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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팀의 조건
자이언츠와 와이번스.
두 팀 간의 시리즈 4차전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팀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김광헌 투수였다.
88년생, 올해로 32살의 김광헌 투수는 188cm의 키에 90kg의 하드웨어로 특유의 투구 폼이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좌완투수였다.
한 때는 국내 최정상급 좌완 투수로 거론되며 메이저리그 진출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선수 본인이 구단에 잔류함으로써 메이저리그 진출 설을 일축했던 과거가 있었다.
올 시즌은 전반기 내내 부상 여파에 시달리다가 7월 달부터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전성기 때에 비한다면 구위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였지만, 여전히 특유의 투구 폼으로 인해 우타자의 눈에는 마운드가 아닌 1루 베이스 쪽에서 공이 던져진다는 착각이 들게 만드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후우~"
마운드에 오른 김광헌 투수는 손에 묻은 로진 가루를 입으로 불어내며 자이언츠의 첫 타자를 맞이한다.
오늘 자이언츠의 선두 타자로 타석에 선 선수는 중견수 유성철이었다.
성철은 몇 년 간 팀의 주전 중견수로 자리한 전준오를 위협할 정도로 좋은 타격감과 수비 능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4할이 넘는 출루율이 증명하듯이 팀에서 4번 타자인 강호 다음으로 높은 출루율을 기록하는 타자였다.
김광헌 투수는 성철을 상대하기 위한 초구를 결정짓고는 역동적인 와인드업 동작으로 초구를 뿌리고 있었다.
후오옹, 터엉!
포수 미트를 가득 채우는 소리가 모두의 이목을 이끈다.
성철은 김광헌 투수의 초구를 지켜본 후 저도 모르게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149km. 뭐야? 리포팅에 나온 구속하고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성철이 전광판에 찍혀 있는 구속을 확인한 후 주심의 볼 판정이 이어진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초구 판정은 스트라이크였다.
타자의 몸 쪽을 완벽하게 파고드는 149km의 포심 패스트볼은 타격감이 좋은 성철로서도 건드릴 수 없는 공이었다.
덕 아웃에서 두 선수의 대결을 지켜보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그점을 인지하게 된다.
"구위가 장난 아닌데? 김광헌 투수 전성기 시절 때나 저런 공을 던지지 않았나? 오늘 긁히는 날인 것 같은데?"
"오늘은 점수를 많이 뽑아내기는 틀린 것 같아. 저런 공을 어떻게 공략해?"
"모르지, 또. 강호라면 저런 공에도 홈런을 때려낼 수 있을지."
선배 선수들은 김광헌 투수의 초구 감상평을 밝히며, 고개를 내젓다가 이내 강호를 향해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상대 팀에 김광헌과 같은 투수가 있다면 자신의 팀에는 '백강호'라는 강타자가 있었던 것이다.
"강호, 오늘 컨디션 어때? 김광헌 투수 공 상대할 수 있겠어?"
팀의 주장인 강민수가 강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어오고 있었다.
이제 캡틴 강민수마저 어려운 상황에서 의지할 정도로 강호는 팀의 대표 타자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많은 선수들은 그 어떤 상대 투수를 만나더라도 '강호가 있으니까' 혹은 '강호에게 기회만 연결시켜 주면 돼'라는 생각으로 타석에 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때로는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관심과 중압감이 강호에게는 긍정적인 상승작용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기분이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만큼 내가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니까. 캡틴을 포함한 모든 선, 후배 선수들이 나를 믿는다는 기분, 이런 느낌이었구나.'
강호는 평생 그려오던 무대의 중심에서 남다른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1군 무대에서 경쟁해 보는 것이 당면 목표였던 과거의 모습이 떠오른다.
생존이라는 단어가 하루하루를 살게 하는 유일한 목표였을 시절, 강호는 꿈을 꾸었었다.
1군 생존 경쟁을 넘어, 호쾌한 홈런포를 때려내는 팀의 4번 타자로 활약하는 모습을.
그 꿈을 실현시켜 준 것은 반칙같이 찾아온 우연이었지만, 그 기회를 잡은 것은 강호 본인이었다.
'그리고 손 감독님 덕분에 팀의 4번 타자가 될 수 있었어. 이제는 2군에서 올라온 후배 선수들뿐만 아니라 캡틴이나 다른 선배 선수들도 나를 믿게 됐다. 부담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지금 이 순간은 꿈에서나 그리던 장면이니까. 꿈꾸던 것을 손 안에 넣게 되었는데 허무하게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지.'
강호는 캡틴 강민수의 물음으로 찾아온 묘한 여운을 그렇게 정리하며,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한다.
단지 질문을 던진 민수뿐 아니라 많은 선수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답을 해주고 싶었다.
"타자가 못 칠 공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광헌 투수의 공도 마찬가지고요."
강호의 대답은 길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한 답변이 됐을 정도로 임팩트 있는 대답이었다.
강호의 이번 시즌 기록만큼이나 인상적인 대답인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들은 민수와 선배 선수들은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렇지! 자이언츠의 4번 타자면 그런 패기 정도는 있어야지. 우리 선배들도 강호 너한테 기회를 넘겨주려고 애쓸 테니까 강호 너도 2타점 정도는 뽑아줘! 백강호 파이팅!"
강호의 대답에 대꾸한 것은 캡틴 강민수가 아니라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지명타자 채중석이었다.
그는 강호를 향해 오른 주먹을 들어 올리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만약 문표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분명히 중석의 말에 토를 달았겠지만, 문표는 지금 대기타석에 나가 있는 상태였다.
오늘의 2번 타자가 바로 문표였기 때문이다.
평소 같았으면 문표가 했을 말을 캡틴 강민수가 대신한다.
"중석 선배님은 오늘 타순에 없으시잖아요?"
"타순에는 없지만, 대타로 나갈 수는 있는 거잖아. 뭐, 예를 들어서 문표가 타석에서 삽질하면 내가 2번 자리에 대타로 나갈 수도 있는 거니까 확정은 짓지 말자고. 내가 오늘만큼은 대타로 타석에 서면 후배님들한테 제대로 기회를 연결시켜 줄게. 볼넷으로 걸어 나가서라도 말이야."
중석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면서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의 대표적인 장점이 선구안 능력이었기 때문에 볼넷을 얻어서라도 기회를 연결시켜 주겠다는 말은 왠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한편, 강호와 선배들이 의견 교환을 나누는 사이 팀의 선두 타자인 성철이 5구째 승부 끝에 삼진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며 덕 아웃으로 돌아서는 그에게 대기 타석에 있던 문표가 말을 건넨다.
"괜찮아. 수고했어. 성철이 네가 삼진 먹는 동안 이 최문표 형님께서 김광헌의 공을 공략할 포인트를 찾았다고. 나한테 맡겨 둬!"
"공략이요? 저런 공에 공략이 가능하겠습니까? 설마 또 기습 번트 대시려고요?"
"...그건 영업 비밀이야. 삼진 당했으면 덕 아웃으로 썩 물러나 있어."
문표는 삼진을 당한 성철을 위로하다가 종국에는 그를 비난하는 말로 짧은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타석에 선다.
그는 성철의 예상대로 김광헌 투수의 2구째에 기습 번트를 감행했지만, 강한 구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공이 포수 위로 떠오르면서 허무한 아웃카운트 하나만 늘어나고 있었다.
"아놔, 저게 왜 뜨는 거야? 분명 3루수하고 투수 사이를 파고들어야 하는데?"
문표는 2구만에 내야 뜬공으로 물러나며 혼잣말을 되뇐다.
덕 아웃으로 들어오는 문표에게 누군가가 손가락질을 해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문표와 앙숙이라 할 수 있는 지명타자 채중석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강호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이던 중석은 문표를 향해 기괴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삿대질을 하는 중이었다.
"푸헿헿! 그걸 지금 번트라고 대는 거야? 아~오늘은 문표 자리에 대타로 설 수 있겠네. 문표야, 다음 타석에도 번트 대줘. 그럼 감독님이 너를 빼버리고 대신에 나를 대타로 세울 것 같단 말이야. 오늘 경기에서는 2번 타자 채중석의 위엄을 보여줘야겠네."
"...이건 제 잘못이 아니라 김광헌 투수 공이 너무 좋은 거라고요."
"누가 뭐래? 그런 좋은 공 던지는 투수한테 번트는 왜 대는 거야? 차라리 커트를 하지 그랬어?"
두 사람은 조금 전 문표의 번트 실패를 주제로 한동안 설전을 벌이는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강호가 나서서 두 사람을 말려주었겠지만, 강호는 지금 자신의 배트를 든 채 대기 타석에 선 상태였다.
'1회에는 나한테까지 타석 기회가 오지 않겠네. 1회 공격은 철이 타석에서 끝나겠어.'
강호는 대기 타석에 선 채 1회 상황을 그렇게 내다보고 있었다.
대기 타석에서 지켜본 김광헌 투수의 공은 언터쳐블한 모습이었고, 3회 이전에 공략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과연 그런 예상대로 박철은 4구째 승부 끝에 내야 뜬공을 때려내며 1회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이 나고 만다.
이제 1회 말 와이번스의 공격 차례가 되고 있었다.
문학구장을 찾은 자이언츠 원정 팬들은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오늘 선발로 등판할 것이라 생각했던 투수의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야? 라일리는 어디 갔어? 오늘 라일리 차례 아냐?"
"김영명이 누군데? 저런 이름은 처음 봤는데? 아무리 세대교체 시기라도 쌩 초보를 선발 투수로 올리면 어쩌자는 거야?"
모두의 시선 속에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사전회의에서 조민욱 볼펜 코치가 제안한 김영명 투수였다.
올해로 97년생 23살이 되는 젊은 투수 김영명.
올 시즌 들어 몇 차례 불펜 등판하기는 했지만, 다수의 자이언츠 팬들조차 그의 이름을 모를 정도로 활약이 미비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팀의 2선발 라일리를 대신해 선발 투수로 오르자 많은 팬들이 의문의 시선을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몇몇 팬들은 스마트 폰으로 인터넷 중계 창을 열어 중계 내용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아...오늘 라일리가 손톱이 들렸다네. 그럼 3선발인 박세준을 올려야 되는 거 아닌가?"
"박세준은 준비가 안 됐겠지. 뭐, 손성조 감독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결정 내린 거 아니겠어? 원래 이런 경우에 임시 선발로 올릴 권대우는 마무리로 돌렸고, 박상현은 부상으로 빠졌잖아. 성수제는 어제까지 불펜으로 던졌고, 사준식도 엊그제 던졌으니까. 지금 선발로 올릴 투수가 손명학이나 김영명밖에 없는 거지."
자이언츠의 라인업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일부 자이언츠 팬들은 금세 납득하는 모습이지만, 그런 정보들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다수의 팬들은 여전히 의문섞인 시선으로 마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팬들의 의문 속에 김영명의 초구가 뿌려진다.
파앙!
날카롭게 포수 미트를 파고드는 초구에 순간 타석에 오른 타자가 움찔하는 모습이다.
배트를 내기에는 묘하게 멀어 보이면서도 마음먹고 휘둘렀으면 때리지 못할 코스는 아니었던 것이다.
와이번스의 선두 타자, 가메스의 시선이 자연스레 주심에게로 향한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판정은 스트라이크였다.
가메스는 주심의 판정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을 돌려 전광판을 확인해 본다.
143km.
100kg이 넘는 김영명의 체구를 생각했을 때 빠른 구속은 아니었다.
그런데 코스가 절묘하다보니 때린다고 해도 파울 이상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어서 던져진 2구마저 비슷한 코스의 스트라이크로 선언되자 가메스는 혀를 길게 빼무는 모습이었다.
한편, 마운드 뒤에서 김영명이 던진 두 개의 공을 지켜본 강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영명이가 긁히는 날이구나. 2군에 있을 때도 그랬었지. 영명이는 제구가 안 되는 날에는 말도 안 되게 털리지만, 이상하게도 긁히는 날이 많은 투수였어. 긁히는 날의 제구력이 본인의 실력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자주 긁히는 것 같기도 해서 손 감독님이 영명이를 1군에 올리는 걸 주저하셨던 기억이 나.'
강호의 기억대로 야구 원로인 손 감독을 주저하게 만들 정도로 김영명의 투구는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긁히는 날에는 확실한 제구력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특별할 것 없는 2군 투수의 전형을 보여주는 투구를 하고는 했다.
그런데 긁히는 날이 지나치게 자주 있다는 장점이 있는 투수였다.
2군에서 선발로 오르는 등판 때도 3번 중, 한 두 번은 긁히는 날이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손 감독은 그런 김영명의 투구 패턴을 지켜보다가 이렇게 결론을 내렸었다.
"아직 자기만의 투구 리듬을 만들어내지 못한 거야. 1군에서 통하는 제구력이지만, 그걸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만들 수 없다면 1군에 올릴 수는 없겠지."
김영명을 2군에서 지켜보던 손 감독의 결론이었다.
그런 손 감독이 김영명 투수를 직접 1군으로 콜 업 시켰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강호는 그것을 이렇게 결론짓고 있었다.
'완성되어 간다는 거겠지. 영명이가 1군에서 통할 수 있는 투수로 말이야.'
강호가 내린 결론 속에 마운드에 오른 김영명 투수는 총 26개의 공을 던지며, 와이번스의 1회 공격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볼넷 하나와 안타 하나를 내주며 불안한 모습으로 출발했지만, 위기 대처 능력이 돋보이는 김영명의 1회였다.
중계석에서도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김영명 투수, 오늘 경기가 자신의 첫 1군 선발 등판 경기임에도 침착하게 위기를 마무리 합니다. 자이언츠에서 또 다시 눈여겨볼만한 신인 투수가 나온 것 같은데요?"
"네.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타자 입장에서는 제구가 안 되는 강속구 투수보다 김영명 투수처럼 구속은 낮지만, 제구력이 뛰어난 투수가 더 상대하기 어려운 점도 있거든요. 오늘 경기는 선발 대결에서 와이번스 쪽으로 기울지 않나 생각했었는데, 경기를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한명진 캐스터와 박재헌 위원의 호평 속에 첫 선발 등판 신고식을 알린 김영명 투수가 마운드를 내려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와이번스의 선발 투수인 김광헌 투수가 마운드에 오른다.
그리고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소리를 등에 업은 채 팀의 4번 타자인 강호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타석에 들어선 강호는 마운드 위의 투수와 시선을 마주한 채 배트를 들어 올린다.
배트를 힘껏 쥠에 따라 강호의 발달된 상체 근육이 마운드 위의 투수를 위협하듯 불거져 나온다.
"때려라, 백강호!"
"강호 후배, 날려 버려!"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응원과, 강호의 해결사 능력을 기대하는 선배 선수들의 함성 속에 김광헌과 강호,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