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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에 오르다
호쾌한 타격음과 함께 잠실구장의 공기가 잠시 멈춘다.
벼락같이 나온 강호의 타격은 모두의 숨을 멎게 만드는 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타구가 워낙 빨랐던 까닭에 타석 상황에 집중하지 않았던 다수의 팬들은 타구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타구 위치를 놓친 일부 팬들이 어리둥절해할 무렵, 잠실구장은 곧 그들의 주변을 가득 채운 자이언츠 팬들의 함성으로 뒤덮여 버린다.
"우와아아!!!"
"넘어갔어!"
"장외야! 장외! 완전히 넘어갔다고!"
강호가 등장한 순간부터 단 하나의 상황도 놓치지 않게 집중하고 있던 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런 팬들의 목소리를 통해 상황을 알지 못했던 이들도 강호의 타구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중계석에서는 강호의 타격 순간부터 모든 상황을 힘찬 목소리로 중계해주고 있었다.
"높은 볼을 때렸습니다. 좌중간으로 멀리 갑니다! 쭉쭉 뻗습니다! 계속 갑니다! 아! 경기장 밖을 완전히 넘어갑니다! 또 한 번 터져 나오는 백강호의 장외 쓰리런 홈런! 백강호가 잠실구장 세 경기 연속 홈런으로 자신의 시즌 홈런 기록을 67개까지 늘립니다!"
한명진 캐스터의 목소리가 모든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장외 홈런이었다.
다소 높은 공을 타격한 강호의 타구가 잠실구장의 좌중간을 완전히 넘겨버린 것이다.
잠실구장이 자이언츠 팬들이 내지르는 함성으로 뒤덮인 가운데 중계석의 해설위원이 긴 탄식을 내뱉는다.
박재헌 해설위원의 탄식은 진심어린 감탄사였다.
"아~~ 이걸 넘기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스트라이크 존을 완전히 벗어나는 하이 패스트볼이었거든요. 웬만한 파워로는 담장을 넘기기도 힘든 높은 공이었는데 이 공을 장외로 넘겼어요. 백강호 타자의 이런 파워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정말 역대 급 파워입니다."
박 위원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주심의 눈높이로 향할 정도로 높은 코스의 공을 장외 홈런으로 넘겨버린 강호의 파워는 여태껏 국내 무대에서는 본적 없는 파워임에 분명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다른 구장도 아니고 잠실구장이거든요. 규모가 작은 구장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국내 최대 크기의 잠실구장에서 이런 코스의 공을 장외로 넘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백강호 타자의 파워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국내 슬러거들 중에서도 오직 백강호 선수만이 가능한 홈런이지 않을까 하네요."
강호의 장외 홈런을 목격한 박 위원의 솔직한 총평이었다.
그는 이번 시즌 내내 강호에게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해설위원으로 유명했는데 이번 홈런 에서도 강호의 파워와 타격 능력, 유연성 등을 칭찬하며 강호가 국내 슬러거들 중에서 최고의 능력을 갖춘 타자라고 극찬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박 위원의 해설을 TV중계를 통해 접하게 된 팬들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저런 게 장외로 갈 수도 있구나. 다른 데도 아니고 잠실구장인데."
"와아~ 저 정도면 국내 무대가 아니라 바로 메이저리그로 가야하는 거 아냐? 국내에서는 너무 양민학살인데?"
자이언츠와 강호를 응원하는 팬들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시즌 초만 해도 의문 투성이었던 백강호라는 선수가 어느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모든 스포츠팬들은 꿈을 꾸고는 한다.
응원하는 소속 구단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 선수가 비밀 병기로 성장하는 모습을.
올 시즌 강호의 활약은 자이언츠 팬들이 꿈속에서나 바라던 가장 이상적인 괴물 신인의 모습이었다.
대다수의 자이언츠 팬들은 강호를 말할 때 '신인 선수'나 '데뷔 시즌 선수'라는 타이틀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있었다.
"백강호 선수 70홈런이 어려울 것 같다고 누가 말했었지? 잠실구장에서 저런 똥 볼을 받아 넘겨서 장외 홈런을 치는 타자인데."
"70홈런은 무조건 가능해! 내 오른 손을 걸고 말하는데 백강호 70홈런은 이번 달 내로 가능하다고 본다! 무조건!"
"야, 그래도 오늘이 21일인데 9일만에 홈런 네 개를 어떻게 치냐? 너 그러다가 손모가지 날아간다."
"어허! 백강호는 가능하다니까! 너는 백강호 선수가 8월 달에 열 경기 연속 홈런 때린 것도 까먹은 거야? 지금 잠실구장에서 세 경기 연속 홈런 때리는 선수가 9일 만에 홈런 4개를 못 때리겠어?"
강호를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에도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올 시즌 강호가 자이언츠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라는 것에 동감하던 팬들도 강호의 70홈런 달성에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많은 팬들은 강호의 홈런 기록이 70홈런을 넘을 거라고 예상하기도 했지만, 그와 비슷한 수의 팬들은 70홈런이 불가능할 거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호의 장외 쓰리런 포를 직접 목격하게 된 팬들은 70홈런 달성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철회하고 있었다.
"허허...그럼 70홈런, 70도루인 거야? 미쳤다, 미쳤어!"
이제 대다수의 자이언츠 팬들은 강호의 70홈런 달성을 기정사실화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팬들의 반응은 이 날의 경기가 강호의 쓰리런 포가 결승점이 되어 자이언츠의 8대 7승리로 끝이 난 후에 더욱 심화된다.
왜냐하면 경기가 끝난 후의 인터넷 야구 기사에서 강호의 홈런이 어떤 의미를 담은 홈런이었는지를 대서특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강호의 67호 홈런, 팀의 80승을 견인하다!]
[자이언츠, 백강호의 67호 쓰리런 홈런으로 팀 역사상 최초의 80승 고지에 오르다!]
자이언츠의 승리를 담은 기사들은 강호의 홈런으로 팀이 80승 고지를 밟게 되었다고 알리고 있었다.
80승 고지는 1982년 야구 원년에 원년 구단 중 하나로 창단한 자이언츠가 37년 동안 올라보지 못한 고지였다.
창단 후 37년 동안 달성하지 못했던 시즌 80승이라는 고지를 강호의 쓰리런 홈런으로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자이언츠 팬들 입장에서는 강호의 67호 홈런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와아아...자이언츠가 80승을 달성하다니.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윗님, 그렇게 삶을 포기하지 마세요. 아직 우리가 볼 게 더 남아있습니다. 베어스하고 승차가 반 경기 차밖에 안 남았다고요. 내일 경기만 이기면 우리 자이언츠가 1위로 올라서는 거예요!"
자이언츠 기사에 달리고 있는 댓글들은 강호의 기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강호의 67호 홈런으로 완성된 팀의 80승 달성 소식에 기뻐하며, 축제 분위기가 만들어 진다.
처음으로 팀의 80승 달성 장면을 볼 수 있게 된 팬들은 이제 남아있는 단 하나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 간다.
"허헐...80승도 모자라서 1위라니?! 진짜 내일 경기까지만 이기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죽긴 왜 죽어? 정규 시즌 우승하고 한국 시리즈 가는 거 봐야지. 우리도 한국 시리즈 직행하는 거 한 번만 해보자! 자이언츠라고 못할 게 있나?"
"그래! 한국 시리즈 직행하게 정규 리그 우승하자고! 자이언츠 파이팅!!"
팬들은 이제 자이언츠의 우승을 마지막 남은 시즌 목표로 삼기 시작한다.
시즌 우승을 부정적으로 보던 일부 팬들마저도 80승 고지에 올라 선 팀 성적을 확인하고 나서는 더 이상 부정적인 발언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우승이라는 목표를 모든 자이언츠 팬들이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팬들의 분위기는 베어스와의 시리즈 첫 경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선수들에게도 전달되고 있었다.
시간과 장소는 21일 경기가 끝난 후 자이언츠 선수단이 숙소로 잡은 호텔로 이동한다.
"기사는 강호 후배 이름으로 내걸렸는데 댓글에는 죄다 80승 얘기랑 시즌 우승해 달라는 말밖에 없네. 강호 후배, 조금 서운하지 않아?"
대우의 태블릿 PC로 오늘 경기에 대한 기사들을 검색해 보던 문표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강호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의 표정에서 유치한 의도가 보이는 것 같아 강호는 피식 웃음 짓는다.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강호가 잠시 입을 다물자 근처에 있던 다른 선수가 문표의 질문에 대신 대답하는 모습이었다.
"강호가 서운할 일이 있나? 문펴, 네 말대로 기사가 죄다 강호 이름으로 타이틀을 걸었는데. 서운할 사람들은 나 같이 경기에도 못 나가서 기사에 이름 한 줄 못 올린 선수들 아니겠어? 자, 문펴. 어서 나를 위로해 봐."
문표의 말에 강호를 대신해서 대꾸하는 사람은 지명타자 채중석이었다.
그의 말대로 중석을 포함한 대타 요원들에게는 한 타석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경기였다.
그래서인지 기사의 본문과 댓글에는 중석을 포함한 일부 선수들에 대한 내용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문표는 중석의 요구대로 위로할 수 있는 말을 떠올려보다가 생각의 방향을 바꾸고는 이렇게 되묻는다.
"중석 선배는 안 주무십니까? 왜 후배들 노는데 오셔가지고 훼방을 놓으세요?"
"훼방이라고?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야? 같이 어울리자는 거지."
문표의 물음에 순간 발끈한 중석은 그렇게 대꾸를 하다가 이내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썹을 씰룩이며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문표 너도 강호 또래들하고 어울릴 나이는 아니잖아? 너 나랑 4살 차이잖아? 강호랑은 아홉 살 차이고. 후배들하고 어울리는 게 훼방이면 문표 네가 이 방에 있는 것도 훼방인 거야! 어서 썩 나와 인마! 나랑 같이 치킨이나 먹으러 가자."
"치킨? 콜!"
그렇게 서로 섭섭한 대화를 나누던 중석과 문표는 치킨이라는 공통 관심사에 의기투합하며 강호의 방을 벗어난다.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던 강호가 곁에 있던 대우에게 넌지시 당부한다.
"너는 저런 선배들 보고 배우지 마라."
"넵."
장난기 다분한 강호의 당부에 대우는 곧바로 대답한다.
강호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대우는 강호의 말대로 중석이나 문표를 보고 배울 생각은 없었다.
이미 대우의 곁에는 완벽한 롤 모델이 존재했던 것이다.
'벌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보고 배우려면 강호 선배를 보고 배워야죠.'
대우는 강호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겉으로는 '이히히' 하고 실없이 웃어 보인다.
그 모습을 마주한 강호는 대우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며 이렇게 묻고 있었다.
"벌써 문표 선배 바이러스가 너한테 옮은 것 같은데?
"네? 바이러스요? 문표 선배 감기 걸렸습니까?"
"아니."
"그럼 무슨 바이러스 말씀하시는 거예요?"
"바보 바이러스."
"...."
강호의 말에 대우는 잠시 침묵한다.
평소답지 않게 연달아 두 번의 농담을 뱉어내고 있는 강호의 행동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런 대우를 내버려두고 강호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대우는 강호의 행동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선다.
"리포팅 자료 보시는 겁니까?"
"응."
"이거 니퍼드 투수 자료 아닙니까?"
"맞아."
"그러니까 왜요? 선발 투수 리포팅 자료를 보시려면 내일 경기 선발인 장원종 투수 걸 봐야하는 거 아닙니까?"
대우의 질문은 당연한 지적을 담고 있었다.
니퍼드는 오늘 경기의 선발 투수로 올라 5와 1/3이닝을 소화했으니 내일 경기에서 또 다시 마운드에 오를 수는 없었다.
강호가 내일 경기를 준비할 생각이라면 니퍼드의 리포팅 자료가 아니라 선발로 예정된 장원종의 자료를 공부해야만 했다.
물론 강호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복습 몰라? 우리 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면 결국 베어스와 맞붙게 돼. 제일 위협적인 투수의 투구 성향을 경기 당일에 복습해두지 않으면 한국 시리즈 무대에서는 기억도 안 날 거라고. 리포팅 자료에 나와 있는 것을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맞붙은 당일의 감각을 기록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강호는 대우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오늘 직접 상대해본 니퍼드의 투구 성향을 리포팅 자료에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기록하는 모습이었다.
이미 강호는 정규 시즌이 끝난 이후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강호를 롤 모델로 삼고 있는 대우가 진심어린 감탄사를 내뱉는다.
"이야~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도 그럼 오늘 경기를 복습해야겠네요."
대우는 강호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리포팅 자료를 꺼내 드는 모습이었다.
오늘 경기에서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던 대우는 1이닝 동안 2개의 안타와 1볼넷으로 1실점을 내어주는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시리즈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강호 선배처럼 오늘 경기를 복습해둘 필요가 있어!'
대우는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오늘 경기에서 자신의 실투 내용과 상대한 타자들에 관한 내용들을 정리해 나간다.
강호는 그런 대우를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 짓는다.
왜냐하면 대우에게 다 말하지 않는 내용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대우야, 사실 내일 경기는 준비할 필요가 없단다.'
강호는 대우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킨다.
그가 다음 날 맞붙게 될 선발 투수에 대해 대비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대우에게 말하지 못한 이유는 프리마켓 아이템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내일 경기가 되면 결과로 알게 될 테니까.'
강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대우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자정이 지났을 무렵, 두 선수의 방에서는 리포팅 자료를 넘기는 소리와 볼펜 소리만이 환하게 밝혀진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이제 다음날로 이동한다.
9월 22일 일요일 아침이 밝아 있었다.
자이언츠의 1위 도약이냐, 아니면 베어스의 1위 수성이냐가 걸려 있는 이 날의 경기에 양 팀 팬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자이언츠가 1위로 올라갈 거야!"
"헛소리 마! 넘볼 곳을 넘보라고! 정규 시즌 우승은 당연히 우리 베어스 거지!"
자이언츠와 베어스, 양 팀 팬들의 논쟁은 여전히 온라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런 팬들의 열기 속에 자이언츠 선수단을 태운 원정 버스가 다시 잠실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