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91화 (29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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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고 싶은 타자

형이 마련해준 축하회식 자리에서 강호는 점점 즐거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형의 친구나 지인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형의 주변인들을 만난다는 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자신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를 이어가던 강호, 그러다 문득 떠오른 기억에 형을 향해 웃음 띤 얼굴로 묻고 있었다.

"형."

"엉? 왜? 밑반찬 더 갖다 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기한 걸 청산해야지."

"뭔 소리야?"

강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말고 영문 모를 말을 하는 동생을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강호는 그런 형을 향해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일깨워 준다.

"기억 안나? 수요일에 집에서 치킨 먹으면서 내기했었잖아. 잘 생각해 봐."

"..."

강호의 말에 강수는 수요일 밤의 기억을 한 번 떠올려 본다.

그 때의 강호는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70홈런 가능성에 대해서 내기를 제안했었다.

'그 때 형이 2억 대신에 2만 원만 달라고 했잖아. 내가 이번 주에 70홈런 달성하면 그 2만 원 어디에 썼는지 나한테 알려줘. 그게 내기 조건이니까.'

강호는 그 때 이번 주 내로 70홈런을 달성하겠다는 조건으로 2만 원에 대한 출처를 밝히라고 했었다.

강수는 과거 동생이 건넨 2억 원을 받지 않았고, 대신 2만 원을 달라고 한 뒤 그 돈으로 어머니를 모신 납골당에 헌화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강호는 70홈런에 대한 내기 조건으로 그 2만 원에 대한 사용처를 알려달라고 했던 것이다.

'기억력도 좋은 놈. 그걸 기억하고 있었네. 70홈런이나 친다고 정신없을 줄 알았더니.'

강수는 남다른 동생의 기억력을 속으로 욕하며 빙긋이 웃어 보인다.

동생에게 사실을 이야기하면 기뻐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강호는 어렸을 때 엄마에 대한 원망이 깊었으니까.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에 납골당을 찾아뵌 적도 없을 정도로 원망이 깊었어. 사실 엄마에 대한 원망은 강호나 진주 모두 가지고 있는 공통 분모와도 같아.'

강수는 뿌리깊은 동생들의 원망에 대해 떠올리며 겉으로는 미소 띤 얼굴을 지어 보인다.

강호에게 사실을 알려주자니 지금의 장소가 적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기 조건에 대한 대답을 다음으로 미루고자 했다.

"기억나. 그런데 여기서 말해주는 건 좀 곤란하고, 다음에 한 번 데려갈 테니까 네가 직접 확인해 봐."

"데려간다고?"

"그래, 조만간 함께 갈 일이 생길 테니까 그 때 강호 너도 같이 가자."

강수는 그 정도까지만 얘기하고, 입을 닫아 버린다.

강호가 재차 설명을 요구했지만, '다음에 같이 가면 너도 알게 돼'라고 답하며 뜻 모를 미소만 지어 보인다.

결국 강호는 70홈런 달성에 대한 내기 조건을 듣지 못한 채 그 날 하루를 마무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월요일 휴식일이 지나 화요일이 되었을 때 자이언츠 선수단은 3위 팀 다이노스를 홈으로 불러들여 다이노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루고 있었다.

여기서 손 감독과 김 수석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볼 넷, 베이스 온 볼."

주심의 볼넷 판정이 선언되고 있었다.

1회 말 1사 주자 1, 3루 상황에서 나온 고의사구에 타석에 선 타자의 얼굴이 굳어진다.

타석에 선 타자는 다름 아닌 강호였다.

'다이노스에서 나를 거를 줄은 몰랐는데. 오늘 경기를 확실히 이기겠다는 의사 표시 같은 건가?'

강호는 속으로 다이노스 덕아웃의 의도를 예측해보며 1루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 모습을 자이언츠 덕아웃에서 보고 있던 코칭스태프들의 얼굴에도 미세한 표정 변화가 생겨난다.

"거르네요. 다이노스는 3위가 거의 확정적이라 강호의 타석에서 승부를 볼 줄 알았더니 승부를 피하는데요?"

손 감독에게 말을 건네 오는 사람은 김민철 수석 코치였다.

그는 일요일 경기를 마치고 사직으로 돌아오던 원정 버스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며 손 감독의 의견을 묻고 있었다.

다른 팀은 제외하더라도 3위 팀 다이노스는 강호와의 타석 승부를 피하지 않을 거라는 손 감독의 말, 그 말이 이번 주 첫 경기부터 빗나가고 만 것이었다.

"다이노스도 오늘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하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 아직 3위 자리가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니지 않나?"

손 감독은 그렇게 답하면서도 내심은 조금 불편했다.

'1회부터 고의 사구라니. 다이노스 코칭스태프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야? 강호만 거르면 오늘 경기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인가?'

손 감독은 상대편 덕 아웃에 서있는 다이노스의 감독을 응시한다.

다이노스의 감독은 짙은 색의 고글을 쓰고 있는 이유로 내심을 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에서 오늘 경기에 대한 그의 열망을 읽을 수가 있었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인가보군. 강호만 거르면 이번 경기를 잡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게야.'

다이노스 감독의 내심을 읽은 손 감독은 미간을 좁힌다.

다이노스 창단 이후로 유독 다이노스를 만나기만 하면 약해지는 자이언츠였다.

올 시즌 전적 역시 15전 6승 9패로 열세에 있는 상황이다.

'공룡에게 약한 거인'이라는 징크스가 여전히 유효한 가운데 다이노스 코칭스태프의 내심을 읽게 되자 이대로 흐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손 감독도 나름 준비하고 있던 특단의 대책 하나를 일찍부터 꺼내 들었다.

"대타를 내게."

"네? 대타요? 1회 말부터 말입니까?"

1회 말부터 대타를 내라는 손 감독의 지시에 김 수석이 놀라 묻는다.

1회부터 1사 만루의 찬스 상황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대타를 낼 포인트는 아니라는 것이 김 수석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단호해 보이기까지 하는 손 감독의 얼굴에서 대타 지시를 무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누구를 낼까요? 5번 타순에 스팅이 지명타자이니까 수비 포지션은 큰 상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김 수석은 대타로 누구를 낼지 물으면서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선택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5번 타자인 스팅이 수비 포지션이 없는 지명타자이므로 대타로 그 누구를 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감독님이 장타를 원하시면 중석이나 상훈이, 진택이, 진만이를 고려해도 되고, 다음 상황으로의 연결을 원하시면 문표나, 택근이, 최훈 정도를 대타로 내세워도 돼.'

김 수석은 대타로 내세울 타자들을 떠올려 보다가 지명 타자 자리에 낼 수 있는 대타 카드가 무척이나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그 선수들 모두가 시험이 필요한 선수가 아니라 이미 올 시즌 검증이 모두 끝나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김 수석의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손 감독은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문표를 내게. 아직 1회니까 경우의 수를 남겨 두어야지."

손 감독의 대답에 김 수석은 '네'라고 대답한 후 얼른 행동에 나선다.

발 빠른 타자인 문표를 낸다는 것은 김 수석으로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대타 기용이었다.

'주력이 좋은 문표라면 땅볼을 때리더라도 더블 플레이가 나올 가능성은 적어. 1루 주자인 강호도 발이 빠른 편이니까.'

김 수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5번 타자인 스팅을 불러들이고, 문표에게 대타 지시를 내린다.

그런 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다가 방금 전 스스로가 했던 생각의 오류를 발견하고는 헛웃음을 지어 보인다.

'강호가 발이 빠른 편이라고? 강호는 그냥 빠른 편이 아니라 국내 최고의 주력을 가진 선수야. 타순이 4번이라 주력보다는 타격 능력이 부각되서 그렇지 열 개 팀 리드오프들과 비교해 봐도 강호보다 빠른 선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까 시즌 86도루까지 할 수 있었던 거고.'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문표를 대타로 기용한 손 감독의 결정이 어떤 대타 카드보다도 적절하게 느껴진다.

발빠른 타자 주자 문표와 그것을 능가하는 1루 주자 강호의 조합이라면 최소한 병살타는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더군다나 문표의 작전 수행 능력은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수준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강호의 주력을 다시 한 번 체크해볼 필요도 있겠어. 최근 들어서 주력이 조금 더 빨라진 느낌이 든단 말이야. 설마 10초대를 넘어선 것은 아니겠지?'

김 수석의 생각은 강호의 100미터 스퍼트가 9초대에 진입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무리 된다.

100미터 9초대의 주력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현실성이 떨어지는 일이겠지만, 올 시즌 불가능한 것을 모두 가능하게 만든 강호라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다이노스에서도 강호를 고의사구로 거르는 거겠지. 강호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타자니까.'

김 수석의 생각은 그쯤에서 끝이 난다.

대타로 타석에 선 문표가 깔끔한 좌전 안타를 뽑아내며 오늘 경기의 첫 타점을 신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나이스 문표!"

순조로운 첫 출발에 김 수석을 포함한 자이언츠 선수단 대부분이 웃음 짓는다.

그 가운데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팀의 총사령탑인 손성조 감독이었다.

'지금은 문표가 적시타를 때려내서 분위기가 우리 쪽으로 넘어와 보이지만, 다음 번 강호의 타석에서도 고의사구가 나온다면 분위기가 달라 지게될 거야.'

손 감독은 강호의 다음 타석을 예측하며 자신 또한 대응 방법을 고심한다.

만약 다이노스 배터리에서 강호의 다음 타석마저 고의사구로 거른다면 그 다음 타석에 오르는 타자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뒤바뀌게 될 것이다.

'야구는 팀플레이이자 멘탈 스포츠야. 사소할 수 있는 부분에서 분위기가 뒤집어질 수도 있어. 다이노스에서는 정공법이 아니라 우회 공격을 택한 거고, 나는 그것을 방어해야하는 입장인 거야.'

손 감독은 그렇게 판단을 내린 후 강한 시선으로 그라운드를 응시한다.

그 사이 문표의 2타점에 6번 타자 황제인의 타점까지 더해지며 3루에 있던 강호가 홈을 밟고 덕 아웃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손 감독은 그런 강호를 향해 한걸음 나서며 조언을 해주려다가 이내 걸음을 멈추고 만다.

'지금의 강호에게 조언이 필요하기나 할까? 내가 느낀 점을 강호 역시도 느끼고 있지 않을까?'

갑자기 든 생각에 손 감독은 건네려던 말을 속으로 삼키고, 그저 '잘했다'라는 말로 강호의 득점을 칭찬한다.

강호는 그런 손 감독에게 미소 띤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동료 선수들과 손뼉을 마주치는 모습이었다.

손 감독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전 생각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강호 녀석도 느끼고 있을 거야. 야구 아이큐가 높은 선수니까.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나름의 대처 방법을 찾아내려 할 거야.'

손 감독은 지금의 강호를 믿고 지금의 상황을 맡기기로 한다.

그러는 사이 경기는 계속되어 어느새 자이언츠가 5득점을 올린 가운데 2회 말 강호의 타석이 이어지고 있었다.

"볼넷, 베이스 온 볼."

주심은 강호의 타석에서 또 한 번 볼넷을 선언한다.

이번에도 다이노스 배터리가 고의사구를 택한 것이다.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나온 고의사구에 사직구장이 야유로 가득차고 있었다.

"마! 뭐하는 거야? 제대로 공 안 던져?"

"또 거르는 거야? 경기를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팬들의 야유 속에서도 다이노스 배터리는 표정이 없었고, 강호는 별 수 없이 1루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경기가 계속되어 양 팀의 점수 차가 9대 7로 자이언츠가 앞선 가운데 강호는 세 번째 고의사구를 맞이하게 된다.

"볼 넷."

주심의 볼넷 선언에 어김없이 팬들의 야유 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강호의 발걸음은 1루로 향한다.

6회 말인 지금까지 강호는 네 번의 타석 기회 동안 세 개의 고의사구와 한 개의 단타를 기록하며 100%출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팬들이 바라는 것은 강호의 출루가 아니었다.

"마! 다이노스 너희들 승부를 하자는 거야, 뭐야?"

"거르지 말고, 붙어라! 이, 치사한 놈들아!"

다이노스를 향한 항의를 담은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지만, 결과는 번복될 리 없었다.

강호는 결국 8회 말, 마지막 타석까지 고의사구로 걸러지며 오늘의 승부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버린다.

9회 초 경기가 끝날 때까지 양 팀 점수 차가 11대 9의 박빙 상황이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다이노스 배터리의 선택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지는 시점이었다.

결국 경기는 자이언츠의 2점 차 승리로 끝이 나지만, 강호의 화끈한 홈런포를 바라던 자이언츠 팬들에게는 아쉬운 경기임에 분명했다.

그래도 승리는 승리였기에 팬들의 얼굴에 아쉬움은 남아도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그것은 경기를 직접 플레이 한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걸로 올 시즌 다이노스 전은 끝났네!"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경기가 마지막 다이노스 전이었는데 이겨서 다행입니다. 만약 졌으면 또 공룡한테 졌다고 욕을 엄청 먹었을 거예요."

선수들은 오늘 경기 승리에 대한 소감을 말하며 자신들의 짐을 챙겨든다.

내일인 수요일은 자이언츠의 경기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일찍 집으로 돌아가 컨디션 관리를 할 생각인 것이다.

그런 선수들 중에서 문표는 익숙한 얼굴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얼른 입을 연다.

"근데 강호는 어디 간 거야?"

강호를 찾는 문표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선수들이 주변을 둘러보지만, 강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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