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83화 (28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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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지에 오르다

    점심시간을 조금 넘긴 시간, 자이언츠의 원정 버스가 잠실구장에 도착한다.

    일요일인 오늘 경기는 한 곳을 제외한 모든 일정이 오후 2시 경기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일명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이라는 방식인데 2015년에 신설된 것으로 10구단 체제에서 일요일 경기를 오후 2시와 오후 5시로 나누어 5경기 중 4경기를 오후 4시에 시작하고, 나머지 1경기는 오후 5시에 열린다.

    메이저리그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처럼 유독 관심이 집중될 수 있는 경기를 오후 5시에 편성하는 것이다.

    자이언츠와 베어스 간의 경기는 올 시즌 정규 리그 우승 향방이 걸려 있는 중요한 결전이었지만, 5시에 배정되지는 못했다.

    양 팀의 팬들은 시즌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일전이라 여기지만, 나머지 팀 팬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는 경기이기도 했다.

    중, 하위권 팀들에게는 1위 경쟁보다 가을 야구에 승선할 수 있는 5위 경쟁이 더욱 큰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선데이 나이트 경기로 지정된 경기는 광주에서 열리는 5위 팀 타이거즈와 6위 팀 트윈스 간의 경기였다.

    "오늘은 경기 빨리 이기고 일찍 퇴근할 수 있겠네."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몸을 일으키던 강호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인 문표가 씨익 하고 웃어 보인다.

    "나는 이래서 가을이 좋아. 여름에는 날씨가 더우니까 밤에 경기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이렇게 날씨가 선선해지면 낮에도 경기하고, 집에도 일찍 가서 좋잖아. 안 그래, 강호 후배?"

    문표는 자신의 주장을 밝히며 강호에게 동의를 구해 온다.

    그의 말대로 9월에 접어들어 주말 경기를 오후 2시나 5시에 진행하면서 퇴근 시간이 단축되고 있었다.

    날씨가 유독 더웠던 8월에는 주말에도 경기가 오후 6시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평일 오후 6시 30분이라는 경기 시간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 점을 잠시 생각하고 있던 강호는 문표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고, 근처에서 몸을 일으켰던 백업 좌익수 한택근이 대신 입을 연다.

    좌익수 한택근은 원래는 2군 좌익수를 맡았던 21살의 신인으로 올 시즌 1군과 2군을 넘나들다 9월 확장엔트리를 통해 1군에 확고한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문표 선배님은 오늘 경기 당연히 이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택근은 문표의 말 중에 '오늘은 경기 빨리 이기고'라는 부분에 주목하며 묻고 있었다.

    그런 택근의 물음에 버스에서 내리려던 몇몇 선수들이 발걸음을 멈춘 것을 택근은 보지 못했다.

    택근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문표가 아닌 그 선수들 중 한 사람에게서 들려오고 있었다.

    "택근아, 당연히 이겨야지. 오늘 경기만 이기면 시즌 1위인데. 그럼 질 생각이었어?"

    묵직한 목소리로 택근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는 팀의 캡틴인 강민수였다.

    민수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에서는 묵직한 의지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민수의 태도에 택근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만다.

    "아닙니다. 당연히 이겨야죠!"

    "그래. 오늘 경기는 당연히 이기는 경기야. 감독님도 인터뷰 때 말씀하셨잖아? 남은 목표가 우승이라고. 그러니까 오늘 경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되는 거야."

    민수는 그렇게 말을 하며 오른 손을 들어 택근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러면서 당부의 말을 전한다.

    "택근이 너도 언제든지 경기에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둬. 선발 라인업에 올라가지 않는다고 해서 시무룩해있지 말고. 감독님이 교체 지시를 내리면 100% 컨디션으로 경기에 나갈 수 있게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민수는 온화한 표정으로 택근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런 캡틴의 말에 택근은 왠지 모를 감동을 느끼며 '넵!'하고 힘차게 대답하는 모습이다.

    "그래, 택근이 너는 부지런한 놈이니까,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할 거라 믿는다."

    민수는 부드러운 어조로 택근을 격려하며 몸을 돌린다.

    그러다가 한 켠에 서있던 강호와 눈을 마주치고는 잠시 망설이는 모습이다.

    강호에게도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쉽게 뱉어내기에는 어려운 말이었던지 몇 초의 망설임 끝에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강호에게 말을 건네는 캡틴 강민수의 얼굴은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강호는 평소대로만 해주고. 이왕이면 홈런도 뻥뻥 쳐주면 고맙겠다."

    강호에게 건넨 민수의 말이었다.

    프로 생활이 15년차가 넘은 민수로서는 지금 강호가 느끼고 있을 부담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강호가 역대 급 기록행진을 이어가면서 모든 팬들의 이목이 강호에게만 집중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를 잘 안다.

    그래서 강호에게 부담이 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강호의 투지 넘치는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기대가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새 팀 캡틴인 민수마저도 강호의 해결사 적 능력에 강한 기대감을 품게 된 것이다.

    강호는 그런 민수의 기대감을 마주하고는 입을 열었다.

    "네, 홈런 말입니까?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강호는 민수의 당부에 진지한 표정으로 답하다가 말이 끝날 때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강호의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던 민수는 '그래' 라고 간단히 답한 후 버스에서 내린다.

    그를 따라서 원정 버스에서 내려선 강호와 선수들, 곧 그들에게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저기 자이언츠 선수들 내린다!"

    "어디? 어?! 백강호 선수잖아? 어서 싸인 받으러 가자!"

    "나 야구공 하나 가져왔는데 여기에 싸인 받으면 되겠다!"

    "나는 글러브에다 받아야지!"

    "나는 가슴에다 싸인 받고 이제부터 안 씻을 거야!"

    자이언츠 팬들은 원정 버스에서 내리는 선수들을 발견하고는 급히 뛰기 시작했다.

    매표를 위해 줄을 서고 있던 다수의 팬들은 그 행렬에 동참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이미 인터넷 발권을 해두었거나 시즌 권을 끊어 두었던 일부 팬들만이 원정 버스에서 내리는 선수들에게 다가서는 모습이었다.

    "백강호 선수! 싸인 좀 해주세요!"

    대다수의 팬들은 강호의 싸인을 받기 위해 몰려들었지만, 일부 팬들은 캡틴 강민수나 권대우 투수, 그리고 채중석 등의 선수들에게 싸인을 받아가기도 한다.

    그 중에서 문표는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었다.

    "아니, 왜 내 싸인은 안 받아가는 건데?"

    문표의 절규에 몇몇 팬들이 웃음 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표의 싸인을 요청하지는 않는 모습이다.

    올 시즌 규정 타석을 채우고 시즌 3할 이상의 고타율을 유지하고 있는 문표였지만, 여전히 팬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모습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두고들 보세요! 내가 오늘 경기에서 홈런을 날려버릴 테니까. 그 때는 싸인 해달라고 해도 안 해줘~"

    문표는 결국 유치한 투정을 팬들에게 쏟아낸 후 자신의 짐을 챙겨들고 경기장으로 입성한다.

    강호는 팬들의 싸인 요청을 모두 받아준 까닭에 문표나 다른 선수들에 비해 조금 늦게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그렇다보니 강호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선발 라인업을 조금 늦게 확인하게 되었다.

    4번 타자에 이름을 올린 자신과는 다르게 몇 명의 선수들의 라인업 순서가 변경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인업 순서가 변경된 선수 중에는 먼저 경기장에 들어섰던 문표도 있었다.

    "호오~ 이것 봐라? 오늘도 내가 1루수로 선발 출장이란 말이야. 타순도 9번으로 옮겨졌고. 감독님이 오늘 경기에서 나를 중요한 역할로 쓰시겠다는 뜻 아니겠어?"

    문표는 8번에서 9번으로 옮겨진 자신의 타순 변경 사실에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런 문표의 모습에 곁에 있던 백업 좌익수 한택근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택근은 오늘 선발 라인업에서는 제외되었고, 백업 외야수로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

    "8번에서 9번으로 변경된 거면 타순이 밀린 거 아닙니까? 좋아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택근의 물음에 문표는 한 쪽 입 꼬리만을 올리며 미소 지어 보인다.

    "택근 후배, 그게 무슨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야? 타순이 높아서 좋은 거면 1번 타자인 성철이는 우리 팀에서 최고라는 소리야?"

    "그건 아니지요...팀의 최고 타자는 4번 타자인 강호 선배 아니겠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타자들의 타율이 죄다 3할이 넘는 우리 팀 타순에서 8번하고 9번 중에 어디가 더 중요할 것 같아?"

    문표의 이어진 질문에 택근은 입을 다물고 만다.

    그 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강호가 끼어든다.

    "그럼 오늘 경기에서 8번 타순보다 9번 타순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당연하지, 강호 후배! 우리 팀의 9번은 평범한 하위 타선이 아니라 1번 타순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리드오프라고 보면 되는 거라고. 감독님이 내 주력을 고려해서 9번 자리로 이동시킨 거 아니겠어?"

    문표의 되물음에 강호는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가 웃은 이유는 문표의 말에 납득했다기 보다는 문표의 뒤편에서 나타나는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표 네 말은 9번보다 8번이 구린 거라고?"

    "당연하죠! 현대 야구에서는 당연히 8번보다 9번이죠!"

    뒤에서 물어오는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문표는 고개를 돌려 말을 건 당사자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얼어붙고 말았다.

    뒤에서 묘한 미소를 짓는 사람은 오늘 라인업에서 8번 타순에 선발 배정된 캡틴 강민수였던 것이다.

    85년생인 민수는 문표에 비해 1살이 많은 1년 선배다.

    "아, 그러니까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아직 경기 시작하기 전까지 시간 많으니까 차근차근 설명해 봐."

    자신의 말실수로 캡틴 강민수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게 된 문표는 도움을 바라는 눈빛으로 강호와 택근을 바라본다.

    강호는 그런 문표의 시선을 느끼고는 택근을 향해 입을 연다.

    "택근아."

    "네, 선배님."

    "우리는 준비 훈련하러 나가자."

    "네, 그럴까요?"

    강호의 제안에 택근은 글러브와 공을 얼른 챙겨들고는 그라운드로 뛰쳐나간다.

    강호 역시 그런 택근의 곁을 함께 하고 있었고, 캡틴 강민수와 둘만 남게 된 문표는 한동안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그 모습을 근처에서 지켜 본 선수들은 두 선배 선수의 유쾌한 모습에 미소를 짓게 된다.

    팀의 1위 도약이 걸려있는 중요한 일전이어서 긴장한 선수들도 많았지만, 캡틴 강민수와 문표처럼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도맡은 선배들의 노력으로 자이언츠 선수들의 긴장감은 서서히 사라진다.

    잔뜩 경직된 베어스 선수단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시선은 잠시 베어스 선수단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오늘 경기는 절대로 밀려선 안 돼. 다들 무슨 소리인 줄 알겠지?"

    "네!"

    베어스의 캡틴, 오재현의 당부에 후배 선수들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런 베어스 선수들의 분위기는 어제에 비해서 남다른 각오가 느껴지고 있었다.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의지, 1위 자리를 반드시 수성하고야 말겠다는 투지가 베어스 선수들에게서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시즌 내내 선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베어스이기 때문에 오늘 경기를 패하여 2위로 내려서는 일은 어떤 선수도 바라지 않는 결과였다.

    캡틴 강민수와 문표의 행동으로 웃음이 감도는 자이언츠의 덕 아웃 분위기와는 확실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양 팀 코칭스태프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긴장되시는 모양입니다."

    베어스의 총사령탑인 구형태 감독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구 감독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수석코치인 유지혁 코치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유 수석은 50대인 구형태 감독에 비해 12살이 많은 원로 코치 중 한 명이었다.

    구 감독은 푸근한 인상을 지으며 말을 건넨 유 수석에게 대답할 말을 찾다가 이내 솔직하게 대답한다.

    "긴장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네, 긴장됩니다. 오늘 경기는 우리가 무조건 잡아야 하니까요."

    "솔직하시네요. 선수들도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시즌 내내 선두를 지키고 있는 팀의 선수들이니 그런 위기감을 누구보다도 잘 느끼고 있을 겁니다."

    유 수석은 부드러운 말로 구 감독의 긴장을 풀어준다.

    그리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오늘 경기는 지지 않을 겁니다."

    유 수석의 말에 구 감독의 얼굴은 조금이나마 풀리는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긴장감을 놓지 는 않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유 수석의 말이 큰 위안이 되지는 않았으나 자신보다 12살이나 많은 원로 코치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후반기의 자이언츠는 지지 않을 거라는 각오 정도로는 이길 수 없는 팀이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 베어스도 강팀이지만, 자이언츠 역시 강팀이 되었어요.'

    구 감독의 속내는 그러했다.

    그는 오늘 경기를 승리로 끝낼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 편, 반대편 덕 아웃에서도 감독과 수석 코치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베어스와는 대조적으로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수석코치가 아닌 손 감독이었다.

    "김 수석."

    "네, 감독님."

    "중석이와 진택이, 그리고 택근이 녀석에게 경기 전에 내가 잠시 할 말이 있다고 전해 주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수들의 경기 전 훈련을 지켜보던 손 감독이 김 수석에게 건넨 말.

    그 짧은 지시 사항이 두 사람 간에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김 수석이 자신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덕 아웃을 나선 후, 손 감독은 그라운드 위에서 경기 전 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선수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한다.

    '오늘 경기가 이번 시즌의 마지막 고비가 되겠구나.'

    손 감독은 선수들의 모습에서 오늘 경기의 향방을 가늠하고 있었다.

    베어스의 구 감독에 비한다면 크게 긴장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긴장감이라도 감추기 위해 '1위'라는 고지를 앞둔 노장은 더욱 냉철한 시선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본다.

    그리고 어느새 경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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