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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를 위한 결정
팬들의 함성 속에 타석에 선 강호, 그리고 그를 마주하게 된 히어로즈 선발 투수 맥도날드.
때려내야만 하는 강호의 책임감과 막아내야 하는 맥도날드의 입장이 충돌하는 가운데, 마운드에 발을 디디고 있는 맥도날드는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거르라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보낸 포수의 싸인에 맥도날드 투수의 미간이 잔뜩 좁혀진다.
1회 말, 1사 주자 1, 3루 상황. 지금이 과연 강호를 거를 상황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코칭스태프는 자이언츠의 라인업을 제대로 보기나 한 거야? 오늘 자이언츠의 타순은 백강호 하나를 거른다고 해서 될 라인업이 아니잖아!'
그것이 맥도날드의 불만이었다.
오늘 자이언츠의 라인업은 4번 타자 강호 이후에 5번 타자 황제인, 6번 타자 스팅, 7번 타자 문표, 8번 타순에는 캡틴 강민수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름만 놓고 봐도 모두가 3할 대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는 좋은 타자들이었고,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의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5번 타자 황제인은 컨택과 파워 모두를 갖춘 타자야. 6번 타자인 스팅은 전형적인 거포 유형의 타자고. 그런데 7번 타순의 최문표는 컨택 위주의 교타자 형 타자. 밸런스 형 황제인을 넘어도 스팅이 있고, 스팅을 넘으면 컨택 위주의 최문표가 버티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이 세 명을 넘어도 시즌 29홈런의 강민수가 남아 있어.'
맥도날드는 오늘 자이언츠의 타순을 떠올리며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중심 타선과 연결된 하위 타선마저도 중심 타선 같아 보이는 자이언츠의 라인업이었다.
5번 타자 황제인은 4번 타순에 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타자였고, 6번 타자 스팅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 7번 타순의 문표는 2번이나 3번 타순에 어울리는 타자인데다가 8번 타순의 민수는 5번 자리에 두어도 될 정도의 장타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오늘 자이언츠의 하위 타순은 또 다른 중심 타순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인 것이다.
'이런데 백강호를 거르자고?'
맥도날드는 그런 의사를 담아 포수를 노려보지만, 포수 박동현은 자신의 미트를 흔들며 고의사구를 재촉할 뿐이었다.
'그래. 거르자, 걸러!'
맥도날드는 결국 한숨과 함께 자리에 일어서 있던 포수 박동현의 방향으로 고의사구를 던진다.
그 모습에 사직구장이 야유로 가득차고, 잠시 후 강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1루로 걸음을 옮긴다.
그런 강호의 얼굴은 중계 카메라를 통해 포착되었고, 중계진에서는 그에 대한 코멘터리를 잊지 않는다.
"아~~거르네요. 히어로즈가 백강호를 걸러서 1사 만루를 채웁니다. 안경훈 해설께서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요. 지금은 위험한 상황을 자처하는 결정일 수가 있어요. 오늘 자이언츠의 타순에서 보시는 것처럼 하위 타선이 하위 타선처럼 안 느껴지거든요. 컨택 능력이 좋은 황제인을 5번에 넣고, 슬러거 유형의 스팅을 6번에 다시 컨택형 최문표를 7번에, 장타력을 갖춘 강민수 선수를 8번에 넣으면서 퐁당퐁당 구조로 하위 타순을 짰어요. 여기에 9번 타자인 황인태 선수는 컨택 능력도 검증을 받은 데다 발까지 빠르거든요. 그야말로 피할 곳이 없는 자이언츠의 타순입니다."
염 캐스터의 질문에 안 위원은 강호를 거르는 히어로즈의 고의사구 결정이 오히려 좋지 못한 분위기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안 위원의 말은 곧 현실이 되고 있었다.
딱!!
호쾌한 타격음과 함께 루상의 모든 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좌중간을 가른 타구는 팬스를 직격하는 빠른 타구였고, 중견수 한정음이 급히 타구를 잡았지만 이미 3루 주자와 2루 주자가 홈을 밟고 있었다.
여기에 1루 주자였던 강호가 3루 베이스를 도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파핫!
역동적인 모션으로 중견수 한정음이 홈을 향해 공을 뿌린다.
하지만 강호의 발이 워낙 빨라서 홈에서 잡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결국 중견수가 던진 송구는 투수인 맥도날드의 글러브에 가로 막힌다.
터업!
포구를 함과 동시에 맥도날드는 2루 베이스를 밟은 타자 주자 황제인을 견제해 본다.
그 사이 1루 주자 강호가 홈을 밟았고, 황제인의 2루타는 싹쓸이 3타점 2루타로 기록되어 버린다.
자이언츠 홈팬들의 목소리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잘 했다, 황제인!"
"요놈들아, 이제 알았냐? 우리 팀에는 백강호 걸러도 황제인이 있다!"
"그 다음에는 스팅도 있고, 강민수도 있다!"
"중간에 최문표는 왜 빼는 거야?"
"최문표? 그 선수는 믿음이 좀 안 가."
팬들은 황제인의 3타점 2루타에 기뻐하며, 웃음 띤 얼굴로 대화를 나눈다.
그 사이 6번 타자인 스팅이 우익수 방면 뜬공으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2루 주자였던 황제인이 3루까지 갈 수 있었고, 이어서 타석에 들어선 문표의 내야 안타에 홈을 밟는다.
강호를 거른 히어로즈의 결정이 결국 4실점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 걸러라! 우리 백강호 선수를 거르니까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야!"
"백강호를 두 번 정도만 더 걸렀다가 10점도 넘게 나겠네."
자이언츠 팬들은 강호를 걸렀던 히어로즈의 결정에 질타의 목소리를 던지고 있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강호를 걸렀던 결정이 최악의 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어로즈 덕 아웃의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3회 무사 주자 1루 상황에 타석에 선 강호를 또 다시 고의사구로 거르는 작전을 펼친 것이다.
"우우우우~~"
"야구를 하자, 야구를! 왜 백강호 타석 때만 캐치볼을 하냐?"
팬들의 야유에 고의사구를 던지고 있는 맥도날드 투수의 표정이 착찹해진다.
'내가 이러려고 한국에 온 건 아닌데.'
맥도날드의 마음에 조금씩 자괴감이라는 감정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런 투수의 감정은 포수인 박동현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고, 경기가 진행됨에 따라 히어로즈 선수단 전체를 빠르게 잠식해 나간다.
그런 분위기를 뒤늦게 알아차린 히어로즈 코칭스태프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위기가 넘어갔네요."
수석 코치의 목소리에 히어로즈의 감독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1회 말에 이어 3회에도 강호를 거르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4회 말이 된 지금 상황에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점수 차가 11대 2까지 벌어지고 만 것이다.
히어로즈의 감독은 그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백강호의 타석에서 승부를 봤어야했어. 백강호를 지명타자로 둔 게 이런 변수를 만들어 내다니. 심리전에서 완전히 밀려버렸구나.'
히어로즈의 감독은 강호가 지명타자로 기용된 오늘 라인업을 확인하고는 그것이 큰 변수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비력이 좋은 강호를 유격수 자리에서 뺌으로서 자이언츠의 수비력이 약화되는 결과가 있을 거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결정이 타석 상황에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4번 타자의 수비 위치를 변경하는 게 타석에서 큰 변수가 될 수는 없어. 수비위치 하나 바뀐다고 타석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손 감독은 백강호를 지명타자로 세우고, 백강호가 걸러질 것을 대비한 하위타선을 들고 나왔어. 이런 결정이 결국 심리전 작용을 해서 우리 선수들의 정신력에 데미지를 줘버린 거야.'
잠시 심리전의 중요성을 잊고 말았다.
그것이 결국 패착이 되었고, 결국 이날의 경기에서 히어로즈는 6대 17로 대패하며 강호를 고의사구로 내보낸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해야만 했다.
덕분에 자이언츠는 9월 17일 타이거즈 전의 패배 이후 7연승을 달리며 같은 날 경기에서 패한 베어스를 한 경기 반 차이로 격차를 벌릴 수 있었다.
히어로즈 입장에서는 다행인 것이 광주 경기에서 타이거즈 역시 패하며 여전히 5위 팀 타이거즈와의 격차를 한 경기 차로 유지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경기까지 패하게 된다면 순위 유지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백강호를 거르느냐, 승부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걸러도 문제고, 승부해도 문제고. 이것 참. 왜 하필이면 지금 자이언츠를 만나서 이런 일을 겪는 건지. 시즌 초나 중반에 자이언츠 라인업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 자이언츠 전을 모두 소화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놈의 태풍이 뭔지, 우천 취소 됐던 게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게 되네요."
하루가 지나 히어로즈 코칭스태프는 강호에 대한 승부를 고심해야만 했다.
27일 금요일, 오늘의 경기는 자이언츠와의 시즌 마지막 대결이었고, 4위 수성을 위해서는 꼭 이겨야만 하는 경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4번 자리에 붙박힌 강호에 대한 고민으로 다른 사항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손 감독이 백강호를 1번이나 3번 같이 다른 타순에 뒀으면 이렇게 고민은 안했을 텐데요."
코치 중 누군가의 의견이었다.
그는 차라리 강호를 리드오프나 다른 타순에 뒀으면 미련 없이 고의사구로 내보냈을 거라는 발언을 하고 있었다.
발 빠른 주자 백강호를 루상에 내보내는 것이 두렵기는 하지만,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타자로서의 강호가 훨씬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4번 타자인 거 아니겠습니까? 어떻게든 작전을 짜내서 오늘 경기는 이겨야지요."
"그럼 승부하는 겁니까?"
"그건 좀."
"그럼 거르자는 거예요? 어제 경기를 보고서도 거르자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요."
코칭스태프 간의 대화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감독으로서는 한숨을 내쉬게 만드는 사전회의 장면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대처하기로 합시다. 백강호도 만능은 아니니까 승부처가 아니면 승부하고, 승부처일 때는 거르기로 하죠."
감독의 결정은 결국 어제와 달라진 것이 없는 내용이었지만, 딱히 더 좋은 작전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모든 코치들이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결정이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야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따악!!
호쾌한 타격음과 함께 사직구장이 함성으로 가득 차오른다.
1회 말 2사 주자 2루 상황에서 터진 강호의 타구가 사직구장의 좌측 담장을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넘어갔구나!!"
"오늘은 초구부터 넘기는구나! 역시 백강호야!"
"72홈런 추가요!"
자이언츠 팬들은 상대 팀 배터리의 집중 견제 속에서도 나온 강호의 홈런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22일 사이클링 홈런 이후 세 경기 만에 나온 강호의 홈런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중계 카메라가 그런 팬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고, 중계석에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지금의 상황을 알린다.
"넘어갔습니다! 백강호 시즌 72호 홈런! 초구를 노린 백강호의 타구가 좌측 담장을 너머 투런 홈런포가 됩니다!"
"이래서 백강호 선수를 고의사구로 내보내는 겁니다. 초구부터 홈런을 날려버리는데 어느 배터리가 정면 승부하고 싶겠습니까? 그나저나 벌써 72호 홈런이네요. 이렇게 되면 2001년도에 당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배리 본즈 선수가 기록한 73홈런의 세계 기록에 홈런 한 개차로 다가서게 되네요. 대단합니다."
염용수 캐스터의 말에 이어 안경훈 해설의 코멘터리가 더해진다.
안 위원은 특유의 침착한 목소리로 해설의 말을 끝냈지만, 그것을 듣게 된 자이언츠 팬들은 침착할 수 없었다.
"뭐?! 그럼 하나만 더 치면 배리 본즈랑 동률인 거야?"
"메이저리그하고 KBO수준 차는 존재하겠지만, 개수로는 확실히 동률이 되는 거지!"
"너는 그게 무슨 소리야? 수준 차를 따질 거면 경기 수도 따져야지!"
"무슨 경기 수?"
"메이저리그는 한 시즌이 162경기고, 우리는 144경기 밖에 안 되는데 상대적으로 경기수가 적은 우리나라에서 70홈런 때리는 게 더 힘든 거라고!"
자이언츠 팬들의 의견이 분분해진다.
메이저리그와 국내 리그의 수준 차는 분명히 있었고, 경기수의 차이 역시 존재했다.
하지만 강호의 홈런 기록이 그런 차이를 떠나 세계 기록인 배리 본즈의 2001년 기록에 한 개 차로 가까워졌다는 것이 큰 의미가 되었다.
그것은 강호를 응원하는 자이언츠 팬으로서의 자부심이었다.
"나는 배리 본즈도 모르고, 메이저리그도 안 봐. 그런데 우리 백강호 선수가 세계 기록을 넘었으면 좋겠어!"
결국 팬들의 바람은 강호의 다음 홈런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귀결된다.
당연히 강호의 다음 타석을 향해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팬들의 관심 속에 3회 말 2사 주자 1루 상황에서 강호가 타석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거르지 말고 붙어라!! 제발 좀 붙어라!!"
"가자! 73호 홈런!"
"넘겨라, 백강호!!"
사직구장이 잔뜩 달아오른 가운데 반대로 히어로즈 덕 아웃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작전 코치의 목소리가 묘하게 신경을 자극한다.
"거를까요?"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것을 들은 감독은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는 지금 순간만큼 올 시즌이 힘든 순간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결국 히어로즈의 감독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말없는 절규를 내질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