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5 / 0335 ----------------------------------------------
강호의 계획
자이언츠의 움직임이 분주해지는 동안 중계진도 이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은 박세준 투수의 손톱이 들린 것 같은데요? 의료 요원이 급하게 응급조치를 해보지만, 좋지 않아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투수를 교체해야 하겠네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캐스터를 대신해 박재헌 위원이 TV를 지켜보고 있는 팬들에게 상황을 알려준다.
그의 목소리에 TV를 시청하고 있던 자이언츠 팬들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1회 말 무사 주자 1, 2루 상황, 여기에서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다음 투수가 오르게 되면 상황이 더욱 나빠지게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올릴 투수가 누가 있지? 성수제인가?"
"아마도 성수제가 제일 낫지 않을까? 트윈스 전에는 등판하지 않았으니까 성수제한테 3이닝 정도는 맡길 수 있을 거야. 상황 봐서 4, 5이닝 정도 가능할 거고."
"불펜투수한테 무슨 5이닝씩이나 맡겨?"
"너 잘 모르는구나? 성수제 투수는 원래 선발 자원이야. 전반기 때 4선발까지 했었다고. 선발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말이야."
"그래? 나는 몰랐네. 근데 성수제가 아닌데?"
"뭐가?"
"바뀐 투수 말이야. 성수제 말고, 가진성이네."
"엉? 진짜네?"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자이언츠 팬들은 박세준에 이어 다음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게 될 투수를 전망하다가 가진성의 모습을 확인하자 조금은 놀라는 모습이다.
가진성은 올 시즌 처음으로 1군 마운드에 올라 특이한 투구 폼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후, 후반기 들어서는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95년생, 강호와 같은 나이인 25살로 작년까지만 해도 포수로서 2군 경기를 뛰었던 경력이 있었다.
"후우~"
진성은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긴 날숨과 함께 연습 피칭에 들어간다.
손 감독이 준비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노력했다고는 해도 아직 완전히 몸이 풀리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연달아서 연습구를 던지는 진성의 얼굴이 경직돼 보였다.
파앙!
미트가 공을 때리는 소리가 연달아서 들려온다.
진성의 공을 집적 받은 강민수 포수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벼워. 제구는 나쁘지 않지만, 구속과 구위 모두 별로야. 진성이의 공은 포심 평균 구속이 151km나 되는 강속구이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어. 포심을 제외한 다른 무기가 빈약하니까.'
민수의 생각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점이었다.
프로 생활 4년 동안 포수로 활동하다가 작년부터 투수로 보직을 변경한 진성이다.
그런 진성에게 많은 구종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성이 1군 무대에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포심 패스트볼 구속이 최고 156km까지 찍힌다는 점에 있었다.
강력한 구위를 가진 150km대의 강속구, 게다가 마치 점프를 하는 듯한 투구 모션이 가진 특별함까지.
그런 장점들을 보유한 가진성 투수이지만, 지금 민수에게는 그런 진성의 장점들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144km. 진성이의 투구 메커니즘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 구속이면 베어스 중심타선들에게는 배팅 볼이나 다름없어.'
민수는 빠르게 판단을 마친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이언츠 덕 아웃을 향해 정해진 수신호를 보냈고, 그 수신호를 포착한 여민석 투수 코치의 움직임이 다시 분주해진다.
그 후 다시 몇 개의 연습구가 던져지고, 타석에서 물러나 있던 베어스의 3번 타자 바인스가 타석으로 들어선다.
'이런 공이면 넘길 수 있겠는데?'
타석에 선 바인스는 진성의 연습구를 보며 판단을 끝낸 상태였다.
평소에 비해 가벼워 보이는 진성의 포심을 노리고 타격한다면 잠실구장의 담장도 넘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타자인 바인스 뿐 아니라 싸인을 내는 포수 강민수 역시 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어설픈 공을 던졌다가는 장타로 연결될 거야. 불펜에서 다른 투수가 준비되고 있을 테니까 견제구도 던지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도록 하자. 바인스는 볼넷으로 내보내더라도 어설픈 공을 줘서는 안 돼.'
민수의 생각은 곧 진성을 향한 싸인으로 발현된다.
결국 진성은 바인스의 타석에서 총 10개의 공을 던진 후에 다음 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겨야만 했다.
진성이 던진 10개의 공 중에 다섯 개의 공은 주자들을 묶어두기 위한 견제구였다.
정확히 말한다면 다음 투수가 몸을 풀 시간을 마련하기 위한 방책 중에 하나인 것이다.
진성의 투구 내용을 지켜 본 중계석의 한 캐스터는 이렇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볼 넷. 이제 루상이 가득 채워져서 만루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자이언츠의 마운드가 교체되는군요. 지금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는 성수제 투수로 보입니다."
한 캐스터의 상황 설명 후 박 위원의 해설이 이어진다.
"자이언츠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되고 말았어요. 갑자기 올린 가진성 투수의 구속과 구위가 좋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바인스 타자에게 볼넷을 내주고, 다음 투수인 성수제 투수를 올리는 결정을 한 건데 성수제 투수가 김재성 타자와의 상대 전적이 좋지 않아요. 올 시즌에 열 타석을 맞붙어서 9타수 4안타 1홈런을 허용했거든요? 상대 타율이 4할 4푼 4리입니다. 이런 자이언츠의 투수 교체 결정이 어떤 결과로 드러나게 될 지 한 번 지켜봐야겠습니다."
박 위원은 '지켜봐야겠다'라는 말로 멘트를 마무리한다.
새롭게 마운드에 오른 성수제 투수와 타석에 선 채 그를 기다리고 있던 베어스의 4번 타자 김재성, 박 위원이 지적했다시피 두 선수의 상대 전적은 베어스의 김재성이 우위에 있었다.
투수 교체를 단행한 자이언츠의 손 감독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성수제 투수를 제외한 다른 불펜 투수들은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1회 말부터 빅 이닝을 내어주는 거고, 최고의 상황은 2실점 이하로 1회 말을 막아내는 거야.'
날카로운 눈으로 그라운드를 응시하는 손 감독의 생각이었다.
손 감독은 2실점 정도로 지금의 위기 상황을 마무리 짓기 위해 성수제 투수를 선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 이닝을 허용할 수도 있다는 계산 정도는 하고 있었다.
야구에서 빅 이닝이란 3점 이상을 득점한 이닝을 정의하는 말로, 최근에는 한 이닝에 5득점 정도는 나와야지 빅 이닝이라 부를 수 있다는 인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손 감독이 각오하고 있는 빅 이닝도 5실점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런 손 감독의 각오 속에 성수제 투수와 베어스의 4번 타자 김재성의 승부가 시작된다.
따악!
초구를 타격한 김재성의 타구가 외야를 향해 뻗어져 나가자 베어스 팬들이 함성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러나 타구가 오른쪽 파울 라인을 벗어나 버리자 그 함성은 곧 탄식으로 뒤바뀐다.
자신의 유격수 수비 위치에서 김재성의 파울 홈런을 지켜 본 강호는 강한 위기감이 들었다.
'김재성 타자의 스윙이 수제의 구위를 압도하고 있어. 아무래도 김재성 타자는 좌타자라서 타구가 내 쪽으로 올 확률이 적을 텐데. 지금의 타석 상황에서는 유격수인 내가 위기를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어. 투수인 수제 본인이 해결해내는 방법밖에.'
강호의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성수제 투수와 김재성 타자 간의 대결은 계속되고 있었다.
따악.
또 한 번의 타구가 장외 홈런이 되자 자이언츠 팬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6구째까지 이어지는 이 대결이 왠지 불안한 결말로 끝이 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이거 느낌이 쎄한데?"
"나도 불안불안하다. 이러다가 홈런이라도 맞으면..."
팬들이 불안감의 정체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할 무렵, 수제의 7구가 던져지고 낮은 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타자인 김재성이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악!
타격음과 함께 자이언츠 팬들은 고개를 떨구어야만 했다.
너무도 잘 맞은 공은 우익수인 박철이 쫓아가기를 포기할 정도의 대형 홈런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랜드 슬램, 만루 홈런이었다.
김재성의 만루 홈런으로 잠실구장은 베어스 팬들이 내지르는 함성으로 가득차 올랐고, 그 홈런은 김재성의 시즌 48호 홈런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성조 감독은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성빈이가 준비되긴 했습니다. 투수를 바꿀까요?"
투수 코치인 여민석의 물음에 손 감독은 짧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여민석이 말한 홍성빈 투수가 조금 더 일찍 몸이 풀렸다면 그를 먼저 올렸겠지만, 모두가 홈런을 얻어맞고 난 다음의 결과론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원하게 얻어맞았으니까 확실하게 긴장은 풀렸을 거야."
손 감독의 이어진 대답이었다.
그의 말에서 의도를 깨달은 여 코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짝 물러난다.
그 후 손 감독의 믿음대로 만루 홈런을 얻어맞은 성수제 투수가 각성하여 1회 말을 추가실점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김재성 타자에게 허용한 그랜드 슬램이 뼈아픈 승부로 기록되었고, 이제 양 팀 점수 차는 4대 0이 된 채 2회 초 자이언츠 공격으로 넘어간다.
손 감독은 2회 초 선두 타자로 나서는 선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1회 말의 상황을 잊기로 했다.
'5실점을 각오했는데 4실점으로 막아낸 게 긍정적인 부분이겠지. 최악은 피했으니까 점수 차를 따라잡을 일만 남은 셈이야.'
손 감독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원동력이 타석에 서고 있었다.
타석에 선 타자는 다름 아닌 강호.
그는 올 시즌 경기 당 타점 생산 능력이 평균 2점이 넘는 4번 타자였다.
만약 강호가 2회 초 시작부터 홈런을 때려내어 1점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베어스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린 분위기를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호 녀석에게 과한 기대가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강호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
그것이 손 감독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평소 특정 한 선수에게 너무 큰 무게감을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손 감독이지만, 강호에게 만큼은 본인의 야구 철학 이상의 것을 바라게 된다.
그것은 바로 강호에 대한 신뢰였다.
'강호야, 부탁한다.'
손 감독은 타석에 선 강호에게 강한 염원을 담아 마음속으로 당부의 말을 전한다.
그런 손 감독의 염원을 등에 업은 강호는 의외로 담담한 상태에서 상대 투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1회에 장원종 투수의 커브가 없었어. 장원종 투수는 포심과 슬라이더, 커브와 체인지업의 포 피치 투수야. 그런데 1회에는 세 가지 구종만을 이용해서 세 타자를 삼자범퇴로 잡아냈어.'
강호는 타석에 들어서며 1회 초 장원종이 구상한 전략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원종이 자신을 돌려세울 결정구로 커브를 선택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러 전략이 가능하겠지. 커브를 결정구로 선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커브로 허를 찔러서 카운터를 가져갈 수도 있는 거고. 장원종 투수 정도 되는 베테랑이라면 굳이 나를 삼진으로 잡아낼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강호는 그렇게 생각을 끝내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장원종 투수의 눈을 노려본다.
그러면서 오픈 스탠스로 다리를 벌려 좌, 우 양 쪽 코스 모두에 대한 대처 능력을 끌어올린다.
1회 초 3번 타자인 전준오 역시 강호처럼 오픈 스탠스를 선택했지만, 등 뒤에서 두 타자 모두를 지켜보게 된 양희지 포수는 그 무게감이 남다름을 느끼고 있었다.
'백강호가 오픈 스탠스로 나왔단 말은 좌우 모든 코스의 공을 받아 넘기겠다는 뜻이야! 밀어쳐도 장외 홈런을 때리는 녀석이니까 절대로 쉽게 승부를 보려 해서는 안 돼.'
양희지 포수는 강호의 오픈 스탠스 자세를 보고 전준오 선수 때와는 전혀 다른 대처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즌 타율 3할 초반대의 전준오와 시즌 타율 4할 3푼 7리의 강호를 같은 방식으로 대처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구부터 다소 신중한 모습으로 싸인을 내고 있었다.
그 싸인을 받은 장원종 투수가 눈을 크게 뜬다.
'초구부터 원 바운드 공을 던지라고? 그것도 커브로? 초구부터 커브를 던져서 백강호를 흔들자는 얘기구나!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원종은 양희지 포수의 초구 싸인을 납득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후 특유의 습관 중 하나인 양 볼을 크게 부풀려 보인 후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양희지 포수가 요구한 원 바운드 커브볼은 정타로 타격할 확률이 거의 없는 공이었다.
백강호 정도 되는 타자를 헷갈리게 할 목적으로 볼 카운트 하나 정도를 버리는 건 아까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초구를 던지는 장원종 투수의 투구모션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파핫!
역동적인 투구 동작 후 원종의 손끝에서 공이 떠난다.
한 눈에 봐도 궤적이 지나치게 큰 슬로우 커브는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 어이없는 구종 선택을 확인한 강호.
누가 봐도 초구는 흘려보낼 것이 확실해진 순간에서 강호는 별안간 허리를 회전시키며 원 바운드 된 공을 걷어 올리는 것이 아닌가.
원 바운드 공을 통타한 강호의 스윙은 야구 선수의 것이 아니라 마치 골프 선수의 스윙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딱!!
호쾌한 타격음에 공을 던진 장원종 투수도,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던 양희지 포수도 모두 깜짝 놀라고 만다.
왜냐하면 원 바운드를 통타한 강호의 타구가 외야 높은 곳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계석에서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초구 변화구 대처합니다. 지금은 원 바운드 된 공을 타격해냈어요. 아! 그런데 이 타구가 넘어갔습니다! 백강호의 시즌 68호 홈런이 이렇게 터져 나옵니다! 장원종의 원 바운드 된 커브를 받아쳐서 홈런을 만들어내는 백강호!"
처음에는 높지 않은 어조로 설명을 이어가던 한 캐스터.
원 바운드 된 공을 타격한 강호의 타구가 홈런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타구가 잠실구장의 좌측 담장을 넘긴 것을 확인하자 급히 목소리를 높여 강호의 타구가 홈런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었다.
"국내 리그에서도 이런 홈런이 나오네요! 원 바운드 홈런이 나왔어요?!"
한 캐스터는 진심으로 놀란 것인지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던졌고, 그의 말은 곁에 앉은 박재헌 위원이 받는다.
"네, 정말 대단한 장면입니다. 규정상 투수의 공이 원바운드 되었을 때 타자가 타격을 하면 정상적인 인플레이 상황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의 홈런은 정상적인 홈런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박 위원은 뜻밖의 홈런 장면에 감탄을 하면서도 해설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런 박 위원의 해설 속에 강호가 홈을 밟았고, 자이언츠 팬들은 뜨거운 함성으로 홈런을 치고 돌아온 강호의 모습을 환영하고 있었다.
"우와아아!!"
팬들의 함성 속에 홈을 밟은 강호가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강호: 어?! 이게 넘어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