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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에서
자이언츠 팬들이 우승이라는 열망을 가슴에 새긴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아져 있었다.
김민철 수석 코치는 새로운 라인업 구성을 위해 손 감독의 방으로 향한다.
손 감독이 1군 총 사령탑이 된 이후에는 거의 모든 라인업 구성을 손 감독이 직접 작성하고 있었지만, 김 수석의 역할이 없지는 않았다.
김 수석은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자이언츠의 감독 대행 자리까지 앉았던 베테랑 코치였다.
혹시라도 손 감독이 구상한 라인업에 흠이 있거나 오류가 있을 때에 조언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목상 조언자 역할이기는 해도 당사자인 김 수석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손 감독님이 구상하신 라인업에 오류가 있을 리가 있나? 감독님 혼자 계시는 게 적적하실 수도 있으니까 문안 인사차 들려보는 게 수석 코치된 사람으로서의 도리겠지.'
김 수석은 내심 손 감독이 직접 구상하는 라인업에 조언자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손 감독 홀로 원정지 숙소에서 라인업을 구상하는 지루한 시간을 함께 해준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김 수석이 손 감독의 라인업 구상을 함께 하게 된 것은 김 수석의 의지가 아니라 손 감독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은 손 감독이 1군 사령탑으로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로 이동한다.
"조언자요? 제가 감독님이 직접 짜시는 라인업에 조언을 하란 말입니까?"
그때의 김 수석은 헛웃음 지으며 그렇게 반문했었다.
혹시나 손 감독이 농담을 하는 걸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냥 편하게 라인업 구상을 위한 코칭스태프 회의를 주관하면 될 일을 굳이 자신에게 조언자를 청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손 감독의 얼굴은 장난기가 1도 포함되지 않은 진지한 표정이었고, 김 수석은 이어질 손 감독의 말을 기다리게 된다.
"국가대표 급 선수들에게도 조언을 해주는 코치들이 항상 붙어있지. 자네는 김연아나 펠프스, 우사인 볼트 같은 세계 정상 급 선수들에게 코치가 꼭 필요하다고 보나?"
손 감독이 뱉어낸 말은 선문답과도 같은 말이었다.
자신의 반문에 다시 질문을 되돌려주는 손 감독의 물음에 김 수석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피겨 스케이팅의 전설이 된 김연아 선수, 수영계의 레전드 펠프스, 그리고 단거리의 수식어를 바꾼 우사인 볼트까지. 이 선수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코치들이 꼭 필요하냐고?'
속으로 손 감독의 말을 곱씹어보는 김 수석.
그는 곧 결론을 내린다.
'물론 필요하겠지. 김연아 선수가 세계 정상에 올랐을 때도 코치가 항상 곁에 있었고, 펠프스나 볼트 역시 마찬가지야. 세계 최정상급 선수라도 코치들이 항상 곁에 있어야만 하겠지. 하지만 그들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될까? 그 정도 엄청난 선수들의 코치는 코치가 아니라 매니저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았을까?'
김 수석은 대답을 위해 생각을 이어가다가 오히려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 김 수석을 바라보던 손 감독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세계 최정상에 올랐던 선수들에게도 곁에서 조언해주는 코치가 필요한 거야. 그것은 우리같은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고. 김연아나 펠프스의 곁에서 조언해주는 코치들이 그 선수들보다 좋은 재능을 타고 났다거나 운동을 더 잘해서 조언을 해주는 것은 아닐 게야. 방향을 잡아주는 거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코치들의 역할은 바로 그것이니까. 선수들이 오랜 시간 땀흘려 방향을 잡은 경로에서 이탈하지 않게, 곁에서 수시로 확인해주는 역할인 거지."
손 감독의 발언은 오랜 시간 지도자로서 쌓아온 연륜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손 감독의 말을 듣고도 김 수석은 자신이 왜 손 감독의 조언자가 되어야하는 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현연 선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감독님의 조언자가 되는 것과 김연아 선수에게 코치가 필요한 이유는 조금 다르지 않겠습니까?"
김 수석은 그렇게 반문하고 있었다.
대단한 재능을 타고 났다고 해도, 아직 나이가 어린 선수들에게는 필수적으로 코치들이 따라 붙는다.
그러나 현장에서 5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야구라는 종목의 한길만 걸어 온 야구 명장에게 조언자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손 감독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러니까 더욱 조언자가 필요한 게야. 나이가 어릴 때는 코치의 말을 믿고 따르지만, 우리처럼 나이가 들면 고집이라는 게 생기거든. 그래서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릴 때가 있지. 우리 지도자들은 항상 그런 점을 경계해야만 해. 독단에 빠지지 않게 말이야. 김 수석, 자네가 나를 도와줘야할 것도 바로 그 점이야. 알겠나?"
"그런 의도이시면 경기 때마다 코칭스태프 회의를 소집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손 감독의 말에 김 수석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제안했었다.
그러자 손 감독은 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렇게 대답했었다.
"앞으로 코치들이 바쁜 일이 많을 게야. 그런 코치들을 회의한답시고 자꾸 불러서야 되겠는가? 자네와 내가 조금 더 부지런 떨면 되는 일을."
웃음 띤 얼굴로 말하는 손 감독의 말에 결국 김 수석은 조언자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우려를 잊지 않는다.
'덕분에 다른 코치들은 여유가 생기겠지만, 감독님은 더 바빠지시겠네요.'
그 때의 김 수석은 손 감독의 과로를 우려하고 있었다.
시간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그 때의 우려를 잊지 않은 김 수석은 한 손에 한약 팩을 잔뜩 챙겨 든 채 손 감독의 숙소 방을 노크한다.
"들어와."
여전히 괄괄한 손 감독의 목소리에 문고리를 돌리고 방으로 들어선 김 수석.
그의 시선에 돋보기안경을 낀 채로 라인업 구상에 들어간 손 감독의 모습이 들어온다.
손 감독은 김 수석의 얼굴을 힐끗 살핀 후 '와서 앉게' 라고 말하며 다시 라인업 차트에 시선을 내린다.
김 수석은 그런 손 감독의 모습을 확인한 후 씨익 하고 웃어 보이면서 들고 온 한약 팩을 머그컵에 따른다.
그러자 방안 가득 쓰디 쓴 한약 냄새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김 수석도 몸 생각할 나이가 된 모양이지?"
손 감독은 머그컵에 한약을 따르는 김 수석의 모습에 피식 웃음 지으며 잠시 볼펜 움직이는 손길을 멈춘다.
손 감독은 김 수석이 자신에게 주려고 한약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예상하지 못한 채 김 수석이 몸 챙길 나이가 되었다며 웃음 짓는다.
그런 손 감독에게 머그컵을 내미는 김 수석.
"집 사람이 몸에 좋다고 지어준 한약인데, 손 감독님 체질에도 맞을 겁니다. 소양인이시죠? 한 잔 드셔보십시오. 힘이 불끈불끈 솟더라고요."
김 수석은 그렇게 말하며 손 감독에게 머그컵에 든 한약을 권한다.
어떻게 데운 것인지 머그컵에서는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 컵 속에 든 짙은 색 한약을 내려다보던 손 감독. 시선을 들어 김 수석을 바라본다.
"자네 김영란 법도 모르나? 이런 뇌물 한 잔에 우리 둘 다 자리에서 물러나는 수가 있다고."
"하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수석 코치가 감독님께 한약 한 잔 대접했다고 목이 날아갈 리가 있겠습니까? 한 잔 드셔보십시오. 요즘 감독님 피부가 조금 거칠어진 것 같던데, 이거 한 잔 드시면 효과가 좋을 겁니다."
"한약 한 잔 마신다고 효과가 바로 올 리가 있나? 만병통치약도 아닐 텐데."
김 수석에게 보기 드문 모습으로 농담을 건네던 손 감독은 결국 앞에 놓인 머그컵을 들어올린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되는 강행군에 체력이 떨어지던 찰나인데 이렇게 자신을 챙겨주는 김 수석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소문내지 말게. 내가 이런 뇌물을 받아 마신다는 소문이 나면 안 되니까' 라고 김 수석에게 농담을 건넨다.
"하하,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거 한 잔에 만 원도 안합니다. 김영란 법은 3만원이 초과하는 대접에 적용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감독님께 향응을 대접해서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감독님께서 감독 자리를 물려주실 게 아니라면 제가 더 올라갈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요, 뭘."
김 수석은 그렇게 대꾸하며 호탕하게 웃어 보인다.
손 감독은 그런 김 수석과 마주 웃어 보이며 들고 있던 머그컵을 기울여 한약 한 모금을 삼킨다.
그리고 다시 라인업 구상에 몰두하다가 한참이 지나 식어버린 한약 컵을 들고 창가를 향해 다가선 손 감독.
그의 눈동자에 창가를 촉촉하게 적시기 시작한 빗방울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비가 오는군."
"네?"
손 감독의 말에 라인업을 검토하던 김 수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선다.
과연 손 감독의 말대로 옅은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김 수석은 습관적으로 시계를 바라보며, 지금 내리는 비로 경기가 우천 취소될 지를 가늠해 본다.
한편 같은 시간 창밖에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었다.
그는 바로 강호였다.
강호는 허리 근력을 강화하기 위해 밴딩 운동을 하다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창가로 다가선 상태였다.
파워가 최대치를 찍으며 더 이상 근력을 강화할 필요가 없게 된 강호였지만, 이렇게 개인 운동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타격감이 떨어지는 까닭으로 여전히 개인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강호의 모습은 룸메이트인 대우에게 가장 모범적인 선배 선수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어?! 비가 내리네요? 오늘 강수 확률이 있기는 했는데 50%라서 안 올 줄 알았더니. 비가 내리긴 하네요. 그러고 보니까 일기예보가 비 모양으로 죄다 바뀌어 있습니다."
대우는 창가에 선 강호에게 다가서며 자신의 태블릿 PC를 내민다.
그의 말대로 태블릿 PC화면에는 전국이 우산 모양으로 표기된 일기예보 지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구름이 표시되어 있던 일기예보가 뒤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근데 이 정도 비로는 경기가 취소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대우의 말에 강호가 넌지시 묻게 된다.
"왜? 너는 경기가 취소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연한 거 아닙니까? 강호 선배 연속 경기 홈런을 이어가려면 오늘 경기도 속행돼야죠! 타자들 연속 경기 기록은 갑작스런 경기 취소에 쥐약이라면서요? 요즘 강호 선배 타격감도 좋으신 것 같은데, 가급적이면 경기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강호의 물음에 대한 대우의 대답이었다.
그는 다른 모든 이유를 떠나서 강호의 홈런 기록을 위해서 경기가 속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소 어이없는 대답이긴 해도, 자신을 생각해주는 대우의 마음이 고맙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상 체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도 오늘 경기는 진행됐으면 좋겠지만, 구름이 심상치가 않아. 우천 취소될 수도 있겠어."
강우로 인한 우천 취소를 염려하는 강호의 말에 대우는 창밖을 한 차례 노려보더니 이렇게 단언하고 있었다.
"우천 취소 안 될 겁니다. 강호 선배의 홈런 기록이 계속되기를 하늘도 바라고 있을 거라고요. 두고 보십시오. 다른 구장은 몰라도 잠실구장 경기만큼은 취소되지 않을 겁니다."
대우는 근거 없는 말로 강호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대우의 위로는 시간이 지나 현실화되고 있었다.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비가 그친 것은 아니었지만, 경기를 속행하기에는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심판진이 경기 시작을 알린 것이다.
그 소식을 전달받은 중계진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많은 분들이 우천 취소를 염려하셨을 텐데 안심하시라는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산과 광주, 대전 경기가 취소되기는 했지만, 이곳 잠실구장의 경기는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잠시 후 함께하시죠!"
캐스터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비에 젖은 그라운드를 비추는 중계 화면은 잠시 광고 화면으로 넘어간다.
다시 중계 화면으로 넘어와 시구와 시타, 애국가 제창 등의 과정이 모두 끝난 후 1회 초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 캐스터는 손 감독이 김 수석의 한약 조공에 힘입어 작성한 라인업을 읽어 내리며 오늘 경기에서 주목할 점을 지적하고 나선다.
"자이언츠 타선에서 주목할 선수는 단연 백강호 선수이지 않을까 합니다. 백강호 선수, 8월 13일부터 시작된 연속 경기 홈런 기록이 일곱 경기 째 계속되면서 어느새 홈런 수가 56개까지 늘어났습니다. 어제 그 영광의 순간을 저희와 함께 하셨는데요. 박재헌 위원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오늘도 백강호 선수의 홈런 기록이 이어질 것 같으세요?"
한 캐스터가 생각하는 오늘 경기의 최대 관심 요소는 바로 강호의 홈런에 관한 것이었다.
그 점을 지적하며 마이크를 넘긴 한 캐스터의 물음에 박재헌 위원이 곧바로 입을 연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기록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데요. 오후부터 내리던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는 홈런 성 타구가 나오기는 힘들 수 있습니다. 다른 구장도 아니고 잠실이거든요? 백강호 선수나 자이언츠 입장에서는 차라리 경기가 우천 취소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어요. 오늘 백강호 선수는 상대 투수뿐만이 아니라 날씨와도 싸움을 벌이면서 집중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항상 강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만을 말하던 박 위원도 오늘 경기만큼은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었다.
박 위원이 걱정할 정도로 내리는 빗방울이 심상치 않았고, 날씨로 인한 변수는 강호의 연속 경기 홈런 기록을 가로 막을 최고의 변수로 예상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TV중계를 지켜보는 다수의 자이언츠 팬들이 차라리 빗방울이 더 굵어져 오늘 경기가 취소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기도 할 정도였다.
그런 팬들의 우려 속에 1회 초 자이언츠의 공격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