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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팀의 조건
많은 이들의 이목이 마운드와 타석으로 집중되고 있는 순간, 드디어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된다.
이미 1회에 전성기 시절 못지않은 구위를 보여준 김광헌 투수의 공이 포수 미트를 강타하고 있었다.
퍼엉!
포수의 미트를 때리고 있는 공의 소음은 1회 때를 능가하는 강한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은 초구 판정을 내려 줄 주심에게로 향한다.
"볼."
주심의 초구 판정은 볼이었다.
그 판정 내용에 와이번스 팬들은 탄식을, 자이언츠 팬들은 함성을 토해내는 모습이다.
단지 하나의 볼카운트일 뿐인데도 양 팀 팬들의 반응이 남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이나 지금의 대결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타석에 선 강호는 김광헌 투수의 초구에 그의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자세를 풀며 문뜩 전광판을 올려다본다.
'151km. 공이 살짝 뜨기는 했지만, 분명 카운트를 잡으려고 들어오는 공이었어. 힘을 과하게 주다보니까 업슛 형태의 포심이 된 거야.'
강호는 김광헌의 초구에서 자신과 제대로 승부를 보겠다는 의도를 읽고 있었다.
볼이 되긴 했지만, 칠 테면 쳐보라는 듯이 최고의 공을 던지고 있는 김광헌 투수.
어쩌면 김광헌 투수야말로 강호가 넘어야할 최고의 상대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완급 조절이 가능한 좌완 강속구 투수, 과거 내가 가지고 있던 세 개의 약점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투수야. 게다가 김광헌 투수가 나와의 정면 승부를 원하고 있어. 걸어오는 승부를 피할 수는 없지. 나는 팀의 4번 타자니까.'
강호 역시 김광헌이 걸어온 승부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아홉 명 중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팀의 자존심과 긍지를 보여줘야 할 4번 타자였다.
1회 초 상황 때 캡틴 강민수와 채중석을 포함해 많은 선, 후배 선수들이 자신에게 믿음을 보여준 것이 떠오른다.
강호는 동료들의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타석에 들어서기 전, 이미 타격 아이템 사용을 배제한 상황. 동료들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아이템 없이 본인의 힘으로 승부를 벌여야만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고는 배트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게 된다.
김광헌의 공을 장타로 때려내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구종만을 노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
'슬라이더야! 슬라이더만 노리자.'
강호는 자신이 노릴 공 하나를 선택한다.
김광헌 투수의 초구가 평소보다 묵직한 포심 패스트볼로 들어왔지만, 승부구를 포심으로 던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광헌 투수의 최고 무기 중 하나인 슬라이더를 아직 단 하나도 던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광헌 투수의 슬라이더는 우타자가 의식하기 전에 이미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장점이 있어. 오늘 경기에서 단 하나의 슬라이더도 던지지 않은 것은 슬라이더를 아껴두고 있다는 의미야.'
강호의 생각은 확신에 가까웠다.
김광헌 투수가 슬라이더를 아끼고 있는 이유, 위력적인 포심과 체인지업으로만 자이언츠의 1, 2, 3번 타선을 상대한 이유는 바로 자신을 상대하기 위함이라고 여겨졌다.
상대 선발 투수가 주 무기라고 할 수 있는 구종을 한 타자를 잡아내기 위해 아껴두고 있는 것이다.
바로 강호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서.
'자만 같은 게 아니야. 나는 4번 타자야. 그것도 4할을 때려내고 있는 4번 타자. 상대 선발 투수가 나를 상대하기 위한 전략을 들고 나왔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 김광헌 투수 정도의 선수라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아.'
강호는 빠르게 결론을 내며 2구째 공을 지켜본다.
예상대로라면 2구 역시 포심이 들어올 것이라 생각됐기 때문에 강호는 일단은 공을 지켜보고자 했다.
퍼엉!
과연 김광헌의 2구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강호의 바깥쪽 코스를 공략하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주심은 이번 포심에는 스트라이크를 선언한다.
강호는 다시금 전광판을 올려다보며 타석에서 반발짝 물러서는 모습이다.
전광판의 구속 표시에는 정확히 150이라는 숫자가 적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한 구종이 들어왔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타석에 선다.
그 후 김광헌의 3구째가 뿌려진다.
후웅, 딱.
투수의 공이 손을 떠난 후, 곧장 타격에 들어간 강호의 배트가 공을 때리고 있었다.
타구는 파울이었다.
바깥쪽에 걸치고 들어오는 공을 타격하려다보니 타격 후 강호의 자세가 무너질 정도로 먼 쪽의 코스였다.
'슬라이더였는데.'
강호는 자세를 바로하며 입맛을 다신다.
코스는 조금 멀어 보였지만, 궤적을 확인하는 순간 타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리고 있던 슬라이더가 조금 먼 쪽으로 들어오기는 했어도 남들에 비해 타격 범위가 긴 자신이라면 정타로 때려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틀리지 않았지만, 김광헌의 구위가 생각보다 묵직했던 까닭에 배트가 밀려 파울 타구가 만들어지고 만 것이다.
'이제 상대 배터리도 내가 슬라이더를 노린다는 것을 알았겠지. 전략을 수정해야 하나?'
타자인 강호의 입장으로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정 구종을 노리는 자신의 전략이 들통 났으니 상대 배터리가 그 점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타석에서 반 발짝 물러난 채 짧은 고민을 해보던 강호는 다시 타석에 서며 특유의 눈빛을 빛낸다.
이제 볼카운트는 1볼 2스트라이크 상황.
타석에 선 강호는 오픈스탠스로 자세를 변경하며 컨택 위주의 타격을 할 것이라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로 뒤에서 확인한 와이번스의 이재훈 포수는 곧장 투수를 향해 싸인을 낸다.
투수 김광헌은 그 싸인을 확인한 뒤 잠시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와인드업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다.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김광헌 투수의 순간적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은 강호는 끌어 당겼던 배트를 낸다.
기간제 아이템인 '내가 심판이다'가 적용되고 있는 강호의 시선에 가상의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고 있는 김광헌의 4구가 표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광헌의 슬라이더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던 강호는 포수 미트를 향해 날아드는 저속의 공에 반 템포를 쉬고 나서야 배트를 내밀게 된다.
딱!
"오오오!"
배트에 공이 맞는 순간 자이언츠 원정 팬들이 탄성을 내지를 정도로 잘 맞은 타구는 아깝게도 좌측 홈런 폴대를 벗어나는 대형 파울이 된다.
자이언츠 팬들의 탄식 속에 강호는 다시금 타석에 자리를 잡는다.
그 후 김광헌과 강호, 두 사람의 끈질긴 승부가 이어진다.
틱, 딱, 딱.
4구째 이후에도 연달아 3개의 파울타구를 때려내며 강호는 이번 승부에 대한 집착을 내보이고 있었다.
여전히 볼카운트는 1볼 2스트라이크.
공을 던지는 김광헌은 오직 존을 걸치는 코스의 공만 던지고 있었고, 타석에 선 강호는 모든 공에 배트를 내며 정면 승부해 들어오는 상대 배터리의 의도를 피하지 않는다.
그 모습에 양 팀 팬들은 묘한 감정을 전달받고 있었다.
"백강호 선수가 다르긴 다르네. 파울 홈런도 두 개나 때려내고, 김광헌의 공을 계속 커트하고 있잖아. 150km이 넘는 공도 죄다 커트하네."
"그럼 뭐해? 정타로 때려내야지. 파울 홈런을 수십 개를 때려도, 안타 못치면 결국 아웃되는 거잖아."
"여기 야알못 한 명 나셨네. 파울을 수십 개 때리면 투수 입장은 어떻겠어? 타자는 투수 한명만 상대하면 되지만, 투수는 1번부터 9번까지 아홉 명의 타자를 모두 상대해야 된다고. 타자 한 명한테 승부가 길어지면 정신적인 피로도가 높아지는 게 당연한 거잖아. 지금 백강호가 안타를 못 친다고 해도, 4번 타자로서의 역할은 다한 거야."
"그래도 이렇게 된 김에 하나 때려줬으면 좋겠네. 이왕이면 큰놈으로다가 말이야."
양 팀 팬들은 두 선수의 길어지는 대결에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팬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개의 공이 포수 미트에 뿌려졌고, 그 중 하나는 다시 파울이 됐고, 하나의 공은 볼이 된다.
이제 볼카운트는 2볼 2스트라이크 상황.
승부는 10구째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김광헌이 던진 10구째 공을 확인하는 순간, 강호는 눈을 크게 뜬다.
'실투다!'
김광헌의 투구가 가운데로 몰리는 실투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배트를 낸다.
따악!
10구째 승부 끝에 때려낸 타구가 호쾌한 소리를 내며 문학구장의 좌중간을 가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은 강호가 때려낸 타구를 향하고, 곧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입에서 큰 함성 소리가 터져 나온다.
"와아아아!!"
자이언츠 팬들의 함성 속에 강호가 천천히 그라운드를 돈다.
10구째에 스트라이크 존 가운데로 몰리는 슬라이더를 던졌던 김광헌 투수는 마운드 위에 쪼그리고 앉은 채 자책이 담긴 허무한 미소를 흘리는 모습이었다.
국내 최고의 좌완 투수이자 베테랑 투수인 김광헌이 어이없는 실투 하나로 홈런을 헌납하고 만 것이었다.
이 모습을 중계석에서 확인한 한명진 캐스터는 상황을 이런 말로 정리한다.
"치열했던 10구째 승부 끝에 하나의 실투가 승부를 결정짓습니다! 백강호, 시즌 45호 홈런! 백강호는 이 홈런으로 홈런 부분 공동 선두로 올라섭니다. 그리고 이번 시즌에 갱신된 시즌 최다 타점을 184타점으로 늘립니다!"
한 캐스터는 지금의 홈런으로 강호 본인이 기록 중에 있는 시즌 최다 타점이 또 다시 갱신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강호가 1위를 달리고 있는 타점 부분은 단지 이번 시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리그의 타점 기록을 다시 쓰고 있는 기록이었다.
184타점.
2015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직전, 히어로즈의 박병호 선수가 기록했던 146타점을 이미 훌쩍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페이스만 유지된다면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시즌 200타점 달성도 충분하리란 전망이 있을 정도로 강호의 타점 생산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었다.
"잘했어, 4번 타자!"
"강호, 잘했어! 이제 점수 팍팍 내자!"
선제 포를 때리고 돌아온 강호에게 선배 선수들의 칭찬 세례가 이어진다.
선배들은 강호의 헬멧을 두드리거나 손뼉을 마주치면서 의미 있는 1타점을 기리는 모습이다.
강호가 때린 솔로 포는 단지 1타점을 추가한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난공불락처럼 여겨지는 김광헌 투수의 오늘 공을 공략해 냈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강호가 포문을 열면서 전성기 때의 구위로 자이언츠 타선을 압살하던 김광헌에게서 안타를 뽑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딱.
스팅을 볼넷으로 출루시킨 후, 6번 타자인 캡틴 강민수에게 중전 안타를 허용하는 김광헌.
와이번스 덕 아웃에서 흔들리는 투수를 진정시키기 위해 마운드에 오르는 모습이다.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방문한 이후로 다소 흔들려 보이던 김광헌의 투구가 안정감을 되찾았지만, 강호의 홈런으로 불붙기 시작한 자이언츠 타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이언츠 타선은 김광헌이라는 거물 투수가 내보인 허점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딱.
7번 타자인 김상훈의 희생 번트 후, 8번 타자 황인태의 안타가 터져 나온다.
인태의 안타는 주자를 모두 홈으로 불러들이는 적시타였고, 이제 점수 차는 3대 0으로 벌어진다.
그 후 오진택에게 땅볼을 유도해 위기 상황을 병살타로 막아내긴 했지만, 2회 동안 김광헌 투수가 던진 공의 개수는 40개가 넘은 상황이었다.
1회를 11개의 공으로 마무리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강호의 홈런 하나가 만들어낸 2회의 광경은 팀의 4번 타자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게 해주는 이닝이었다.
4번 타자인 강호가 2회 팀 타선을 이끄는 선봉장 역할을 하면서부터 자이언츠의 타선이 각성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늘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자이언츠 타자들은 5번 스팅과 6번 강민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3할 대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 타자들.
2회부터 시작된 자이언츠의 맹타는 왜 자이언츠의 2019시즌이 이전과는 다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강호의 솔로포를 시작으로 3점을 얻어낸 2회 공격이 끝난 후, 2회말을 무난히 막아내고 맞이한 3회 초 자이언츠의 공격 차례.
1번 타자인 유성철부터 시작되는 맹타는 어느새 다시 강호에게로 연결되고 있었다.
따악!
또 한 번의 호쾌한 타격음이 문학구장을 가득 채운다.
3번 타자인 박철이 내야 뜬공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주자가 1, 2루에 진루한 상태에서 터져 나온 강호의 밀어 친 타구가 페어로 선언되고 있었다.
"돌아, 돌아, 돌아!"
베이스 코치의 싸인대로 2루 주자 유성철과 1루 주자 문표가 모두 홈으로 들어서고, 강호는 3루 베이스 코치의 시그널을 확인한 후, 2루 베이스를 돌아 그대로 3루를 파고든다.
동시에 우익수 이명규의 송구가 3루로 향한다.
"세이프!!"
3루심의 판정은 세이프였다.
이 판정으로 강호의 안타는 3루타로 기록되며, 2회 솔로 포에 이어 3회 초 공격에도 타점을 생산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강호의 타점 기록은 186타점까지 올라가게 된다.
경기를 관전하는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입장으로서는 함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와아아!! 백강호 최고다!"
"오늘도 이기자!! 10연승 가자!"
자이언츠 팬들은 강호의 싹쓸이 3루타로 점수 차가 5 대 0까지 벌어지자 승리를 낙관하며, 응원의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다.
승리를 확신한 일부 팬들은 승리를 알리는 응원가로 자리매김 한 '부산 갈매기' 를 부르며 자이언츠의 10연승을 노래 부른다.
아직 3회 초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승리를 예견하는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목소리가 문학구장을 뒤엎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기 베라의 명언대로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경기는 양 팀 팬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개로 이어지며 잠시 후, 경기의 승부처라 할 수 있는 8회 말로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