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75화 (275/335)

0275 / 0335 ----------------------------------------------

프리마켓 D-17

자정이 지나 강호의 의식은 사직동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잠시 과거에 대한 회상을 떠올려 보던 강호는 잠에 들기 위해 잠자리로 걸음을 옮긴다.

아직은 시즌이 남아 있는 까닭에 컨디션 관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당장 내일만 해도 트윈스와의 시리즈 6차전이 계획되어 있지 않은가.

남은 일정에서 팀이 도약할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을 위해 4번 타자로서의 컨디션 관리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강호의 그런 의도는 잠시 후 틀어지고 만다.

삑삑삑삑, 띠리리리.

현관문의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에 강호는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걸어 나간다.

사직동 집의 출입문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으니 방문자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응? 강호 아직 안자고 있었네?"

방문자의 정체는 형인 강수였다.

그는 양 손에 작업용 가방을 든 채로 현관으로 들어서는 모습이었다.

강호는 얼른 형이 든 짐 하나를 받아들며 물어본다.

"남해에 3일 동안 출장 간다며? 어떻게 된 거야?"

"오늘까지만 하고, 남은 공사는 딜레이 됐어. 집 주인이 변덕을 부려서."

"뭐? 그럼 잔금 떼이는 거 아냐?"

"이 형이 누구야? 오늘까지 작업한 건 다 받아냈지. 나머지 공사는 한 달 후에 하자는데 저렇게 변덕부리는 사람 공사는 다시 안 받는 게 좋을 것 같아."

형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출장 일정을 단축시킨 이유를 알게 된다.

그리고 형의 짐을 받아든 강호는 또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거 무슨 냄새야? 치킨이야?"

"엉. 혹시 너 밥 안 먹었을까봐 사와 봤지. 밥은 먹었어?"

"당연히..."

밥을 먹었냐고 물어보는 형의 질문에 강호는 사실대로 대답하려다 이내 입을 다문다.

데뷔 후 첫 선발승을 따낸 이청기 투수가 밥을 산 까닭에 저녁을 먹고 들어온 강호였다.

사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밥값은 캡틴인 민수가 낸 것이었지만, 어쨌든 강호는 푸짐한 식사를 마친 뒤였다.

그런데 형의 행색을 보아하니 왠지 저녁을 먹지 못했을 거라는 예상이 들고 있었다.

"안 먹었지. 형은 저녁 먹었어?"

"응? 나는 작업이 늦게 끝나서 아직 못 먹었어. 강호 너는 뭐한다고 아직 안 먹었어? 오늘 경기는 일찍 끝났잖아. 운동선수가 끼니 거르고 그러면 안 돼. 특히 너처럼 앙상한 녀석이 밥을 거르면..."

아직 밥을 먹지 않았다는 강호의 말에 강수는 타박의 말을 하다 자신의 말에 오류를 발견하고는 입을 다문다.

과거의 강호는 지독하게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었다.

운동선수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어서 강호 본인은 물론 곁에서 지켜보던 강수 역시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기억이었다.

이제 강호의 체중은 105kg를 넘어 앙상하다는 말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체격이 되어 있었다.

습관적으로 동생에게 살찌라는 잔소리를 하려던 강수,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대화의 방향을 바꾼다.

"치킨 먹자."

강수는 주제를 전환하기 위해 강호의 팔을 식탁으로 잡아끌며 제안했고, 강호는 피식 웃으면서 모른 척 넘어가 주는 모습이었다.

식탁에 앉은 강호가 치킨 박스를 열어보니 예상대로 튀긴 치킨이 아닌, 구운 치킨이었다.

시즌 중이라 몸 관리를 하는 동생을 위해 튀긴 치킨 대신 구운 치킨을 사온 형이었다.

본인이 저녁을 먹지 않아 사온 치킨마저도 동생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강호는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감동은 감동인데, 이걸 무슨 수로 먹지? 고깃집에서 괜히 많이 먹었네.'

강호는 순간 갈등한다.

청기와 함께한 회식 자리에서 배를 채워 공복감이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

그런 강호를 향해 눈치 없는 형은 가슴살을 집어 들어 동생에게 건네 온다.

"너 몸 관리하니까 가슴살 먹어야지? 나는 닭 가슴살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더라. 강호 너는 닭 가슴살 좋아하니까 다행이야."

'형, 나도 닭 가슴살 안 좋아해. 이때까지는 몸 관리해야 되서 그냥 먹은 거야. 그리고 나 지금 배가 불러서 도저히 못 먹겠는데. 그냥 형이나 먹어.'

강호는 대답대신 우러나오는 마음의 소리를 홀로 삼키며 형이 건넨 닭 가슴살을 받아 든다.

그 후 두 형제는 동상이몽 속의 밤늦은 식사를 시작하고,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강호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강호 네 홈런 기록 때문에 내 주변에서도 말이 많아. 70홈런 달성이 어려워졌다는 말도 있을 정도라니까. 참 나, 그게 말이나 돼?"

강수는 동생의 홈런 기록에 대해 거론하며 핏대를 높이고 있었다.

최근 들어 다소 페이스가 떨어진 강호의 홈런 기록에 대해 우려하는 시선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강호는 문득 다른 사람의 시선을 떠나 형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형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응? 뭘?"

"내가 70홈런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아?"

강호는 궁금증을 담아 묻고 있었다.

그러자 강수는 두말할 이유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대답한다.

"당연히 할 수 있지! 네가 70홈런 못하면 직원들한테 크게 한 턱 쏜다고 내기까지 걸었는데!"

강수는 동생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하다가 문득 아차 하는 생각이 든다.

프로야구 선수에게 멘탈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 강수다.

그런데 당사자인 강호를 앞에 두고 심적 부담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대놓고 하고 만 것이다.

실수를 깨달은 강수는 얼른 말을 덧붙인다.

"농담이야, 농담. 너무 신경 쓰지 마. 70홈런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는 거지. 벌써 아시아 기록도 넘었는데 70홈런이 뭐가 중요하겠어, 안 그래?"

강수는 말을 바꾸며 동생의 눈치를 살핀다.

혹시나 자신의 말에 강호가 부담을 가지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강호는 그런 형을 향해 장난기 넘치는 모습으로 웃어 보인다.

"형이 그런 내기를 걸었다고? 그럼 안 되겠네. 아껴둘 생각이었는데 이번 주에 해버리지 뭐."

"엉? 이번 주에 뭘 해버려?"

"70홈런 말이야. 그깟 70홈런 이번 주에 끝내버리지, 뭐."

갑작스러운 강호의 호언장담에 강수는 말을 잃고 만다.

동생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살피니 농담 같기는 한데 올 시즌 동생의 기록을 정확히 알고 있는 형의 입장으로서는 무턱대고 농담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강호라면 진짜 가능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드는 강수였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농담을 던진 동생을 타박하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홈런이 치고 싶다고 때려지는 개념의 기록이야? 이번 주라고 해봐야 일요일까지 네 경기밖에 안 남았는데 그동안에 네가 무슨 수로 70홈런을 때려? 지금까지 64홈런이니까 여섯 개를 더 쳐야하는 거잖아? 그럼 경기 당 1.5홈런 씩 때려야 하는 건데 네가 아무리 내 동생이고, 백강호라도 그건 어렵지 않겠어?"

강수는 다시금 목에 핏대를 세운다.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동생이 너무 자만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강호의 올 시즌 기록을 떠올려본다면 자만심으로만 여겨지지 않는 동생의 말이었기에 타박을 하던 강수 본인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었다.

강호는 그런 형의 모습에 더욱 진하게 웃어 보인다.

"왜? 내가 못할 것 같아? 그럼 나하고도 내기하자."

"뭐? 내기?"

"직원들하고도 내기 했다며? 나하고도 하자. 내가 이번 주까지 70홈런을 때릴 수 있는지 없는 지로 말이야. 형은 못할 것 같다고 했으니까 나는 할 수 있다에 걸게."

강수는 동생의 갑작스러운 내기 제안에 조금은 당황하고 있었다.

평소 내기 같은 것과는 담을 쌓고 사는 동생이라 강호 본인이 자발적으로 내기를 걸어오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호기심은 생겨난다.

"무슨 내기? 설마 돈 내기를 하자는 건 아니겠지?"

의구심을 담은 형의 물음에 강호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리고는 꽤나 긴 시간을 궁금해 했던 한 가지 의문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낸다.

"석 달 전쯤이었나? 내가 모델 계약을 하고 받은 돈을 형한테 맡기려고 했잖아. 기억나?"

강호의 물음에 강수는 기억을 거슬러 본다.

그 때 동생은 스포츠 용품 업체들과의 모델 계약을 통해 2억이라는 거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돈이 들어있는 통장을 고스란히 자신에게 건넸던 기억도 함께 떠오른다.

"아~~ 그 때? 기억난다! 강호 네가 나한테 통장 맡기려고 했잖아. 설마 지금 내기 조건으로 2억을 걸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강수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묻고 있었다.

동생의 베포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2억이라는 거액을 내기에 걸겠다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든다.

그런 형의 의문에 강호는 '풋'하고 실소를 흘린다.

"형, 그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내기로 2억을 건다고? 그 정도면 구속수사 감 아냐? 나 현역 프로야구 선수야. 돈 내기 같은 거 안 해."

동생의 대답에 안심하면서도 여전히 강수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럼 그 때 일은 왜?"

본론을 물어오는 형의 질문에 강호는 잔잔한 어조로 대답한다.

"그 때 형이 2억 대신에 2만 원만 달라고 했잖아. 내가 이번 주에 70홈런 달성하면 그 2만 원 어디에 썼는지 나한테 알려줘. 그게 내기 조건이니까."

강호는 그렇게 내기 조건을 밝힌다.

그런 동생의 말에 강수는 잠시 얼어붙고 만다.

잠시 잊고 있었던 석 달 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강호야, 그 때 네가 준 2만원으로 엄마한테 가서 헌화를 드렸다. 그게 그렇게 궁금했던 거야?'

강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음 짓는다.

동생이 건넨 2억을 거절했던 기억, 그리고 2억을 대신해서 받아든 2만 원으로 엄마가 계신 납골당을 찾아 헌화를 받쳤던 기억이 떠오른다.

동생인 강호와 진주는 자신들에게 비참한 인생을 안겨 준 엄마를 원망했었다.

그래서 2만 원의 용도를 밝힌 적 없었던 강수.

그것이 동생이 내건 내기의 조건이 될 줄 몰랐기 때문에 잠시 침묵한 채 대답할 말을 떠올려 본다.

"그래, 그러자. 네가 이번 주 내로 70홈런 치면 알려줄게."

강수의 대답에 동생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형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기라며? 네가 조건을 내걸었으니까 내가 내기에서 이기면 얻는 것도 있어야지. 이 내기에서 내가 이기면 뭘 얻을 수 있는 건데?"

강수는 과거의 회상에서 벗어나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강호는 그런 형의 시선과 마주하며 이렇게 대꾸한다.

"그러네. 형도 얻는 게 있어야지. 만약 형이 이기면 2억 줄게."

"뭐? 너 지금 형한테 돈 주려고 내기 거는 거야?"

"2억이 싫으면 어쩌라는 거야? 그럼 형이 이기면 2만 원 줄게. 형 2만 원 좋아하잖아."

"..."

동생의 말에 강수는 대답이 없었다.

결국 두 형제의 내기는 2만 원이라는 조건이 내걸리게 된다.

그 후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지고, 주제는 전혀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태호는 어떻게 지내?"

닭 가슴살을 먹는 듯 마는 듯 하던 강호가 불현듯 던진 물음이었다.

그의 물음에 강수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어느새 두 사람의 이야기는 태호에게로 옮겨진다.

시간과 장소는 잠시 과거 시점의 경남중 야구부로 이동한다.

잠시 인근의 거래처를 방문했던 강수는 태호의 근황이 궁금해져 경남중 야구부를 들리게 된다.

이 때 강수는 태호의 훈련 장면을 지켜보게 되고, 한 가지 특이점을 목격할 수 있었다.

휴식 시간이 되었을 때 태호에게 다가 선 강수가 그 점에 대해 물어본다.

"태호, 이제 투수 쪽으로 노선을 잡은 거야?"

인사말을 건넨 후 다가선 강수, 그가 건넨 질문에 태호가 특유의 시선으로 올려다보며 대꾸한다.

"저 원래 투수도 했어요."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그런데 너 원래 타자 쪽으로 진로 잡지 않았어? 오늘 훈련하는 거 보니까 투수 훈련만 하던데?"

"네, 이제부터 투수만 할 거니까요."

태호의 단호한 대답에 강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고등부 야구부로 올라가기 전 확고한 포지션을 정하는 것은 선수 본인에게도 현명한 판단일 수 있었다.

타격 재능과 투수로서의 잠재능력을 모두 갖춘 태호였기에 고등부 입학 이전에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었다.

태호의 조언자 역할을 도맡고 있는 강수로서는 그런 태호의 선택을 존중하게 된다.

"잘했다. 강 감독도 네가 투수 쪽으로 재능이 더 좋다고 하던데, 결정은 선수 본인이 하는 거니까. 잘 결정했어."

강수는 태호의 결정을 존중해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런데 태호가 낀 글러브를 보고는 또 하나의 의문점이 생겨난다.

"너 그런데 오른손잡이 아니었어? 우투우타였던 것 같은데, 원래 좌투우타였어?"

강수는 태호가 낀 글러브에 시선을 둔 채 묻고 있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태호가 오른손으로 공을 던지고, 우타석에 섰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왼손으로 공을 던지고, 오른손에 글러브를 낀 모습이었다.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네, 맞아요. 이제부터 좌 투수하려고요."

태호의 대답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강수의 말대로 예전에는 우투우타였지만, 이제부터 좌투우타로 전향할 생각이란다.

그 황당무계한 결정에 이렇게밖에 물을 수 없었다.

"왜?"

"백강호 선수가 좌 투수한테 약하다고 해서요. 이왕 투수가 되기로 했으니 국내 최고의 투수가 되어야죠. 백강호 선수한테 강한 투수면 국내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거잖아요."

태호의 삼단논법을 듣게 된 강수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리고 태호의 말에서 나온 전제 하나에 발끈하게 된다.

"강호가 좌 투수한테 약하다고 누가 그래?"

발끈해서 묻고 있었다.

강수는 동생에게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강호'라는 주어를 사용해 태호에게 윽박지른다.

그런 강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호.

"아저씨 백강호 선수랑 친해요? 왜 백강호 선수한테 강호라고 부르는 거예요?"

"아니...뭐. 얼굴은 몇 번 봤어."

"얼굴 몇 번 봤다고 왜 말을 놓고 그래요? 하여튼 어른들은 조금만 친해도 무지 친한 척 하더라."

태호는 강수가 백강호라는 대 선수의 이름을 이용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태호의 태도에 강수는 대답할 말이 없다.

'확, 백강호가 내 동생이라고 밝혀 버릴 수도 없고. 이것 참.'

강수는 태호의 오해가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기며 대화의 주제를 전환시킨다.

"투수로 전향하려는 진짜 이유는 따로 없는 거야?"

강수의 질문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기도 하고, 대화의 주제를 바꾸기 위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볍게 던진 강수의 질문에 태호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최고의 선수가 돼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투수 전향이랑 무슨 상관이야? 타자가 되면 최고가 될 수 없다는 말이야?"

"타자 쪽에는 벌써 백강호 선수가 있잖아요. 백강호 선수는 올 시즌이 데뷔 시즌이라서 제가 프로에 데뷔해도 여전히 국내 리그에 남아 있다고요. 백강호 선수가 현존하는 리그에서 어떻게 최고가 될 수 있겠어요? 차라리 투수로 성공하는 게 더 빠른 거죠."

똑 부러진 태호의 말에 강수는 표정을 바꾼다.

형과 동생의 신분을 떠나 강호의 올 시즌 기록은 언터쳐블 자체였고, 태호가 프로에 데뷔해 강호의 업적을 넘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태호의 잠재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강호의 올 시즌 기록 자체가 사기에 가까울 정도로 넘사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강수의 생각 속에 태호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백강호 선수를 타자로서 넘어서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백강호 선수를 이기려면 마운드 위에서 이겨야죠. 투수로서 백강호 선수를 넘어서는 건 가능하지 않겠어요?"

태호는 당돌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강호를 넘기 위해 투수가 되겠다는 태호의 말, 왠지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래서 강수는 태호를 향한 마지막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데? 백강호 선수를 넘고 싶은 이유가 있는 거야?"

"최고가 되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내 말은 왜 최고가 되고 싶은 거냐고. 물론 목표가 높으면 좋겠지만, 너무 과한 목표는 선수 몸을 혹사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어."

강수는 아직 성장기에 있는 태호가 너무 높은 목표를 잡고 본인의 몸을 혹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태호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한국 시리즈 무대에서 선발 선수로 출장하게 되면 후원자의 이름을 알려준다고요. 한국 시리즈에 선발 출장하려면 우선 팀을 한국 시리즈까지 올려야 하는 거고, 그러려면 최고의 선수가 되어야죠. 어정쩡한 팀에서 어정쩡한 선수가 한국 시리즈 무대를 밟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최고가 돼야 하는 거고, 그러려면 백강호 선수를 넘어야죠."

태호는 또 다시 삼단논법을 이용해 자신의 주장을 밝히고 있었다.

아직 중학생인 태호의 입장에서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결론 같아 보이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강수로서는 태호의 주장에서 여러 가지 오류를 발견한다.

'그렇다고 해서 태호의 꿈을 꺾을 필요는 없겠지. 태호가 성장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될 테니까.'

강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태호를 격려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시간과 장소는 다시 현재의 사직동 집으로 돌아와 강수는 동생인 강호와 마주하고 있었다.

강호는 태호는 어떻게 지내냐고 물은 자신의 질문에 형이 대답 없이 자신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었다.

"왜 그래? 태호한테 무슨 일 있는 거야?"

강수는 동생의 질문에 더욱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동생아, 지금 경남중 야구부에는 너의 천적이 될 지도 모르는 꼬맹이 하나가 성장하고 있단다.'

강수는 자신과 태호만 알고 있는 비밀을 결국 속으로 삼킨다.

어차피 태호가 프로에 데뷔하려면 6, 7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동안 강호에게 알려주지 않은 비밀 하나를 태호와 공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동생의 질문에 이렇게 대꾸하고 있었다.

"없어, 아무 일도. 그냥 뭐 사춘기 정도?"

그것이 강수의 대답이었다.

그렇게 형제의 대화는 끝이 나고, 시간은 또다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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