 시청 바랍니다."

염 캐스터의 설명에 이미 이벤트 일정에 대해 알고 있는 안 위원도 궁금증이 생긴다.

"이번 시상금은 규모가 얼마나 될까요? 70홈런이니까 자이언츠 구단에서 7천만 원을 내놓을 것 같기도 한데."

안 위원은 궁금한 마음에 개인적인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시상식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강호의 70홈런에 대한 시상금이 얼마인지는 듣지 못했던 것이다.

현장 PD를 통해 시상금 규모를 전달받은 염 캐스터는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현장 PD에게 전달받은 정보로는 아홉 자리 단위의 시상금이라고 하네요. 시즌 중에 진행된 시상식의 상금 규모 중에는 역대 최고 수준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아홉 자리요? 아, 그럼 억 단위라는 말이겠네요."

"자세한 내용은 경기가 끝난 후에 시청자 여러분도 이벤트를 직접 지켜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염 캐스터는 TV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관심을 증폭시키기 위해 그쯤에서 멘트를 마무리 한다.

대신 곁에 앉아 궁금해 하는 안 위원을 향해 메모지에 아홉 자리의 숫자를 적어 슬쩍 내밀어 보인다.

그것을 확인한 안 위원의 눈이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역대 급 시상금이 맞네요. 백강호 선수의 올 시즌 연봉이 2천 9백만 원 규모거든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을 이런 경우에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안 위원 역시 그쯤에서 멘트를 마무리한다.

그러면서도 시상금을 받게 될 강호에게 진심으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데뷔 시즌에 이토록 많은 시상금을 받은 선수가 또 누가 있었겠는가.

그 대상이 4할 타율에 70홈런을 때린 주인공, 강호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던 안 위원은 또 다시 궁금증 하나가 생겨난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게 보통 시상식 같은 이벤트는 경기 후가 아니라 경기 전에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지 않나요? 만약 경기 후에 시상식을 하게 되면 홈 팀이 졌을 때 시상식 분위기가 애매해 지거든요. 백강호 선수의 70홈런에 대한 시상식을 경기 후에 하는 게 의문이 드네요. 거기에 대한 정보도 현장 PD가 알려준 게 있습니까?"

안 위원은 개인적인 호기심에 묻고 있었다.

대다수의 경우에 시상식과 같은 일정은 경기 전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만약 경기 후에 시상식 일정을 잡았는데 홈팀이 패배해버린다면 시상식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채로 행사가 진행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염 캐스터가 미리 전달받은 내용이 있었던지 그 의문에 곧바로 대답해주고 있었다.

"네, 현장 PD가 자이언츠 구단에 전달받은 내용으로는 구단 프런트 쪽에서 경기 후에 시상식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지금 중계 카메라로 포착된 구단 사장님의 모습을 보니까 그 이유가 설명되는 것 같네요."

염 캐스터의 간략한 설명에 이유를 깨닫게 된 안 위원이 '아~'하는 탄성을 내뱉으며 입을 연다.

"자이언츠 프런트 쪽에서는 오늘 경기에서 팀이 승리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대단하네요. 아무리 선수들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런 확신까지 가지기가 힘든 거거든요. 괜히 확신을 가졌다가 홈팀이 패하기라도 하면 시상식을 주관하는 입장에서 민망해지기도 하고요."

안 위원의 말대로였다.

지 사장은 오늘 경기에서 팀이 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강호에 대한 시상식 일정을 경기 후로 잡은 것이었다.

안 위원은 그 결단에 찬사를 보내며 갑자기 든 생각을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백강호 선수가 만약 73홈런을 때리면 더 재밌어지겠네요. 백강호 선수가 세계 홈런 기록과 타이가 되면서 팀까지 승리하게 만들면 프런트 입장에서는 그보다 좋은 일도 없는 거거든요. 선수단을 믿고 경기 후에 이벤트를 진행한 보상을 톡톡히 받게 되는 겁니다. 팀도 승리하고, 신기록도 수립하고요. 1회 말 백강호 선수가 투런 포를 때리면서 시즌 홈런 기록이 72홈런이 되지 않았습니까?"

안 위원의 주장에 염 캐스터가 '그러네요!'라고 맞장구를 친다.

그런 중계석의 목소리에 TV로 중계를 지켜보는 팬들은 강호의 다음 타석을 더욱 기다리게 된다.

1회 말 하나의 홈런과 3회 말인 조금 전 상황에서 1타점 3루타를 때려낸 강호.

조금 전의 3루타는 펜스를 직격하는 타구였고, 1회 말 홈런은 당연히 펜스를 넘기는 타구였다.

강호의 타격 컨디션이 상당히 좋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래. 백강호 선수, 갑시다! 73홈런으로 직행하자고요!"

"빨리빨리 경기해라. 백강호 다음 타석 좀 보게!"

안 위원의 말에 동조된 자이언츠 팬들은 어서 빨리 강호의 다음 타석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런 팬들의 기대 속에 경기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제 자이언츠가 6대 2로 앞선 가운데 6회 말 타석이 시작되고 있었다.

6회 말, 선두타자로 타석에 선 타자는 바로 강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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