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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의 문턱에서
위즈와의 경기는 이제 6회 말로 넘어가 있었다.
자이언츠의 무득점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강호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강호와 마찬가지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선수들 역시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강호를 포함한 벤치 멤버들의 시선 속에 6회 말 선두 타자로 타석에 오른 선수는 문표였다.
딱.
투수와의 5구째 승부 끝에 문표가 때려낸 타구가 그라운드로 가라앉는다.
타구가 2루수 정면 땅볼이 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벤치 멤버들이 일제히 ‘아~’하는 탄식을 토해낸다.
“오늘만 몇 개째 땅볼이야? 웬만한 공은 건들면 죄다 땅볼이네.”
“조금 전에도 포심이었지? 어떻게 포심으로 땅볼을 유도하는 거야?”
“오늘 헤인즈 포심 무브먼트가 작살이네!”
“그래도 제구력이 좋은 것 같지는 않네요. 볼넷도 많이 내주고 있잖습니까? 언터쳐블한 공은 아니어서 정타도 몇 개 때려냈는데 이상하게 득점이 안 나오네요.”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지루한 벤치 상황에 의미를 더한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경기 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일부 선수들은 몸을 풀면서 코칭스태프들에게 자신의 좋은 몸 상태를 어필하기도 했다.
대타나 대수비로라도 기회를 얻기 위해 애를 쓰는 선수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강호는 그런 선수들의 한편에 앉아 오랜만에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된 감상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어. 벤치에서 쉬는 것도 계속되다 보면 할 짓이 못 된다는 걸.’
강호는 피식 웃음 지으며 주변 선수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동안 팀의 4번 타자로 매 경기에 선발 출장하다보니 잠시 잊고 있었는데 자신이 벤치에서 대기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점은 모든 선수들의 공통점인 모양이었다.
다른 선수들 역시 벤치에서 기다리는 것에 대한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대수비로라도 안 내줄려나? 이대로라면 경기를 그냥 내줄 것 같은데요?”
“왜? 재호 네가 대수비로 올라가면 경기 역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뇨, 어차피 내준 경기, 공이라도 한 번 만져보게요.”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 연승 중인데 부정 타잖아.”
“제가 말 한 번 잘못했다고 깨질 연승이면 16연승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그건 그렇지. 재호 너 정도가 저주한다고 깨질 연승이면 여기까지 안 왔겠지. 강호 정도면 몰라도.”
백업 외야수인 김재호와 대화를 나누던 2루수 최훈이 별안간 강호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최훈의 말에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강호에게로 몰려들고 있었다.
강호는 자신에게로 몰려드는 선수들의 시선을 느끼며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렇게들 보십니까? 저는 팀이 지라고 저주는 안할 겁니다.”
약간의 진심을 담은 강호의 농담에 그를 바라보던 선수들이 웃음 짓는다.
그 속에는 재호와의 대화중에 강호의 이름을 입에 담은 최훈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최훈은 황제인과 함께 1군에 복귀하긴 했지만, 어느새 2루수 자리를 굳혀버린 황인태와의 경쟁에 밀려 벤치에서 대기하는 경우가 잦아져 있었다.
그럼에도 큰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모습으로 강호에게 말을 건네 온다.
“당연한 거지. 팀의 4번 타자가 팀 연승 깨지라고 저주나 하고 그러면 안 되지. 강호, 오늘 컨디션은 어때? 이제 충분히 쉬었으니까 7회나 8회쯤에 타점 하나 올릴 수 있겠어?”
최훈의 물음에 벤치에 앉아 있는 더 많은 선수들의 시선이 강호에게로 모여든다.
마치 강호가 7회나 8회에 대타로 오를 것을 확신하는 듯한 최훈의 말에 동의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주전 선수들이 아닌 백업 선수들이나 대기 멤버들에게도 4번 타자로서 강호의 입지가 확고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즌 초만 하더라도 최훈 선배가 나보다 더 확고한 주전 자리를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입장이 반대가 되고 말았구나. 최훈 선배는 인태에게 밀려 백업 내야수가 돼버렸고, 정해진 포지션 하나 없던 나는 팀의 4번 타자가 되었어. 하지만 이 자리가 영원한 것은 아니야.’
강호는 최훈에게 대답하기 전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된 오늘 경기의 감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2군에서는 늘 있던 일이었고, 1군에 올라온 4월에도 강호는 치열한 주전 경쟁을 벌여야만 했었다.
그런데 팀의 4번 타자가 되면서 그런 생존 경쟁은 강호 본인을 비껴나가 있었다.
여기서 타성에 젖어버린다면 확고해 보이는 4번 타자 자리와 유격수 포지션이 자신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음을 눈앞의 최훈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최훈 선배는 잘못이 없어. 작년 시즌의 혹사가 올 시즌의 부상으로 최훈 선배의 발목을 잡은 것뿐이야. 선수 본인이 잘못하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는 것이 1군 무대야.’
강호는 최훈 본인에게는 말하지 못할 생각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입을 연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참 선배인 최훈의 물음에 답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타점은 모르겠지만, 헤인즈가 던지는 공에 타이밍 맞출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강호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대답으로 최훈의 물음에 답하고 있었다.
최훈은 컨디션이나 몸 상태를 물었던 것이었는데 강호는 상대 선발 투수 헤인즈에 공략에 대한 자신감으로 답변을 대신한 것이다.
“호오~ 정말이야? 그럼 강호 너는 헤인즈 공에 안타를 때려낼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네? 이거 감독님이 들으셨으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이야긴데? 오늘 경기에서 스팅이 날려먹은 득점권 기회가 두 타석이나 되잖아? 강호를 라인업에서 빼지 않았으면 오늘 경기는 쉽게 먹는 거였어.”
최훈은 강호의 대답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밝히고 있었다.
그는 강호가 라인업에서 빠지지 않고, 평소와 같이 팀의 4번 타자로 출장했더라면 오늘 경기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오늘의 4번 타자로 낙점된 스팅이 들었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최훈은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스팅은 2아웃 상황인 지금 타석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최훈은 타석에 선 스팅을 흘낏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간다.
“스팅이 요즘 한국말이 부쩍 늘었어. 이런 말을 스팅이 있는 자리에서 했다가는 아작이 나버릴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도 스팅 욕할 거 있으면 지금 해. 기회야, 기회.”
최훈은 강호와의 대화를 유머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 때, 6회 말 공격의 선두 타자로 나서 내야 땅볼을 치고 덕 아웃으로 들어와 있던 문표가 최훈과 강호를 향해 다가온다.
문표는 계속되는 땅볼로 인해 조금은 소심해져 있는 모습이었다.
“훈이 너 강호 후배랑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혹시 내 욕하고 있었던 거 아니지?”
손에 쥔 생수를 들이키며 묻고 있는 문표의 물음에 최훈이 ‘설마요’라고 답하며 근처에 있던 글러브를 들어올린다.
최훈이 손에 쥔 글러브는 문표의 1루수 글러브였다.
“괜한 의심하지 마시고 수비하러 가십시오. 이닝 종료됐습니다.”
“뭐? 벌써?”
최훈은 문표의 글러브를 건네며 말하고 있었다.
이닝이 종료되었다고.
문표가 내야 땅볼로 아웃 된지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이닝이 종료되어 버린 것이다.
2아웃 상황에서 타석에 섰던 스팅이 헤인즈의 4구만에 삼진으로 물러나고 이제 이닝은 7회 초로 넘어가고 있었다.
문표는 목을 축일 사이도 없이 최훈에게서 자신의 글러브를 건네받고는 그라운드로 발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내쉰다.
“아이고, 오늘은 물 마시를 틈도 없네. 무슨 경기가 이래? 오늘 경기는 컨셉이 뭔지 모르겠다.”
문표는 풀리지 않는 오늘 경기에 대해 불평하며 자신의 1루수 자리로 달려 나간다.
그런 문표가 남기고 간 농담에 살짝 웃음 짓고 있던 강호.
누군가가 그런 강호의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강호야.”
강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린다.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는 타격 코치인 정호종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는 오늘 경기를 지켜보며 다소 답답함을 느끼던 강호에게 정 코치의 목소리는 구원의 목소리 같았다.
‘혹시?’
강호는 한 줄기 희망을 가져보며 정 코치의 부름에 ‘네!’하고 답한다.
“컨디션은 좀 어때?”
“좋습니다. 6회까지 쉬었더니 좀이 쑤십니다.”
컨디션을 묻는 자신의 물음에 활기찬 목소리로 답하는 강호의 행동에 정 코치는 피식 웃음 짓게 된다.
현역 시절에 이글스의 4번 타자 자리를 도맡았던 정 코치는 지금 강호의 입장이나 감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뛰고 싶어서 안달이 났겠지. 시즌이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몸은 피곤해도 라인업에서 제외돼 버리면 몸에 좀이 쑤시는 게 당연할 거야.’
정 코치는 강호의 현재 심경을 정확하게 간파하며 입을 연다.
“7회 말에 상황이 만들어지면 대타로 오르게 될 테니까 몸을 좀 풀어놓도록 해.”
강호는 정 코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힘 있게 대답한다.
“네!”
힘찬 대답과 함께 온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한다.
오늘 경기에서는 휴식을 취하라는 손 감독의 지시로 경기 전 훈련도 일부 생략했던 강호였다.
몸을 풀기 위해서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는데 정 코치의 지시 하나로 준비 운동은 필요 없어졌다.
강호는 대타로 나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빠르게 뛰기 시작한 맥박을 느끼는 중이었다.
‘뒤집어야 돼! 오늘 같은 경기를 내주게 되면 다음 주부터 시작될 다이노스 전까지 나쁜 분위기가 이어지게 될 거야.’
강호는 천천히 몸을 풀며 타석에 섰을 때의 전략을 구상해 본다.
최근 며칠 동안은 타석 상황에서 일회용 타격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굳이 타격 아이템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좋은 타격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된 채로 경기를 관망하게 되자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오늘 경기에서 타석에 설 수만 있다면 타격 아이템을 써서라도 경기의 분위기를 뒤집어야 해!’
강호는 대타로 올랐을 때 상황에 맞는 타격 아이템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팀이 2점 차로 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루상에 주자만 나가 있다면 한 방의 홈런으로 동점까지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대타로 타석에 서면 몇 개 남아있는 ‘홈런’아이템을 써서라도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
‘내가 대타로 타석에 서면 고의사구가 나올 가능성이 있어. 만약 고의사구 작전이 나와 버린다면 홈런 아이템을 쓴 것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 거야.’
강호는 상대 배터리에서 자신을 고의사구로 거를 수 없는 상황에 대타로 섰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이미 전반기 동안의 타석 상황을 통해 일회용 타격 아이템을 사용하더라도 상대 배터리가 고의사구로 거르려 한다면 사용한 타격 아이템이 취소된 후 반환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제 아무리 만능 치트키인 타격 아이템을 쓰더라도 고의사구가 나와 버린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마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무사나 1사 상황에서 타석에 서는 게 좋아. 가장 안 좋은 상황은 2사 주자 2루나, 2사 주자 3루 상황일 때야. 그런 상황에서는 나를 고의사구로 거를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아질 테니까. 가장 최악은 주자 없는 상황에서 대타로 서는 거고. 제발 타격이 가능한 상황에서 대타로 서야 될 텐데.’
강호는 7회 초 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벤치에서 부지런히 몸을 풀며, 자신의 타석을 기다린다.
고의사구로 걸러질 상황을 우려하는 강호.
냉정한 이성으로는 그럴 확률이 높지 않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염두 하자 자꾸만 불안감이 생겨난다.
‘위즈 선발 투수인 헤인즈가 벌써 127개의 공을 던졌으니까 7회 말부터는 불펜을 투입할 거야. 그러니까 7회 부터는 다른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겠지.’
강호는 위즈의 올 시즌 불펜 진을 떠올려보며 계산하고 있었다.
리그 최약체로 평가받는 위즈의 불펜이라면 7회부터 자이언츠에게 기회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혹시라도 위즈 팀 덕 아웃에서 그런 점을 고려해 127구나 던진 헤인즈 투수를 7회에도 마운드에 올린다면 그것 역시 나쁘지 않았다.
헤인즈 투수의 체력이 제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130구를 넘긴 상황에서도 구위를 유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제발 와라. 내가 타점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딱 한 번만 와라!’
강호는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지기를 열망하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단 한 번의 타석 기회라도 최상의 몸 상태로 타석에 서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는 강호였다.
그리고 그런 강호의 바람은 곧 현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