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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휴식
23일 아침, 자이언츠 선수단은 원정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사직동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잠실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 몇 시간 지나지 않았지만, 다음 원정을 위해 이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문표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불만의 말을 토로한다.
"세 시간도 못 잤네. 이럴 거면 그냥 원정 버스에서 계속 재우던가, 아니면 바로 광주로 이동할 것이지. 뭐 하러 부산에는 들른 거야?"
문표의 불평은 나름 타당해 보였다.
어제 경기가 우천콜드 승으로 종료되면서 평소보다 일찍 끝나기는 했지만, 비가 오는 고속도로를 달리느라 원정 버스가 평소에 비해 속도를 내지 못했었다.
빗길에 미끄러지는 교통사고를 우려해서 저속으로 이동하다보니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부산에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간은 오전 9시.
비 내리는 잠실에서 경기를 펼쳐야 했던 선수들은 짧은 수면 시간에 피로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피로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엣취!"
"어허이, 문펴 썩 저리 비켜. 어디서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는 거야? 매너 마스크 몰라? 감기 환자들은 마스크 착용해야지."
버스에 들어서다말고 재채기를 하는 문표에게 지명타자 채중석이 타박의 말과 함께 무언가를 건넨다.
"이게 뭡니까?"
"뭐긴 뭐야? 마스크지. 거 왜 있잖아? 애기들 감기 걸렸을 때 쓰는 마스크 말이야."
중석은 설명과 함께 뒷자리에 앉은 선수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돌린 문표는 몇몇 선수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제부터 감기증상을 보였던 2루수 황인태나 3루수 오진택, 우익수 박철, 심지어 외국인 타자인 스팅마저 마스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문표는 별 수 없이 중석이 내민 마스크를 받아들고 자신의 얼굴에 착용하기에 이른다.
"이것 참, 팬들이 이렇게 많이 찾아줬는데 아프다고 광고하는 꼴이라니."
문표는 마스크를 얼굴에 착용하며 한숨 섞인 말을 토해낸다.
그의 말대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씨에도 많은 팬들이 원정 버스를 찾아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었다.
버스에 오른 지금도 팬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끼야아악! 저기 봐! 백강호 선수 온다!"
"백강호 선수! 여기 한 번 봐주세요!"
"백강호 선수! 이거 감기약입니다. 감기 걸리면 안되니까 예방 차원에서 미리 드세요~"
"백강호 선수 사랑해요! 나랑 결혼해줘요~"
"강호 형 사랑해요~ 나랑도 결혼해줘요~"
강호가 출근하고 있는 것인지 수많은 팬들의 비명과 함성소리에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선수들이 웃음 짓게 된다.
강호는 원정 버스 근처에 배치되어 있던 경호원들의 도움을 받아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그런 강호의 양 손에는 팬들이 현장에서 건넨 각종 선물들이 한 아름 안겨있는 모습이다.
"역시 우리 백 스타~ 뭘 그렇게 수금을 많이 해왔어? 먹을 건 없어?"
앞자리에 앉은 중석이 웃음 띤 얼굴로 버스에 오른 강호에게 물어본다.
그러자 양손에 든 선물들을 흘낏 내려 본 강호가 대답을 위해 입을 열었다.
"먹을 것도 있을 것 같은데, 찾아볼까요?"
"아냐, 아냐. 됐어. 팬들이 아직 보고 있는데 나한테 선물을 넘겨준다고 뒤지다가는 내가 팬들한테 뒈지는 수가 있어. 나중에 먹을 거 있으면 나한테도 몇 개만 넘겨줘~~"
중석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애교 넘치는 말투로 강호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다.
강호는 그런 중석의 말에 웃음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뒤쪽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로 이동하다보니 곳곳에 마스크를 착용한 선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 바로 옆에는 역시나 마스크를 착용한 문표가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뭡니까? 그 눈빛은요?"
"아니, 그냥. 부러워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저 밖에 있는 팬들이 죄다 강호 팬들인 거야?"
"모르겠네요. 한, 두 명은 다른 선수 팬들도 있겠죠. 그래도 문표 선배 팬은 없는 것 같던데요."
"칫, 세상은 불공평해. 야구 잘하는 사람한테 팬까지 많네."
"야구를 잘하니까 팬이 많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너 잘나셨어요. 에잇취!"
두 사람의 대화는 문표의 재채기로 인해 이어지지 못한다.
문표는 마스크를 반쯤 내려 티슈로 얼굴을 닦다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호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고개를 돌려본다.
그러자 강호가 팬들에게 받아온 선물 중 하나를 꺼내 문표에게 내밀었다.
"이거 드셔보십시오. 감기약이랍니다."
"아아, 아침에 감기약 먹고 나왔어."
"이 약, 비싸 보이는 건데요."
"이리 줘 봐."
비싸 보인다는 말에 문표는 강호가 건넨 한약을 받아들고는 곧장 복용하는 모습이다.
한약은 신기하게도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었고, 그것을 들이킨 문표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엄청 쓰네~ 한약은 쓰면 비싼 거야. 약빨도 잘 받고. 좋아, 좋아. 조금 더 없어? 좀 더 줘봐."
탐욕을 부리는 문표에게 강호는 발치에 놓인 한약 꾸러미 모두를 건넨다.
그러자 문표는 한약 몇 개를 꺼내어 앞자리에 앉은 몇몇 선수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아닌가.
혼자서 다 복용할 것이라 여겼는데 의외의 모습에 문표의 행동을 지켜보게 된다.
"진택아, 철아, 인태야~ 여기 한약 먹어라. 감기에 효과가 좋단다. 헤이, 스팅~ 디시 이즈 포호 유~ 레츠 드링크!"
"땡큐, 문펴~ 왓 츠 댓?"
문표는 차례로 한약 팩을 넘기다가 외국인 선수인 스팅에게도 한약 팩을 넘긴다.
스팅은 문표의 호의에 고마워하며 한약을 한 모금 마셨다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이렇게 반문한다.
어느새 한국 생활이 익숙해진 것인지 스팅의 말에는 꽤나 정확한 발음의 한국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왓 더 퍽!? 이거 머야? 똥이야?"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항변하는 스팅의 말에 원정 버스 안이 웃음바다로 변한다.
누구에게 한국말을 배우는 것인지 스팅은 요즘 들어 부쩍 한국어 욕 구사가 능수능란한 모습이다.
강호는 그런 스팅의 모습에 유쾌하게 웃으면서도 한 가지 걱정에 표정을 굳히게 된다.
'주전 야수들이 감기로 컨디션이 떨어진 상황에서 선발 라인업 구상이 쉽지 않을 텐데. 감독님은 이점을 고려하고 계시는 걸까?'
강호가 걱정하는 부분은 이번 시리즈 경기에서의 라인업 구성이었다.
문표를 포함한 주전 선수 몇 명이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을 코칭스태프에서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 선수들의 상황을 알고 있다면 이번 시리즈 선발 라인업 구상에 골머리를 썩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독님도 머리가 아프시겠는데?'
강호는 순수하게 손 감독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더불어서 한 가지 기대감도 생겨난다.
선수들이 감기로 고역을 겪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손 감독과 같은 베테랑 지도자가 어떠한 결정을 내릴 지가 기대되는 것이다.
그런 강호의 기대는 광주의 원정 숙소에 도착한 후 곧바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네?! 저를 라인업에서 뺀다 말입니까? 도대체 왜...에잇취!"
반쯤 열린 숙소 방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문표로 보였다.
감기로 인해 목소리가 다소 변질되긴 했지만, 문표 특유의 억양을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쉿, 한 번 나가보자."
강호와 대우는 숙소 방밖으로 빼꼼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두 사람의 시선에 기성태 코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문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문표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로 연신 기침을 하는 모습이었다.
기성태 코치는 그런 문표의 등을 두드려 주며 대답의 말을 꺼낸다.
"이러니까 빼는 거야. 감독님 지시 사항이다. 오늘 경기에서 문표, 너를 포함해서 오진택, 박철, 황인태, 스팅까지. 감기가 의심되는 모든 선수들이 라인업에서 제외될 거야. 감기가 나을 때까지는 쉬도록 해."
"아니, 저는 뛸 수 있다니까요. 에잇취! 아이고, 저 콧물 흘린 거 아닙니다."
"그래, 알겠으니까 오늘 경기는 쉬도록 해. 감독님 지시 사항이니까."
기 코치는 손 감독의 지시사항을 전달한 후, 복도를 벗어난다.
그 모습에 강호와 대우는 얼른 몸을 숨겼다가 홀로 복도에 남은 문표에게 다가간다.
문표는 감기로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이 분한 건지 인상을 쓰면서도 계속 튀어나오는 기침에 난색을 표한다.
그러다가 자신을 향해 강호와 대우가 다가오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저지한다.
"어어! 오지 마. 너희들한테 감기 옮기면 나 역적 되는 거야. 내가 선발에서 빠지는 건 괜찮아도 팀 4번 타자랑 팀 마무리 투수한테 감기를 옮겨서야 되겠어? 저리 멀리 떨어져~"
문표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린 채 두 후배들에게 손을 저어 보인다.
혹시라도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강호와 팀의 마무리 투수인 대우가 감기에 옮을까봐 3미터 이상 떨어진 채로 고개를 내젓는 모습이었다.
대우는 그런 문표에게 질문을 던진다.
"문표 선배님. 기 코치님이 하시는 말씀 들었습니다. 선발 라인업에서 빠지신다면서요?"
"어, 그래. 들었어? 나만 빠지는 게 아니라 감기 걸린 선수들 죄다 뺀다고 하네. 대체 오늘 경기 라인업은 어떻게 하시려는 건지. 컨디션 떨어진 선수들 쉬게 하는 것도 좋지만, 타순에서 다섯 명을 제외하면 어떻게 경기를 하시겠다는 건지 모르겠어."
문표는 그렇게 걱정 어린 말로 대우의 질문에 답한다.
그러자 대우가 양손을 들어 곁에 있는 강호의 얼굴을 가리킨다.
"여기 있잖습니까? 강호 선배가 건제하니까 가능한 라인업 구상 아닐까요?"
대우는 맹랑하게도 강호가 멀쩡하니 아홉 명의 선발 타순에서 다섯 명이 제외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주장을 펼친다.
라인업에서 제외된 문표로서는 다소 기분 나쁜 말일 수도 있었지만, 대우의 주장이 사실에 가까웠기 때문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기분은 좀 상하네. 강호만 멀쩡하면 다섯 명이나 빼도 된다니."
"그만큼 저희 팀 백업 멤버들이 믿을만한 점도 있죠. 외야에 스팅하고, 박철 선배가 빠지면 전준오 선배랑 택근 선배를 투입하면 되고요. 또 내야에 선배님하고, 진택 선배, 인태가 빠져도 황제인 선배랑 최훈 선배, 김상훈 선배를 투입하면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대우는 마치 본인이 감독의 입장에서 라인업 구상을 밝히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손 감독이 직접 구상한 오늘 라인업이 대우가 즉흥적으로 말한 라인업 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김상훈을 대신해서 이인호를 넣고, 3루수에는 황제인을 대신해서 임정을 넣었다는 점이 조금 다른 점일 것이다.
"그래. 아주 잘 나셨네. 네가 감독 해먹어라. 나는 들어가서 쉬어야겠어. 감독님이 주전 다섯 명을 뺀 걸 보면 오늘 경기는 우천 취소될 것 같아. 그러지 않고서야 백업이 아무리 튼튼해도 이런 식으로 주전을 대량 교체하지는 않거든. 팬들 눈도 있고. 나는 이만, 에잇취! 아이고, 들어갈게~"
문표는 그렇게 자신의 주장을 밝히며 강호와 대우에게 손을 흔들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강호는 대우와 문표의 주장을 모두 들은 후, 문표의 의견이 나름 타당하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러고보니까 광주는 부산보다 강우량이 더 많은 것 같던데. 오늘 경기는 문표 선배 말대로 우천 취소될 확률이 높아. 그러니까 감독님께서 주전 라인업에 큰 변동을 주더라도 상관은 없을 거야. 어차피 그 라인업대로 경기를 뛰지 못할 테니까."
강호는 대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예보에서 예측한 23일 광주의 강우량이 80mm가 넘는 상황이라 경기가 속행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호텔 창밖을 내다보니 과연 일기예보대로 빗줄기가 거세게 내리는 모습이었다.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온 강호와 대우는 이제 곧 경기 취소를 알리는 소식이 있을 거라 여겼고, 잠시 후 그 예상은 현실이 된다.
"오늘 경기는 우천 취소다! 일단은 쉬고 있어. 감독님 지침 떨어지면 추가로 알려줄 테니까!"
복도에서 김민철 수석이 경기가 우천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휴대폰 메시지로 오늘 경기가 우천 취소되었다는 사실이 전파되고 있었다.
혹시라도 선수들이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봐 코칭스태프가 온, 오프라인 모두를 이용해 경기 취소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김 수석의 통지 후에 자신의 스마트 폰에 도착한 경기 취소 메시지를 확인한 대우가 문득 드는 의문을 강호에게 물어본다.
"그런데 오늘 경기가 우천 취소될 거라는 점을 감독님도 알지 않으셨을까요? 그런데 왜 기성태 코치님을 시켜서 라인업 변경 소식을 알려준 걸까요? 어차피 경기가 취소될 거니까 기존대로 라인업을 짜도 되는 일이잖습니까?"
대우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그는 폭우로 인해 우천 취소가 확실시 되는 오늘 경기에서 굳이 문표를 비롯한 주전 선수들에 대한 라인업 제외 소식을 알릴 필요가 있었나하는 의문을 가진 것이다.
강호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 고려해보고 있었기 때문에 대우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해도 되겠지. 하지만 문표 선배를 포함해서 감기에 걸린 선수들을 라인업에서 제외시킨 결정은 여러 가지 이점이 있어."
"네? 이점이요?"
"그래. 코칭스태프 쪽에서 선수단의 건강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린 셈이잖아? 사소한 감기일 수도 있지만, 감독님이 선수들의 건강 상태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제스처이기도 한 거야. 그리고 선수들의 컨디션 저하가 발생하면 휴식을 보장해준다는 메시지이기도 하고."
"아, 그런 겁니까? 단순한 의미는 아니었네요."
대우는 강호의 설명을 들으며 '아~'하는 감탄사를 토해낸다.
강호는 그런 대우에게 씨익 웃어 보이며 그에게 다하지 않은 말을 홀로 생각한다.
'이점은 또 있어. 다섯 명이나 되는 주전 선수들을 라인업에서 제외시켜도 경기에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지. 이제 9월부터 시작되는 확장 엔트리까지 발표되면 그 자신감은 더욱 커지는 셈이고. 그렇게 되면 웬만한 실력으로는 선발 라인업에 끼기도 힘들 거야.'
강호는 대우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킨다.
이제 자이언츠는 3할의 타율을 기록하더라도 선발 라인업에서 언제든지 제외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타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선수가 바로 강호였다.
어느새 강호는 백업 선수마저 3할 타율을 기록하고 있는 자이언츠에서도 대체 불가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