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54화 (25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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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휴식

강호가 생각한 부분은 선수단의 고참 선수들을 중심으로 알음알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손 감독이 우천 취소된 경기에서 라인업 구상을 통해 보여준 자신감.

그것은 선수들에게 묘한 감탄과 호응, 그리고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3할을 치더라도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위기감.

그 생각이 우천으로 경기가 취소된 날에도 선수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강호, 너 예전에 선구안 훈련 말이야. 그거 나도...!"

강호의 숙소 방에 들어오며 어렵사리 말을 꺼내던 지명타자 채중석.

그는 강호의 방에 들어서다말고 이미 많은 선수들이 강호의 방에 들어차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벌린다.

그런 중석에게 먼저 도착해 있던 유성철이 손짓한다.

"어?! 중석 선배님도 오셨습니까?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여기서 반상회 해?"

성철의 말에 중석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는다.

중석은 강호를 위주로 진행되고 있는 모의 훈련에 얼떨떨한 표정이 된다.

여러 개의 VR안경을 이용한 선구안 훈련, 밴딩과 간단한 도구를 이용한 근력 단련 훈련, 그 외에도 갖가지 훈련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숙소 방은 마치 실내 훈련장을 방불케 했다.

중석은 그런 광경을 살펴보다가 근처에 앉아 있던 대우가 태블릿을 검색하는 것을 보고는 다가가 묻는다.

"대우, 너는 뭐해? 그것도 훈련 같은 거야?"

"이거 말입니까? 자이언츠 팬들 반응보고 있습니다. 오늘 경기 취소된 거 때문에 팬들 반응이 울상입니다. 선배님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요즘 팬들 댓글 보는 재미가 나쁘지 않아요."

대우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태블릿을 건넨다.

중석은 대우의 말에 관심을 보이며 태블릿을 받아들고는 기사를 읽어 내려간다.

중석의 시야에 들어온 팬들의 댓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안 돼! 경기가 취소되다니! 백강호 선수 홈런 기록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일단은 스탑 되는 거고, 다음 경기부터 이어지는 겁니다. 연속 여덟 경기 홈런까지 쳤으니까 다음 경기를 기다려야죠....아 못 기다리겠어! 왜 광주 구장은 고척처럼 돔이 아닌 거야!"

"자이언츠 경기 못 보니까 금단 현상이 있네요. 손, 발이 자꾸 떨려! 이거 저만 그런 가요?"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 주말 내내 비가 온다는 소식이에요."

"뭐?! 안 돼!! 그럼 주말 경기가 아예 없는 거잖아!"

광주 경기가 취소된 것에 대한 자이언츠 팬들의 비명 소리가 댓글 속에 담긴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중석은 그런 댓글들을 읽으며 피식 웃음 짓다가 의외의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중석이 발견한 댓글들은 다음과 같았다.

"오늘 취소된 라인업 본 사람? 2번 박철, 5번 스팅, 7번 황인태, 8번 오진택, 9번 최문표 빼고 백업 선수를 넣었다던데요?"

"뭐? 주전 선수를 다섯 명이나 빼고 그 자리에 누굴 넣었답니까?"

"2번에 전준오, 3번에 이인호, 5번 황제인, 7번 최훈, 8번 임정, 9번 한택근이라네요."

"응? 그 정도면 주전 라인업 아냐? 전준오 2할 9푼에 이인호 3할 1푼, 황제인은 원래 4번 타자였고, 최훈 2할 8푼에 임정 3할, 한택근도 규정 타석은 못 채웠지만, 시즌 타율 3할 아니었나?"

"정확하게는 최훈 2할 9푼에 한택근 3할 1푼입니다. 새로 라인업에 들어간 선수들 타율 평균 내면 3할이 넘어요."

"헐, 무슨 백업 선수들이 죄다 3할이야? 자이언츠 백업 선수들이 언제 이렇게 막강해진 거지?"

"그러니까 감기로 주전 다섯 명이 빠져도 팀이 돌아간다는 거죠. 아! 백강호 선수는 제외고요. 백강호 선수는 대체 불가니까."

팬들은 오늘 손 감독이 작성했던 라인업에 대해 설왕설래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팬들의 댓글을 모두 읽은 중석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엉? 오늘 라인업이 이렇게 바뀌었어? 나는 몰랐는데, 나 같은 고참 선수도 모르는 사실을 팬들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중석은 팬들이 공개되지도 않은 오늘 라인업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그것은 태블릿의 주인인 대우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오히려 중석을 향해 물어본다.

"글쎄 말입니다. 기사로 뿌린 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대우의 물음에 중석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과정은 알 수 없지만, 팬들에게 오늘의 라인업이 공개된 후였다.

그로인한 팬들의 반응은 주전 다섯이 빠져도 큰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라인업에서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한 중석에게는 위기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놔, 안 되겠네. 나도 훈련이라도 해야지. 야, 나한테 아무거나 좀 줘 봐. 나도 훈련해야겠어."

"중석 선배님이 웬일이십니까? 여기 VR안경으로 선구안 훈련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오케이,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였어. 그거 이리 줘 봐. 나도 선구안 훈련이라는 거 좀 해보게."

중석은 상훈이 건넨 VR안경을 받아들고 곧바로 훈련에 돌입한다.

오늘 라인업 발표를 통해 백업 멤버에서도 밀려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중석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대타 자리도 간당간당한데 백업에서까지 밀려나면 1군에 내 자리는 없어져버려!'

중석을 훈련에 돌입하게 만든 생각이었다.

1군 백업에서 밀려나면 결과는 간단해진다.

2군행.

9월 달에 발표되는 확장 엔트리에도 불구하고, 2군행이 결정돼 버린다면 올 시즌은 그것으로 끝난다고 봐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가을야구에도 초대받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럴 순 없지! 지금 당장 타격 능력을 끌어올릴 순 없어도 선구안을 개선하는 건 크게 무리가 없을 테니까, 내가 가진 장점에 집중하도록 하자!'

중석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우천 취소로 인한 휴식을 활용하기로 결정한다.

단지 중석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선수들이 숙소에서도 진행할 수 있는 훈련에 전념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무리에 빠져있는 선수들도 있었다.

장소는 문표의 숙소 방으로 옮겨진다.

"누가 휴지 좀 줘봐. 콧구멍에서 자꾸 물이 흘러."

"아...더러운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휴지는 문표 선배 옆에 있지 않습니까?"

"이거 휴지가 너무 거칠어서 코가 다 헐어버렸단 말이야. 부드러운 물티슈로 내놔."

문표는 근처에 누워 있는 오진택의 물티슈를 강탈하며 '팽'하고 코를 푼다.

그런 문표의 근처에는 오진택을 포함하여 감기에 걸린 모든 선수들이 누워있었다.

마치 부상 병동이 연상되는 문표의 방.

심한 감기에 걸려버린 문표와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처럼 자발적인 훈련 대열에 동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안 돼. 내가 이렇게 누워있는 사이에 중석 선배가 내 자리를 뺐을 것 같단 말이야.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훈련을 해야....에잇취!"

문표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몸을 일으키다가 재채기와 동시에 자동적으로 눕고 만다.

그러다 어지러움을 느꼈는지 인상을 써보이다가 이내 코를 골며 잠이 드는 모습이었다.

진택과 후배 선수들은 그런 문표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젓다가 이내 자신들 역시 잠이 들고 말았다.

손 감독의 애초 의도대로 컨디션이 떨어진 선수들에게는 휴식을, 경쟁이 필요한 선수들에게는 자발적인 훈련이 진행되는 금요일이었다.

경기가 취소된 금요일 하루는 그렇게 흘러간다.

그런데 다음 날인 토요일이 되었을 때도 비가 내렸고, 또 다시 숙소 내에서는 새롭게 변경된 라인업에 관한 이야기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1루수 자리에 상훈이가 들어가고, 지타 자리에 내가 들어갔다고? 제인이는 3루수로 이동하고?"

"네, 제가 수석 코치님이 들고 가시는 라인업을 살짝 봤는데 그렇게 써있더라고요."

"그래? 내가 6번 자리 지타였다는 건 확실한 거지?"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정확합니다."

중석은 최훈에게 듣게 된 새로운 라인업 구성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어제 라인업에서 백업에 조차 들지 못했다는 사실에 불안했었는데 오늘 변경된 라인업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게 되자 안심이 된다.

그러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중석이었다.

'어차피 오늘 경기도 우천으로 취소될 거야. 내일은 비가 그친다고 하니까 오늘 라인업이 내일까지 유지되려면 감독님께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겠지. 보니까 코치님들이 오다가다 1층 로비를 자주 지나치시는 것 같던데...'

중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곧장 행동을 개시한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호텔 실내에서 러닝을 하며 오다가다 지나치는 코치들에게 자신을 어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계단을 오르내리기에는 힘이 들어 층계를 이동할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며 실내 러닝을 이어가던 중석.

약 십 분 뒤 목적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어?! 중석이 실내에서 뭐하는 거야? 뭐 급한 일 있어?"

"수석 코치님! 컨디션이 좋아서 러닝하고 있습니다."

"러닝은 밖에서 해야지. 호텔 안에서 무슨 러닝이야?"

"밖에는 비오잖습니까? 괜히 문표처럼 감기 걸려서 후배들 감기 옮기면 안되니까 실내에서 해야죠."

"큭. 누가 들으면 문표가 감기 퍼뜨린 줄 알겠네. 실내 러닝이라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몸 푸는 선에서 해."

"네, 그렇게 해야죠. 그래도 컨디션이 좋아서 두 시간 정도는 충분 합니다!"

"그래? 컨디션이 많이 좋은 모양이네. 그래도 무리하지는 말고, 내일 라인업에서도 선발 출장할 수도 있는 거니까."

"정말요? 그럼 자제해야죠. 아~~그만해야겠다."

사실 중석은 10분 만에 지쳐버렸지만, 김 수석이 지금 하는 말을 듣기위해 과장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사실 김 수석도 그런 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37살의 고참 선수가 자발적으로 훈련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을 만류하기 보다는 권장하는 것이 수석 코치의 역할일 것이다.

채중석 선수 정도 되는 베테랑 선수가 자발적으로 훈련하는 모습은 후배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기류로 작용되기 때문이다.

김 수석은 그런 점을 고려해서라도 내일 선발 라인업에서는 중석의 이름이 올라갈 수 있도록 손 감독에게 건의를 해볼 생각이 든다.

'어쩌면 감독님도 이런 분위기를 원하시고 라인업을 흘리시는 걸 수도 있지. 굳이 우천으로 취소될 경기에서 라인업 구상을 바꿀 필요는 없었는데, 사소한 액션 하나로도 선수단의 분위기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니까.'

그것이 김 수석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 증거물이 육중한 발걸음으로 눈앞에서 뛰어다니고 있으니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사실 그런 점을 느끼고 김 수석 본인도 손 감독의 이번 계획에 동조한 점도 있었다.

'그나저나 비는 언제 그치는 거야? 내일 경기까지 취소돼 버리면 광주까지 온 보람이 없는데 말이야. 그리고 경기를 너무 오래 쉬어버리면 선수들의 페이스도 조금은 떨어질 우려가 있어. 무엇보다 강호의 홈런 기록도 걸려있고.'

김 수석은 생각을 이어 나가다가 강호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이제 선수단을 생각할 때 강호를 떼놓고는 계획을 짤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한 팀 분위기를 느낀다.

심지어 김 수석 본인도 그렇지 않은가.

또한 팀의 사령탑인 손 감독은 라인업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강호의 이름부터 써놓은 후 나머지를 고려할 정도였다.

'그럴 만도 하지. 강호가 목요일에 때린 홈런이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으니까.'

김 수석은 목요일 비오는 날의 잠실에서 6회 초 강호가 때려낸 장외 홈런을 떠올리고 있었다.

서서히 굵어지기 시작한 빗방울 속에서 나온 완벽한 스윙.

하체를 시작으로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회전한 허리 근육에 이어 배트를 휘두르는 강력한 상체의 힘, 그것으로 완성된 임팩트 순간.

누가봐도 홈런을 예상할 수 있었던 그날, 강호의 스윙에 김 수석은 전율했었다.

여태껏 현역 생활과 지도자 생활을 통틀어 직간접 적으로 경험한 가장 완벽한 홈런이었기 때문이다.

'강호 녀석은 내 현역 시절 때와는 차원이 다른 선수로 성장해 버렸어. 이제 우리 팀을 설명할 때 강호를 빼놓고는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니까.'

김 수석은 자신의 현역 시절과 강호의 기록을 비교해보며 웃음 짓는다.

1984년부터 1996년까지 자이언츠에서 활약하며 통산 13시즌 동안 2할 7푼 8리의 타율과 106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팀의 4번과 5번 자리를 오고갔던 김 수석이었다.

90년부터 92년까지 3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하며 당시 소총부대라 불리던 자이언츠 타선을 이끌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기록을 더해도 강호의 올 시즌 한 해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클래스가 다른 선수니까. 내가 괜한 염려를 하는 걸 수도 있어. 몇 경기 쉰다고 해서 강호의 타격감이 떨어진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

김 수석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피식 웃음 짓는다.

이틀 연속 경기를 쉬며 강호의 타격감이 떨어질까 우려하던 자신의 걱정이 괜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며 걸음을 옮긴다.

그런 김 수석의 시야에는 여전히 양팔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러닝 하는 시늉을 하고 있는 채중석이 있었다.

"헛, 둘, 헛, 둘!"

김 수석의 시야에서 러닝을 하던 중석은 등을 돌린 사이 사라져 버린 김 수석의 자취를 확인하고는 거친 숨을 크게 내쉰다.

"푸헤헥, 몇 분 뛰었다고 힘드네. 아이고, 이제 좀 쉬어야지."

날숨을 길게 토해낸 중석의 발걸음은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향해 이동한다.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중석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춘다.

엘리베이터에는 낯익은 인물이 우의를 걸쳐 입고, 내려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강호 어디가? 편의점 가는 거야?"

"아뇨, 방에만 있으려니까 답답해서요. 잠시 러닝 좀 하고 오겠습니다."

"뭐? 비가 이렇게 오는데 러닝이라니? 웬만하면 호텔이 있어."

"호텔 주변만 돌다가 올 겁니다. 그리고 감기 걸릴까봐 우의 안에 외투도 입었어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강호는 그렇게 대답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로비를 지난다.

잠시 그런 강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중석.

그는 비오는 날에도 열정적인 강호의 훈련 일정을 눈으로 확인한 후, 자신이 과연 쉴 때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에라이, 훈련이나 좀 더 하자!"

중석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물러나 호텔 비상구의 계단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한 후배 선수의 증언에 따르면 중석은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호텔 내부를 뛰어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치열한 이틀이 지나고, 일요일 아침이 밝아온다.

선수들은 예보와는 다르게 화창한 하늘을 마주하며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우천 취소 없이 경기가 진행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선수들의 예상 속에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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