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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고비를 넘다
강호의 홈런으로 점수는 9대 7, 자이언츠가 다시 리드를 가져오게 된다.
70홈런이라는 대업이 달성되자 남은 5회 초 이닝이 추가 득점 없이 마무리되고 있어도 사람들의 관심은 경기에 있지 않았다.
오직 한 선수의 이름을 연호하며 한국을 넘어 아시아 야구사의 홈런 기록을 다시 쓴 강호의 기록 달성을 축복하고 있었다.
"백강호, 백강호, 백강호!!"
잠실구장은 오직 강호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곳이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사직이 아니어도 그의 이름을 외치는 팬들의 목소리는 전혀 부족함이 없을 지경이다.
더군다나 70호 홈런을 치고 덕 아웃에 들어가 있던 강호가 다시금 그라운드로 모습을 드러내자 팬들의 함성은 폭발할 듯이 증폭된다.
"우와아아아!!!"
팬들의 함성을 온 몸으로 받으며 강호가 그라운드로 올라서고 있었다.
커튼콜을 하기 위해서나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후속 타자들이 범타로 물러나 이닝이 종료된 까닭에 팀 동료들과 함께 글러브를 챙겨들고 공수교대를 위해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야, 저 소리 들려? 여기가 사직구장도 아닌데 대단하다, 진짜!"
함께 그라운드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최훈 선수가 놀란 목소리로 물어온다.
그러나 그런 최훈의 목소리는 강호에게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라운드를 장악한 팬들의 목소리로 인해 바로 곁에서 말하고 있는 최훈의 목소리가 차단되고 있는 것이다.
강호의 시선에서는 자신을 향해 말을 걸어오는 최훈의 입이 뻐끔거리는 정도로만 인식될 정도였다.
'70홈런을 때리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였나?'
당사자인 강호 역시 조금은 놀라고 있었다.
지금 잠실구장은 베어스 팬과 자이언츠 팬,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양 팀 팬들이 모두 뒤섞여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중이었다.
베어스 팬들은 비록 강호가 상대 팀 선수라고 하지만, 70홈런이라는 위업을 쌓은 것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강호는 한때 그들의 선수이기도 했다.
자신의 구단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강호가 다른 팀으로 간 후에라도 대성한 모습에 베어스 팬들은 묘한 감동을 느낀다.
그것은 응원하는 팀을 떠나 백강호라는 선수가 올 시즌에 써내려가고 있는 격정적인 드라마가 모든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백강호!!"
심지어 양 팀 팬들은 유격수 자리에 서서 수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강호를 향해 함성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은 베어스의 선두 타자가 타석에 선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당사자인 강호와 타석에 선 베어스 타자 모두가 민망함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5회 말 선두 타자로 나선 베어스의 4번 타자 김재성이 초구부터 벼락같은 스윙으로 장타를 뽑아내고 있었다.
딱!
깔끔한 타격음과 함께 타구는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 타구에 타자 주자인 김재성이 2루 베이스를 밟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강호의 이름을 외치는 팬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제길, 내가 2루타를 치고 출루를 했는데도!'
재성은 분개하고 있었다.
팬들의 환호가 오직 자이언츠 팬들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자신을 응원하고, 자신의 안타를 축복해야할 베어스 팬들마저 강호의 이름을 부르짖는 모습에 이를 악물게 된다.
때문에 재성의 분노는 그 당사자를 향해 표출되고 있었다.
'백강호!'
재성은 들끓는 분노를 담아 강호의 얼굴을 노려본다.
유격수 자리에 위치한 강호는 2루 베이스를 밟고 선 재성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거리적으로 가깝기도 했지만, 지금 재성의 눈에는 오직 강호의 모습만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재성은 강호를 바라보며 하나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시즌 중반만 해도 백강호와 나의 거리는 지금처럼 가깝게 느껴졌었는데, 어느새 우리 두 사람의 간격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고 말았구나!'
재성이 느끼는 분노의 근원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강호와 더불어 다이노스의 테인즈, 와이번스의 정의준, 그리고 베어스의 자신까지.
이 네 선수가 홈런 경쟁에서 박빙을 이루며 뜨거운 홈런왕 경쟁을 이어갔었다.
그 중에서 팬들은 잠실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면서도 40개의 홈런포를 쌓아올린 자신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재성에게 홈런왕 경쟁에서 유리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번 시리즈에서 1홈런을 추가하며 기록하고 있는 시즌 홈런 기록은 48홈런.
70홈런을 달성한 강호를 따라잡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진 이유였다.
'오늘 경기도 그래. 1회 만루 상황에서 홈런을 때릴 때만 해도 오늘 경기의 주인공은 내가 되는 거였어. 오늘 경기를 승리로 이끌면서 승리의 주역은 백강호가 아닌 내가 되어야만 하는 거였다고!'
재성은 오늘 경기의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제 경기를 강호의 활약으로 패하게 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절치부심을 다짐했었다.
그렇게 해서 때려낸 1회 그랜드 슬램.
비록 60홈런 이상을 달리고 있는 강호의 홈런 페이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팀의 4번 타자로서 자존심을 세워주는 만루 홈런이었다.
재성은 그 그랜드 슬램으로 오늘 경기를 승리로 이끌 것을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느껴진다.
'아니! 아직 진 게 아니야. 겨우 5회 말일 뿐인데 남은 이닝에서 결승타를 때려내고 경기를 뒤집으면 되는 거야!'
재성은 베테랑 타자답게 생각의 방향을 바꾼다.
2루 주자인 자신이 하기에 따라서 지금의 출루를 득점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강호에 대한 질투와 시기의 감정을 승리에 대한 원동력으로 뒤바꾼 베어스의 4번 타자 김재성.
그의 의지가 다음 타자에게 전달된 것인지 5번 타자 오재섭이 시원한 스윙으로 정타를 때려내는 모습이었다.
딱!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2루 주자였던 김재성이 홈을 밟았고, 타자 주자 오재섭은 1루에 멈춘다.
강호의 홈런으로 9대 7로 뒤집은 점수 차가 다시 9대 8까지 좁혀지게 된 것이다.
비록 추가 득점은 없었지만, 베어스라는 팀이 왜 강팀인지를 보여주는 5회 말 공격이기도 했다.
필요한 상황에서는 반드시 점수를 뽑는 모습, 그것이 베어스라는 팀을 시즌 1위에 등극하게 만드는 원동력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시즌 2위 팀 자이언츠 역시 만만치 않았다.
"베이스 온 볼."
주심의 볼넷 판정으로 선두 타자인 문표가 1루로 출루하자 곧장 손 감독의 지시가 떨어진다.
그의 지시는 곁에 서 있던 김 수석을 향한 것이었다.
"대타 지시를 내리게."
"성철이 타석에서 대타를 말입니까? 누구를 세울까요?"
"김상훈을 올려."
"상훈이 말입니까? 그럼 중견수 자리가 비게 됩니다. 얼마 전에 재호나 민아를 2군으로 내려서 중견수 요원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3번 타석에 대타를 써서 준오도 빠진 상태고요. 좌익수로 올라간 택근이를 중견수로 옮기면 좌익수 자리가 공석이 됩니다."
김 수석은 손 감독의 대타 지시에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1번 타자이자 팀의 중견수인 유성철의 타석에서 대타를 세우게 되면 6회 말 상황부터는 외야 한 자리가 비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 수석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고, 손 감독의 지시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손 감독은 그런 김 수석의 반론에도 자신의 지시를 번복하지 않았다.
"여기가 승부처야! 6회 초에서 추가 득점을 해야만 추격해 들어오는 베어스를 따돌릴 수 있어. 그리고 비게 되는 중견수는 택근이를 이동시키면 되는 거고, 좌익수 자리에는 우익수에 둔 박철을 이동시키면 돼."
"네? 그럼 우익수 자리가 비게 됩니다."
김 수석의 마지막 반론에 손 감독이 진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우익수가 왜 없나? 자네는 오진택을 스팅의 타석에 넣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미소 띤 얼굴로 말하는 손 감독의 물음에도 김 수석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다.
'5번 자리에 지타로 넣은 진택이는 내야수인데, 감독님이 그 사실을 잊으신 건가? 진택이는 외야수 글러브를 껴본 적도 없는...?!'
순간 김 수석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진택을 거론하는 손 감독의 말에서 자신이 빠뜨린 점을 찾아보다 한 가지 생각에 미친 것이다.
'설마? 진택이는 원래 팀의 주전 유격수였어. 하지만 지금은 강호가 팀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고 있지. 만약 강호의 유격수 자리에 진택이를 이동시키게 되면?'
거기에까지 생각이 이동한 김 수석은 결국 '그러겠습니다.' 라고 대답한 후 손 감독의 대타 지시를 실행시킨다.
그렇게 해서 6회 초 무사 주자 1루 상황에서 타석에 선 사람은 1번 타자인 유성철이 아니라 대타인 김상훈이었다.
상훈을 대타 카드로 꺼낸 손 감독의 결정에 베어스 역시 투수 교체라는 카드를 꺼내들어 대처하는 모습이었다.
바뀐 타자와 바뀐 투수 간의 불꽃 튀는 승부가 이어지고, 결국 9구째 승부 끝에 대타인 김상훈이 삼진으로 물러나며 양 팀 벤치의 싸움은 베어스가 승리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종일관 틈을 노리던 1루 주자 문표가 베어스 투수의 9구 째에 도루를 감행하며 또 다른 변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이프!"
2루심의 세이프 판정으로 문표의 도루가 성공한다.
이로 인해 이제 상황은 1사 주자 2루 상황이 되고, 단타 하나면 추가 득점이 가능한 상황에서 바뀐 베어스 투수는 의외의 장면을 연출하고 만다.
"히트 바이 피치볼, 타자 1루로."
주심의 사구 선언에 타자로 나선 박철이 1루를 향해 걸음을 떼고 있었다.
박철의 몸 쪽으로 바짝 붙이려던 베어스 배터리의 결정이 좋지 못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 다음 타자인 3번 타자 한택근에게 마저 사구를 허용하며 결국 6회 초 1사에서 만루라는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베어스 덕 아웃에서는 무거운 표정의 투수 코치가 마운드로 오르고, 타석에서는 모두의 환호 속에서 자이언츠의 4번 타자인 강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강호! 백강호! 백강호!"
"거르지 말고 붙어라!!"
팬들의 함성 속에 타석에 선 강호는 지금의 상황이 마치 자신을 위한 기적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2회 솔로 포, 3회 투런 홈런, 4회 쓰리 런에 이어 6회 초 만루 상황에 타석에 선 본인의 지금 상황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왜냐하면 인벤토리에는 정확히 하나의 홈런 아이템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걸 하늘이 돕는다고 하는 걸까?'
강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물어본다.
그 사이 또 다시 베어스의 투수가 교체되고, 바뀐 투수 윤형준이 연습 피칭을 하기 시작한다.
강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금의 타석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를 기다린다.
이윽고 윤형준의 연습 투구가 끝이 나고, 곧 강호의 시선에는 기다리고 있던 시스템의 메시지가 질문을 던져온다.
-득점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시스템의 물음에 강호는 망설이지 않고 긍정의 의사를 전한다.
그러자 시스템은 오늘 경기에서 익숙해진 메시지를 또 다시 전달하며 지금 타석의 결과를 확정짓고 있었다.
-아이템 홈런(일회용)을 사용합니다.
짧은 메시지와 함께 지금의 타석에 대한 결과가 정해지고 있었다.
강호는 시스템의 메시지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맹렬한 기세로 배트를 휘두른다.
어느새 윤형준의 초구가 던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악!!
가슴까지 뻥 뚫리는 호쾌한 타격음이었다.
그리고 그 타격은 잠실구장의 담장을 넘기며 모든 이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축포와도 같은 홈런이 된다.
중계석에서는 지금의 홈런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백강호! 그랜드 슬램!! 여러분, 믿겨지십니까? 백강호 선수가 만루 홈런을 터뜨리며 세계 야구사에 없었던 사이클링 홈런을, 그것도 내추럴 사이클링 홈런(natural cycling homerun)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잠실구장에서 유례없었던 4연타석 홈런 기록이며 백강호 선수의 시즌 홈런 기록을 71호까지 추가하는 그랜드 슬램으로 기록됩니다!"
한 캐스터의 목소리가 지금의 상황을 모두 설명해주고 있었다.
딱 한 번, 미국에서 메이저리그 무대가 아닌 더블 A리그에서 기록된 사이클링 홈런은 1998년 7월 27일 타이론 혼 선수가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야구 무대의 1부 프로리그에서는 아직 사이클링 홈런이 기록된 적은 없었던 것이다.
강호의 내추럴 사이클링 홈런은 그동안 세계 야구사에서 유례가 없었던 기록으로 정식 인정되고 있었다.
중계석의 한 캐스터는 또다시 유례없는 기록을 성공시킨 강호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소리친다.
"바로 백강호입니다! 오직 백강호 선수만 가능한 기록이 다른 곳도 아닌 이곳 잠실구장에서 완성됩니다! 오늘의 경기는 승패를 떠나서 이 장면 하나로 영원히 남게 될 겁니다!"
한 캐스터는 예언하고 있었다.
승패를 떠나 지금 강호의 홈런 장면이 앞으로 세계 야구사에 영원히 각인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의 발언은 TV중계로 경기를 지켜보는 대다수의 팬들이 동감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일부 팬들은 그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강호의 사이클링 홈런 달성에 흥분해서 한 캐스터의 멘트를 듣지 못한 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와아아악! 지린다!"
"또 지렸어? 그럼 또 바지 벗고 소리 질러! 백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