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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 타자의 존재감
7회 말 2사 만루 상황.
자이언츠가 오늘 경기에서 맞이하는 네 번째 만루 찬스였다.
세 번의 만루 기회를 무득점으로 놓쳐버렸기 때문에 이번 기회마저 무득점에 그친다면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할 것으로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이언츠 덕 아웃은 오늘 경기의 4번 타자였던 스팅을 대신해 또 다른 대타를 올리고 있었다.
스윽.
자신의 배트를 챙겨들고 그라운드로 발걸음을 옮기는 강호.
그가 그라운드로 걸음 옮기는 모습을 확인한 자이언츠 팬들은 강호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사직구장을 함성으로 뒤흔든다.
"와아아아! 그래, 이기려면 백강호를 진즉에 냈어야지! 지금도 안 늦었으니까 안타 하나만 치자!"
"볼넷도 좋으니까 제발 1점이라도 내보자!"
"백강호! 선수 홈런 하나 부탁해요!!"
일부 팬들은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강호의 귀에까지는 닿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3만 명에 가까운 관중들이 일제히 소리치고 있는 목소리는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에게는 그저 '와아아아'하는 함성으로만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라운드 위 자신의 수비 자리에 위치에 있는 위즈의 선수들은 자신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관중들의 함성 소리에 혀를 내두르는 모습이었다.
"우와, 장난 아니네. 자이언츠 홈 응원이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어?"
"백강호 인기가 대단하네. 혹시 백강호가 안타라도 때리면 고막 터지는 거 아냐?"
위즈의 야수들은 경기장을 뒤흔드는 자이언츠 홈 팬들의 함성 소리에 순간 집중력을 잃은 채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동료 선수들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그들이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기에는 관중석의 함성 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컸다.
"뭐? 뭐라고? 하나도 안 들려! 경기장이 너무 시끄러워서 안 들린다고!"
"뭐?! 할 말 있으면 경기 끝나고 해! 하나도 안 들린다!"
위즈의 야수들은 서로 의사소통 하는 것을 포기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경기 내용에 집중하기로 한다.
자칫 방심하고 있다가 강호가 때리는 타구를 놓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막을 때리는 팬들의 함성 속에서 타석에 선 강호.
강호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응원의 목소리에 긴장이 될 법도 했지만,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낀다.
'가장 원하는 상황에서 타석에 섰다. 긴장할 필요도, 망설일 필요도 없어. 애초 계획대로 팀이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타점만 생산해 내면 되는 거야!'
타석에 선 강호는 대타 찬스에서 7회까지 끌려가던 경기를 뒤집을 생각이었다.
최근 들어 일회용 타격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 타석만큼은 역전을 위한 아이템 사용을 망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주자 만루 상황입니다.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시야에 표시되는 시스템의 메시지를 확인한 강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팀의 연승 기록이 걸려 있지 않았더라면 아이템 사용 없이 승부를 벌일 수도 있었다.
팀이 가진 최다 연승이 깨지기 전까지는 승부처에서도 타격 아이템 사용 없이 승부를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다.
'팀의 17연승이 걸려 있는 경기야. 나를 대타로 세우기 전까지 감독님의 고민이 깊었을 텐데 어이없게 아웃될 수는 없지. 타격 아이템으로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겠어.'
강호는 손 감독의 의중을 유추해보며 타석에 자리를 잡는다.
어느 정도는 손 감독의 의중이 짐작이 가는 강호였다.
최근 강호 본인을 향한 우려의 시선과 타석 관리에 대한 여론들. 그것을 의식한 손 감독이 오늘 선발 라인업에서 자신을 제외했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휴식을 위해서 선발 제외했다는 말은 대외적인 명분일 뿐이야. 감독님의 진짜 의도는 여론을 잠재우겠다는 생각일 거야. 단순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고 여긴다면 감독님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에 불과해. 손 감독님은 한 가지 결정으로 하나의 이득만 얻으려는 다른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니까.'
강호는 손 감독이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과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승부를 벌이고 있다는 점을 짐작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손 감독의 그런 의중을 눈치 챈다면 무모하다고 말하겠지만, 강호 본인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한테는 득점권 상황을 반드시 타점으로 연결할 수 있는 타격 아이템이 있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위험률이 높은 승부일지 몰라도 내게는 100%의 승률이야. 여기서 설령 고의사구가 나온다고 해도 1타점은 보장받을 수 있어. 물론 위즈 배터리에서 고의사구를 낼 리는 없겠지만.'
생각을 정리한 강호는 마운드에 오른 투수를 응시한다.
위즈의 투수는 언더핸드인 김기령에서 또 다시 바뀌어 있는 상태였다.
바뀐 투수는 위즈의 셋업 투수인 한일균 투수.
99년생의 어린 투수로 쓰리쿼터 방식으로 공을 던지며 올 시즌 2점대의 방어율을 마크하는 중이었다.
쓰리쿼터(Three quarter)방식이란 공을 쥔 손을 귀와 어깨의 중간 높이로 올려 비스듬히 던지는 투법을 말한다.
보통 정통파라고 불리는 오버핸드와 허리 위치에서 공을 던지는 사이드핸드의 중간 위치로 공을 던진다고 보면 된다.
올 시즌이 데뷔 시즌인 한일균 투수가 2점대의 낮은 방어율을 거두고 있는 원동력에는 그가 쓰리쿼터 유형의 투수라는 점도 있었지만, 더욱 큰 요소도 존재했다.
'쓰리쿼터 유형의 좌완 투수. 국내 리그에서는 흔하지 않은 투법으로 공을 던지는 투수지만, 지금 타석에서 만큼은 무의미한 장점일 거야. 미안하지만 승부는 내가 가져가야겠다.'
강호는 흔치 않은 유형의 신예 투수에게 속으로 먼저 사과를 전하며 그의 초구를 향해 배트를 휘두른다.
한일균의 초구는 기간제 아이템의 효과로 표시되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꽤나 빠지는 바깥쪽의 공이었지만, 강호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배트를 낸다.
따악!
밀어치는 타법으로 때려낸 타구가 호쾌한 타격음과 함께 외야를 향해 뻗어나간다.
최근 들어 타격 아이템을 사용하며 타석 당 지켜보는 볼의 개수가 늘어난 강호. 그러나 이번 승부만큼은 한일균 투수의 공을 길게 보지 않고 곧장 배트를 낸 것이다.
혹시라도 위즈의 배터리가 자신에게 어려운 승부를 펼치다가 볼넷을 내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안타를 허용하면 2타점 이상의 실점이 되지만, 볼넷을 내주면 1실점을 하는 셈이니까. 고의 사구는 없을 수 있어도 볼넷이 없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한일균의 초구를 컨택한 강호의 생각은 그러했다.
그리고 초구를 타격한 강호의 타구는 우측 담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파고드는 모습이었다.
"이익!"
위즈의 우익수인 하준혁이 억눌린 신음과 함께 힘껏 점프해 보았지만, 강호의 타구는 하준혁의 키를 넘어 우측 펜스를 강타하고 있었다.
터엉!
펜스에 직격하는 타구를 확인한 자이언츠 홈 팬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진다.
이미 강호가 한일균의 초구를 타격할 때부터 '와아아!'소리와 함께 커지기 시작한 함성 소리는 그라운드 위를 달리는 선수들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고 있었다.
"와아아아!!"
"돌아, 돌아! 홈까지 들어가!"
"그래! 바로 이거지! 황인태 들어가고! 최문표도 들어가고! 박철도 어서 들어가! 싹 다 홈으로 들어가라고!"
자이언츠 팬들은 강호의 안타에 홈을 밟은 인태와 문표의 모습을 차례로 확인하며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팬들이 외치는 바람대로 1루 주자였던 박철마저 3루 베이스 코치의 시그널을 확인한 후 곧장 홈으로 파고든다.
그와 동시에 뒤늦게 공을 잡은 우익수 하준혁의 송구가 홈으로 향한다.
파악!
하준혁의 송구는 빠르게 홈으로 파고든다.
중간에 위즈의 2루수인 박경석이 하준혁의 송구를 커트하려고 했지만, 송구의 높이가 높았던 까닭에 공은 그대로 홈으로 향한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강호는 2루 베이스를 밟은 후 3루를 향해 내달린다.
"세이프!"
박철의 홈 승부에 대한 주심의 판정은 세이프였다.
주심의 판정을 확인할 사이도 없이 위즈의 포수 안진형이 급히 몸을 일으켜 미트에 든 공을 3루수를 향해 던진다.
그 사이 강호의 빠른 발이 3루 베이스를 향해 쇄도해 들어가고, 3루수 바르테의 글러브가 강호의 발목을 태그 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세이프!"
3루심의 판정은 세이프였다.
이미 3타점을 확보한 상황이어서 자이언츠 홈 팬들의 환호성이 3루심의 목소리를 가릴 정도였다.
3루심은 고막을 때리는 관중들의 함성 때문에 타자 주자인 강호나 3루수인 바르테가 제대로 콜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한 번 더 양팔을 활짝 펼치며 세이프 시그널을 보낸다.
"세이프!"
재차 세이프를 선언하는 3루심의 판정을 확인한 강호는 슬라이딩을 위해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며 홈팬들을 향해 주먹을 들어 올린다.
그 모습에 자이언츠 홈 관중들의 환호성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와아아아!! 역전이야!"
"오늘 경기는 이기러 가자! 17연승 가자고!"
홈 팬들은 지겹도록 터지지 않던 타선을 지켜보다가 7회 상황에서 극적으로 나온 강호의 3타점 싹쓸이 3루타에 목소리를 드높인다.
그들은 지금의 역전 타점으로 자이언츠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역전에 대한 찬사는 곧 3루 베이스를 밟고 선 강호를 향해 쏟아진다.
"우리 팀의 4번 타자는 역시 백강호지! 스팅이나 황제인은 안 돼!"
"오늘 백강호 선수가 선발에서 빠지니까 만루 찬스도 점수로 연결되지 않잖아! 4번 타자는 그냥 백강호 선수 고정으로 줍시다!"
"황제인 3번! 스팅 5번! 백강호 선수는 4번! 이게 우리 자이언츠 중심 타선 아니겠어? 그렇게 정리하자고!!"
팬들은 강호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목 놓아 외치고 있었다.
자이언츠 덕 아웃에 자리한 손 감독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참 동안이나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이다.
덕 아웃의 손 감독은 자이언츠 팬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또한 손 감독의 곁에 선 김민철 수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들려오는 팬들의 목소리에 김 수석이 결국 손 감독을 향해 입을 연다.
"감독님, 이제 강호를 4번 자리에서 빼기는 힘들겠는데요? 이런 경기를 한 타석 만에 뒤집어 버리는데 어떻게 선발에서 제외시키겠습니까? 휴식 차원에서 뺀다는 말도 더는 안 통할 것 같습니다."
김 수석은 사직구장을 뒤흔드는 팬들의 성화에 혀를 내두르며 손 감독에게 말을 건넨다.
강호가 붙박이 4번 타자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팬들의 성원은 덕 아웃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누군가 손 감독에게 팬들의 의지를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김 수석이 한 발짝 나서며 입을 연 것이었다.
그런 김 수석에게 손 감독이 대답의 말을 꺼낸다.
"그래. 늦기는 했어도 팬들이 그 사실을 알았으면 충분한 거야. 17연승보다 값진 결과이지 않은가?"
"네?"
손 감독은 자신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김 수석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그라운드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그런 손 감독의 시선 너머에는 팬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는 강호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잘했다. 강호! 이것으로 충분한 거야. 어쩌면 팀의 연승이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구나.'
짙은 색 고글에 가려진 손 감독의 눈은 지금 웃고 있었다.
승률이 높은 모험이긴 했지만, 팀의 17연승이 달려 있는 경기를 걸었던 모험은 성공이라는 결과로 나타나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을 확실하게 만들려면 경기를 승리로 따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손 감독은 강호의 3루타로 뒤집어버린 경기를 지켜내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여 코치! 불펜에 연락해 둬. 성수제와 표성태, 권대우를 모두 준비시켜 두라고!"
손 감독의 목소리는 여전히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팬들의 함성을 뚫고 여민석 투수코치에게 전달된다.
여 코치는 '네!'하는 대답과 함께 인터폰을 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경기는 그것으로 마무리 된다.
8회 초와 9회 초는 여섯 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기 위해 팀에서 가장 확실한 불펜 투수 세 명을 차례로 올리며 무실점으로 나머지 이닝을 종료시킨다.
3대 2.
시종일관 위즈에게 끌려가던 자이언츠는 대타로 나선 강호가 상대 투수의 초구를 때려 뽑아낸 3타점 3루타로 인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경기로 강호가 자이언츠라는 팀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모든 팬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게 된다.
17연승과 강호라는 4번 타자의 존재감.
팬들이 환호하는 것은 17연승이라는 결과물이었지만, 손 감독을 포함한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경기를 통해 자이언츠가 얻은 것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강호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싣기로 유명한 오썬 스포츠의 허일수 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 기자는 자이언츠와 위즈의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묘한 전율을 느낀다.
그런 허 기자의 감동은 곧 하나의 문구를 통해 기사화되어 빠르게 온라인상으로 퍼져 나간다.
[백강호, 4번 타자의 존재감. 한 번의 스윙으로 팀의 17연승을 지켜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