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70화 (270/335)

0270 / 0335 ----------------------------------------------

승선하다

9월 8일 히어로즈와의 고척 시리즈가 끝난 후 자이언츠의 원정 버스는 사직으로 되돌아 온다.

부산으로 진입하는 톨게이트를 지날 무렵에는 이미 자정이 지나 월요일 새벽이 시작되고 있었다.

버스 안 풍경은 장거리 원정에 잠이 든 선수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부는 잠에서 깨어나 곁에 앉은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이제 또 월요일이네요. 태풍 덕분에 일주일 넘게 쉬었더니 경기 일정이 조금 빡빡해진 느낌입니다."

앞 쪽 자리에서 2루수 최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이번 경기에서 강호와 함께 환상의 키스톤 콤비를 선보인 베테랑 내야수였다.

최훈의 말에 답하는 목소리는 선수들에게 무척이나 익숙해진 지명타자 채중석의 목소리였다.

중석은 최훈의 말에 시크한 태도로 이렇게 답하고 있었다.

"이까 짓 일정이야. 나는 하도 벤치에만 앉아 있어서 몸에 담이 결릴 지경이다. 남은 경기 전부 1루수로 선발 출장한다고 해도 끄덕 없어."

중석의 대답에 최훈이 피식 웃어 보인다.

"선배님은 이번 시리즈에서 선발 출장하셨지 않습니까? 벤치에만 앉아계신 건 아니죠."

"그래봐야 지명타자인데, 뭐. 타석에 설 때 빼고 벤치에 앉아만 있었던 거잖아?"

중석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최훈의 물음에 답한다.

그러다 무언가가 떠오른 것인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일정 관리 어플리케이션을 활성화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최훈이 관심을 내보인다.

"그건 또 뭡니까? '일정 관리 매니저'요? 선배님이 그런 것도 하십니까? 요즘 사업하세요?"

"아니 꼭 뭐 사업하는 사람만 이런 어플 쓸 수 있어? 우리 같은 프로 선수도 자영업자 같은 개념 아냐? 이런 일정 관리 어플은 기본이지! 훈이 너도 하나 깔아둬."

중석은 그렇게 콧대를 세우며 활성화한 어플을 체크한다.

그러더니 최훈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 정상적인 시리즈 일정은 다 끝난 거네. 올해는 일정을 왜 이렇게 끊었는지 모르겠어. 작년까지는 확장 엔트리 전에 5차전 전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줬는데, 올해는 5차전까지의 일정이 이제 끝난 거잖아."

일정 관리 어플을 확인하며 꺼낸 중석의 말에 최훈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중석의 휴대폰에 적혀 있는 일정표를 자세히 살피고 나서야 '아~'하는 탄성을 내뱉으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후반기 일정 말씀하시던 거였습니까? 그러고 보니까 다음주부터는 시리즈가 2경기 씩 진행되겠네요. 선배님 말씀대로 작년에는 9월 시작부터 그런 식으로 일정을 짰던 것 같은데 올해는 일주일이 늦은 것 같습니다."

최훈은 오랜 1군 경력 기억을 더듬어 보며 후반기 남은 일정을 예측해 본다.

이제 자이언츠에게 남은 경기는 23경기.

모든 팀과의 시리즈 5차전 경기가 종료된 시점이라 잔여 경기가 9경기가 남아있어야 하는 시점이지만, 올해 경기 역시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천으로 인한 잦은 경기 취소로 올해 역시 후반기 일정이 계획보다 많이 남게 된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한 KBO는 9월 일정부터는 시리즈 경기를 두 경기로 줄이고, 팀마다 부족한 경기 일수를 채울 수 있도록 일정을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9월 일정이 10일 뒤로 밀려 9월 10일부터 마지막 6차전 시리즈를 치르게 된 것이다.

만약 9월에 예정된 시리즈 6차전에서도 잔여 경기를 소화하지 못한 팀은 9월 말과 10월까지 연간 소화해야 하는 경기 일정을 모두 소화해야만 했다.

144경기, KBO 열 개 팀이 다른 아홉 개 팀과 정확히 16경기를 소화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최종 경기 수인 것이다.

자이언츠는 현재 여러 번의 우천 취소로 인해 121경기까지 소화한 상태였다.

베어스와 라이온즈와의 시리즈 5차전은 태풍의 북상으로 단 한 경기도 치루지 못했으니 계획된 일정이 모두 끝난 후 그들과의 치열한 일전이 예고되어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다른 경기는 모르겠는데 베어스하고 남은 경기는 장난 아니겠는데? 지금이 한 경기 반차인가? 후반기 내내 우리 팀이 그렇게 많이 이겼는데 왜 베어스하고의 격차는 아직 이 모양인 거야?"

"그만큼 우리 팀의 전반기 성적이 안 좋았다는 거죠. 꼴등까지 떨어졌잖습니까? 그런 순위를 2위까지 끌어올린 게 대단한 겁니다."

중석과 최훈의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원정 버스는 어느새 사직구장이 위치한 동래구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편, 자신의 자리에서 잠들지 않고 있던 강호는 중석과 최훈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많이 좁혀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베어스와의 격차가 한 경기 반이나 남아 있어. 베어스의 최근 상승세를 생각한다면 결국 베어스와의 남은 맞대결에서 판가름이 나게 될 거야.'

두 선배의 대화를 통해 강호 역시 팀의 남은 일정을 예상해보고 있었다.

자이언츠가 시즌동안 베어스와 치룬 경기는 열 두 경기.

아직 베어스와 네 경기가 남아있는 상태라 두 팀 간의 맞대결로 올 시즌 우승의 향방이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베어스와의 경기가 네 경기나 남은 이유는 우천으로 인해 시리즈 5차전이 치러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정규 시즌 우승이 가시권까지 도달해 있는 상황이야.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강호는 고민하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본인의 생존을 위해서, 그것을 보장받은 후부터는 1군에 자신의 확고한 자리를 만들기 위해 오직 경기에만 전념하며 지내 왔었다.

팀을 위한 밑그림을 그려본 적도 딱히 없고, 그저 이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매일같이 타석에 섰다.

그런데 지금은 팀의 4번 타자로서 원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움직여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우승. 자이언츠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정규 시즌 우승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4번 타자인 내가 단지 개인의 기록을 위해서 타석에 선다면 그건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는 짓이야. 이미 개인 기록은 차고 넘칠 정도로 달성해 놓은 상태니까 이제는 팀의 4번 타자로서 움직일 때가 됐어.'

강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직 달성 가능한 신기록은 남아 있었지만, 그것에 연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미 고척 시리즈에서 2016년 라이온즈 최형수 선수가 달성했던 46개의 최다 2루타 기록을 47개로 갱신한 상태였다.

최다 2루타, 최다 3루타, 최다 홈런 기록을 모두 갈아치운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시즌 190개째를 이어가고 있는 최다 안타 기록일 것이다.

최다 기록인 서건찬 선수의 201안타 기록과는 11개째로 좁혀졌으니 신기록 달성도 이미 기정사실화 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타격 기록 달성에는 미련이 생기지 않는 강호였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내 기록들은 이어지고 있고, 특히 최다 홈런 기록은 현재 진행형이야. 그건 팬들뿐만 아니라 다른 팀의 배터리도 알고 있는 상황. 나에 대한 집중 견제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 그런 부분을 이용할 필요가 있어.'

강호는 사직으로 돌아가는 원정 버스 안에서도 여전히 치열한 구상을 이어나간다.

이제 그의 시야는 1군 무대의 생존이나 라인업 경쟁, 개인 기록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19일이 되면 또 한 번 프리마켓의 문이 열린다. 그 때는 홈런 기록에 연연하지 말고, 팀 우승을 위한 아이템들을 우선적으로 구매하도록 하자.'

강호는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제 9월 10일이 되었으니 다음 프리마켓 방문 때까지는 9일이 남은 상황.

그 기간 동안 팀 승리를 위해 최대한 기여하며 정규 시즌 우승을 위한 속도를 높여가고자 한다.

하지만 계획은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다.

9월 10일부터 진행된 위즈와 이글스,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3승을 거두는 동안 3패를 얻으며 베어스와의 승패 마진이 오히려 두 경기 차이로 벌어지고 만 것이다.

강호는 원정과 홈경기를 오가던 10일 부터 15일까지, 6일 동안의 경기에서 2개의 홈런을 더하며 64홈런을 이어가기는 했지만, 중요한 승부처마다 고의사구로 자신을 거르는 상대 배터리의 전략으로 여섯 경기 동안 5타점을 생산하는 것에 그친다.

이로써 자이언츠의 시즌 성적은 76승 51패가 되며 여전히 베어스에 뒤진 2위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즌이 종료되기 전까지 이제 17경기를 남아둔 상태에서 손성조 감독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상황과 장소는 사직구장에서 진행될 타이거즈와의 시리즈 6차전을 앞둔 실내 훈련장으로 이동한다.

"모두에게 해줄 말이 있다."

손 감독은 자신의 소집령에 따라 실내 훈련장에 모인 선수들에게 입을 뗀다.

손성조 감독이 1군 사령탑으로 부임한 이후 경기 전, 선수들을 모두 모이게 한 적은 드물었고, 특히나 이렇게 본인의 입으로 직접 지침을 내리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모든 선수들은 표정을 굳히며 손 감독의 입에서 나올 말에 주목하게 된다.

"이제 열일곱 경기 남았어.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우리 팀의 목표는 우승으로 수정되었다. 2등에서 만족하기에는 우리가 2위 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어. 3등이나 4등에서 엎치락뒤치락 했더라면 팬들도 2등에 만족했을 테지만, 우리가 2위 자리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팬들도 이제는 우승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말이야."

손 감독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시작부터 농담으로 포문을 열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 말이 농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손 감독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던 까닭도 있었고, 드디어 손 감독의 입에서 '우승'이라는 단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우승이라는 단어는 선수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때도 무겁게 들리는 단어였는데 손 감독이 직접 언급을 하자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감독님이 이제 말씀을 하시려는 모양이구나.'

베테랑 선수들은 느끼고 있었다.

손성조 감독이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이언츠의 2군에 머물며 노리고 있던 단 하나의 목표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10년을 기다려왔던 그 말을 꺼내기 위해 드디어 모든 선수들을 불러 모은 것이라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우승이라는 단어는 베테랑 선수들에게마저 무게감을 선사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매 경기가 한국 시리즈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해야 할 거야. 어설픈 마음가짐으로는 가을 야구에 함께 할 수 없을 테니까. 각자의 컨디션 관리나 멘탈 관리는 스스로가 챙기는 게 좋아. 이제는 코치들도 일일이 챙겨줄 수 없어. 우리는 이제 정규 시즌 우승을 위해 달려야 하니까."

손 감독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손 감독의 목소리에는 묘한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고, 베테랑 선수들을 시작으로 루키 선수들까지 그 분위기에 동조되어 간다.

"오늘, 그리고 내일. 타이거즈와의 경기가 지나면 베어스와의 일전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거다. 나는 베어스와의 일전에 모든 것을 걸 생각이야. 그러니까 너희도 아껴두고 있던 체력이 있다면 이번 주 경기에서 모두 쏟아내는 게 좋을 거다."

손 감독은 또 한 번 농담이 섞인 말을 이어나간다.

그러나 이번에도 선수들은 웃지 않는다.

농담의 이면에 가려진 손 감독의 각오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 감독은 말하고 있었다.

이번 주 베어스와의 일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마도 손 감독의 계획에서 이번 베어스와의 시리즈를 모두 패하게 되면 자이언츠가 정규 시즌 1위에 올라설 수 있는 확률이 확연히 떨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결과는 자이언츠의 어떤 구성원도 바라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할 테니 잘 듣도록 해라. 이건 감독으로서의 지시이기도 하고, 부탁이기도 하니까."

손 감독은 길지 않았던 말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빛났고, 목소리는 담담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선수들의 중심에 선 채 그런 손 감독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강호.

강호는 손 감독이 선수들에게 건넨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오늘부터는 지지말자. 남은 17경기를 모두 이길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이 될 때까지 경기를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이긴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거니까.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경기도 이제는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그게 승리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테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손 감독은 승리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밝히며 선수들에게 묻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17경기, 그 남은 경기 동안 자신을 믿고 따라줄 수 있냐고. 그래서 자이언츠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정규 시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함께 쌓을 수 있느냐고.

어느새 60대의 말미에 들어선 노장은 가장 순수한 열망을 모두에게 꺼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선수들은 그런 손성조 감독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네!!"

그것이 선수들의 대답이었다.

다른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시즌이 막바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할 무렵, 자이언츠 선수들은 손성조라는 선장이 모는 함선에 온전히 승선하게 된다.

우승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 작품 후기 ============================

269회, 스팅의 장타율을 0.916에서 0.716으로 수정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