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7 / 0335 ----------------------------------------------
예고된 홈런
강호의 홈런 신기록 달성 당시 자이언츠에게만 쏠려 있던 대다수 야구팬들의 시선은 이제 각자가 응원하는 팀으로 다시 분산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1위 팀 베어스를 시작으로 2위인 자이언츠 이하 다이노스, 히어로즈, 타이거즈, 와이번스, 트윈스, 이글스까지. 총 여덟 개의 팀이 각각 1위 자리와 3위 자리, 5위 자리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중이기 때문이다.
팬들은 각자의 팀이 가을 야구에 어떤 포지션으로 승선하게 될지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비단 팬들뿐만 아니라 경기를 직접 플레이하는 선수들에게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시간과 장소는 잠실구장의 홈 팀 덕 아웃으로 옮겨진다.
"오늘 경기 밀리면 끝이야. 무조건 이겨야 되는 거라고!"
경기 전 훈련에 앞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선수들의 이목을 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트윈스의 캡틴 유재국이었다.
야수 조의 고참 선수가 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다른 팀들과는 다르게 트윈스는 투수 조 최고참인 유재국 투수가 주장을 맡고 있었다.
유재국은 83년생, 올해로 37살의 노장급 투수로 한 때 메이저리그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짧게나마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었다.
"다들 파이팅 하자고! 자이언츠는 중심 타선이 강하니까 수비 상황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캡틴 유재국의 당부에 대다수의 선수들이 '네!'하는 기합 든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러나 대답을 하는 후배 선수들의 내심은 기합 든 목소리와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자이언츠가 중심 타선만 강할까? 1번 유성철부터 9번 전준오까지 죄다 3할 타율이고, 리그 초반만 해도 약점이던 불펜진이 안정된 데다가 마무리 투수 권대우의 방어율이 1점대인데.'
'정신 차린다고 이게 될 게임이야? 다른 선수들은 그렇다 치고 백강호는 무슨 수로 막을 거야? 다른 팀들처럼 백강호한테 볼넷만 주는 것도 능사는 아니야. 백강호의 발이 좀 빨라야 말이지. 루상에 나가면 웬만한 1번 타자들보다 빠른 선수라 득점 기여도가 지나칠 정도로 높아. 백강호가 루상에 나가면 스팅이나 강민수 같은 타자들이 가만히 있겠냐고.'
'자이언츠는 주전 선수들만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백업 선수들도 부담스럽다고. 오죽하면 2할 9푼을 치는 채중석 선수나 3할 대의 김상훈, 이인호 같은 선수들이 백업이겠어?'
그것이 캡틴 유재국의 당부에 답하는 후배 선수들의 마음이었다.
트윈스의 모든 선수들이 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 선수들에게서 출발한 무기력감은 경기가 시작된 후부터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이 촉발된 것은 1회 초 자이언츠의 공격에서 선두 타자인 유성철과 2번 타자인 박철이 모두 출루하면서 부터였다.
오늘 경기에서 트윈스의 선발 투수로 낙점된 임창규는 주심의 다소 좁은 스트라이크 존과 경기 초 불안한 제구력으로 연달아 두 명의 타자들을 출루시키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맞이한 3번 타자 황제인과는 7구째까지 가는 승부 끝에 빗맞은 공 하나를 어렵사리 유도할 수 있었다.
딱.
황제인이 때린 공은 내야 높은 곳으로 떠오르고 1루심의 인필드 플라이 선언이 떨어진다.
인필드 플라이(Infield fly)란 무사나 1사 상황에서 주자 1, 2루 또는 만루 상황일 때 타자가 친 볼이 내야에 떠올라 내야수가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페어 플라이 공일 때 아웃으로 선언됨을 말한다.
공격 측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수비 측 야수가 일부러 내야 뜬공을 놓친 후 더블 플레이, 혹은 트리플 플레이로 연결시키는 꼼수를 막기 위해서 생겨난 규정이었다.
"아웃."
1루심의 인필드 플라이 아웃 선언으로 1, 2루에 있던 주자들은 모두 루상에 묶여버린다.
타자 주자인 황제인만 고개를 떨구고 아웃된 상황에서 다음 타자인 강호가 타석에 들어선다.
그러자 잠실구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목소리가 잠실구장을 뒤덮는다.
"백강호 날려라!!"
"오랜만에 시원하게 홈런 한방 갑시다, 백강호 선수!"
자이언츠 팬들은 강호의 홈런을 기대하며 '오랜만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강호의 홈런 기록이 멈춘 것은 네 경기 전인 9월 15일 경기 부터였다.
엄연히 따진다면 고작 세 경기 동안 홈런을 때리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자이언츠 팬들은 강호의 홈런이 한참동안 나오지 않은 것 같은 갈증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 자이언츠 팬들의 갈증은 이어진 관중석의 목소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백강호 선수 홈런 좀 치게 좋은 공 좀 줘라!!"
"그래! 거르지 말고 붙어라! 이놈들아~!"
"거르지 말고 붙어라!"
누군가가 외친 '거르지 말고 붙어라' 라는 함성은 마치 응원가처럼 퍼져 나가 잠실구장의 그라운드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에 대한 홈 팬들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잠실구장의 과반석 이상을 차지한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목소리에 비해서는 다소 약하게 느껴진다.
강호의 타석 상황에서 발생한 양 팀 팬들의 신경전은 그라운드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지경이었다.
관중석에서 맞붙은 팬들의 신경전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선수는 마운드 위의 투수였다.
트윈스의 선발 투수인 임창규.
92년생 올해로 28살이 되어 전성기에 접어든 임창규 투수는 팬들의 바람대로 성장을 끝내 팀의 선발 한 축을 담당하며 올 시즌 9승 7패, 3.89의 나름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창규는 양 팀 팬들의 목소리에 입술을 질끈 깨문다.
'나도 거를 생각은 없다고!'
강호와의 승부에 앞선 임창규 투수의 각오였다.
올해로 전성기에 접어든 젊은 투수, 게다가 올 시즌 야구 역사의 판도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강호와의 상대 전적도 나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이곳은 국내 무대에서 가장 투수 친화적인 야구장인 잠실구장인데다가 홈 경기였고, 1사 주자 1, 2루 상황이었다.
주자 상황이 2, 3루였더라면 강호에게 볼넷을 주어 1루를 채울 생각을 했겠지만, 주자 1, 2루 상황에 일부러 볼넷을 주어 만루를 만들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백강호와 승부를 본다!'
그것이 임창규 투수의 각오였고, 또한 트윈스 배터리의 결정이기도 했다.
승부를 보려는 임창규 투수의 생각에 유광남 포수 역시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강호의 최근 홈런 페이스가 주춤하고, 여긴 잠실구장이야. 창규의 포심 구위가 좋으니까 잘 맞더라도 외야 뜬공이 될 확률이 커. 지금은 승부하는 게 맞아!'
판단을 마친 유광남 포수는 초구에 포심 패스트볼 싸인을 낸다.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이 좁은 까닭에 그나마 제구력이 통하고, 구위가 강한 포심을 택한 것이었다.
투수인 창규 역시 그런 포수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이며 세트포지션에 들어간다.
그런 두 사람의 결정은 곧 패착으로 드러나게 된다.
뿌드득!
임창규 투수의 릴리스 동작이 끝나고, 포수인 유광남은 마치 환청을 듣는 것만 같았다.
타석에 선 강호의 배트 스윙이 시작되면서 마치 강호의 근육에서 마찰음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든 것이다.
유니폼을 찢을 듯이 불거져 나온 강호의 상체 근육은 900g짜리 배트에 엄청난 속도를 가하고 있었고, 곧 배트의 중심부에서 마치 폭탄이 작렬하는 것만 같은 타격음이 터져 나온다.
그 순간, 강호의 뒤편에 앉은 유광남 포수는 속으로 비명을 집어삼켜야만 했다.
'안 돼!'
초구 선택이 실책인 것을 깨달은 광남은 강호의 타격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콰앙!
착각에 가까웠지만, 유광남 포수의 귀에는 폭발음 같이 들려오는 타격음이었다.
강렬한 타격음이 있은 후 강호는 배트를 살짝 내려놓으며 1루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홈런이었다.
강호가 쏘아올린 타구는 잠실구장의 담장을 넘은 것도 모자라 경기장을 완전히 넘겨버리는 장외 홈런이었다.
또한 이 홈런은 마치 축포처럼 잠실구장을 환호성으로 물들인다.
"우와아아아!!!"
"넘어갔어!!"
자이언츠 팬들의 함성 속에 중계석의 캐스터는 지금의 홈런이 강호의 시즌 65호 홈런이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캐스터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홈런 소식을 전파하는 사이 강호의 발걸음은 어느새 홈에 도달해 있었고, 주자였던 유성철과 박철의 환대를 받으며 함께 자이언츠 덕 아웃으로 들어선다.
덕 아웃에서 가장 먼저 강호를 반긴 것은 손성조 감독의 목소리였다.
"잘했다."
짧은 칭찬이었다.
그러나 손 감독의 입가에 핀 환한 미소를 마주하자 그 어떤 말보다 더한 찬사로 들려온다.
강호는 그런 손 감독과 손뼉을 마주치며 보무도 당당하게 덕 아웃으로 들어선다.
동료 선수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달려들어 강호를 향해 자신들의 손바닥을 내민다.
"우와~~ 진짜로 넘겨버리네! 버스 안에서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거야? 진짜로 홈런 예고였어?"
"백강호, 이 괴물 같은 자식! 올 시즌 잠실에서만 두 개째 장외 홈런 아니야? 어떻게 잠실에서 장외 홈런을 날리냐? 나는 잠실에서 홈런 하나 때린 적도 없는데."
"강호! 나부터 하이파이브 해줘! 어서 나에게 홈런의 기운을 전달해 달란 말이야!"
"중석 선배, 저리 비키십시오. 선배는 시즌 13홈런이나 때렸잖아요? 기록적으로다가 2개 부족한 제가 먼저 강호 후배의 홈런 기운을 전달받겠습니다."
"너나 비켜, 문펴! 좋은 건 어른부터 챙겨줘야지~ 너는 경로 우대도 몰라? 다들 비켜라, 이 후배 놈들아. 강호의 손바닥은 내 거니까!"
캡틴 강민수를 시작으로 문표와 중석, 이하 모든 동료 선수들이 환대해주고 있었다.
강호의 홈런 기록은 이제 1개의 홈런 기록이 더해지는 의미가 아니라 홈런을 치는 순간마다 한국 야구사를 새롭게 쓰는 귀중한 홈런들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동료 선수들은 격한 모습으로 강호의 홈런을 축하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자이언츠 선수단의 분위기는 중계 카메라를 통해 고스란히 TV전파를 타고 있었고, 중계석 캐스터의 목소리가 오디오를 통해 덧입혀진다.
"지금 백강호 선수의 쓰리런으로 자이언츠 덕 아웃이 축제 분위기로 물듭니다. 이렇게 되면 경기 초반부터 흐름이 자이언츠 쪽으로 넘어가게 되는 걸까요?"
캐스터의 멘트는 의문으로 끝나고 있었지만, 절반의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과연 그런 캐스터의 확신대로 강호에 이어 타석에 선 스팅과 강민수가 연속 안타를 때려내며 좋은 분위기를 이어나간다.
여기에 7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한 채중석이 또 하나의 쓰리런 포를 날려보내며 1회부터 빅 이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잘 봤냐, 문펴? 이 형님의 시즌 14호 홈런이야!"
"그거 다 강호 후배 홈런 기운 빨 아닙니까? 선배가 강호 후배하고 제일 먼저 하이파이브 해서 홈런 기운이 옮겨간 거라고요."
"그럼 네가 먼저 강호랑 하이파이브 하지 그랬냐?"
홈런을 때리고 덕 아웃으로 돌아온 중석은 문표와 유치한 논쟁을 벌이며 자신의 14호 홈런을 자축한다.
그렇게 이 날의 경기는 강호와 중석의 쓰리런으로 화려하게 시작되었고, 9회 말 트윈스의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이 끝났을 때는 양 팀의 점수 차가 15대 4까지 벌어진 채 자이언츠의 승리로 끝이 난다.
강호는 이 경기에서 3점 홈런 하나를 때린 것이 유일한 안타였지만, 2개의 볼넷을 얻어내어 5타석 3타수 1홈런, 3타점, 3득점을 기록하게 된다.
단 하나의 홈런이 주는 임팩트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나머지 타석에서 안타를 추가하지 못했어도 내일의 플레이를 기대하게 만드는 강호의 경기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좋은 분위기는 다음 경기에서도 이어진다.
다음 날인 20일 경기, 3회 초 강호의 타석 상황에서 중계진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백강호 타격, 쳤습니다! 그리고 뻗습니다! 이 타구는 어제에 이어 잠실구장의 담장을 완전히 넘겨버리는 백강호 선수의 또 하나의 홈런으로 기록됩니다! 백강호, 시즌 66호째 홈런이 바로 이 잠실구장의 담장을 넘깁니다! 그리고 지금의 투런 포로 자이언츠가 경기를 3대 2로 뒤집습니다!"
캐스터의 설명이 모든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3회 초에 터져 나온 강호의 투런 포는 1대 2로 뒤지고 있던 점수 차를 뒤집는 역전 투런 포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강호가 기록 중인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66이라는 숫자로 바꿔놓는 홈런이기도 했다.
연이틀 터져 나온 강호의 홈런포에 자이언츠 팬들의 가슴은 벅차오른다.
"백강호, 네가 최고다!!"
"강호 형, 의심해서 미안해요! 형이 짱이에요. 70홈런도 금방 해줄 거죠?!"
"강호 오빠! 나랑 결혼해줘!!"
원정석을 가득 채운 자이언츠 팬들은 각자의 목소리가 강호의 귀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마치 그런 팬들의 말을 모두 알아듣기라도 한 것인지 홈런을 치고 자이언츠 덕 아웃으로 들어서던 강호가 자이언츠 팬들을 향해 높이 손을 뻗어 보인다.
그런 강호의 행동으로 자이언츠 팬들의 목소리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팬들의 함성이 잠실구장을 가득 채운다.
9월 20일, 이제 시즌 경기를 13경기 남겨두고 있는 자이언츠의 풍경 중 하나였다.
이 날의 경기는 강호의 투런 포가 결승점으로 기록되며 7대 2, 자이언츠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된다.
그리고 이제 경기는 올 시즌 자이언츠의 최대 숙적이라 할 수 있는 베어스와의 경기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