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139화 (268/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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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감독의 안배

강호가 때린 타구가 45도의 완벽한 각도를 그려내며 이글스 파크의 좌중간을 가로지른다.

웬만한 파워가 아니고서야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대형 타구가 경기장을 완전히 넘겨버리고 있었다.

9회 초 만루 상황에서 나온 강호의 그랜드 슬램은 장외 홈런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 타구가 어디로 간 겁니까? 넘어갔나요? 넘어갔군요! 이런 홈런이 9회 초 1사에 나오네요! 백강호가 이 그랜드 슬램으로 4대 1로 경기를 끌려가던 팀을 패배에서 구해냅니다. 이제 점수는 5대 4. 백강호의 만루 홈런으로 경기는 알 수없는 곳으로 향합니다!"

배성한 캐스터의 격앙된 목소리와 함께 TV중계로 극적인 홈런을 지켜보던 자이언츠 팬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래! 저거야! 만루 상황에 백강호가 나올 때부터 한 방 해줄 것 같았어. 역전이야, 역전!"

거제 시장에서 울려 퍼지는 황동철의 목소리에 친구인 갑식이 코웃음을 친다.

"웃기고 앉았네. 오늘 경기 질 것 같다며? TV끄고 3차 가자고 하지 않았어? 왜 이렇게 금방 말을 바꾸나?"

갑식 역시 강호의 홈런에 환호성을 터뜨리다가 동철의 말에 급 정색을 하며 묻고 있었다.

친구의 지적에 동철은 곧바로 반박하고 나선다.

"마! 남자의 과거는 묻는 게 아니야. 묻어두라고. 그리고 그건 8회 때 한 소리지. 9회 만루 상황에 백강호가 딱! 타석에 올라왔을 때는 한 방 쳐 줄 거라고 얘기 했잖아. 그러니까 반은 맞은 거야!"

우격다짐으로 우기고 있는 동철의 말에 또 다른 친구인 현승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피식 웃어보인다.

"그럼 경기 결과도 한 번 맞춰봐라. 오늘 경기 이기겠나?"

현승의 물음에 동철은 목청이 보일 정도로 웃어젖히며 대답했다.

"마. 각이 딱 안 나오나? 딱 이길 각이잖아. 오늘은 이대로 이길 거야. 5대 4. 점수도 좋네!"

술김에 오늘 경기의 결과를 예언하고 있는 동철, 그의 말대로 9회 말 1점 차의 스코어를 잘 지켜낸 자이언츠의 승리로 경기가 종료된다.

이로써 자이언츠는 시리즈를 스윕하며, 이글스 전 무패 기록을 이어나간다.

시즌 전적 24승 28패. 6위에 머물러 있던 이글스를 8위까지 끌어 내리며, 7위로 올라서게 된 자이언츠.

반사 이득으로 6위로 올라 선 트윈스를 반 경기 차이로 바짝 추격하게 된다.

라이온즈 경기에 이어 이글스 경기까지. 한 주에 있었던 6경기 중 다섯 경기를 이기며, 팀 승률 0.462까지 끌어올리는 자이언츠였다.

사직으로 돌아가는 원정 버스 안은 당연히 좋은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꼴찌를 벗어나니까 일이 착착착 풀리네! 다음 주에 홈에서 6위까지 달리면 되겠어. 그래, 우리 팀이 하위권이 웬 말이야? 그래도 5등 싸움은 해줘야지."

앞 쪽 자리에 앉은 채중석의 걸걸한 목소리가 선수단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선수들은 이번 시리즈를 통해 각자가 느꼈던 소감을 말하며 들뜬 분위기를 이어나간다.

그러는 사이 원정 버스는 부산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좋은 분위기에 합류하지 못하는 몇몇 선수들이 눈에 띈다. 그 중 한 명인 문표가 자꾸만 앓는 소리를 내며 주변의 관심을 바라는 눈치였다.

"아이고~ 다들 신이 났는데 나는 왜 이럴까? 아이고~"

마치 영감님처럼 자신의 무릎을 치며 푸념하는 문표의 행동이 이어지자 결국 보다 못한 강호가 격려의 말을 꺼낸다.

"문표 선배, 왜 그렇게 기운이 없으십니까? 홈런 좀 충전해 드릴까요?"

문표를 위해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는 강호의 목소리에 오른 쪽에 앉아있던 박상현 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강호, 그런 것도 충전할 줄 알아? 그래도 그냥 내버려둬. 문표는 글러먹었어. 문표가 이번 시리즈 동안 병살타만 세 개나 때렸잖아. 아마 홈경기에서 주전 명단에 빠질까봐 저러는 걸 거야."

박상현 투수의 말이 정곡을 찌른 것인지 문표는 뜨끔 하는 표정을 지으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다.

"저는 억울합니다. 이번 시리즈 동안 제 앞 타자가 채중석 선배였다고요. 저만 죽을 수 있는 땅볼 타구에 주자로 나간 중석 선배도 같이 아웃되는 걸 어쩌겠어요? 3번 타자인 강호는 시리즈 내내 홈런 때려서 홈으로 먼저 들어가 버리니까 제 앞에 발 빠른 주자가 남아있질 안잖아요. 저는 강호 홈런 때문에 피해를 본 거라고요."

문표의 어이없는 항변에 강호는 입을 벌린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할 수 없는 대꾸의 말을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그 정도 발언은 문표 선배 정신 승리 아닙니까? 제가 홈런 친 게 어떻게 잘못이 됩니까?'

강호는 속으로 하고 있는 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까 망설이다가 박상현 투수가 먼저 말을 꺼내는 바람에 입을 다물게 된다.

"내가 그렇게 참신한 헛소리는 오랜만에 듣네. 문표 네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든 거야? 혹시 돌?"

상현의 타박에 문표는 다시 항변의 말을 꺼내고, 두 선배 선수의 대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가운데 끼어있던 강호가 결국 참고 있던 말을 내뱉는다.

"문표 선배님, 제가 자리 바꿔드리겠습니다. 두 분이서 말씀 나누시죠."

무표정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말하는 강호로 인해 두 사람의 대화는 멈춰진다.

잠시의 정적 후, 강호를 향해 거절의 의사를 밝히는 문표.

"싫어. 박상현 선배 옆에 가면 자꾸 꿀밤 때린단 말이야. 강호 후배가 내 방패막이 되어 줘야지, 어딜 도망가려고? 딱 가운데 앉아 있어."

문표는 그렇게 말하며 강호의 옷자락을 움켜쥔다.

한동안 철없는 두 선배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강호, 그러다 자연스럽게 전환된 주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바뀐 주제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박상현 투수였다.

"그런데 이번에 부임한 주루코치 말이야. 그 이름이 뭐였더라? 기..."

"기성태요. 기성태 코치입니다."

"그래, 강호야. 기성태 코치. 그 사람 말이야. 기성태 코치는 어디 팀에 있던 사람이야? 내가 현역으로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나하고 연배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왜 본 적이 없지?"

아무 생각 없이 운을 띄운 박상현 투수의 말에 곁에 있던 문표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것 참 이상하네요. 혹시 기성태 코치가 상현 선배보다 어린 거 아닙니까? 상현 선배 나이가 마흔이시니까 선배보다 어린 코치가 부임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자신의 나이를 들먹이는 문표의 나이 공격에 박상현 투수가 발끈할 무렵, 강호가 두 선배를 만류하기 위해 재차 입을 연다.

"듣기로는 기 코치님이 77년생이라고 들었습니다. 올해로 43살이시니까 상현 선배님과 동시대에 활동한 거 아닙니까?"

강호는 어쩌다 알게 된 기성태 코치의 나이를 말하며 상현에게 묻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상현은 '으음'하고 신음을 삼키며 기억을 더듬어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이 안 나네. 나랑 3살 차이밖에 안 나니까 분명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을 텐데... 기성태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도 아니고, 몇 번만 상대해 봤어도 기억에 남는 이름인데."

그렇게 말하며 기성태 코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쓰는 박상현 투수.

그 때 잠자코 있던 문표가 입을 연다.

"기성태 코치는 원래 자이언츠 출신입니다. 우리 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어요."

갑작스레 진지해진 문표의 말에 박상현 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래? 그럼 왜 난 기억에 없지? 나도 자이언츠에서 데뷔했는데? 혹시 대학 졸업 후에 입단한 건가? 그럼 나하고 1년 차라서 더 기억에 남아야 하는데."

문표가 꺼낸 말에 더 헷갈려하는 박상현 투수. 문표는 그런 상현을 위해 기성태 코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꺼낸다.

"상현 선배님은 입단하자마자 1군에서 활동하셨지 않습니까? 기성태 코치는 입단해서 줄곧 2군에 있다가 이글스로 드레이드 됐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 베어스로 갔다가 다이노스로 옮긴 후에 위즈에서 은퇴를 했어요. 1군에 얼굴을 비춘 적은 거의 없고, 2군에서만 활동을 해서 박상현 선배는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문표에게서 기성태 코치의 경력을 듣게 된 박상현 투수는 그제야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2군에만 있었으면 모를 수도 있지. 나는 2군 경기는 거의 뛴 적이 없거든. 부상 때문에 재활 군에 몇 년 있기는 했어도 다른 팀 2군 선수들은 잘 몰라."

문표의 말에 그렇게 대꾸하던 상현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인지 문표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문표 너는 기성태 코치에 대해서 어떻게 잘 아는 거야? 언제 밥이라도 같이 먹었어? 아니면 그 전부터 알던 사이야?"

상현의 물음에 문표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대꾸의 말을 한다.

"저는 2군에 오래 있었잖아요. 기성태 코치님도 2군에서 뛰었으니까 오다가다 얼굴 볼 일이 많았죠. 기성태 코치가 은퇴한 게 5년이 됐네요. 그 전에는 2군 경기에서 얼굴 자주 봤었습니다."

문표의 말에 상현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금세 납득한다.

자신이 잘 모르는 2군 얘기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표의 곁에 앉은 강호의 입장은 달랐다.

강호 역시 2군 밥을 꽤 오래 먹었기 때문에 지금 문표처럼 다른 팀 선수의 사연이나 경력사항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뭔가 있어. 문표 선배와 기성태 코치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아. 스쳐가는 인연이었으면 문표 선배가 기성태 코치의 경력을 저렇게 잘 알 수는 없는 거야. 나중에 시간이 될 때 물어봐야겠어.'

강호는 문표와 기성태 코치 사이에 무언가 연관성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묻지 않았다.

문표 본인이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였고, 자신도 두 선배들의 대화로 빼앗긴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개인 훈련에 좀 더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알고 있는 문표와 별로 궁금해 하지 않는 상현, 궁금하긴 하지만 자신의 훈련 스케줄이 먼저인 강호를 태운 원정 버스는 사직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이때까지만 해도 강호는 기성태 코치와의 친분을 빠르게 쌓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간은 하루가 흘러 다음 날이 되어 있었다.

강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에서 휴식을 취하려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박차고 나선다.

짧은 휴식일 동안 형인 강수의 사직동 집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한 강호는 형이 일터로 출근하기 위해 집을 비워버리자 텅 비어 버린 집이 주는 쓸쓸함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나선 것이다.

트레이닝복 한 벌을 몸에 걸친 채 밖으로 나서는 강호, 몸이 더 커진 것인지 그렇지 않아도 몸에 밀착되던 트레이닝복이 더욱 타이트하게 느껴진다.

그 덕분에 체지방 없이 탄탄한 강호의 건강한 몸매가 트레이닝복 밖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고, 그가 지나는 곳마다 사직동 주민들이 눈에 이채를 뛰면서 빠르게 사라져버린 강호의 뒷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있었다.

"어?! 자이언츠 백강호 선수 아냐?"

"어디? 어디?!"

"저기 지금 지나갔잖아?"

"진짜 백강호야? 그럼 싸인이라도 한 장 받아야 되는데! 어서 따라가 보자!"

강호를 알아본 사직동 주민들이 뒤늦게 강호를 따라잡기 위해 걸음을 뗐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강호를 뛰어서 따라잡기는 불가능했다.

최근 들어 스퍼트를 측정해보지는 않았지만, 100미터 11초 5를 뛰는 강호를 일반인이 뜀박질로 따라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강호는 동네 주변을 러닝 할 때도 가벼운 뜀박질이 아니라 100미터에 14초 이내의 속도로 빠르게 러닝을 하기 때문이다.

"헉, 헉, 헉! 뭔 육상 선수야? 왜 저렇게 빨라?"

"야, 포기하자. 너무 힘들다. 저렇게 빠르니까 벌써 40도루나 한 거지. 우리는 못 따라잡겠네. 싸인은 경기장가서 받는 게 낫겠다."

"그래. 그러자. 그런데 40도루가 아니라 41도루야. 임마. 정확하게 말해야지. 헉, 헉."

강호에게 싸인을 받기 위해 뒤따랐던 사직동 주민들은 사실 자이언츠의 골수팬들이었다.

그들은 강호가 경기장에서도 싸인을 곧 잘 해준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지친 발걸음을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돌린다.

그들 이후에도 강호를 알아보고 함께 셀카를 찍거나 싸인을 받고 싶은 마음에 빠르게 달리고 있는 강호의 뒤를 따르는 일부 주민들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도 얼마 가지 않아 포기하게 된다.

이미 강호는 야구도시라는 구도 부산에서 유명 스타가 되어 있어서 혼자 거리를 활보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정도였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러닝을 할 때만큼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있는 강호. 그의 발걸음이 어느새 러닝 코스 중 하나인 사직 야구장 주변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더욱 속도를 높여 달리고 있는 강호의 근처로 누군가가 강호 못지않은 속도로 따라붙고 있었던 것이다.

"백강호 선수? 백강호 선수 맞죠?"

강호는 빠르게 달리고 있는 자신의 곁으로 따라 붙으며 묻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이내 걸음을 멈춘다.

남자의 정체는 사직동 주민이나 팬이 아니라 강호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코치님. 안녕하십니까? 휴식 일에 구장에 어쩐 일이세요?"

상대를 알아본 강호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강호의 인사를 기분 좋게 받으며 웃음 짓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새롭게 부임한 주루코치인 기성태 코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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