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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간 자리
기 코치는 휴식일인 월요일에도 구장에 출근해 있었다.
일주일 중 유일한 휴식 일에도 선수들의 훈련 일정과 컨디션 관리, 확장 엔트리 준비 등의 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손성조 감독을 돕기 위함이었다.
손성조 감독과 기성태 코치, 두 사람은 태풍이 북상하고 있는 휴식 일에도 여전히 팀을 위하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감독님, 2군에서 보낸 자료 가져왔습니..."
기 코치는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감독실로 들어서며 보고를 시작하려다 통화를 하고 있는 손 감독의 모습에 급히 입을 다문다.
그런 기 코치의 시선 속에 손 감독은 꽤나 긴 통화를 나누었던 상대방과의 통화를 종료하는 모습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손 감독은 그렇게 말을 마치며 전화를 끊는 모습이었다.
그런 손 감독의 태도에서 남다른 점을 느낀 기 코치가 물어본다.
"중요한 전화인가 봅니다. 혹시 사모님께 온 전화는 아니겠지요?"
기 코치는 나름의 농담을 섞어 묻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손 감독이 피식 웃음 짓는다.
"집 사람은 모임 나간다고 정신없을 거야. 전화는 프런트에서 온 거야."
"프런트 말입니까? 프런트에서 감독님께 직통을 넣었다고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손 감독은 지 사장의 전화를 '프런트'라고 지칭하고 있었고, 그의 말에 기 코치는 설마 구단 사장이 직접 전화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의문을 내보인다.
그러면서 손에 들고 온 자료를 손 감독에게 건넨다.
손 감독은 기 코치가 건넨 자료를 받으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천 기간 동안 필요한 게 있는지 묻는 전화였어. 기 코치 자네 필요한 거라도 있나?"
"주루 코치인 제가 필요한 게 어딨겠습니까? 선수들이라면 모를까요."
"선수들이라고 뭐 필요한게 있겠나?"
"그래서 프런트에는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태풍이 올라고 있으니 선수들에게 우산이라도 지원해 달라고 했지."
"...네?"
"자네가 들은 그대로네."
손 감독은 그렇게 대화를 끝내며 자료로 시선을 돌린다.
덕분에 기 코치는 방금 전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진짜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선수들한테 우산을 지원해 달라고 말씀 하셨다고? 대체 왜? 우산 쓰고 야구할 것도 아니잖아.'
기 코치는 한동안 손 감독의 조크를 이해하지 못한 채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40대 초반의 기 코치가 이해하기에는 손 감독의 묵직한 농담이 다소 어렵게만 느껴진다.
결국 기 코치는 손 감독에게 직접 묻고 있었다.
"우산 얘기는 농담이시죠?"
"이제 알았나?"
"하.하.하. 재밌습니다."
기 코치는 기계적인 웃음 소리로 손 감독의 말에 간접적으로 반박했고, 손 감독은 그런 기 코치의 반응에 피식 웃음 지으며 사실을 알려준다.
"구단 사장 전화야. 강호 타격 컨디션 관리에 대해서 묻는 전화였어. 우습지 않나?"
"네, 차라리 그게 더 웃기네요. 선수가 저렇게 잘하고 있는데 구단에서 해줄게 뭐가 있다고 구단 사장이 전화까지 한답니까?"
"그러게 말이야. 팬들 반응에 일희일비해서야 쓰겠는가? 강호 녀석이 본인 컨디션 관리도 못하는 선수였으면 저런 기록을 애초부터 낼 수도 없었을 거라는 점을 알아야지."
손 감독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팬들은 태풍 나니의 북상으로 인해 강호가 피해를 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지만, 그런 우려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여타의 선수들이었다면 우천 취소로 인한 휴식으로 타격감이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강호는 예외였다.
만약 강호가 며칠의 휴식으로 컨디션을 까먹을 선수였다면 지금의 기록들이 불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강호 녀석은 지금도 훈련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나있을 게야. 그런 녀석의 컨디션을 누가 대신 관리해준다는 말이야?'
손 감독은 휴식 일에도 경기장을 찾아 개인 훈련을 하던 강호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웃음 짓는다.
기 코치와 대화를 나누는 지금도 강호가 경기장을 찾아 남몰래 훈련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강호는 그런 녀석이니까. 누군가가 녀석을 대신 관리해줄 수는 없겠지.'
손 감독은 강호에 대한 생각을 그쯤에서 접고, 기 코치가 건넨 자료에 집중한다.
당장 이번 주 일요일부터 확장 엔트리가 시작된다.
확장 엔트리로 다섯 명의 선수를 1군에 추가로 등록할 수 있게 되는데 기존 27명에서 32명으로 등록할 수 있는 1군 선수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후반부 들어 체력이 떨어진 선수들에 대한 체력 안배가 가능해지고, 2군에 머물고 있던 1군급 선수들로 라인업을 재편할 수 있게 된다.
"기 코치, 자네가 보기에는 2군에서 올릴만한 녀석들이 있어 보이던가?"
손 감독은 여전히 자료에 시선을 둔 채로 기 코치에게 질문을 던진다.
딱히 답을 구하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항상 조언자들의 말을 참고하는 손 감독의 오랜 버릇이기도 했다.
며칠 전 김 수석이 지명타자 채중석의 기용을 건의했을 때 그 말을 참고해서 타이거즈 전에 대타로 기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결정에는 손 감독 본인이 채중석의 컨디션과 타격감을 여러 번 확인했던 과정이 있었다.
손 감독의 그런 성향에 대해 알고 있는 기 코치는 심중에 담고 있던 몇몇 선수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낸다.
"내야 자원인 추정혁과 1루수 유동근이 쓸 만합니다. 동근이는 종종 1군에 등록된 경험도 있고, 나이도 적은 편은 아니어서 루키들처럼 헤매지는 않을 겁니다. 우현태라는 선수도 괜찮아 보이는데 아직 수비가 부족합니다. 지명타자로 쓰면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1군에 더 이상 지명타자는 필요 없겠지요?"
기 코치는 세 명의 선수를 거론하며 웃음 짓는다.
3루수 자원인 추정혁을 제외한 나머지 두 선수는 모두 1루수 자원이었다.
그 중 우현태는 1루 수비마저도 불안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1군에 올린다면 지명타자로 기용하는 게 옳아 보였다.
'지금 자이언츠 1군에 지명타자 경쟁자가 몇 명인데 우현태를 올리겠어? 내가 생각해봐도 웃긴 일인데 감독님은 어련하실까?'
기 코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 감독의 표정을 살핀다.
그런데 의외로 손 감독은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기 코치가 말한 세 선수의 이름을 자신의 노트에 기록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몇 마디 말을 덧붙인다.
"정혁이 녀석의 수비는 나쁘지 않아. 배트 스피드가 부족해서 컨택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번 시즌동안 근력 단력을 부지런히 한 모양이야. 2할 중후반에 머물던 타율도 3할이 넘었다고 하니 확장엔트리에 넣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동근이나 현태도 시험삼아 올릴 수 있는 일이고."
손 감독은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기 코치는 그런 손 감독의 반응이 의외라는 생각을 가진다.
야수들 쪽에서는 이미 1군에도 차고 넘칠 정도의 경쟁자들이 많아서 확장 엔트리를 채울 선수들은 투수 쪽에서 찾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 코치가 굳이 투수들을 거론하지 않은 이유는 본인의 담당이 주루 코치이기 때문이었다.
주루 코치가 투수들을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어서 주루 능력을 갖춘 타자들 쪽으로 건의를 해본 것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심중에 담아 두고 있던 한 투수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독님 스타일대로라면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을 하시겠지. 양용민 감독과 지속적으로 의견교환을 하실 테니까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기 코치는 잠시 고민에 잠긴다.
양용민 2군 감독과 지속적으로 소통을 하고 있는 손 감독이라면 자신이 거론하고 있는 모든 선수들의 스탯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투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2군과 3군을 포함한 모든 선수들을 꿰뚫고 있는 손 감독이라면 지금 기 코치가 떠올리는 선수 역시 눈여겨보는 중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손 감독의 의중이 궁금해진 기 코치가 말을 꺼내본다.
"투수 쪽에서도 신경 쓰이는 선수가 있습니다."
기 코치는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꺼낸다.
손 감독은 그런 기 코치의 태도에 웃음 지으며 반문한다.
"신경 쓰이는 투수가 있다고? 그래, 주루 코치인 기 코치가 신경 쓰이는 투수는 누구인지 한 번 말해봐."
손 감독의 입장에서는 재미있게 느껴진다.
주루 코치가 야수가 아닌 투수를 눈여겨보고 있다니, 그것도 1군 선수도 아닌 2군 투수를 말이다.
왠지 이어질 기 코치의 말이 기대되는 손 감독이었다.
기 코치는 그런 손 감독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박상현 투수입니다."
상현의 이름을 꺼내는 기 코치의 말.
손 감독은 오랜만에 접하게 된 상현의 이름에 표정을 바꾼다.
박상현 투수.
강호의 원정 버스 단짝이자 팀의 최고참 투수였던 좌완 투수.
올해로 마흔 살이 되는 박상현 투수는 팀의 막내인 권대우 투수와 같은 방을 쓰기도 했던 친숙한 인물이었다.
지금은 많이 안정되었다지만, 올 시즌 전반기 내내 불안했던 자이언츠 불펜에서 4승 2패 12홀드 2세이브에 방어율 3.47을 기록하며 전반기동안 자이언츠 허리 라인을 지키기도 했던 선수다.
그랬던 상현이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2군행이 결정되며 수술일정을 잡기도 했었다.
'상현이 본인이 수술을 거부했었지. 지금은 약물 치료와 재활을 병행한다고 들었는데, 그런 상현이를 왜?'
손 감독은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기 코치를 바라본다.
기 코치는 손 감독과 시선을 마주하며 부연설명을 이어나간다.
"재활 군에 잠시 들렀다가 본 내용인데, 박상현 투수의 재활이 생각보다 진행 과정이 좋습니다. 당장 9월부터 마운드에 올릴 수는 없어도 뒤늦게 합류시킬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재활군의 조종훈 코치도 그렇게 보고 있고요."
기 코치의 말에 손 감독은 묵직한 침음을 흘리며 자세를 달리한다.
그는 앉아 있던 감독용 의자에 몸을 기대며 기 코치가 말한 이름을 속으로 되뇐다.
'박상현이라. 녀석이 늦게라도 1군으로 돌아온다면 팀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아. 아니, 아주 좋은 카드가 생기는 거야. 올 시즌 자이언츠의 야구는 정규 시즌에서 끝나는 게 아닐 테니까.'
손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노트에 하나의 이름을 더한다.
박상현이라는 이름을 노트에 적어 넣으며 태풍으로 인해 생긴 시리즈 휴식동안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체크해나가는 손 감독.
그의 시야는 이미 정규 시즌을 넘어 가을에 진행될 포스트 시즌에 닿아 있었다.
한편, 손 감독과 기 코치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무렵 강호 역시 바쁜 휴식 일을 보내고 있었다.
손 감독의 예상대로 강호는 휴식 일에도 집에서 쉬고만 있을 선수는 아니었다.
창밖에 비가 내리는 이유로 야외 훈련이나 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실내에서 대체할 수 있는 개인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투수 유형: 좌완 오버 스로우
구종: 슬라이더
구속: 133km
VR안경을 통해 표시되는 정보를 눈으로 확인한 강호는 곧바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의 궤적을 쫓는다.
강호는 벌써 몇 시간동안 선구안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도 오직 슬라이더 한 구종만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이제 나를 상대하는 투수들이 슬라이더를 선택할 확률이 무척 높아졌어. 대비해놓지 않으면 당장 다음 경기부터 홈런 기록이 끊어져 버릴 거야!'
최근 며칠 동안 자신의 리포팅 자료를 읽어보던 강호는 그런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백강호'라는 이름으로 분석된 리포팅 자료에는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패스트볼 인플레이 타구 비율과 변화구 대처 능력에 대한 분석이 나와 있었다.
그 중 강호의 이목을 끈 부분은 체인지업이나 커브, 포크볼 등 느린 변화구에 대한 높은 대처 능력이 아니었다.
"슬라이더에 대한 인플레이 타구 비율이 이렇게나 낮았어?"
강호가 놀란 부분은 바로 슬라이더 대처 능력이었다.
리그 평균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호 본인의 타구 성향과 비교한다면 슬라이더에 대한 대처 능력이 월등히 떨어져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자신을 상대하는 투수들이 체인지업이나 커브보다는 슬라이더를 유인구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을 떠올린다.
"나도 다른 팀에게 분석되고 있구나. 슬라이더에 대한 대처 능력을 키워두지 않으면 애를 먹을 수도 있겠어."
그렇게 결론을 내린 강호는 VR안경을 통해 슬라이더라는 구종을 파헤쳐 보기로 한다.
벌써 수백 개의 슬라이더를 눈으로 지켜보았지만, 필요하다면 수천 개의 슬라이더를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슬라이더야! 이제부터는 슬라이더 대처 능력이 관건이야."
강호는 그렇게 되뇌며 월요일 하루 온종일 슬라이더에 대한 분석에 돌입한다.
사실 강호는 별다른 위기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단점으로 지목되고 있는 슬라이더 분석에 재미를 느끼고 있을 뿐.
여전히 강호에게는 야구가 직업이자 취미였고, 휴일을 즐겁게 해주는 최고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휴식 일 동안 강호의 신체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의 두뇌는 여전히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