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92화 (29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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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를 위한 결정

선수들이 강호의 행방을 궁금해할 무렵, 강호는 손 감독의 부름을 받고 그와 독대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손 감독은 강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문을 연다.

"이제 열 경기 남았다."

"네?"

"정규 시즌 종료까지 열 경기가 남았다는 말이다. 남은 경기에서 강호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본론부터 말해오는 손 감독의 질문에 강호는 머리를 굴려 본다.

'뭘 물으시는 거지? 설마 나한테 남은 경기 동안 팀 운영 방법을 묻는 건 아니실 테고.'

강호는 손 감독이 자신을 높게 평가한다고는 해도 갑작스럽게 불러 팀 운영을 상의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질문에 대한 범위가 좁아진다.

'감독님의 질문은 오늘 경기의 연장선에 있는 내용이겠구나. 오늘 경기에서 네 번의 고의사구가 있었고, 남은 경기에서도 그런 장면이 재현될 확률이 높다는 걸 지적하고 계신 거야.'

강호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동안 손 감독이 다시 입을 떼고 있었다.

"강호야, 그동안 네가 해준 것만으로도 팀은 충분한 도움을 받았다. 강호, 너는 4번 타자로서 최고의 기여를 해줬고, 이제 남은 경기 동안은 네가 애쓰지 않아도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구나."

손 감독은 담담한 어조로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 속에는 강호를 향한 고마운 감정이 오롯이 담겨 있었고, 그 태도 또한 감독이 선수에게 말한다기보다는 할아버지가 친 손주를 앞에 두고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처럼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손 감독이 한 말의 내용에서 강호는 일말의 불안감을 발견하고 있었다.

'내가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도움을 받았다고? 설마 남은 경기에서 나를 선발 라인업에 넣지 않을 생각이신 걸까?'

강호는 머릿속에 차오르기 시작한 의혹을 속으로 삼키며 손 감독의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기로 한다.

몇 마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손 감독에 대한 오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강호의 복잡한 속내 속에 손 감독의 말이 이어진다.

"오늘 경기에서 본 것처럼, 후반기 경기 내내 우리를 상대하는 팀은 승부처마다 강호 너를 일부러 거르고 있어. 그런 점은 백강호라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네 실력을 다른 팀에서도 인정한다는 뜻이겠지만, 남은 경기에서는 그런 모습이 더욱 심하게 표면화 될 게야."

손 감독의 말은 강호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전반기 때보다는 올스타브레이크가 끝난 후의 후반기에 더욱 많은 볼넷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는 한 타석을 제외한 모든 타석에서 고의사구로 걸러지기도 했다.

남은 일정에서 모든 팀들의 포스트 시즌 일정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에 강호 본인을 상대하는 상대 팀들의 견제는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이미 하고 있는 강호였다.

'그래도 승부 상황은 반드시 온다! 나를 상대하는 팀들이 모든 타석에서 고의사구로 거르지는 못할 거야. 고의사구를 내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도 분명 존재하니까.'

강호는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진 손 감독의 말에는 강철 멘탈을 가진 강호 또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은 열 경기에서 강호 너를 선발 유격수로 기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네?"

손 감독의 선언에 강호는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만다.

남은 경기에서 선발 유격수로 기용하지 않겠다는 말, 듣기에 따라서 남은 경기에서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의미도 된다.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순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 당황한 강호였지만, 손 감독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속으로 드는 모든 의심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감독님 말씀을 끝까지 들어보자.'

강호는 손 감독을 믿고, 먼저 나서서 묻지 않기로 한다.

손 감독은 자신의 충격적인 선언에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강호의 태도에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왜 묻지 않는 거냐?"

"뭘 말입니까?"

"내가 남은 경기에서 너를 유격수로 기용하지 않는 이유 말이다."

손 감독이 물어오는 내용은 강호 역시 궁금한 사항이기는 했지만, 강호는 순간의 궁금증을 참고 이렇게 대답을 내어놓는다.

"선수기용은 감독님의 고유 권한이지 않습니까? 남은 경기에서 제가 필요 없으시다면 저는 군말 없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선수는 그라운드 위에서만 경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호는 강직한 목소리로 손 감독의 질문에 대답한다.

선수기용에 관한 손 감독의 권한을 적극 수용한다고 말하면서 말의 끝에는 스스로의 주장을 서슴없이 밝히고 있었다.

그 마지막 말이 손 감독의 가슴에 묘한 여운을 남긴다.

'선수는 그라운드 위에서만 경기를 해야 한다? 경기장 밖에서는 경기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그것은 야구 정치나 외압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로구나. 과연 강호다운 대답이다.'

손 감독은 강호의 대답에 흐뭇함을 느낀다.

혹시라도 남은 시즌에 자신을 배제하려는 손 감독의 결정이 구단내의 정치적인 이유나 또 다른 외압에 의한 것이라면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은 채 야구 선수의 본분을 지키겠다는 강단 있는 주장이기도 했다.

'강호야, 너는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의 선수가 되었구나! 실력과 의지, 그 이상의 야구 철학을 이 어린 나이에 완성시킬 수 있다니. 올 시즌의 기록이 단지 우연이 아니었던 게야.'

손 감독은 강호의 성장에 누구보다도 뿌듯함을 느끼며 그의 오해를 풀어주는 말을 꺼낸다.

"그래. 강호 네 말대로 선수기용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지. 분명히 말하겠는데 너를 유격수에서 제외하려는 결정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온전히 나만의 결정이다."

손 감독은 먼저 자신의 결정에 외압이나 정치적인 이유가 없음을 밝히며 미처 말하지 않은 내용을 입 밖으로 꺼낸다.

"강호 너를 남은 열 경기에서 지명타자로 기용할 생각이다."

"네?"

"지명타자 말이야. 백업으로 빠져 있던 진택이를 유격수로 세우고, 너를 지명타자 자리에 세울 거다. 간혹 상황에 따라서 대타로 기용해야할 순간도 있을 게야. 그 이유는 강호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결론에 도달한 손 감독의 말을 통해 강호는 자신의 믿음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수비 위치를 유격수에서 제외하고 지명타자로 이동시킨다는 말은 4번 타자 자리는 그대로 맡기신다는 뜻이구나! 그런 방법이라면 남은 시즌동안 체력적인 문제로 타격 페이스가 떨어질 이유도 없고, 상황에 따라서는 상대 팀 배터리가 고의사구 작전을 펼치는 걸 조기에 차단시킬 수도 있을 거야!'

강호는 손 감독의 말에서 자신의 정당한 승부를 지켜주기 위한 손 감독의 고뇌와 진심을 느낀다.

유격수 자리에서 배제하겠다는 손 감독의 말에도 그를 믿었던 강호의 믿음이 옳았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수비를 중시하는 손 감독의 입장에서는 유격수를 교체하는 결정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손 감독이 강호의 수비 위치를 유격수 자리에서 지명타자로 옮기며 그의 타순을 그대로 4번 자리에 고수시키는 방법으로 강호의 남은 경기를 지켜 주려하고 있었다.

또한 경우에 따라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시켰다가 만루 상황과 같이 고의사구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강호를 대타로 내세우는 방법들도 구상해두고 있었다.

이런 방법은 야수 자원이 넘쳐나는 자이언츠만이 가능한 선수 기용법이기도 했다.

'수비 위치가 없는 지명타자는 다른 타자들에 비해서 벤치와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 작전을 코칭스태프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받을 수도 있는 장점도 존재하고, 체력 관리에 대한 장점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강호는 생각을 이어가며 때에 따라서는 라인업에서 배제된 후 만루 상황에만 대타로 나서는 작전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진다.

'유격수'라는 수비 책임감을 덜어놓으니 오로지 타자로서만 기용될 수 있는 꽤나 많은 방법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강호를 지명타자로 돌리는 손 감독의 선택은 강호를 타자로 기용하면서도 그에 대한 견제와 압박을 덜게 해주는 최상의 방법 중 하나였다.

"강호야, 이제 팀 상황에 구애받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스윙을 하도록 해라. 홈런을 치고 싶으면 홈런 스윙을 해도 좋고, 편하게 볼넷으로 걸어 나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아. 도루를 원하면 출루 상황에서 언제든 뛰어도 좋다. 네가 홈스틸을 한다고 해도 말리지 않을 테니까."

손 감독의 말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라운드 위의 선수에게 전권을 맡긴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기록을 써나가고 있는 강호이지만, 올 시즌이 데뷔 시즌인 신인 선수에 불과하다.

신인 선수에게 마치 그라운드 위의 감독처럼 경기 내용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모든 권한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강호 개인의 타석과 플레이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여태껏 한국 야구사에서 이 정도의 권한을 부여받은 신인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베테랑 선수마저도 너무 많은 권한을 원할 경우에 라인업에서 제외되거나 은퇴 수순을 밟는 것이 한국 야구 현장의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호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십니까?"

"왜? 거짓말 같으냐? 원한다면 각서라도 써주겠다. 내가 나중에 말을 바꿀 게 걱정이라면 법원에 공증을 받아다 줄 수도 있어."

손 감독은 웃음 띤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공증까지 받아주겠다는 말은 물론 농담 섞인 말이지만, 강호가 믿지 않는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해줄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강호가 손 감독을 믿고 있었다.

"그렇게 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호는 손 감독의 진심을 받아들이며 밝게 웃어 보인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궁금증 하나를 묻게 된다.

"그런데 한국 시리즈에서도 저는 지명타자로 서는 겁니까?"

강호의 물음에 손 감독은 진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강호 너는 우리가 한국 시리즈에 올라갈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구나."

"네, 감독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손 감독의 물음에 강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 손 감독이 경기 후 인터뷰를 통해 우승을 선언했던 장면을 강호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강호의 머릿속에는 자이언츠가 2위나 3위로 시즌을 마무리한다는 구상 자체가 배제되어 버린 것이다.

그만큼이나 손 감독을 믿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한국 시리즈에서는 유격수로 서게 될 거다."

손 감독의 확답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난다.

강호는 자신에 대한 손 감독의 신뢰를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고, 손 감독은 강호에게 더 큰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는 다음 경기부터 현실이 되고 있었다.

시간과 장소는 9월 26일, 목요일 히어로즈와의 홈경기가 예정된 사직야구장의 중계석으로 이동한다.

"이제 오늘 경기 이후에는 자이언츠에 남은 경기가 아홉 경기가 됩니다. 베어스는 일곱 경기가 남게 되고요. 아직까지는 정규 시즌 우승 팀이라고 확정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 팀이 없겠네요. 양 팀 경기 차도 아직 반 경기차가 유지되고 있어요."

오늘 경기의 해설 위원인 안경훈 위원의 말이었다.

그의 말에 곁에 앉은 염용수 캐스터가 추가 설명을 더한다.

"네, 추가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베어스 같은 경우에는 히어로즈와 타이거즈, 이글스, 라이온즈와의 시즌 경기를 모두 끝낸 상태입니다. 자이언츠의 경우에는 다이노스와 이글스의 경기를 모두 끝냈고요. 아직 베어스와 자이언츠 간의 시즌 맞대결 기회가 두 경기 남아 있는데, 그 마지막 맞대결에서 정규 시즌 우승 팀이 판가름 날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염 캐스터의 말이 올 시즌 막바지까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팀 순위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1위 팀 자이언츠와 2위 팀 베어스 간의 팀 경기는 여전히 반 경기 차, 거기에 3위 팀 다이노스와 7위 팀 트윈스까지의 격차가 그리 심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8위 팀 이글스가 포스트 시즌 진출이 좌절된 가운데 9위 팀 라이온즈와 10위 팀 위즈만이 내년 시즌을 위해 신인 선수들을 기용하는 정도의 경기 운용을 선보이고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자이언츠와 맞붙게 될 히어로즈는 시즌 4위에 올라 있는데요. 5위 팀 타이거즈와의 격차가 한 경기 차거든요. 만약 오늘 경기를 히어로즈가 패하고, 광주 경기에서 타이거즈가 승리하게 되면 팀 승률에 앞서는 타이거즈가 4위로 올라서게 됩니다."

"네, 그래서 사직구장의 지금 경기는 1위 팀 자이언츠의 1위 수성과 4위 팀 히어로즈의 4위 수성이 걸린 중요한 경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염 캐스터와 안 위원이 차례로 말한 대로 오늘 사직경기는 자이언츠와 히어로즈 양 팀 모두에게 중요한 일전임에 분명했다.

경기 시작 전부터 사직구장을 가득 채운 인파가 그런 분위기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오늘은 거르지 말고, 좀 붙어라!"

"그래! 백강호한테 고의사구는 안 돼!"

강호의 타석에서 고의사구 상황을 우려하는 홈 팬들의 목소리가 경기 시작 전부터 그라운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에 맞서는 히어로즈 원정 팬들의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백강호 거르고, 오늘 경기 이기자!"

"4위는 무조건 지켜야 돼! 백강호는 걸러서 유격수 수비만 보게 만들어라!"

히어로즈 팬들의 목소리 역시 뜨거웠다.

그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상대 팀 4번 타자인 강호를 걸러 오늘 경기를 쉽게 풀어가자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타석에서 승부하지 않으면 강호는 그저 발 빠르고 수비력 좋은 유격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경기 시작 후 전광판에 표시 된 라인업 명단을 통해 깨어지고 만다.

"엉?! 백강호가 지명타자야?"

"뭐?! 그럼 유격수는 누군데? 오진택이야?"

히어로즈 팬들 뿐만 아니라 자이언츠 팬들 역시 달라진 강호의 수비 포지션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호의 수비 포지션 변화에 관중석의 소란이 계속되는 사이, 어느새 1회 말 자이언츠의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딱!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자이언츠 홈팬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1사 주자 1루 상황에서 터진 3번 타자 오진택의 안타에 1루 주자였던 박철이 3루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다.

타자 주자 오진택은 1루에서 멈춰 섰지만, 득점권 주자가 3루에 갔다는 것 자체가 1회부터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다음 타자가 강호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이언츠 팬들로서는 기대로 부푼 마음을 진정시키기 힘들 지경이었다.

"백강호! 날려라!!"

"거르지 말고, 붙어라!!"

관중석을 양분하는 두 가지 응원 목소리 속에 4번 타자인 강호가 배터 박스에 들어선다.

상대 선발 투수를 응시하는 강호의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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