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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고비를 넘다
강호가 홈을 밟고 자이언츠 덕 아웃으로 들어섰을 때, 중계석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은 강호의 기록 하나를 거론하는 중이었다.
"아?! 지금 홈런이 백강호 선수의 시즌 이백 두 번째 안타가 되는군요! 이렇게 해서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 역시 백강호 선수가 가져가는 모습입니다."
한 캐스터는 뒤늦게나마 강호의 기록 달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강호가 어제 경기에서 201안타 째를 달성하며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과 타이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을 현장 PD가 전해주는 메모를 보고서야 알게 된 것이다.
한명진 캐스터도 강호의 시즌 안타가 최다 안타 기록에 근접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벌써 기록을 갱신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곁에 있는 박재헌 위원도 마찬가지였다.
"백강호 선수에게 미안한 일이네요. 선수 본인은 기록 달성을 축하하는 축포를 홈런으로 쏘아 올렸는데 해설하는 입장에서 그 점을 늦게 알아차려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박 위원이 한 캐스터의 말에 사과를 더하는 동안 중계 화면에는 강호의 기록 달성을 알리는 자막과 메시지들이 송출되고 있었다.
캐스터와 해설위원은 잠시 잊고 있었지만, 현장 중계진은 강호의 최다 안타 기록 달성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강호 202안타, 한 시즌 최다 안타 달성]
중계진이 준비한 자막이 TV화면을 통해 전달되고, 그것을 본 일부 시청자들은 중계석의 두 사람처럼 강호의 기록 달성을 뒤늦게 알 수 있게 된다.
"엉?! 백강호가 벌써 202안타야? 200안타는 언제 넘은 거야?"
"나는 백강호 선수 타율이 4할 3푼 대라 벌써 200안타 찍은 줄 알았더니. 어제 경기에서 200안타를 쳤었어? 그럼 백강호 선수 타석 수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적다는 거 아냐?"
강호의 홈런 기록에만 전념하고 있던 일부 팬들은 이제야 강호의 다른 기록에도 관심을 돌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팬들의 숫자가 더욱 많았다.
그들은 강호의 기록 하나하나까지 곱씹으며 자이언츠의 경기를 지켜보는 다수의 팬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무리들에는 자이언츠의 구단 사장인 지정만 사장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저런 얼빠진 현장 중계진들을 봤나? 우리 백강호 선수의 안타 기록이 뭐가 어렵다고 까먹고 난리야? 그리고 베어스 구단도 너무 한 거 아냐?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을 갱신했는데 전광판에 표시라도 해줘야지! 그게 무슨 큰 돈 든다고 안 해주는 거야? 쟤네들은 일을 안 하는 거야?"
지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잔뜩 흥분하고 있었다.
현장 중계진의 착오와 베어스 구단의 차별에 자신들의 자랑거리인 강호가 타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물론 그런 생각들은 지정만 사장의 과한 생각일 수도 있었지만, 실시간으로 응원 댓글이 달리고 있는 문자 중계 방은 지 사장과 같은 의견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지 사장은 TV화면 옆에 새로 장착한 댓글 모니터링 화면을 확인하고는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이거 봐. 이걸 보란 말이야! 팬들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잖아. 기록 달성했는데 남의 구단 선수라고 폭죽도 안 터뜨려주고 말이야. 서울에는 폭죽도 안파는 거야?"
서운한 감정을 잔뜩 담은 지 사장의 목소리에 곁에 있던 허 실장이 대답할 말을 고민하게 된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다음 경기부터는 원정 팀 구단에 축하용 폭죽을 택배로 보내두기라도 하라는 거야?'
허 실장은 속으로 불평을 토해내다가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실소를 머금고 만다.
그 미소를 포착한 지 사장이 한 쪽 눈 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아! 걸렸네.'
허 실장은 딴 생각을 하다가 지 사장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헛기침을 하며 얼른 입을 연다.
"음흠, 사장님. 이럴 때일수록 저희가 준비를 잘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음 주 일정은 사직 홈경기로 시작하는데 저희가 백강호 선수의 기록 달성을 챙겨주는 겁니다."
허 실장은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이미 기획서로 작성까지 끝낸 안건을 건의하고 있었다.
지 사장은 그런 허 실장의 눈을 응시하며 어디 더 해보라는 식으로 바라본다.
"듣고 있으니까 계속 해."
지 사장의 재촉에 허 실장이 빠르게 말을 뱉어낸다.
"이제 우리 백강호 선수의 70홈런 달성도 거의 가시권이지 않습니까? 아마 다음 주 홈경기에서 70홈런을 달성할 것 같은데 저희가 대대적인 축하 이벤트를 하는 겁니다. 상금도 지급하고, 폭죽도 터뜨리고, 방송국하고 협의해서 멘트도 멋진 걸로 준비해 두고요."
허 실장은 이 때다 싶어 지 사장의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는 말들을 쏟아내었다.
그러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던 지 사장의 표정이 조금씩 변화한다.
지 사장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자리잡아가는 것이 아닌가.
"요즘 허 실장의 생각들이 아주 좋아~ 그렇지! 잠실에서 베어스 구단이 챙겨주는 것보다 홈경기에서 우리 자이언츠 구단이 챙겨주는 게 더 그림이 좋은 거지. 지금 당장 추진해!"
지 사장은 호탕하게 웃어 보이며 허 실장의 제안에 찬성의 의사를 밝힌다.
허 실장 역시 지 사장과 닮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네!'하고 사장실을 나서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때까지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다음 주나 되서야 달성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강호의 70홈런 기록이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달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시 장소는 잠실구장으로 넘어온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강호의 홈런에도 2회 초 자이언츠가 얻은 점수는 1점이 유일했다.
베어스의 선발 투수인 장원종은 강호에게 벼락같은 홈런을 허용했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투구로 스팅, 황제인, 강민수에 이어진 자이언츠의 강타선들을 범타로 돌려세우는 모습이었다.
그 압도적인 피칭 모습에 자이언츠 덕 아웃의 누군가가 한숨 같은 한탄을 내뱉고 있었다.
"초반에는 득점 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늘 장원종의 투구가 보통이 아니네요. 5회 정도가 지나야 활로가 뚫리지 않을까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석 코치인 김민철 수석이었다.
그는 2회까지 26개의 공으로 자이언츠 타선을 봉쇄하는 장원종의 투구에 기가 질린 모습이었다.
손성조 감독은 그런 김 수석에게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킨다.
"강호는 그런 장원종에게 홈런을 뽑아냈어. 심지어 원 바운드 공을 때려서 말이야."
"아, 네. 그러긴 했지요. 그러고 보면 오늘 장원종의 투구 내용보다 강호의 홈런이 더 기가 막힌 거였습니다."
김 수석은 원 바운드 공을 통타해 잠실구장의 담장을 넘긴 강호의 홈런을 떠올리며 작게 미소 짓는다.
손 감독의 말에 김 수석이 대답하는 동안 선수들은 공수 교체를 위해 각자의 글러브를 챙겨들고는 그라운드로 뛰쳐나간다.
손 감독은 그런 선수들의 뒷모습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변수 하나만 있으면 돼. 변수 하나면 5회까지 걸리지도 않을 거야.'
손 감독은 상대 선발 장원종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하나의 변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유격수 자리로 뛰어가는 강호의 뒷모습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다른 곳을 향해 옮겨진다.
손 감독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자신들의 타석 기회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있던 채중석, 오진택, 한택근 선수가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변수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드는 거야.'
손 감독은 이미 경기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변수를 직접 만들기 위해 세 선수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한 편 2회 말 상황은 특별한 장면이 만들어지지 않은 채 종료된다.
1회 말 김재성에게 그랜드 슬램을 허용했던 성수제 투수가 빠르게 안정감을 찾아 2회에는 두 개의 삼진을 솎아내며 무실점으로 이닝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3회 말도 마찬가지였다.
3회 말 역시 성수제의 호투 속에 이닝이 마무리되고, 4회 초가 시작되었을 때는 4대 1의 점수 차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맞이한 4회 초 자이언츠의 공격 상황.
선두 타자로 나서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3번 타자 전준오는 갑작스런 벤치의 호출에 걸음을 멈추는 모습이었다.
중계석에서는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지금은 대타를 내는 것 같은데요?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 3번 전준오의 타석에 대타 채중석을 냅니다. 박 위원께서는 지금의 대타 카드를 어떻게 보십니까?"
상황을 설명한 후 자연스럽게 멘트를 넘기는 한명진 캐스터, 그의 물음에 박재헌 위원이 대답을 위해 입을 연다.
"지금이 4회 초 무사 상황이거든요. 자이언츠에서 대타로 채중석 타자를 꺼내 들었어요. 조금은 의외의 장면입니다. 채중석 타자는 자이언츠에서 가장 발이 느린 선수 중에 한 명이거든요. 아마도 손성조 감독의 생각은 채중석 타자가 출루에 성공하면 대주자를 내겠다는 의도로 보여요."
박 위원은 나름의 해설을 하고 있었지만, 손 감독의 의중을 정확히 읽어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4회 초 무사 상황에서 나온 채중석 대타 카드는 박재헌 위원으로서도 의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박 위원의 당황 속에 대타 채중석이 타석에 서고, 곧이어 장원종의 투구가 시작된다.
타악.
초구에 배트를 낸 중석의 타구는 밀어치는 파울이 된다.
애초부터 정타를 때릴 생각이 없었는지 살짝 끊어 친 타격 모습이었다.
그 후 던져진 원종의 2구는 떨어지는 체인지업, 중석은 선구안의 달인답게 그 공에 반응하지 않는다.
'원종이의 투구 패턴은 내가 잘 알지. 정타를 때려내지 못하더라도 볼넷을 얻어내는 건 힘든 게 아니야.'
볼 카운트가 1볼 1스트라이크가 된 상황에서 타석에 선 중석의 생각이었다.
원래 자이언츠 소속으로 베어스에 이적했다가 다시 자이언츠로 돌아온 전력이 있는 채중석 선수.
그는 자이언츠 출신이었던 장원종 투수와 교점이 많은 선수 중 한명이었다.
친분이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 팀에서 생활하며 장원종의 투구 패턴에 대해 직접 들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중석을 맞상대하는 원종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칫, 포심은 커트하고 유인구는 거르겠다는 뜻입니까? 슬라이더를 노리는 모양인데 뜻한 대로는 안 될 겁니다.'
원종은 중석을 향해 마음의 소리를 내뱉은 후 곧바로 3구 투구에 나선다.
중석은 원종에 비해 프로 입단 3년 선배로서 중석의 나이 37세, 원종의 나이가 35세였다.
빠른 년생인 중석이 원종의 입단 3년 선배가 되는 것이다.
파앙!
3구는 파공음이 들릴 정도로 빠른 공이었다.
전광판에 찍히는 구속은 147km.
하지만 중석은 반응하지 않았고, 주심은 원종의 3구를 볼이라고 판정한다.
"볼 투."
주심의 판정으로 이제 2볼 1스트라이크 상황이 된다.
원종의 3구는 스트라이크 존 위를 벗어나는 하이 패스트볼이었고, 약간의 긴장이 더해진 실투성 성격이 강했다.
중석의 장타력을 생각했을 때 제대로 타격했다면 장타로 연결될 수도 있었지만, 중석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원종은 한 가지를 느끼게 된다.
'볼넷으로 나가겠다는 뜻인가?'
원종은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걸치는 포심 패스트볼을 4구째로 선택한다.
따악.
경쾌한 타격음에 원종의 시선이 1루 쪽으로 향한다.
중석의 밀어 친 타구가 1루수 곁을 스치는 파울 타구가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타구는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왔으면 안타가 되거나 1루수 정면 타구가 되었을 거야. 볼넷으로 걸어 나간다는 생각이 아니었나?'
원종은 중석의 타격에서 의아함을 느끼며 다음 공을 고심하게 된다.
그 후 두 선수의 대결은 8구째까지 이어지고, 어느새 볼 카운트는 풀 카운트 상황.
이어서 두 개의 포심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 존을 걸치는 코스로 던져졌지만, 중석은 모두 커트해내며 끈질긴 승부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결국 두 선수의 대결은 11구째에서 결론이 나고 있었다.
"볼 넷, 베이스 온 볼."
주심의 볼넷 선언에 타자인 중석이 씨익 하고 웃어 보이며 1루로 걸음을 옮긴다.
그 후 1루 주자가 된 중석은 대주자인 한택근으로 교체되었고, 1루 베이스를 밟은 택근은 리드 폭을 넓게 벌리며 투수인 원종의 신경을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칫.'
좌완 투수인 원종은 1루 주자 택근의 노골적인 리드 폭에 쓰린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다음 타자를 생각했을 때 좋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분명했다.
마운드 위에 선 원종의 귀에는 원정 팀인 자이언츠 팬들의 뜨거운 목소리가 전달되고 있었다.
"거르지 말고 붙어라!!"
"백강호! 백강호! 백강호!"
강호의 이름을 연호하는 자이언츠 팬들.
'거르지 말고 붙어라'는 응원 멘트가 마운드에 선 원종에게는 묘하게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이어진 강호와의 승부.
틱, 딱. 타악.
연달아 세 개의 파울 타구로 출발한 두 사람의 대결은 어느새 11구째 승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대타 채중석과도 11구 째 승부 끝에 볼넷을 내주었던 원종은 4회 들어 투구 수가 급격하게 올라간 상태.
3회까지 마흔 두 개의 공으로 호투를 펼쳤던 원종은 4회 들어 중석과 강호, 두 타자만을 상대하며 어느새 투구 수를 64개까지 늘리게 되었다.
여러모로 지금의 상황이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투수의 입장이었다.
'차라리 볼넷으로 내보낼까?'
원종은 강호와의 12구째 승부를 앞두고 약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는 강호를 돌려세울 12구 째 공을 선택한다.
파핫.
원종의 투구가 시작되고, 그의 눈치를 살피던 대주자 한택근이 2루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2루를 향해 달리는 택근의 속도는 통상적인 주루 플레이라 하기에는 빨라 보였고, 그 모습에서 포수인 양희지는 자이언츠의 작전이 감행된 것이라 확신을 가진다.
'볼넷이면 정상 출루겠지만, 삼진이면 2루로 뛴 주자를 잡을 수 있어!'
상황 판단을 마친 양희지 포수가 급히 한 쪽 무릎을 세운다.
원종의 공을 받은 직후 2루를 향해 공을 뿌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런 양희지 포수의 생각은 강호의 타격으로 틀어지고 만다.
따악!!
가슴을 뻥뚫리게 만드는 호쾌한 타격음이었다.
그 소리에 무언가를 직감한 자이언츠 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고, 곧 1루를 돌며 자신들에게 손을 뻗어 보이는 강호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와아아아!!!"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뜨거운 함성 속에 양 팀 점수 차는 이제 4대 3까지 좁혀지고 있었다.
장원종 투수의 12구를 타격한 강호의 타구는 홈런으로 기록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