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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은 잠시 월요일 오전으로 이동한다.
강호의 친형인 강수는 오늘만큼은 일정을 잡아두지 않았다.
강수가 실내 작업이 주를 이루는 수장시공 현장의 작업 책임자인 까닭에 비가 오는 날에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비가 오면 작업을 쉬어야 하는 다른 현장 직업과는 조금은 다른 환경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 월요일 일정을 비워둔 이유가 있었다.
"아저씨~~"
해맑은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앳된 목소리에 강수가 고개를 돌린다.
시선을 돌린 그의 시야에 태호와 똑 닮은 어린 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의 이름은 주태양. 강호가 후원하고 있는 경남중 야구부의 주태호가 바로 태양이의 큰 형이었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인 태양이는 요즘 들어 부쩍 방문이 잦아진 강수를 항상 반겨주고는 했다.
왜냐하면 강수가 집으로 찾아올 때마다 치킨이나 피자, 아이스크림 같은 맛있는 간식들을 사다주고는 했던 것이다.
오늘도 강수는 두 손이 무거운 가운데에서도 태희와 태양이를 먹일 간식을 사온 모습이었다.
"치킨이다, 치킨! 이건 뭐에요? 피자에요?"
"그래. 그리고 이건 할머니 건강 죽이니까 들어가서 할머니랑 누나랑 같이 먹고 있어라."
"오예~ 피자, 치킨~~그런데 이건 뭐에요? 오늘도 공사하는 거예요?"
태양이는 강수에게서 받아 든 피자와 치킨, 그리고 할머니의 건강 죽을 품에 안으며 웃음 짓다가 강수와 함께 온 두 사람의 손에 든 공사 재료들과 공구 등을 보며 물어본다.
강수는 그런 태양이에게 피식 웃어 보이며 손을 뻗어 태양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사까지는 아니고, 너희들한테 필요한 거 몇 개 챙겨왔다. 자~ 들어가자."
"네!"
태양이는 현관 문 안으로 등을 떠미는 강수의 행동에 씩씩하게 대답하며 집 안으로 들어선다.
강수와 인부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할머니의 곁을 지키고 있던 태희가 할머니를 부축하며 거실로 나오려 했다.
강수는 얼른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만류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 아니에요. 할머니. 방에 들어가 계세요. 애들 방에 먼지가 좀 날릴 수도 있으니까 태희랑 태양이는 할머니 방에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태희야, 태양이 손에 든 할머니 죽 좀 받아라."
강수는 살가운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당부하며, 곧 자신이 오늘 방문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그를 따라서 태호의 집으로 들어온 인부들 역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강수와 인부들이 태호의 집에 방문한 이유.
그것은 잠시 후 태호가 야구부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가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강수와 인부들의 작업은 공교롭게도 태호가 집으로 돌아온 시점에서야 끝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응?"
집으로 돌아온 태호는 집 입구에 멈춰 서서 잠시 고뇌해야만 했다.
얼마 전에 강수의 도움으로 이사할 수 있었던 투룸 빌라.
오래되기는 했지만, 이전에 살던 폐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주거 여건이었다.
그럼에도 곳곳에 낡은 곳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현관문이었다.
20년은 더 돼 보이는 낡은 철재 현관문에 시트지를 덧발라 어설프게 가린 것이 조금 신경 쓰였었는데 더는 그럴 일이 없어져 버렸다.
왜냐하면 문짝이 통째로 교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뀐 현관문에는 비밀번호를 입력해 문을 열 수 있는 최신식 도어 락이 설치되어 있었다.
태호는 자신이 학교를 다녀온 동안 문짝이 바뀌어버린 현실에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이 자신의 집이 아니었나하는 생각마저 든다.
"집 주인은 난데, 학교를 다녀 온 사이에 문짝은 바뀌어 있고, 비밀번호도 몰라. 이 일을 어쩌란 말이야?"
태호는 잠시 바뀌어버린 자신의 집 문짝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바뀐 문짝이 참 세련돼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녹슨 데도 없고, 금간 데도 없어. 완전 새 거야. 죽이네."
태호는 그렇게 바뀐 문짝을 평가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어 락 커버를 열어 자신의 생일 네 자리를 입력해 본다.
0819.
오늘이 바로 태호의 생일인 것이다.
태호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신의 생일을 입력해 본 것인데, 도어에서 '띠리리링~' 이라는 경쾌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곧바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보게 되었다.
상당히 달라져 버린 집 안의 광경을.
이사한 집은 큰 방 하나와 작은 방 하나, 황량한 거실과 주방이 전부인 투룸 빌라였다.
작은 방은 할머니의 방으로 두고, 큰 방에서 3남매 모두가 생활해야 했던 여건이었다.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는 여동생, 태희를 생각한다면 비좁게만 느껴지는 주거 환경일 것이다.
그마저도 전에 살던 폐가에서는 누릴 수 없는 호사였기 때문에 아무 불만 없이 이사한 집에 만족하며 살았던 3남매.
그런데 지금은 방이 두 개가 아니었다.
쓸데없이 넓었던 거실에 목재 파티션으로 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고, 또한 큰 방 내부에도 파티션과 책장으로 공간을 분리해 태호와 태양이의 방이 구분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뛰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방, 방, 방.
막내 동생 태양이가 새로 집에 들인 가구 위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태호는 약간은 낯설게 느껴지는 막내 동생의 행동에 입을 다물고 만다.
그런 큰 형을 발견한 태양이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형! 침대야, 침대! 우리도 이제 침대에서 자도 된데~~ 이것 봐. 완전 신기해~ 침대 안에 스프링이 있나 봐!"
태양이는 침대 매트리스를 트램플린 삼아 방방 뛰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태호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거실에서 막바지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강수에게로 다가선다.
"아저씨."
"어? 그래. 태호야. 비밀번호는 네 생일로 해놨는데 용케 누르고 들어온 모양이네? 잠시 태양이랑 같이 놀고 있어. 하던 작업 다 끝내고 갈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무슨 일이에요? 먼저 연락이라도 하고 오시던가요."
"에이~ 먼저 연락하고 오면 서프라이즈가 아니지. 조금만 기다려봐. 여기를 태희 방으로 만들 거거든. 공간이 넓지가 않아서 조립식 침대로 설치를 해야 돼. 가구들은 빌트인 구조로 설치가 끝났어. 그러니까 마무리 될 때까지 동생들이랑 놀고 있어 봐."
태호는 그렇게 강수의 손에 억지로 등이 떠밀려 작업이 끝난 큰방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말이 내 방이지, 학교 가기 전하고 완전히 달라졌잖아?'
태호는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큰방에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댄다.
그런 태호의 곁에서 막내인 태양이가 여전히 침대 위를 방방 뛰어다니고 있었다.
"형~ 이거 봐! 나 천장에 손닿는다! 나 완전 키 커 보이지? 형도 해봐! 형은 키가 크니까 천장에 머리도 닿을 거야."
철없는 태양이의 말을 들으며 태호는 그냥 눈을 감아버린다.
잠시 후, 강수와 인부들의 작업은 모두 끝나고 두 명의 인부들은 태호의 집을 먼저 나선다.
홀로 남은 강수는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 전체에 흐르는 땀방울을 씻어낸 후에야 태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태호에게 할 말을 망설이는 강수.
태호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직접 인부들과 시공 작업과 침대 설치를 끝낸 강수였지만, 태호에게 건넬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되나? 그냥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면 되나? 요즘 아이들은 생일 축하를 어떻게 하는 거지? 써~프라이즈~ 이렇게 하면 되려나? 아니지, 서프라이즈는 무슨, 태호가 시공하는 걸 다 봤는데 놀래키리면 태호가 처음 집에 왔을 때 서프라이즈를 해줬어야지. 아이고, 내가 타이밍을 놓쳐 버렸네.'
강수는 작업에 몰두하느라 놓쳐 버린 서프라이즈 타이밍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태호에게 다가선다.
태호는 강수의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무언가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두 사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강수였다.
"너 오늘 생일이라며? 축하한다. 생일 선물로 침대 사왔다."
그것이 태호에게 건넨 강수의 생일 축하 말이었다.
마음으로는 더 따뜻하고 살가운 태도로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무뚝뚝한 성격이 갑작스럽게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말을 해놓고는 인상을 찌푸리게 될 정도로 무미건조한 축하 인사였다.
'이게 아닌데? 내가 이런 말 하려고 몇 시간 동안 땀 흘린 게 아니잖아?'
강수는 스스로의 무뚝뚝함을 탓해보며 한숨을 내쉰다.
그런 강수를 바라보는 태호.
문득 태호가 강수에게 말을 건다.
"아저씨, 팥빙수 하나 드실래요? 더운데 고생도 하셨잖아요."
갑자기 팥빙수를 먹자는 태호.
그의 말에 강수를 대신해 침대 위에서 방방 뛰고 있던 태양이가 소리치며 대답한다.
"팥빙수! 나도 팥빙수!"
"너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형이 팥빙수 사올 테니까."
"오케바리 팥빙수~~ 형 세 개 사와~ 할머니랑 누나 것도!"
아직 어린 막내 동생이 할머니와 누나의 것까지 챙기는 모습에 대견한 미소를 짓게 된다.
태양이를 향한 미소는 강수와 태호,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래, 가자. 팥빙수 먹으러."
강수는 태호에게 이끌려 근처의 팥빙수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태호는 근처 가게에 도착해 팥빙수 두 개를 시키고, 세 개를 포장해 달라고 주문한 후 자신의 지갑을 꺼낸다.
그 모습에 얼른 강수가 자신의 지갑 속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태호가 이렇게 말을 건넨다.
"이 가게는 카드 안 받아요. 그러니까 넣어두세요. 팥빙수는 제가 살게요."
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태호의 말에 강수는 멍하니 입을 벌린다.
그리고는 따져 묻게 된다.
"너 후원금 받아서 이렇게 펑펑 쓰고 있었던 거야? 내가 후원자한테 고자질하면 어쩌려 그래?"
강수는 혹시나 태호가 후원금을 받아 과소비를 하는 게 아닐까 우려하며 물어본다.
그러자 태호는 표정변화 하나 없이 이렇게 대꾸하고 있었다.
"하세요. 고자질. 생일 선물 주러 온 아저씨하고, 제 동생들한테 팥빙수 하나 못 사게 하는 후원자의 돈은 저도 필요 없어요. 그렇게 후원한 돈이 아까우면 후원하지 말라고 하세요. 제가 이제부터 신문배달이라도 하죠, 뭐."
태호의 대답에서 강수는 과소비에 대한 우려를 접는다.
태호는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팥빙수를 먹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자신과 다를 바 없이 무뚝뚝한 태호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속내에 사심 없이 미소 짓는 강수.
그런 두 사람이 가게 안의 작은 티 테이블 앞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기다리던 팥빙수가 나온 이후로는 아무 대화 없이 숟가락질에 바쁜 두 사람.
한창 자신의 팥빙수를 떠먹고 있던 태호가 문득 흘러가는 듯한 말투로 물어본다.
"후원자가 누군지 알려줘요."
"뭐?"
"후원자 이름이요. 아니면 주소라도요."
"그건 네가 알아서 뭐하게? 국내 후원은 후원자 이름을 모르는 게 원칙이야. 굳이 네가 알 필요도 없어."
"그럼 아저씨 이름이라도 알려줘요."
"푸핫, 내 이름 알아서 뭐하게? 내 이름 알려주는 건 별로 어렵지 않지. 내 이름은..."
강수는 방향을 선회해 자신의 이름을 물어오는 태호의 질문에 답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기억 속에 남은 동생과의 대화에서 어떠한 내용 하나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 때 강호는 형에게 이렇게 당부했었다.
"태호나 아이들한테는 비밀로 해줘. 내가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 자존심 상할 수도 있잖아."
강호는 혹시라도 후원자의 정체가 '백강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아이들이 만에 하나라도 자존심이 상할 것을 우려했었다.
그런 강호의 요구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강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래,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비밀로 해둘게."
"그리고 형이 내 친 형이라는 사실도 비밀로 해줘. 요즘 애들은 하도 똑똑해서 형 이름만 알려줘도 우리 두 사람이 형제라는 걸 유추해낼 거고, 그럼 내가 후원자라는 걸 금세 알아차릴 거야."
"그럴게. 강호, 네 이름하고, 내 이름 모두 비밀로 하면 되는 거지? 어려울 것도 없네."
강수는 몇 주 전, 자신에게 신신당부했던 동생의 말을 떠올리며 한 일자로 굳게 입을 다문다.
어려울 것도 없다고 큰소리 쳤었는데 태호의 낚시질에 생각도 없이 대답할 뻔한 자신을 속으로 탓해본다.
'내가 중딩한테 낚일 뻔했네. 정신 차리자.'
강수는 올 여름의 무더위가 자신을 허술하게 만든 것이라 속으로 변명하며 태호에게 대답했다.
"나는 이름이 없어."
"뭐요? 아저씨, 더위 드셨어요? 세상에 이름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말도 안 되는 강수의 대답에 태호가 미간을 좁히며 추궁해 온다.
'안 통하네.'
강수는 동생인 강호의 말대로 요즘 아이들은 너무 영악하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지금도 자신을 주시하는 태호의 눈빛에서 자신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꿰뚫어 보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괜히 태호의 눈빛에 압도당해 '백강수'라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가는 강호의 말처럼 태호가 모든 사실을 알아차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 이름이나 대자.'
강수는 결국 태호에게 가명을 알려주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무슨 이름을 알려줄 지가 문제였다.
강수는 가명 같은 것을 생각해 본적도 없이 살아왔던 수장시공업자이지 않은가.
고려해두고 있던 이름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불현듯 떠오르는 아무 이름이나 내뱉고 만다.
"정우성이야."
"네?"
"내 이름, 정우성이라고."
순간 정적이 흐른다.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가게 주인아줌마도 어처구니를 상실한 표정으로 강수의 뒤통수를 바라본다.
그러다 그녀는 '말도 안 돼'라고 중얼거리며 강수와 태호에게서 관심을 끄는 모습이었다.
그런 주인아줌마를 뒤로 하고, 태호가 확인 차 다시 물어본다.
"아저씨 이름이 정우성이라고요?"
"그래."
태호의 물음에 답하는 강수의 이마에 다시금 땀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거짓말을 많이 해본 적 없는 강수라서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난처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눈앞의 태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호는 자신의 머릿속에 기억된 '정우성'이라는 이름과 연예인 정우성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린 다음 다시 눈앞의 강수를 바라본다.
'아, 말도 안 돼. 매치가 안 되네. 아저씨 이름이 정우성이었다니. 차라리 유해진 같은 이름이었으면 더 잘 어울렸겠다...'
태호는 '유해진'이라는 이름이 강수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생각은 결국 태호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푸핫! 정우성이래! 기가 막혀!"
태호는 그렇게 말하며 크게 웃음 짓고 있었다.
여태껏 강수와 대면한 적이 수십 번은 넘었지만, 한 번도 웃어본 적 없었던 태호.
강수에게는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태호였다.
'내가 정우성이라는 게 그렇게 웃긴 일인가?'
강수는 속으로 의문이 들면서도 테이블을 탕탕 치며 웃어 보이는 태호의 박장대소에 전염되어 함께 웃어 보인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 웃음을 그친 태호가 녹아버린 팥빙수 그릇 안을 수저로 휘휘 저으며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
"제가 어려서 걱정이시면 어른이 되면 꼭 알려주세요. 후원자가 누군지를요."
태호는 끝까지 후원자의 정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강수는 그런 태호에게 피식 웃어 보이며 묻는다.
"후원자가 누구인지는 왜 알고 싶은 거야?"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자존심 세고, 잘 웃지도 않는 고집불통 청소년인 태호가 왜 후원자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 하는 지를.
그래서 이어질 태호의 말을 귀담아 듣게 된다.
"누군지 알아야 갚아줄 수 있잖아요. 그리고...고맙다는 말도 할 수 있고요."
태호는 말을 하면서도 조금은 쑥스러웠는지 강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여전히 팥빙수 그릇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태호의 진심에 강수는 사심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면서 대답을 위해 입을 여는 강수.
"좋아. 대신에 태호 네가 프로에 데뷔해서 한국 시리즈 무대에 선발 선수로서 출장했을 때 알려주도록 할게. 그 정도 조건이 어려운 건 아니겠지?"
강수는 후원자를 알려달라는 태호의 물음에 그렇게 조건을 달고 있었다.
태호가 프로 야구 선수로 데뷔해서 한국 시리즈 무대에 선발 선수로서 출장한다는 조건.
자칫 간단해 보일 수도 있는 조건이었지만, 여러 가지 전제를 충족하기가 어려운 조건이기도 했다.
태호가 본인의 기량을 모두 발휘해서 좋은 선수로 성장한다고 해도, 프로에 데뷔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고, 또 한국 시리즈에 선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프로 선수로서 일류 선수가 되는 것은 선수 개개인의 노력으로도 가능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국 시리즈 무대를 밟기 위해서는 그만큼 좋은 팀에 입단해야하는 행운이 작용되는 것이다.
그러니 강수가 내건 조건은 충족하기 무척이나 어려운 조건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 태호에게는 달성 불가능한 조건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좋아요! 약속하세요. 제가 한국 시리즈에 선발 출장하면 꼭 알려주겠다고요."
태호는 강수가 내건 조건에 반색하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온다.
강수는 평소에 무뚝뚝하고, 어른 같아 보이던 태호가 뜻밖에도 약속을 위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오자 저도 모르게 웃고 만다.
'각서라도 써달랄 줄 알았더니. 새끼손가락을 내밀 줄이야. 못할 것도 없지.'
강수는 이때 아무런 생각 없이 태호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다.
두 사람은 이때까지만 해도 알 수 없었다.
한 여름, 팥빙수 집에서 새끼손가락을 내걸고 했었던 지금의 약속이 모두에게 어떤 미래를 선사해줄 지를,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