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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중간에서
8월 3일 토요일 경기를 승리로 이끈 후, 정확히 하루의 시간이 지난다.
자이언츠는 일요일 경기마저 5대 1 승리로 일궈내며 시즌 연승 기록을 11연승으로 만들어낸 후, 사직으로 돌아가는 원정 버스에 몸을 싣는다.
그러는 사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야구 섹터에는 부산에 연고를 둔 야구팬들과 전국에 거주하는 자이언츠 팬들을 중심으로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자이언츠 팬들을 흥분케 하는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자이언츠, 창단 이후 최다 11연승 달성! 그 현장을 가다]
기사는 자이언츠의 11연승 달성을 메인타이틀로 하여 와이번스에 대한 시리즈 스윕 내용과 올 시즌 자이언츠의 세대교체, 강호와 대우 등 20대 선수들에 대한 발굴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앞으로 자이언츠로 인해 시작될 본격적인 상위권 경쟁에 대한 예측 기사를 싣고 있었다.
후반기가 시작된 직후만 해도 1위 팀 베어스와 2위 팀 다이노스가 확고한 상위권을 형성한 시즌 순위에 변수가 없을 것만 같았던 것이 자이언츠의 11연승으로 인해 그 판도가 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이언츠의 대약진을 예측한 기사에는 당연하게도 자이언츠 팬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게 몇 년 만이야, 대체? 나는 올 시즌도 자이언츠가 중위권 경쟁이나 할 줄 알았는데. 어느새 3위까지 올라와 있네. 다음 경기부터는 꼭 챙겨봐야겠습니다."
"역대 자이언츠 시즌 중에서 이렇게 완벽한 세대교체 시즌이 또 있었나? 박상현이 재활 군으로 내려가서 불펜이 또 폭망 할 줄 알았더니 가진성이 튀어 나오네. 선발진은 이제 문제없으니까 불펜은 성수제, 사준식, 가진성, 권대우로 꾸리면 완벽할 것 같네요. 좌완에 성수제, 사준식, 가진성은 정통파 파이어 볼러, 권대우는 고속 뱀 직구 투수. 놀라운 건 이 투수들 평균 연령이 24살도 안 된다는 겁니다."
"될 팀은 어떻게 해서든 된다고 하더니, 올해 자이언츠가 딱 그러네요. 너무 감동입니다. ㅠ.ㅠ 전반기에 백강호 선수 터졌을 때만해도 감지덕지였는데 지금은 1위권 경쟁도 가능할 것 같아요. 이제 다이노스한테 천적 관계 좀 제발 청산해 주세요."
"진짜 올 시즌은 4위나 5위가 아니라 상위권으로 포스트 시즌 진출하겠는데? 팀에 3할 타자가 몇 명이야, 대체? 자이언츠가 리그 득점율 1위 아냐? 팀 타율도 제일 높은 걸로 아는데."
"여러분 백강호 선수가 드디어 시즌 최다 득점과 타이가 됐습니다. 135득점으로 2014년에 서건찬 선수가 기록했던 최다 득점과 동률이라네요. 올 시즌 최다 타점에, 최다 3루타, 최다 득점까지 갈아치우네요!"
"엉엉엉, 강호 형 날 가져요! ㅠ.ㅠ"
자이언츠의 11연승 기사 댓글에는 그야말로 미처 날뛴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뜨거운 팬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이언츠의 팬이라고 자처하는 모든 이들이 11연승에 대한 기사를 검색하고 있을 무렵 그런 모습과는 대조적인 곳이 존재했다.
장소는 11연승을 달성하고 부산으로 향하는 사직 행 원정 버스로 옮겨진다.
"아이고, 그 에어컨 방향 좀 이리로 돌려봐. 너만 몸이고, 나는 몸뚱이냐? 이 선배도 에어컨 좀 달라고."
"중석 선배님, 카시트 아래쪽에서 에어컨 바람나옵니다. 전원을 켜세요."
"뭐? 카시트 밑에 에어컨 있었어? 나는 왜 몰랐지? 어어~ 에어컨 죽이네!"
중석과 몇몇 선수들이 버스 내 에어컨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에 피식 웃음 짓던 강호는 문득 곁에 앉은 문표에게 시선을 돌린다.
팀이 무려 11연승을 달성하고 사직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문표가 떠들썩한 목소리를 낼 법도 한데 웬일인지 조용한 모습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문표 선배님, 뭐하십니까? 싸인 볼 만드세요?"
강호는 문표가 몰두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보이며 묻고 있었다.
지금 문표는 발아래에 수십 개의 KBO공인구를 내려두고는 매직으로 야구공 전부에 부지런히 싸인을 하는 중이었다.
강호의 질문에 문표는 '말 걸지마, 나 지금 진지하다고' 답하며 여전히 야구공에 싸인 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강호는 재차 묻게 된다.
"문표 선배한테 싸인 볼 달라는 사람도 있습니까?"
문표는 강호가 재차 건넨 질문에 순간 울컥하는 모습이다.
그는 뭐가 억울한 것인지 표정에서 분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문표가 강호를 향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로 바라보며 입을 연다.
"아니, 없어. 이거 내 싸인이 아니라 강호 네 싸인이야."
"네? 뭐라고요?"
"주변에서 자꾸 백강호 싸인 볼 좀 받아달라잖아."
강호는 문표의 어이없는 대꾸에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싸인 볼 하나를 집어 든다.
과연 문표의 말대로 공인구에는 자신의 싸인과 무척이나 흡사한 싸인이 되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표가 수십 개의 공인구를 싸인한 내용은 문표 본인의 이름이 아니라 강호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강호는 당사자인 본인을 바로 곁에 두고 가짜 싸인 볼을 만들어내고 있는 문표의 행동에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저한테 해달라고 하시면 되잖습니까? 이리 주세요. 제가 해드릴게요."
"싫어!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너한테 싸인 안 받을 거야. 내가 네 싸인 똑 같이 흉내낼 수 있으니까 내가 다 할 거야."
문표는 자존심을 들먹이며 강호의 손길을 거절한다.
강호는 근래에 보기 드문 문표의 해괴한 논리에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 강호의 시선 속에 문표는 강호의 싸인을 위조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 쉴 새 없이 궁시렁거리는 중이었다.
"왜 나한테 강호 네 싸인을 받아 달라는 거야? 나도 싸인 있다고! 최, 문, 표! 이 얼마나 멋진 이름이야? 나도 올 시즌에 3할 때리고 있는데 내 싸인 볼은 달란 얘기 안하고 자꾸 강호 네 싸인 볼만 받아달라고 부탁을 하네. 내가 기분 나빠서라도 네 싸인 안 받아다줄 거야. 내가 만들고 말지. 어때? 네 싸인이랑 똑같지 않아? 이거 받는 사람들이 못 알아보겠지?"
강호는 자신에게 가짜 싸인 볼을 내미는 문표의 행동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그가 내민 공을 받아든다.
과감한 획이 돋보이는 '백강호'라는 싸인에 강호는 '제가 한 것보다 더 낫네요'라고 답하면서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다.
"싸인 위조는 형법상 사문서위조변조죄에 해당하는 거 아십니까? 이거 들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들통날 리가 있나? 이렇게 똑같은데? 뭐, 좀 걸리면 강호 후배가 직접 한 걸로 얘기 좀 해줘."
"사나이 자존심이 있어서 제 싸인은 안 받는다면서요? 걸리면 제가 한 걸로 부탁하시는 건 자존심이 안 상하나보죠?"
"그건 좀 다른 개념이지. 내가 후배한테 싸인 볼 부탁이나 할 짬밥은 아니잖아? 이렇게 싸인 위조 기술이 있는데 직접 하고 말지."
강호는 결국 문표의 논리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의 논리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 했다기보다는 문표의 해괴한 논리에 말을 섞기가 싫어진 것이다.
결국 강호는 문표에 대한 관심을 끄고, 손에 쥔 악력기에 힘을 준다.
문표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버스 내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각자의 일로 바빴던 선수단 대부분이 잠이 들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단 창단 이후 11연승이라는 최초 기록 달성에 왁자지껄 소란스러울 법도 한데 무더운 날씨에 계속되는 시리즈 경기로 선수들 모두 녹초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사직으로 돌아가면 휴식 일인 월요일이 되어 짧은 휴식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지금 당장 피로를 이겨내기도 힘들어 보이는 선수단의 모습이었다.
'올해도 지나칠 정도로 더우니까. 다들 지칠 만도 하지. 대구는 벌써 낮 기온이 36도를 찍었다고 하던데. 자칫 체력 관리를 소홀히 했다가는 가을 야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가떨어질 수도 있겠어.'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체력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 팀 선수단들은 본격적인 더위를 맞이하며, 주전 급 선수들의 체력 관리 체제에 돌입한 팀들도 많았다.
자이언츠 역시 체력 소모가 심한 포지션인 포수 강민수와 강호 본인을 포함한 중심 타선에 대한 체력 안배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제 정규 시즌도 두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구나. 대만 스프링캠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즌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 더위도 지나면 올 시즌도 끝나겠지.'
강호는 팀이 11연승을 달성한 귀향 버스 안에서 묘한 회상에 잠긴다.
1군 콜 업을 기다리며 손에 핏물이 베일 때까지 배트를 휘둘렀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올 시즌은 단 한 번이라도 1군 무대에 이름을 올렸으면 했던 바람이 현실이 되어, 이제는 팀의 4번 타자로 우뚝 선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약 군대 제대 후에 야구를 포기해 버렸더라면 지금 이런 모습들도 모두 꿈에 불과한 일이 되었겠지.'
처절했던 작년까지의 기억들, 그리고 어떤 한 해보다 치열했던 올해 초의 기억들.
그 모든 기억들이 추억이 되어 지나가버린 후였다.
강호는 과거의 회상은 그쯤에서 정리하며 카시트에 편안히 몸을 기댄다.
그런 강호의 시선에 여전히 자신의 싸인을 공인구에 위조하고 있는 문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왜 강호 싸인 볼을 해달라고 하면서 내 싸인 볼 달라는 소리는 안 하는 거야? 내 친구라는 놈들이 내 싸인 볼이 필요 없다니. 내가 친구들을 잘 못 둔 거야. 이참에 친구 리스트를 정리할 필요도 있겠어."
싸인 볼을 위조하며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문표의 모습을 보며, 강호는 회상 대신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2군에서 함께 땀을 흘렸던 능청스러운 모습의 문표는 여전히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고, 아직 시즌은 남아 있었다.
강호는 그 남은 시즌을 잘 버텨내기 위해 잠시, 잠깐의 단잠에 빠진다.
한편, 장소는 바로 근처에서 달리고 있는 코칭스태프 버스로 이동한다.
선수들이 타고 있는 신형 버스의 뒤편에서 달리고 있는 코칭스태프 버스에서는 이런 저런 얘기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직접 경기를 뛴 선수들은 피로를 이기지 못해 단잠에 빠져들었지만, 코칭스태프들은 팀 역사상 최초 11연승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다음 시리즈부터는 홈 6연전이네요. 분위기를 계속 타지 않을까요? 올 시즌에는 우리 팀이 홈경기에서 특히 강했지 않습니까?"
김민철 수석은 곁에서 기분 좋게 물어오는 정호종 타격코치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다.
정 코치의 물음에 답하고 있는 김 수석 역시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팀의 연승은 모든 코칭스태프를 웃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지. 이왕 11연승까지 왔는데 여기서 끝나면 허무하잖아? 전반기 내도록 씨를 부려 놨으니 이제는 거둘 차례 아니겠어?"
김 수석은 기분 좋게 대답하며,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수석 코치인 그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최근 들어 상승세를 탄 팀의 호 성적은 전반기 때부터 2군에 있던 손성조 감독과 끊임없이 의견 교환을 나누며 얻어낸 당연한 기록처럼 느껴졌다.
획기적인 투자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선수단과 코칭스태프의 노력이 밑바탕이 된 결과로 여겨지는 것이다.
"홈에서 연승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다이노스를 잡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2위까지만 올라가면 1위도 가시권이지 않겠습니까?"
정 코치와 김 수석, 그 외 코칭스태프들은 팀의 최다 연승 기록으로 달라질 것들을 얘기하며 앞으로의 성적을 낙관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코칭스태프가 탄 원정 버스에서 단 한 명.
단 한 사람만은 그들의 낙관적인 모습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직은 멀었어. 아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남았으니까.'
코치들과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손성조 감독이었다.
그는 승패를 낙관하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 좋은 표정으로 연승의 기쁨을 나누는 코치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사색에 잠기는 손 감독이었다.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경쟁의 시작인 게야. 확장 엔트리에 들어서기 직전의 몇 주, 선수들이 무더위에 노출된 채로 체력 싸움을 벌여야하는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지금 제대로 된 대비를 해놓지 않으면 여태껏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 거야. 다른 팀 감독들 역시 대비를 해두고 있겠지.'
손 감독은 경쟁 팀 감독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을 이어나간다.
다른 코칭스태프들이 호 성적에 기쁨을 나눌 때도 팀의 사령탑만큼은 낙관을 경계하고, 시즌 막바지까지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손 감독은 오랜 지도자 생활로 잠시, 잠깐의 방심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영광을 누리면서도 혹시 모를 위기 상황을 위한 대비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싸움은 지금부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