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25화 (22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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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 타자의 존재감

경기가 종료된 후 꽤나 시간이 흘러있었지만, 자이언츠 홈팬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위즈의 원정 관중들이 경기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뜬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팬들은 자이언츠 선수들이 자신들의 짐을 꾸리고, 덕 아웃에서 벗어날 때까지 경기장에 남아 우뢰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보내주고 있었다.

"와아아아! 오늘 잘했다!!"

"내가 이맛에 야구 본다!"

"백강호 선수 최고!"

열화와 같은 홈팬들의 환호 속에 경기장을 나선 자이언츠 선수단.

그들은 경기장 밖에서 선수단을 기다리고 있는 팬들로 인해 퇴근을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퇴근에 앞서 잠시 경기장 밖을 확인하고 돌아온 누군가가 입을 연다.

그는 오늘 경기에서 6번 타순 지명 타자로 출장한 채중석이었다.

"우와아~ 밖에 난리도 아니야. 한 번 나갔다가 싸인만 스무 개나 하고 들어왔네."

감탄사를 토해내며 혀를 내두르는 중석의 말에 곧장 토를 다는 인물이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동점 득점을 따낸 문표가 숙적인 중석의 말에 곧장 반박하고 나선다.

"뻥치지 마십시오. 누가 중석 선배한테 싸인을 해달라고 합니까? 민수 선배나 제인이, 강호나 대우 정도면 모를까, 중석 선배 같은 비인기 선수한테 싸인 해달라는 팬이 어딨어요?"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따져 묻는 문표의 말에 중석이 순간 발끈한다.

"뻥 아냐 인마! 그리고 비인기 선수라니? 그게 말이야, 방구야? 야구 판에서 내 이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문표 너야말로 비인기 선수지. 시즌 타율이 3할 대면 뭐해? 사람들이 네 이름도 모르는데."

중석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문표의 반응 또한 만만치 않다.

문표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며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모습이다.

"그런 말은 3할 치고 하십시오. 제 시즌 타율은 3할 7리. 중석 선배 시즌 타율은 2할 9푼 7리. 무려 1할 대 차이 아닙니까?"

"그게 왜 1할 대 차이야? 1푼 차이구만."

"우리 같은 야구 선수들한테는 타율 앞자리가 중요한 거지요. 2할 대냐 3할 대냐에 따라서 몸값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안 그래, 강호?"

문표는 중석과 논쟁을 벌이다가 곁으로 다가온 강호에게 무의식적으로 묻고 있었다.

자신의 짐을 챙겨들고 걸음을 옮기던 강호는 문표의 말에 발걸음을 멈춘 후 대꾸한다.

강호에게서 자신의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대답을 원했던 문표는 이어지는 강호의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짓게 된다.

"모르겠는데요. 저는 4할 치고 있는데 연봉 2900받습니다."

"..."

강호의 대꾸에 순간 말을 건넨 문표도, 중석도, 주변에 있던 많은 선배 선수들이 입을 다물게 된다.

후반기까지 무려 4할이라는 엄청난 타율을 기록하고 있는 강호의 몸값이 고작 연 2900만원이라는 소리에 고 연봉을 받는 선배선수들에게서 숙연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문표는 자신이 괜한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고 여기며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말을 꺼낸다.

그런데 그런 문표의 이어진 말이 분위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억대 연봉 받는 선배들이 연봉 500정도씩 걷어서 강호에게 얹어주면 되겠네. 프로 선수는 실력으로 대접받아야지. 아무리 데뷔시즌이라도 최저연봉을 받아서야 되겠어? 안 그렇습니까? 중석 선배."

문표는 이번에는 중석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그의 물음에 중석은 한 일자로 입을 굳게 다문다.

무려 4억의 연봉을 받는 중석이었기 때문에 문표의 말대로 진짜 500만 원 정도를 강호에게 줘야하는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근처에 있는 몇몇 고 연봉 선수들이 움찔하는 모습을 보니 그들 역시 문표의 말에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아~ 이 아재들, 장난 좀 쳤는데 너무 정색들 하시네. 누가 진짜 500을 주랍니까? 아재들 아니랄까봐 농담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네."

문표는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지만,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야기의 당사자인 강호가 자리를 벗어나 버리자 더욱 난감해지는 문표였다.

고액 연봉을 받는 선배 선수들 중심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괜히 미안해지는 문표.

결국 고민 끝에 분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아니, 정 불편하시면 선배님들이 회식이라도 시원하게 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구단 연승 기록도 갱신 중이고, 오늘 경기도 이겼지 않습니까? 요즘 분위기에서 술자리는 힘들겠지만, 삼겹살 정도는 먹어도 좋지 않을까요. 우리 구단이 회식을 안 한지도 오래됐고요."

묘한 분위기를 개선하려는 문표의 임시방편은 회식이었다.

그런데 임기응변으로 꺼낸 문표의 회식 제안이 묘한 설득력이 있는 모양이다.

고참 선수들을 중심으로 문표의 회식 제안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 나쁘지 않지. 내일이 휴식 일이잖아? 문표 말대로 요즘 우리가 회식 안 한지도 너무 오래됐고, 선수들끼리 모여서 술 마시는 거만 아니면 나쁠 것도 없잖아?"

문표의 말에 가장 먼저 동조하고 나선 것은 뜻밖에도 항상 문표와 대립각을 세우던 중석이었다.

중석이 문표의 곁에서 동조하고 나서자 중견 선수인 최훈과 오진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는다.

"저희가 회식을 너무 쉬기도 했지요. 그리고 지금 경기장 밖에 팬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어서 당장 나가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팬들이 조금 빠질 때까지 회식 장소나 섭외해 보는 게 어떨까요?"

"그거 좋네! 어제도 집에 가는 길에 팬들한테 붙잡혀서 싸인만 주구장창 하다가 손목 나가는 줄 알았어요. 경기 때도 손목 부상은 잘 없었는데 싸인하다가 손목 부상 입는 줄 알았다니까요. 경기장 밖이 한산해질 때까지 구장 내에서 시간 좀 때워야 하는데 그 시간에 회식 장소 정하시죠? 사직동은 말고요. 사직동에서 회식하다가는 밥 먹는 내내 싸인만 하다가 끝날 거예요."

최훈과 오진택이 중석에 이어 긍정적인 내용으로 의견을 더한다.

선수단의 최고참이 할 수 있는 중석에 이어 중진급 선수들인 최훈과 진택마저 동조하고 나서자 다른 고참 선수들도 그 분위기에 동참하는 모습이었다.

10년 차 이상 선수들이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며 문표가 제안한 회식 안을 수용하고 있었다.

난감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의견을 낸 문표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뭐야? 진짜 회식하는 거야? 고액 연봉자들이 회식비 내면 나는 포함 안 되는 거겠지? 좋아! 공짜 회식이다!'

문표는 오랜만에 형성되고 있는 회식 분위기에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제가 장소를 섭외해 보겠습니다. 사직동에서 먼 곳으로 다가요."

문표는 신이 난 얼굴로 선수들의 회식 자리를 확정 지으려고 한다.

그 때 누군가가 선수단 라커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창 회식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을 무렵 라커룸에 들어선 인물을 확인하고는 선수들의 입이 다물어진다.

라커룸에 들어선 이는 김민철 수석 코치였기 때문이다.

최근 자이언츠가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사이의 관계가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수석 코치의 입장에서 선수들의 회식이 좋게 여겨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선수들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김 수석이 라커룸에 찾아와 선수들에게 건넨 말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오늘 17연승을 기념해서 회식 자리가 있을 거다. 구단에서 자리를 잡아줬으니까 가급적이면 빠지지 말고 참가하도록 해. 뭐 술은 못 마시겠지만, 고기는 배터지게 먹을 수 있을 거야."

김 수석은 그렇게 말을 전한 뒤 라커룸을 벗어난다.

문표가 지핀 회식이라는 불씨는 김 수석이 전달한 말로 확정되고 있었다.

김 수석이 라커룸을 나가자 문표가 가장 먼저 '예스! 회식이다!'라고 말하며 라커룸에 없었던 후배 선수들에게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한편, 일찍 퇴근하기 위해 자신의 백 팩을 짊어 메고 경기장을 벗어나던 강호.

그는 경기장을 나서자마자 구름 떼 같은 인파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마주하고 있었다.

17연승이라는 대업을 조금 더 만끽하기 위해 선수단을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인파가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이 정도 인파가 장사진을 치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강호로서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낄 무렵, 강호를 근거리에서 직접 보게 된 팬들은 순간 '우와아!'하는 함성을 지르며 빠르게 다가온다.

출입구에는 선수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경호 인력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그들로서도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강호의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백강호 선수! 싸인 좀 부탁합니다!"

"저는 사진 좀요!"

"그럼 나도 사진!"

"저는 싸인하고 사진 다 해줘요!"

"저랑은 결혼 해줘요!"

팬들은 강호를 향해 달려들며 각자의 요구 사항을 밝힌다.

강호는 그런 팬들의 요구에 주춤거리면서도 싸인이나 사진 요청을 거절하지는 않는 모습이다.

"다치니까 밀지 마시고, 줄을 서시면 한 분씩 해드리겠습니다."

강호는 팬들이나 경호원들이 다칠 것을 우려해 큰 목소리로 싸인을 해주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팬들은 고맙게도 '네!'하고 대답하며 먼저 달려든 순서대로 줄을 선다.

평소 강호가 구단과의 프로모션 행사를 통해 팬들과 친밀하게 교감하는 선수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팬들로서는 굳이 달려들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강호 본인이 싸인을 해준다고 했으니 그 말을 믿고 빠르게 줄을 형성해 나간다.

그런 광경은 선수들을 오랜 시간 경호해온 경호원들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던지 혀를 내두르며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였다.

"우와, 장난 아니네. 팬들이 백강호 선수 말은 엄청 잘 듣네."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 전에 저희가 목 터지게 소리칠 때는 듣는 시늉도 안 하더니만 백강호 선수 한 마디 듣고는 줄까지 서네요. 나 참."

강호의 빠른 대처로 할 일이 없어진 경호원들은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경호원들은 달려드는 팬들의 모습에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강호의 말 한 마디에 상황이 정리된 것이 신기했는지 자신들의 할 일도 잊은 채 지금의 상황을 바라본다.

그런 그들을 향해 경호 실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지시를 내렸다.

"너희 둘은 그렇게 멀뚱히 서있지 말고, 책상이나 의자 좀 갖고 와! 백 선수가 싸인 빨리 할 수 있게!"

"아, 네!"

경호 실장의 지시로 불편하게 서서 싸인을 하고 있던 강호의 앞에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구비된다.

어느새 강호의 팬 싸인회가 되어버린 경기장의 출구.

한동안 팬들에게 싸인을 해주거나 셀카를 찍어주던 강호는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강호 후배! 여기 있었어? 뭐하고 있어..."

강호에게 다가온 사람은 문표였다.

그는 후배 선수들에게 회식 소식을 전파하다가 강호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들었지만, 강호의 휴대폰은 응답이 없었다.

별 수 없이 출입구까지 나온 것이었는데 수많은 인파에 둘러 싸여 그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강호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문표의 귓가에 신이 난 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백강호 선수,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어요!"

"저는 싸인 말고 남친 해주시면 안 돼요?"

"저는 남친 말고 결혼이요!"

반쯤 농담이 섞여있는 젊은 여자 팬들의 함성에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다른 팬들 역시 '하하'하고 웃음 짓는다.

강호 역시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결혼은 아직 생각 없고, 싸인은 해드릴게요'라고 재치 있게 응수하며 팬들과 소통의 장을 이어간다.

문표로서는 부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강호 후배, 선수단 회식 있단다. 17연승 기념으로다가. 지금 출발한다니까 강호 후배도 어서 가자고."

문표는 부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강호의 유니폼을 잡아끈다.

젊고 예쁜 여자들의 중심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강호를 보고 있노라니 어서 그를 구장 안으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문표의 행동에 인산인해를 이루던 팬들이 일제히 문표를 노려본다.

"나는 아직 싸인 못 받았어!"

"회식이라고? 우리 백강호 선수한테 술 먹이려고?!"

"하여튼 운동선수라는 사람들이 술이나 마시고! 그래서 다음 경기 하겠어요?"

강호를 데려가려는 문표의 모습에 팬들이 성토의 목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쪽에 물러나 있던 경호원들이 문표의 주변으로 다가가 보호를 해야 할 정도였다.

문표는 오늘 자신의 말 한 마디가 여러 가지 파장을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며, 서둘러 변명의 말을 꺼낸다.

"아닙니다! 저희 술은 안 마실 거예요! 그냥 밥만 먹는 겁니다! 구단에서 17연승 기념으로 마련한 회식 자리라서 빠질 수가 없는 거잖아요? 선수들도 다 같은 직장인들이라고요."

문표는 그렇게 성난 팬들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변명의 말을 꺼낸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않는 일부 팬들의 눈길은 여전히 사나웠다.

그 때 강호가 문표를 돕기 위해 나서서 해명의 말을 꺼낸다.

"회식 자리에서 술은 안마십니다. 감독님부터 선수들까지 술 없이 식사만 하는 게 팀 회식이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강호는 문표의 말을 믿지 않는 팬들에게 그렇게 해명의 말을 더한다.

거기에서 조금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곁에 있는 문표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을 붙인다.

"정 걱정되시면 회식 자리 사진을 문표 선배 SNS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강호는 팬들이 우려하는 음주 회식에 대한 해결책을 그렇게 내놓았고, 강호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자 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 후 몇 분 동안 다수의 팬들과 사진을 찍어주고 구장으로 다시 돌아간 강호.

그런 강호에게 팬들의 성난 눈초리가 무서워 잠자코 있던 문표가 말을 붙여온다.

"왜 내 SNS야? 강호 후배 SNS에 올리면 되잖아?"

문표는 입을 다물고 있던 몇 분의 시간 동안 그것이 궁금했는지 팬들과의 거리가 멀어지자 곧장 물어온다.

강호는 그런 문표를 향해 피식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SNS 안 하잖아요. 이참에 문표 선배 팔로어도 늘어나고 좋은 거죠."

"강호 후배가 그렇게 말했다고 설마 팔로어가 늘어나기야 하겠어? 사진만 부지런히 캡쳐해 가겠지."

문표는 이 때 강호가 건넨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강호의 말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회식 자리에 참석한 후에야 알게 되는 문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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