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18화 (217/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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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중간에서

11연승을 달성하고 돌아온 자이언츠 원정 버스는 사직구장의 주차장에 멈춰서고 있었다.

그 때까지 잠들어 있는 선수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주장인 강민수가 큰 목소리로 입을 연다.

"다 왔습니다! 내립시다!"

캡틴 강민수의 목소리에 잠들어 있던 선수들이 하나, 둘 씩 잠에서 깨어난다.

그 중에서는 강호의 곁에 앉아 있던 문표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강호는 잠시 눈을 붙였다가 부산에 진입하기 전에 이미 잠에서 깨어나 있었기 때문에 캡틴의 목소리에도 깨어나지 않는 문표를 흔들어 깨운다.

"문표 선배, 부산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으응..? 부산이라고? 그럼 나는 사직동에 도착하면 깨워줘."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문표의 모습에 강호는 장난기가 생겨난다.

그래서 사직동에 도착하면 깨워달라는 문표의 요청에 '네, 그럴게요' 라고 답한 후 정확히 5초 후에 다시 문표의 팔을 잡아 흔든다.

"문표 선배, 사직동입니다. 주차장에 도착했어요. 사직동에 도착하면 깨워달라면서요?"

"어...? 뭐라고? 벌써 사직동이야? 보통 톨게이트 통과하고, 사직동까지 시간이 꽤나 걸리는데 벌써 도착한 거야?"

문표는 비몽사몽으로 발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기지개를 켠다.

그는 사직동에 도착하면 깨워달라는 자신의 당부 후에 겨우 5초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강호가 깨웠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우습게 보이기도 하고, 문표의 피곤함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서 강호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할지를 고민하다가 '먼저 내리겠습니다'라고 말을 건넨 뒤 문표의 백 팩을 대신 짊어지고는 먼저 버스에서 내린다.

그 후 원정 버스에서는 잠시의 소란이 일었다.

"내 가방 어디 갔어? 성철아, 내 가방 못 봤어?"

"못 봤습니다."

"누가 가져간 거야? 중석 선배, 제 가방 가져갔습니까?"

"중석 선배 아까 전에 먼저 내리셨습니다. 퇴근하시는 것 같던데요?"

"그래? 아이, 그럼 아닌데...내 가방이 어디 갔지?"

강호는 버스에서 들려오는 문표의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양 손에 들고 있던 백 팩을 모두 내려놓고는 문표에게 카톡을 보낸다.

그 후 몇 초 지나지 않아 문표가 자신의 휴대폰을 손에 쥔 모습으로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호 후배가 챙겨줬구나? 말을 하지 그랬어~"

문표는 다소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카톡 채팅창이 열린 스마트폰을 주머니 속에 챙겨 넣고는 강호의 발치에 놓여있는 자신의 백 팩을 챙겨든다.

그리고는 '나 먼저 갈게' 라고 말하며 자신의 차가 주차된 방향으로 걸음을 떼는 모습이다.

강호는 그런 문표의 모습에 피식 웃어 보이고는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활성화하여 카톡창을 연다.

조금 전, 문표에게 보냈던 카톡 방 아래에는 형이 자정이 되기 전에 보낸 메시지 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형: 강호야, 남해 현장 일이 늦게 끝나서 자정 넘어서야 집에 들어 갈 것 같다. 혹시라도 너 먼저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어. 형이 야식 사가지고 갈 테니까.^^

작업이 늦게 끝날 것 같다는 형의 카톡 메시지를 확인하며 시간을 확인해 본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 2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이 일요일에서 넘어가는 월요일 새벽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형의 작업 일정이 정상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무슨 도배 작업을 일요일 새벽까지 한다는 거야?"

강호는 형의 남해 현장 일을 단순한 도배 일로 여기며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무더웠던 인천과는 다르게 부산은 인천보다 기온이 낮아서 집으로 향하는 길이 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지금 시간이 새벽인 이유도 있겠지만, 가만히 서 있어도 진땀이 흐르는 인천과는 다른 부산의 기온을 느끼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관을 지나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강호는 평소 보지 못한 것들이 거실의 탁상에 놓여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들고 있던 백 팩은 현관 근처에 내려놓고는 탁상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뭐야 이게? 호주 현지 영어회화 한 권으로 끝내기? 한영사전에 호주 영어 회화 책."

강호는 두 권의 책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왠지 최근 수상해 보였던 형의 행동이 이 하나의 단서로 톱니바퀴가 맞아 나가듯이 맞아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형의 지갑에 들어 있던 달러와 한영사전만 봤을 때는 오해를 했었지만, '호주'라는 단어 하나가 들어가니 모든 상황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진주였구나."

확신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막내 동생인 진주가 떠나버린 곳, 그곳이 바로 호주였던 것이다.

정확히 진주가 호주의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진주가 살고 있는 곳이 호주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삐삐비빅, 털컥.

때마침 현관문이 열린다.

강호는 두 권의 책을 든 채로 현관을 향해 시선을 돌려본다.

그곳에는 본인의 작업 가방을 짊어 진 채로 현관에 들어서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어?! 강호 너도 이제야 도착한 모양이네? 형이 조금 늦었다..."

형은 강호를 향해 안부를 물으려다가 동생의 손에 올려져있는 두 권의 책을 확인하고는 행동을 멈춘다.

강호가 원정을 나가 있는 동안에는 사직동 집으로 돌아올 일이 없던 까닭에 개인적인 물건을 거실이나 주방에 놓아두는 경우가 있었는데 깜빡하고 책을 치우지 않았던 기억이 이제야 떠오른 것이다.

강수는 자신의 실책을 속으로 탓하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아~그거? 그냥 뭐, 영어 공부나 좀 해보려고."

강수는 자신의 어색한 변명을 머리 좋은 동생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런 강수의 머리는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고민하며 빠르게 굴러간다.

어색한 표정의 형과 마주하게 된 강호.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변명거리부터 찾고 있는 형을 바라보며 피식 웃게 된다.

'형은 내가 아직도 진주 일로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강호는 형을 변명하게 만드는 당사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진주가 스무 살이 되어 갑작스럽게 호주로 떠나버렸을 무렵, 강호 자신은 동생이 떠난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뒤늦게 형의 연락을 받고 진주의 호주 행을 알게 되어버린 강호.

가슴을 허전하게 만드는 상실감과 왠지 가족 관계에서 배제된 것 같은 배신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 때의 강호는 형을 향해 이렇게 따져 물었다.

"나는 이제 가족도 아니야? 어떻게 한국을 떠날 결정을 하면서 나한테 말 한 마디 없이 가버릴 수 있어?"

지금 돌이켜보면 진주의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지만, 그 때의 강호는 동생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강호 본인이 베어스 2군에서 합숙 생활을 하면서 형과 진주에게 연락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두 사람에게 무심하기도 했다.

그 때의 강호는 방출당하기 직전의 순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진주 본인이 결정한 일이야. 우리는 진주가 유학 잘 다녀올 수 있게 뒷바라지 해주면 되는 거야."

"뒷바라지? 뒷바라지 좋아하시네! 연락처도 안 남기고 간 녀석한테 무슨 뒷바라지야? 형한테는 호주 기숙사 주소라도 알려줬나 보지?"

"..."

강호는 자신의 질문에 입을 닫아버리는 형의 모습에서 동생인 진주가 형에게마저 연락처를 제대로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형 역시도 진주에게 버림받은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강호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허탈하게 웃어 보인다.

'그 때는 진주가 우리들을 버리고 떠난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사실은 진주 본인이 스스로를 내팽개친 거나 다름없어. 진주가 아무 것도 없는 스무 살의 패기만 믿고 떠난 것은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비참한 기억이 남은 이곳을 막연하게 떠나고 싶었던 것일 테니까. 상처 입은 진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 인생만을 바라보며 야구에 전념했던 것이 사실은 진주를 버려지게 만든 거야.'

강호는 예전과 달라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자신과 형을 떠나버린 막내 동생을 원망했지만, 지금은 진주의 결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강호 본인이 치열했던 생존 경쟁에서 벗어나 팀의 4번 타자로 자리매김하면서 마음에 여유라는 것이 생긴 까닭일 수도 있었다.

강호는 당황하는 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두 권의 책을 거실 탁상에 내려놓는다.

그러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묻는다.

"야식 사온다며? 야식 안 사온 거야?"

강호는 형이 카톡으로 사온다고 약속했던 야식에 대해 물으며 화제를 전환한다.

진주라는 아픈 기억을 거론하며 형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형이 작업 가방을 뒤지며 대답한다.

"아, 맞네. 내가 여기 가방에 넣어뒀어. 여기 있네!"

형이 작업 가방에서 꺼내 든 것은 치킨이 들어 있는 치킨박스였다.

강호는 형에게 다가가 치킨 박스를 받아들고는 주방 식탁에 내려놓으며 현관에 놓인 형의 작업 가방을 짊어진다.

항상 강호 본인의 퇴근길에 형이 마중을 나와 백 팩을 옮겨 메던 기억이 떠올라 한 번 해본 것이었는데 형의 작업 가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형은 항상 이런 것들을 짊어진 채로 살아왔던 걸까?'

강호는 지금 자신에 메고 있는 형의 작업 가방이 마치 형이 걸어온 인생의 무게처럼 무겁게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든다.

형이 '내가 들게'라고 말했지만, 강호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하고 있었다.

"씻고 나와. 야식 먹어야지."

강호의 대답이 있은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 형제는 식탁 테이블 앞에 마주앉아 있었다.

동생의 제안대로 씻고 나온 강수는 잠시 동안 강호의 눈치를 살피다가 문득 강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씨익 하고 사심 없이 웃어 보인다.

그 웃음을 마주한 강호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웃고 있었다.

예전에는 진주의 일로 형제가 다툴 때도 많았지만, 지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고충이 느껴져 애써 말을 꺼내지 않는 모습이다.

'예전의 나였으면 형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화를 냈었겠지.'

형을 향해 웃음 짓고 있는 강호의 속내였다.

반대로 그를 마주하는 형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쩐 일로 강호가 화를 안 내는 거지? 이제 진주 일에 대한 앙금이 풀린 건가?'

그것이 강호를 바라보는 형의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상반된 생각 속에 강호가 먼저 입을 연다.

"태호 할머니 수술은 어떻게 됐어? 어려운 수술은 아니었다며?"

태호 할머니 일을 묻는 동생의 질문에 강수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지르며 잠시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돌아와 강호를 향해 본인의 휴대폰을 내미는 모습이다.

"그 일은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태호 할머니도 정신을 차리셨고, 담당의사 말로는 1, 2주 안에 퇴원해도 된다네. 퇴원하실 때 강 감독하고 같이 가서 모셔오기로 했어."

그렇게 대답하며 형이 건넨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니 병원 침대에서 함께 찍은 태호와 태호 할머니, 그리고 형 강수의 모습이 사진으로 담겨 있었다.

과연 형의 말대로 태호 할머니는 정신을 차린 모습으로 환하게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의 곁에서 태호가 평소 표정과는 달리 한 쪽 입 꼬리를 올리고 있는 미소 지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소에 잘 웃지 않는 태호로서는 최대한 미소를 지어본 것이지만, 강호가 보기에는 그저 썩소로 보일 뿐이다.

그런데 그 썩소마저도 짓지 않았던 태호였기 때문에 이 사소한 변화가 강호에게는 긍정적인 변화로 느껴진다.

"태호네 집에 한 번 가봤는데, 태호 할머니 같은 고령의 환자가 지내기에는 좋은 환경이 아니더라고. 태호나 동생들이 살기에도 좋지 않을 것 같고. 폐가나 다를 바가 없더라니까. 그래서 내가 집을 새로 얻어줬어. 월세 집이긴 한데 예전에 살던 곳보다는 훨씬 좋은 집이야. 월세도 태호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내가 내주기로 했어. 큰돈은 아니니까."

형은 강호가 휴대폰 속 사진을 바라보는 사이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해 준다.

강수의 기억은 잠시 태호 할머니가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그 때의 태호는 정신을 차린 할머니의 얼굴을 마주하며, 굵은 눈물방울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억지로 눈물을 참아내려고 인상을 찡그리던 태호였지만, 수돗물을 틀어놓은 것처럼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할머니, 이제 좀 아프지 마요. 아프지도 말고, 죽지도 마요. 나랑, 태희랑, 태양이랑 같이 살아요. 우리랑 같이 살아요. 할머니."

태호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할머니의 손을 붙든 채 그렇게 애원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마취가 다 풀리지 않은 불편한 상태에서도 손을 들어 올려 손자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근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 감독은 어느새 자신의 턱 밑까지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아내기 바쁜 모습이었고, 강수는 그런 강 감독의 곁에서 아무 말 없이 태호와 할머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 강수와 태호, 두 사람은 병원의 복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태호는 언제 울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정색한 채 앉아 있었지만, 한참을 울었던 눈가는 금붕어처럼 부어올라 있는 상태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고집스러운 태호의 얼굴 표정을 곁에서 바라보며 강수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여튼 하는 짓도 강호 어린 시절이랑 똑같네. 강호 이놈은 후원을 해도 꼭 지 같은 녀석을 후원한다니까.'

강수는 태호의 고집스러운 얼굴에서 동생인 강호의 얼굴이 자주 겹쳐 보인다고 생각하며 입을 연다.

"태호야. 지금 사는 집은 어때? 마음에 들어?"

강수의 질문에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한 얼굴로 태호가 대답한다.

"아저씨가 한 번 살아보실래요?"

되물어 오는 태호의 말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강수는 그런 태호를 향해 피식 웃어보이고는 말을 이어간다.

"이사하자. 태호야. 아저씨가 지금보다 나은 집 얻어줄게."

태호는 새 월세 집을 얻어준다는 강수의 제안에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자존심을 버렸던 태호였지만, 아직 모든 것을 내려놓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됐어요. 안 그래도 받은 게 많은데, 집까지 얻어주시면 저희가 너무 폐를 끼치는 거잖아요. 지금 해주시는 것도 나중에 제가 어른 되면 전부 갚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많이 해주지 마세요. 나중에 갚기 힘들잖아요."

태호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똑 부러진 말로 강수의 제안에 거절의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강수는 태호가 거절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시 말을 꺼낸다.

"담당의사 말로는 지금 네가 사는 집처럼 좋지 못한 환경에서는 할머니 병세가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하더라. 어쩌면 그 집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실 수도 있는 일이지."

강수가 담담하게 꺼낸 말에 태호의 눈동자가 부릅떠진다.

태호는 고개를 획하고 돌려 강수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그건 안 돼요! 이사할게요. 할머니가 퇴원하시기 전에 이사할게요!"

"그래. 이사하자."

그렇게 태호네 집의 이사가 결정되고 있었다.

강수는 그때의 기억을 간략하게 요약하며 동생에게 그간의 상황을 설명해 준다.

두 사람은 식탁에 놓인 치킨은 손도 대지 않은 채 대화를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이사한 집 보증금은 네가 준 돈 중에 500만원을 인출해서 지불했다. 월세는 25만원인데 이 돈은 내가 내도록 할게. 이사한 집은 좋아. 월세가 싸다고 나쁜 집은 아니거든. 내가 벌써 도배랑 장판 같은 시공을 새로 다 해버려서 집이 깨끗해. 도배지랑 장판도 고급 재료를 썼어."

태호의 이사 문제를 잘 해결한 것으로 보이는 형의 말에 강호는 안심하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의 과거를 닮은 태호를 마주하며 후원을 결정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그 결정이 평생을 살면서 내린 결정 중 가장 잘한 것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태호와 아이들은 내가 앞으로 지켜야할 사람들이야. 나약해지지 말자. 이 정도 무더위에 꺾이지도 말고, 앞으로 닥칠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내도록 하자. 그래야만 내 몸 값을 올릴 수 있을 테고, 그 돈으로 더 많은 후원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강호는 후원을 통해 더욱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책임감은 긍정적인 작용으로 강호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누군가를 지켜야한다는 감정은 어떤 어려움도 충분히 이겨내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태호와 다른 후원 아동들의 문제에 대해 의논하던 강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 말을 형에게 어떤 식으로 꺼내야할지 고민하던 강호는 그저 흘러가는 말처럼 묻고 있었다.

"진주는 잘 지내는 거지?"

진주가 한국을 떠난 후 처음으로 그녀의 안부를 묻고 있는 강호.

그런 동생의 물음에 강수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진한 여운이 남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잘 지내고 있겠지. 우리 동생이잖아."

강수의 대답이 있은 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강호는 문득 여동생인 진주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오늘따라 한국을 떠나버린 진주의 얼굴이 더욱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는 떠나버린 동생을 다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여름의 중간에서 강수와 강호, 두 형제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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