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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툴 플레이어
1회 말, 히어로즈의 공격은 1번 타자 서건찬이 만든 좋은 기회가 고정욱의 병살타로 무산되며, 3번 타자 김아성까지 땅볼로 물러나고 만다.
삼자범퇴의 이면에는 강호의 호수비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었고, 양 팀 선수들은 빠르게 공수 교대에 들어간다.
2회 초가 되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타석에 모인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간단했다.
강호의 타석을 보는 것, 그리고 강호가 명성에 걸맞은 호쾌한 타격 모습을 선사해주는 것이었다.
그런 팬들의 시선 속에 2회 초 선두 타자로 나선 타자는 바로 강호였다.
강호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타석으로 걸음을 옮긴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왔다고 하더니, 평소와는 분위기가 좀 다르네. 이런 분위기에서 첫 타석부터 삼진이라도 먹게 되면 분위기가 어떻게 바뀔까?'
타석으로 향하던 강호는 문득 드는 생각에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지금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는 강호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지나친 여유에서 나온 생각일 수도 있었고, 진심으로 궁금해서일 수도, 혹은 갑작스레 장난기가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강호의 장난스러운 미소는 중계 카메라를 통해 모든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었고,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팬들은 강호의 미소를 확신에서 오는 여유라고 생각하게 된다.
4할 타율에 61홈런을 때려내고 있는 타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강호의 미소는 그렇게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중계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2회 초 선두타자로 타석에 서는 선수는 모든 팬들이 기다리시던 백강호 타자입니다. 지금 시청자 여러분은 보이십니까? 백강호 선수의 저 여유로운 미소를 말입니다. 저런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시즌 541타석 415타수 185안타, 4할 4푼 6리의 타율에 61홈런, 237타점, 160득점, 80도루, 93볼넷을 기록 중에 있습니다."
중계석의 조호준 캐스터는 타석에 선 강호의 시즌 기록을 읽어 내린다.
그의 말이 끝나자 양 쪽에 앉아있던 두 명의 해설위원이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는다.
타자 출신인 이정범 위원과 투수 출신인 김신우 위원, 두 해설위원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타이거즈의 레전드 출신인 이정범 위원이었다.
"미소 지을만 하네요. 기록만 들어보면 현실의 기록이 아닌 것 같습니다. 뭐, 게임이나 만화 속 기록 같이 들리네요. 물론 백강호 선수를 비하하는 건 아니고요. 그만큼이나 백강호 선수의 올 시즌 기록들이 엄청나다는 말씀입니다. 조만간 최다 도루 기록도 갱신이 되겠네요."
이 위원은 웃는 목소리로 의견을 밝힌다.
그의 말이 끝나자 조 캐스터가 재빨리 설명을 덧붙인다.
"최다 도루 기록은 곁에 계신 이정범 위원께서 가지고 계시죠? 1994년 84도루 기록입니다. 그 이후에는 깨지지 않는 기록인데 지금 타석에 선 백강호 타자가 그 기록을 넘보고 있습니다. 떨리시죠? 이정범 위원."
"하하, 25년이면 오래 가지고 있기도 한 거죠. 백강호 선수 정도 되는 타자가 신기록을 달성한다면 저는 박수를 치면서 축하해줄 생각이에요. 세상에 영원한 기록은 없는 거니까요."
이 위원이 조 캐스터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사이 타석에 들어선 강호는 특유의 눈빛으로 상대 투수를 응시한다.
그런 눈빛을 마주하고 있는 투수는 좌완 용병 투수인 맥도날드였다.
강호와의 상대 전적이 좋지 않은 맥도날드 투수이지만, 오늘 선발로 마운드에 선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선발 투수 순번대로 경기를 진행하다보니 자이언츠와의 첫 경기 선발로 서게 된 맥도날드.
그의 눈빛이 타석에 선 강호의 시선과 맞부딪힌다.
'백강호! 오늘만큼은 너와의 천적 관계를 청산해 주마. 후반기 들어서 구속이나 구위가 더 좋아졌으니 예전처럼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다!'
맥도날드 투수는 시선을 마주한 강호에게 강한 눈빛을 되돌려준 후 곧바로 초구 투구에 나선다.
파핫!
195cm의 큰 키와 역동적인 와인드업 동작으로 던져진 초구는 빠른 속도로 날아든다.
후반기 들어 구속이 더욱 올라간 맥도날드의 포심은 강속구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는 빠르고 묵직한 속구였다.
타석에 선 강호는 그 공에 대해 이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실투다!'
상황 판단을 마친 강호는 준비된 테이크백 동작에 이어 재빨리 배트를 휘둘렀다.
전문가들에게 완벽하다고까지 칭찬을 받았던 그의 부드러운 스윙 동작에 이어 배트가 공을 강타하고 있었다.
따악!
강렬한 타격음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호쾌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지만, 강호는 발걸음을 떼지 않는다.
배트 스피드가 빨랐던 까닭에 타구가 좌측 홈런 폴대를 벗어나는 파울 홈런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투수의 구속이 빨라졌다고 해서 1/4 템포 빠르게 휘두른 건데 타이밍이 조금 빨랐구나. 아쉽네.'
강호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금 타석에 자리 잡는다.
그가 판단했던 대로 맥도날드의 초구가 실투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구속이 빨라 공이 높은 코스로 떠오르는 업슛 형태의 공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온 스카우터 들은 전광판에 찍힌 구속과 자신들의 스피드 건을 번갈아 보며 이렇게 평가할 정도였다.
"95마일의 빠른 패스트볼이었어요. 킬로미터 단위로는 153km가 나오네요. 스카우트 리포팅대로 백강호 선수의 빠른 공 대처가 좋은 것 같습니다. 파울이 되긴 했지만, 배트 스피드가 너무 빨라서 파울이 된 거지 노리고 쳤으면 홈런이 되었을 거예요."
누군가의 주장에 곁에 앉은 다른 스카우터가 혀를 내두른다.
"노리고 친 것도 아닌데 저 정도 타구를 날려 보낼 정도면 노리고 쳤을 때는 어떻게 된다는 거야?"
"그거야 시즌 61홈런이 증명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노리고 들어간 공은 홈런으로 연결시키는 거죠. 방금 전의 파워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스카우터들은 각자의 스피드 건을 확인하며 강호의 타격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교환한다.
그 때 누군가가 의견을 더했다.
투수의 구속을 측정한 다수의 스피드 건은 95마일이 찍혀 있었지만, 강호의 타구 속도를 측정한 스피드 건은 전혀 다른 수치를 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구 속도가 106마일(170km)이에요!"
"뭐? 각도가 낮긴 했지만 타구 스피드가 그렇게 빨랐다고?"
스카우터들이 직접 접하게 된 강호의 타구 스피드와 파워에 놀라워할 무렵, 마운드에 선 맥도날드의 안색이 좋지 못해보였다.
제 3자의 입장인 스카우터들과는 다르게 강호를 직접 상대해야하는 맥도날드 입장에서는 1개의 공을 던진 것으로 강호와의 승부가 눈에 뻔히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를까?'
순간 유혹이 찾아들고 있었다.
강호는 파워뿐만 아니라 타율이 4할 중반에 이를 정도로 컨택 능력까지 인정을 받고 있는 타자다.
거기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구안까지 갖추고 있었다.
맥도날드 투수는 정면 승부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빅 리그 무대까지 밟은 내가 한국같이 작은 나라의 타자와 승부를 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상대는 배리 본즈나 새미 소사가 아니잖아?'
순간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는 맥도날드 투수.
흔히들 빅 리그라고 말하는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은 투수들에게는 자부심이 존재했다.
또한 미국의 문화적 특성상 정면 승부를 좋아하는 성격이 있어서 아무리 강타자라고 해도 승부를 회피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인식이 컸다.
그래서인지 강호와의 승부를 피했던 다른 투수들과는 다르게 맥도날드는 정면 승부를 고집하고 있었다.
'까짓 거, 붙어보자. 얻어맞아봐야 1점짜리 홈런이잖아?'
맥도날드는 판단을 끝낸 후 파이팅 넘치는 모습으로 글러브를 들어올린다.
그가 와인드업을 할 때 취하는 특유의 시작 동작이었고, 그 행동에 강호 역시 배트를 뒤로 당기는 테이크백 동작에 들어간다.
다시 시작된 승부.
강호는 이번 2구째 공에도 벼락같은 스윙을 휘두른다.
왜냐하면 맥도날드의 2구 역시 비슷한 코스의 패스트볼이었기 때문이다.
따악!
다시 한 번 호쾌한 타격음이 모두의 시선을 경기장의 외야로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곧 고척 구장이 함성 소리로 가득 차오른다.
강호의 이번 타구는 파울 라인 밖이 아닌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보였다.
'각이 낮아!'
맥도날드의 공을 직접 타격한 강호는 이번 타구가 담장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달리는 속도를 높여 거의 전속력에 육박한 속도로 1루 베이스를 지난다.
그 사이 타구는 좌중간 펜스를 직격하고 있었다.
터엉!
타구가 담장을 맞고 그라운드로 굴러 나온다.
그 타구를 잡기 위해 중견수 한정음과 좌익수 고정욱이 동시에 움직였고, 먼저 타구를 손에 쥔 것은 좌익수 고정욱이었다.
그는 망설일 것도 없이 3루를 향해 공을 던진다.
5툴 플레이어의 대명사인 강호의 빠른 발을 생각한다면 2루가 아닌 3루에 공을 던지는 것이 맞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파핫!
유니폼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고정욱이 던진 공이 3루를 향한다.
그리고 고정욱 좌익수가 예측했던 대로 강호의 빠른 발은 이미 2루 베이스를 지나 3루로 향하고 있었다.
"슬라이딩!"
3루 베이스 코치는 수신호와 함께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할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강호는 그런 베이스 코치의 주문에 곧바로 몸을 날린다.
촤하학!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해 들어가는 강호의 시야에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곧 베이스가 손끝에 닿는다.
그리고 거의 동 타이밍에 3루수 김민섭의 글러브가 등을 스쳤다.
베이스를 짚은 강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3루심을 바라본다.
강호의 시선을 느낀 3루심은 다소 과장된 제스쳐로 양팔을 펼쳐 보인다.
"세이프!"
3루심의 판정은 세이프였다.
강호는 판정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베이스를 밟는다.
그런 강호에게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함성이 쏟아진다.
"역시 백강호네!"
"잘했다, 백강호!"
자이언츠 팬들은 강호의 타구가 담장을 넘기지 못했음에도 환하게 웃어 보인다.
굳이 이번 타석이 아니더라도 강호의 지금 타격 능력이라면 언제든지 홈런을 때려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강호의 자신감은 그를 응원하는 팬들에게까지 전염되어 있었다.
한편, 강호의 3루타를 지켜 본 스카우터들은 빠르게 자신들의 메모를 추가한다.
"발이 정말 빠른데? 4번 타자가 아니라 리드오프라고 해도 믿겠어."
"자료에는 100미터 주력이 10초대라고 나와 있어. 저 정도 주력이라면 굳이 타순에 구애받지 않아도 될 것 같아."
"1번이나 2번, 혹은 3번에 둬도 좋을만한 주력이야."
스카우터들은 2루타 성 안타에 3루까지 도달하는 강호의 주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보통 파워를 갖춘 강타자들은 발이 느린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많은 홈런을 때려내는 타자들의 수비 보직이 1루수거나 지명타자 등에 국한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강호의 주력은 지금 당장 메이저리그로 가져다 놓는다고 해도 1번 타순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월등해 보인다.
게다가 포지션이 유격수였다.
이미 1회 말 상황에서 강호의 수비력을 확인한 이후였기에 강호의 유격수 수비를 의심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웬만한 리드오프들보다 빠른 4번 타자, 게다가 포지션이 유격수라...."
스카우터들의 머릿속은 강호의 몸값을 계산하기위해 분주해진다.
그 사이 5번 타자로 나선 스팅이 땅볼 타구를 때려내고 있었고, 3루 주자인 강호는 유격수 앞 짧은 바운드 볼에도 홈으로 쇄도하며 자신의 빠른 발을 또 한 번 증명해주고 있었다.
1대 0.
강호의 빠른 발이 만들어낸 점수로 양 팀의 첫 득점이 기록된다.
그리고 경기는 빠르게 속행되어 3회 말 히어로즈의 공격 상황.
히어로즈의 9번 타자인 한정음이 짧은 내야 안타로 1루를 밟으며 1사 1루의 상황이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타석에 선 타자는 히어로즈의 1번 타자 서건찬.
딱.
다소 먹힌 타격음과 함께 타자 주자 서건찬의 발이 빠르게 움직인다.
타구는 투수 곁을 스치고 2루 베이스를 향하는 느린 타구, 그러나 유격수와 2루수 사이를 관통하는 애매한 타구 방향으로 볼 때 중전 안타로 기록될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런데 그 때 이변이 발생한다.
타악.
내야를 빠져나가던 서건찬의 타구가 누군가의 손에 가로막힌다.
어느새 2루 베이스 뒤편까지 달려온 강호가 글러브를 끼지 않은 맨손으로 서건찬의 타구를 낚아챈 것이다.
유격수 위치에서 2루 베이스까지 전속력으로 달린 까닭에 강호의 맨손 캐치 자세는 상당히 불안정했고, 몸을 돌려 송구를 시도하기에는 1루 주자 한정음의 발이 2루 베이스의 근처에 닿아 있었다.
'몸을 돌리면 늦어!'
강호는 타구를 잡은 찰나의 순간,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뒤쪽 방향으로 공을 던진다.
공을 잡은 자세 그대로 2루 베이스로 공을 토스한 것이다.
2루수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던진 강호의 공은 다행이도 2루수 최훈에 글러브에 빨려든다.
"아웃!"
2루심은 즉시 아웃을 선언한다.
그 사이 2루수 최훈의 공이 1루로 향했고, 이제 모두의 시선은 1루심에게로 향한다.
"세이프!"
1루심의 선언은 아쉽게도 세이프가 되고 만다.
강호의 수비가 좋았지만, 타구가 워낙 깊었던 까닭에 타자 주자인 서건찬은 1루에서 세이프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호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관중석을 가득 채운다.
눈으로 보지 않고 2루로 공을 토스한 강호의 수비를 직접 마주한 2루수 최훈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는 모습이었다.
"강호! 그런 수비는 어디서 배운 거야? 장난 아닌데?!"
최훈은 호수비를 보여준 강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칭찬해온다.
강호는 그런 최훈에게 이렇게 답한다.
"2군에서 배웠습니다."
"2군? 나도 2군 갔다왔어. 그런 수비는 안 알려주던데?"
최훈은 강호의 말에 웃음으로 화답하며 강호와 글러브를 마주친다.
어느새 두 선수는 완벽한 키스톤 콤비의 궁합을 보여주고 있었고 강호와 최훈, 두 선수의 호수비 속에 자이언츠의 무실점 행진은 이어진다.
그리고 이닝은 빠르게 흘러 이날 경기의 승부처가 될 7회로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