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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수
경기는 5회 초가 진행되고 있었다.
원정 팀인 자이언츠의 득점권 기회에서 타석에 선 타자는 바로 강호였다.
"후우."
짧은 날숨과 함께 타석에 선 강호.
그를 향해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뜨거운 함성 소리가 쏟아진다.
반대로 다이노스 홈팬들의 응원 열기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다이노스 덕 아웃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결국 투수 교체 카드를 꺼내들고 있었다.
그라운드로 발걸음 옮기는 다이노스 투수코치의 모습을 확인한 조 캐스터가 지금의 상황을 설명한다.
"다이노스 덕 아웃에서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지금은 투수 코치가 주심에게 공을 받아 들었죠? 교체에요. 에릭 투수의 투구가 나쁘지 않았는데 백강호 타자에게 계속해서 홈런을 허용했거든요. 지금의 투수 교체는 백강호 선수로 인한 것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조 캐스터와 박 위원은 지금의 투수 교체 상황을 강호로 인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었다.
다이노스의 선발 투수인 에릭의 투구 내용이 나쁘지 않았지만, 강호에게 2홈런과 3타점을 헌납한 것이 교체의 주된 이유라는 내용이다.
두 사람의 말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주장에 가까웠지만, TV중계로 경기를 시청하는 대다수의 팬들은 두 사람의 말에 동감하고 있었다.
"다이노스 1선발이 백강호한테는 안 통하는 모양이네. 50홈런 때려 맞기 전에 교체하는 것도 방법이지."
"그러게 왜 정면 승부를 해가지고, 그냥 거르면 되잖아? 내가 감독이면 백강호는 그냥 거르겠다. 주자 만루 상황만 아니면 말이야."
"네가 감독이면 욕 엄청 먹겠네. 백강호 선수가 일요일 인터뷰에서 고의사구로 거르지 말라고 대놓고 얘기했는데 어떻게 거르겠어? 자존심 상하게. 괜히 걸렀다가 자이언츠 팬들한테 쫄보라고 비아냥이나 들을 걸?"
자이언츠와 다이노스 팬이 아닌 다른 팀을 응원하는 일부 팬들이 마산 경기를 관전하며 의견을 더한다.
그들은 오늘만큼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잠시 젖혀두고, 더욱 흥미가 느껴지는 마산 경기를 관전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마산 경기의 시청률은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지만, 양 팀 덕 아웃에서는 아직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다이노스 불펜에서 새로운 투수가 모습을 드러내는 가운데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도 움직임이 포착된다.
"대주자를 기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2루 주자인 스팅의 발이 빠른 편이 아니니까 택근이를 대주자로 기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택근이는 중견수 수비가 가능하니까 성철이를 중견수로 옮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손 감독을 향해 의견을 전달하고 있는 사람은 김민철 수석 코치였다.
그는 스팅을 대타 자리에 기용함으로써 라인업에서 빠져버린 중견수 전준오의 공백을 외야수 한택근을 대주자로 기용하는 것으로 상쇄하자는 의견을 내고 있었다.
평범한 주력을 가진 스팅을 대신해 빠른 발을 가진 젊은 외야수, 한택근을 기용하자는 의견이다.
한택근은 강호와 함께 2군 생활을 했던 젊은 외야수로 99년생, 올해로 21살의 좌익수 자원이었다.
좌익수와 중견수 수비가 모두 가능하면서 타격 잠재력 또한 인정받고 있었다.
김 수석의 제안에 손 감독이 그라운드에서 시선을 거둔다.
그리고는 김 수석을 향해 이렇게 대답했다.
"뭐하러 가용 자원을 낭비하겠는가? 대타로 기용한 스팅을 좌익수에 세우고, 성철이를 중견수로 옮기면 되는 일인데. 김 수석 자네는 지금의 상황이 대주자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보나?"
"네? 아무래도 강호가 2루타 미만의 단타를 때리면 스팅 정도의 주력으로는 홈 쇄도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동점을 만든 김에 역전까지 노려봐야죠. 1사 주자 2루에 타자가 강호인데, 타점을 뽑을 기회가 어느 때보다도 높지 않습니까?"
손 감독의 되물음에 대한 김 수석의 대답이었다.
그는 이번 타석에서 강호가 적시 타점을 기록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예상하기에 다이노스가 마운드에 올릴 불펜 투수는 강호에게 상대 전적이 나쁘지 않은 김진석이나 강정산이 될 것으로 보였다.
오늘 강호의 타격 능력이라면 둘 중 어느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도 적시타 이상을 때려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오늘 강호의 타격감은 최상급이야! 그러니까 이번 타석에서 강호에게 최고의 득점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옳아. 왜 감독님은 그런 점을 외면하시려는 거지?'
김 수석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다른 상황도 아니고, 뒤지고 있던 경기를 동점으로 만든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타석에 선 타자가 다름아닌 강호였기 때문에 부여 가능한 모든 기회를 몰아주는 것이 옳아 보인다.
그런 김 수석의 의문에 대한 손 감독의 대답은 간단했다.
"오늘 강호 녀석의 타격감이 무척 좋아. 그런데 그 사실을 우리만 알고 있는 것 같나? 다이노스 쪽에서 그런 사실을 모른 채로 투수 교체를 단행하고 있다고? 그게 말이나 되나?"
손 감독의 대답에 김 수석은 잠시 미간을 좁힌다.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를 손 감독의 말에서 유추해보던 김 수석은 '아!'하는 탄성과 함께 하나의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이노스 덕 아웃에서는 이번 타석에서 강호를 거르면 되는 거로구나! 강호의 타석에서 투수 교체를 한다고 반드시 강호를 상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강호 입장에서는 자신의 타석 앞에서 투수 교체가 승부를 볼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 강호가 그렇게 믿고 있는 가운데 다이노스 배터리가 고의사구를 결정해 버린다면 강호의 입장에서는 허무할 수밖에 없어. 그 미묘한 감정이 오늘 경기의 타격감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거야. 다이노스 덕 아웃에서는 투수 교체와 더불어서 강호를 고의사구로 내보내 멘탈을 흔들어 보려는 뜻이로구나! 감독님께서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그거였어.'
김 수석은 이제야 손 감독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다이노스의 투수 교체에 현혹되어 강호와 승부를 단행할 것이라 여겼었는데 그것이 다이노스의 노림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스포츠 종목이 그러하듯 야구 역시 멘탈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스포츠였다.
타격감이 끌어오른 타자에게 허무한 고의사구를 내주어 미묘한 심리 변화를 야기하는 것은 야구 판에서 흔한 심리전 중에 하나인 것이다.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린 김 수석의 시선이 타석에 선 강호에게로 옮겨진다.
'강호야, 흔들리지 마라! 다이노스에서 투수 교체 후에 고의사구로 거른다고 해도 경기 내용 중에 하나일 뿐이야. 기분나빠할 필요가 없는 거야.'
김 수석은 타석에 선 강호를 향해 마음의 소리를 전달한다.
올 시즌 본인이 가진 모든 잠재력을 대폭발시킨 강호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써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잔여 경기가 40경기미만으로 줄어든 가운데 4할 대의 타율과 50-50기록에서 홈런 하나 만을 남겨둔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강호에게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팬들이 강호에게 열광하는 이유 중에 하나, 젊음.
강호의 나이가 아직 많지 않기 때문에 다이노스의 심리전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이노스는 단지 오늘 경기만 보고 있는 게 아니야. 강호에게 지속적인 심리전을 걸어 이번 시리즈 내내 강호를 봉쇄할 작정인 거야. 강호가 그런 심리전에 말려들지 않아야할 텐데.'
김 수석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타석 위의 강호를 바라본다.
강호는 투수 교체 시간 동안 배터 박스에서 물러선 채 바뀐 투수의 투구 속도에 맞춰 배트 타이밍을 수정하는 중이었다.
평소와 같이 표정 변화가 전혀 없는 강호의 얼굴에서 어떤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김 수석의 우려가 자신을 향하는지 알지 못하는 강호였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거르겠구나. 김진석 투수나 강정산 투수가 아니라 박민성 투수를 마운드에 올렸어. 박민성 투수는 나한테 상대 전적이 좋지 않아. 하지만 제인 선배에게는 상대 전적이 좋은 편이지. 나를 거르고, 제인 선배와 상대해서 병살타를 유도할 작전인 거야!'
강호는 이미 다이노스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신인 타자라면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캐치해내며, 배트를 쥔 손에 조금씩 힘을 푼다.
평소 리포팅 자료를 부지런히 읽지 않았더라면 놓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강호는 다이노스 투수들과 자이언츠 타자들의 상대 전적을 꿰뚫고 있는 상태.
지금의 투수 교체가 심리전의 일종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것이다.
과연 그런 생각대로 바뀐 투수 박민성은 초구부터 존을 완전히 벗어난 곳을 향해 공을 던지고 있었다.
노골적인 고의사구였다.
그 모습에 자이언츠 원정 팬들이 야유의 목소리를 쏟아낸다.
"우우우~"
"3연타석 홈런 치나 했더니 고의사구야?! 왜? 겁나나!?"
"고의사구 주지 말고 승부해라!"
자이언츠 팬들이 야유를 쏟아냈지만, 고의사구를 결정한 다이노스의 선택은 번복되지 않았다.
결국 강호는 타격 아이템 사용 유무와 관계없이 고의사구를 얻어 1루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강호가 출루하며 5회 초는 5대 5 동점이 된 가운데 1사 주자 1, 2루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런 가운데 타석에 선 5번 타자 황제인.
그는 강호를 거르고, 자신을 선택한 다이노스의 결정에 불쾌한 감정을 느끼며, 배트를 힘껏 쥔다.
덕분에 스윙 동작이 평소보다 커지게 되었고, 바뀐 투수인 박민성이 던진 3구에 빗겨맞는 내야 뜬공을 때려내고 만다.
띡!
황제인은 고개를 숙이며 1루를 향해 걸음을 떼다가 3루수 방성민이 타구를 포구하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자이언츠 덕 아웃으로 돌아간다.
그런 상황에서 다음 타자로 오른 채중석의 타석에서 또 다시 투수 교체가 단행된다.
그리고 5회 초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7구째 승부 끝에 중석을 향한 주심의 판정은 삼진으로 결론 나고 있었다.
강호를 거르고, 제인과 중석을 선택한 다이노스의 선택이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불펜 투수인 박민성과 강정산을 차례로 올려야 했지만, 더 이상의 실점 없이 이닝을 5회 말로 넘긴다.
5회 말, 자이언츠의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변함없이 성수제 투수였다.
선발 투수 홍성빈을 대신해 3회부터 마운드를 이어 받은 성수제 투수는 승계 주자 실점은 있었지만, 자책점은 없는 상태로 5회 말 마운드에 오른다.
그리고 선두 타자인 다이노스 2번 타자 김성우와 3번 타자 나성건을 차례로 외야 뜬공으로 돌려세우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있었다.
이제 2사 주자 없는 가운데에서 타석에는 다이노스의 4번 타자인 테인즈가 자리 잡는 모습이다.
마운드에 선 성수제 투수는 2사 상황에서 비어있는 루상을 확인하고는 하나의 생각에 사로 잡힌다.
'거를까?'
일부러 볼넷을 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테인즈는 1회에 2타점 2루타, 3회에 2타점 3루타를 때리며 뜨거운 타격감을 선보이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주자가 없는 상황이지만, 테인즈의 타격감을 생각했을 때 장타를 내줄 것 같은 불안감이 생긴다.
하지만 이내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는 성수제 투수.
'아니,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거를 수는 없지. 장타를 얻어맞는다고 해도 홈런만 맞지 않으면 되는 거야. 볼넷을 내줘서 1루로 출루시키나 2루타 정도 얻어맞고, 2루에 출루시키나 결국 비슷한 거잖아? 어차피 다음 타자를 잡아내면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 지을 수 있어!'
수제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테인즈를 향한 초구를 선택한다.
강민수 포수의 초구 싸인은 체인지업.
테인즈의 초구 성향을 정확하게 분석한 구종과 코스였다.
여기에 성수제 투수가 좌완이라는 점까지 고려한 초구 선택은 최적의 결정으로 보여졌다.
그래서 포수 강민수의 싸인대로 초구를 체인지업으로 선택한다.
부웅!
성수제의 손에서 공이 떠나는 것과 동시에 테인즈의 배트가 휘둘러진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수제는 초구를 스윙 스트라이크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테인즈가 초구 느린 변화구에 대한 컨택률이 무척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제의 믿음은 몇 초 만에 깨지고 만다.
따악!!
정확한 임팩트로 인한 묵직한 타격음이 경기장을 가득 채운다.
공을 던진 성수제 투수는 굳이 외야를 향해 고개를 돌려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 것 같았다.
홈런이었다.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던 초구 체인지업이 제대로 통타당해 버린 것이다.
타자인 테인즈는 드물게도 초구 체인지업을 노린 채 자신의 스윙을 선택한 것이었고, 그의 선택은 홈런이라는 결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중계석의 조 캐스터는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 타구는 우측 담장을 완전히 넘깁니다! 테인즈의 50호 째 홈런이 바로 이곳, 마산구장에서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 홈런은 5대 5 동점을 허용했던 팀이 다시 1점차로 앞서가게 만드는 의미 있는 홈런으로 기록됩니다!"
"아...대단합니다. 저는 백강호 선수가 50호 홈런을 먼저 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는데 테인즈 선수가 먼저 해내네요. 테인즈 선수도 50호 홈런 대열에 동참합니다. 외국인 타자 50홈런은 최초 기록이거든요? 테인즈 선수, 정말 대단한 타자입니다."
조 캐스터와 박 위원이 차례로 코멘터리를 더하며, 테인즈의 50호 째 홈런을 수식한다.
두 사람의 해설 속에 마산 구장은 다이노스 팬들이 내지르는 함성으로 완전히 뒤덮이고 있었고, 전광판에는 테인즈의 50호 홈런을 축하하는 글자들이 화면 가득 수놓아지고 있었다.
50호 홈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엄청났다.
KBO리그 역대로 이승엽, 심정수, 그리고 박병호라는 걸출한 거포들만이 밟았었던 꿈의 경지.
2019년 시즌 홈런왕 경쟁에서 50번째 홈런 고지를 가장 먼저 밟은 타자는 다이노스의 테인즈였던 것이다.
테인즈는 마산 야구장의 다이아몬드를 밟으며 홈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면서 다이노스 팬들을 향해 손을 뻗어 자신의 의미 있는 기록을 되새긴다.
그런 테인즈의 모습을 자신의 수비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테인즈의 뒷모습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호였다.
홈을 밟은 후 다이노스 덕 아웃에서 동료 선수들과 기록을 자축하는 테인즈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강호는 다음에 다가올 자신의 타석을 결정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