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03화 (20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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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만의 비밀

시간과 장소는 잠시 강호에서 멀어진다.

그것은 더 이상 힘을 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던 태호의 이야기였다.

강호의 모교인 경남중의 야구부로 이름을 올린 주태호.

그는 양친이 자신과 동생들의 곁을 떠나버리자 병든 노모와 함께 힘겨운 삶을 지나는 시기였다.

아직 어린 태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겨운 삶의 무게였지만, 태호는 의식이 생긴 순간부터 그런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힘들거나 누군가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태호에게는 당연해진 삶의 모습들이었다.

"형, 형, 형! 이것 봐! 완전 좋아. 새 거야. 새 거! 이거 진짜 내가 가져도 돼?"

태호는 아직 어린 막내 동생, 태양이의 신난 목소리에 사심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어린 동생의 환한 미소를 보는 것이 대체 얼마만의 일인지 몰랐다.

태호는 이름 모를 후원자에게 받은 돈으로 가장 먼저 할머니의 건강을 챙길 약과 쌀, 동생들의 가방과 신발을 구입했다.

처음에는 백만 원이나 되는 후원금을 어디에 써야할지 고민했지만, 집으로 돌아와 병상에 누워계시는 할머니와 동생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돈을 사용하고 있었다.

항상 누군가가 사용했던 낡은 가방과 신발을 신어야만 했던 동생들에게 새 신발과 가방을 사주고 뿌듯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가난한 삶을 살아도, 부모가 없다고 천대 받아도, 동생들만큼은 다른 인생을 살게 해주고 싶어.'

태호는 새 신발과 가방을 받고 기뻐하는 여동생 태희와 막내 태양이의 모습에 후원받는 것을 거부하지 않기로 한다.

처음에는 후원자의 이름을 몰라 후원받는 것을 거절할까도 생각했지만, 눈앞에서 동생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게 되니 그런 생각이 사라지고 만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존심 하나로 버텨오던 태호였지만, 환하게 웃는 동생들의 모습에서 그 고집을 꺾고 있었다.

'할머니가 드실 약도 살 수 있게 됐으니까. 그리고 이 정도 후원금이면 하루 세 끼를 챙겨드릴 수도 있을 거야. 그러면 할머니도 몸이 괜찮아지지 않을까?'

태호는 그런 생각을 가진 채 이름 모를 후원자의 후원금을 받아들인다.

그때부터였다.

항상 그늘이 가득하던 어린 소년 가장, 태호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한 것이.

묻는 말 외에는 말수가 적었던 태호는 조금씩 자신이 가진 밝은 성격을 되찾아갈 수 있었다.

그런 변화는 항상 태호를 안타까워하던 강태성 감독이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된다.

강 감독은 경남중 야구부의 감독으로서 강호가 모교를 찾아와 진행한 행사를 돕기도 했었다.

'태호가 요즘 들어서 웃는 날이 많이 늘고 있어. 말수도 늘어나고. 좋은 일이다. 나쁜 녀석은 아니었는데, 고집이 세다보니까 다른 녀석들하고 부딪히는 일도 많았었지. 이제 태호도 친구를 사귀면서 평범한 학생들처럼 지내면 좋겠구나. 야구도 조금 더 전념할 수 있을 거야.'

강 감독은 태호의 긍정적인 변화에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한다.

그런데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세상의 이치는 태호를 피해가지 못했다.

어느날 강 감독은 훈련 시간이 되어도 야구부에 오지 않는 태호를 찾아 담임에게 찾아갔다.

"네? 학교에 안 나왔다고요? 왜요?"

"그건, 저도 아직...생활기록부에 적혀있는 전화번호에 아무리 전화해 봐도 받지를 않네요."

강 감독은 속편한 담임의 대답에 순간 분노하고 만다.

"담임이라는 사람이 반 학생이 결석을 하면 직접 찾아가보던지 해야지. 전화만 몇 통 하면 답니까?!"

"아니...그게. 결석 하루에 학생 집에 방문하는 교칙은 없어서..."

강 감독은 여전히 답답한 소리를 하는 담임에게 소리쳐 묻는다.

"어딥니까? 태호의 집이!"

강 감독은 담임의 손에서 생활기록부를 뺏어들고는 태호의 집주소를 찾아 곧장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도착하게 된 태호의 집.

'여기가 집이라고? 2019년에도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강 감독은 민가라기 보다는 폐가에 가까운 태호의 집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이런 곳에서 태호와 동생들이 지내고 있다고 하니 왠지 마음이 무거워 진다.

"계십니까?"

강 감독은 집으로 들어서며 허리를 숙여야 했다.

대문이라고 있는 것이 성인 남자가 들어서기에는 너무 낮았던 까닭이다.

마당이라고 나온 곳은 이런저런 폐자재들이 잡다하게 쌓여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강 감독의 목소리에 낡은 문이 열리며 동그란 눈동자가 빼꼼이 모습을 드러낸다.

"누구세요?"

자신을 경계하는 소녀의 모습에 강 감독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태호의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의 경계심을 없애보려고 웃어보지만, 태호네 집의 참담한 현실에 진심으로 웃을 수는 없는 상태다.

"태호 동생이야? 나는 태호 학교 야구부 감독인데, 태호가 오늘 학교에 안 나와서 찾아와 본거야. 오빠 집에 있어?"

"오빠, 지금 병원에 있어요."

"병원?"

"네, 할머니가 아침에 일어나지 않아서 기관 아저씨들하고 같이 병원에 갔어요. 오빠가 우리는 집에서 기다리래요."

아직 초등학생인 태희의 대답에 강 감독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병원이 어디야? 혹시 연락처나 주소 남긴 거 없어?"

강 감독은 그 후 태희가 받아 두었다는 기관 사람들의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어 병원의 위치를 알아내고는 곧장 병원으로 이동한다.

태호의 할머니가 입원했다는 병원에 도착한 강 감독이 발견한 것은 병실의 한 쪽 구석에 걸터앉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태호의 모습이었다.

"태호야."

강 감독의 부름에 태호는 눈물이 가득 맺힌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본다.

"감독님. 우리 할머니 어떡해요? 할머니가 눈을 안 떠요. 어떡해요, 감독님?"

태호는 강 감독을 포함해 다른 사람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강 감독에게 묻고 있었다.

강 감독은 그런 태호에게 다가가 한 쪽 무릎을 굽힌 채 바닥에 주저 않은 태호를 감싸 안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한참을 망설이던 강 감독이 전화를 건다.

그가 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호였다.

과거 경남중 행사에 참석한 강호가 태호의 후원을 약속하면서 강 감독 자신에게 건낸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태호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저한테 전화주세요. 경기 중일때는 전화를 못 받기는 하지만, 부재 중 전화를 확인하면 곧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때 강호가 건넨 말이 떠올라 받지 않는 전화를 두 번이나 했지만, 한동안 강호에게서 전화가 없었다.

강 감독이 강호에 대한 기대는 버리고,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할 무렵.

기대를 접고 있던 강호에게서 걸려온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저 백강호 입니다. 강태성 감독님, 태호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강 감독은 강호의 목소리가 왠지 구세주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강호에게 태호가 처한 상황을 알려준다.

"태호 할머니가 쓰러지셨어요. 의사 말로는 간단한 수술이면 된다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병원비 문제가 있어서요. 태호 할머니 이름으로 보험을 가입한 것도 없고, 태호네 집 형편으로는 아무래도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서요."

강 감독은 강호에게 탁 터놓고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수술비라는 것이 강 감독의 입장에서는 큰돈이기는 해도, 구하지 못할 정도의 돈은 아니었다.

예상되는 수술비와 입원비, 약값 등을 고려한다면 5백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이었다.

그래서 강 감독 본인이 그 돈을 융통하기 위해 움직이려는 순간, 강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지금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수술비용은 염려마세요.

강호는 수술비를 염려하는 강 감독의 목소리에 그렇게 대꾸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강호가 보낸다는 사람이 병원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강호의 형, 강수였다.

강수는 동생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공사를 진행 중이던 현장을 작업 오장에게 맡기고, 병원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강태성 감독님이시죠? 백강호 선수 연락받고 왔습니다."

강수는 강호를 통해 알게 된 강 감독의 인상착의로 그를 알아본 후 태호 할머니의 상태를 전해 듣게 된다.

이미 강 감독이 태호 할머니의 MRI촬영을 받게 하고, 담당의의 소견을 들어놓은 상태였다.

"의식이 없는 건 다행히도 뇌경색이나 뇌출혈 문제는 아니랍니다. 태호 할머니가 예전부터 고혈압에 당뇨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 부분에서 합병증으로 인한 이상이 왔을 수도 있다네요. 자세한 건 혈액 검사가 나와 봐야겠지만, 담당의 말로는 간단한 레이저 수술하고 혈압 약을 복용하는 정도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병을 호전시킬 수가 있답니다. 문제는 그러려면 한 달 이상은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건데 태호 할머니가 보험 가입이 않되 있다 보니 비용문제가 있습니다."

강 감독의 자세한 설명에 강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도 바로 그 비용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였다.

10년 가까이 현장 작업에만 몰두하던 강수는 의료 지식이 풍부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먼저 원무과에 들러 오늘까지의 병원비를 중간 수납한 강수는 곧장 병실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의식이 없는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믿지도 않는 신을 향해 기도하는 태호의 간절한 모습을.

태호는 병실 입구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고, 강수를 바라본다.

강수는 눈물로 범벅이 된 태호의 눈동자와 마주하고는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직 어린 태호의 감성에 동화되기에는 강수 또한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태호의 감성에 젖어버리는 강 감독과는 다르게 강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호에게 첫 인사를 건넨다.

"네가 태호구나. 아저씨하고 얘기 좀 할 수 있겠니?"

인사를 건네며 대화를 청하는 강수의 말에 태호의 시선이 강수의 곁에 선 강 감독을 향한다.

강 감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호는 잡고 있던 할머니의 손을 잠시 놓고는 강수의 곁으로 다가와 선다.

그러면서도 강수에게 일정 거리 이상은 다가서지 않고 있었다.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타인을 경계하는 태호의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강 감독은 그런 태호를 향해 다가가 등을 토닥여 주었다.

"태호야, 아저씨랑 이야기하고 올 때까지 내가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을게."

"..."

태호는 아무 말 없이 강 감독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수의 곁을 스치고 지난다.

태호가 먼저 나가버리자 입구에 남은 두 사람 중 강 감독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상처가 많은 녀석입니다. 아무에게나 쉽게 마음을 열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얘기 나누고 오십시오."

강 감독은 그렇게 말하며, 태호의 할머니가 누워있는 침대 맡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사이 강수는 발걸음을 옮겨, 병실 복도 의자에 앉아있던 태호의 곁으로 다가선다.

태호는 힘없이 의자에 앉은 채 바닥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강수는 그런 태호의 곁으로 다가가 감정을 배제하고는 필요한 말만을 전달한다.

"강 감독님에게 얘기는 다 들었다. 할머니는 간단한 수술을 받으시면 괜찮아지실 거야."

강수의 말에 한동안 대꾸하지 않던 태호. 강수는 그런 태호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준다.

때로는 대답을 독촉하는 것보다 말없이 침묵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을 잘 아는 강수였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몇 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태호가 다물고 있던 입을 연다.

"병원비는요? 그리고 수술비는요? 백만 원 정도로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잘 알아요. 우리집은 그렇게 많은 병원비를 낼 돈이 없어요."

태호의 말에 강수는 조금 놀라게 된다.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태호가 가장 현실적인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수는 그런 태호의 눈높이에 맞춰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태호 너한테 후원자가 생겼다는 것은 알고 있을 거야. 병원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얼마가 되었든 그 후원자 분이 다 해결해 주실 테니까."

강수가 꺼낸 '후원자'라는 말에 바닥을 향해 고개를 처박고 있던 태호가 고개를 들어올린다.

그리고는 강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아저씨가 그 후원자에요?"

"나는 아니다. 나는 그 사람이 보내서 온 심부름꾼 같은 거야. 그래도 이 말은 확실하게 약속할 수 있어. 할머니가 완치되실 때까지 모든 비용을 책임질 거야. 이건 약속이야."

강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자신을 또렷이 바라보는 태호의 눈동자가 누군가를 닮아 있다고 느꼈다.

처음 병실에서 태호의 눈을 마주할 때부터 느꼈었지만, 이렇게 바로 곁에서 태호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강호 녀석, 후원을 해도 꼭 지 닮은 녀석을 후원하고 있었구나. 과연 강호답다.'

강수는 태호의 눈빛이 예전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동생의 눈빛과 많이 닮아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예전 자신의 눈빛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나도 그랬어. 강호와 진주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로 살아야만 했어. 이 태호라는 녀석은 아직 중학생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런 책임감을 안은 채로 살아가고 있구나.'

강수는 태호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 태호의 입장은 그것을 먼저 경험했던 강수로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태호라는 아이가 왠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요?"

강수의 회상은 태호의 물음으로 인해 깨어진다.

태호는 강수를 올려다보던 눈빛을 거두고는 다시 바닥을 향해 시선을 돌린 채 질문을 던져오고 있었다.

"그 후원자 아저씨는 돈이 남아돌아서 그러는 거예요? 저 같은 애가 불쌍해서요?"

태호의 목소리 가득 경계심과 함께 적의가 느껴지고 있었다.

어쩌면 할머니가 쓰러진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 대한 무력감과 상실감, 그리고 세상을 향한 적의가 솟구치는 지도 몰랐다.

그런 점을 느낀 강수는 여전히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도움받기 싫으면 거절해도 좋아. 네가 원하지 않으면 물러서겠다. 후원자에게 찾아가서 없던 일로 해줄 수도 있어."

강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설득할 것이라 여기고 있던 태호는 강수의 단호한 말에 깜짝 놀라며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린다.

강수는 그런 태호와 시선을 마주하며 강한 어조로 말한다.

그가 하는 이야기에는 강수 본인의 처절했던 과거와 기억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키고 싶은 것이 가족이야? 네 자존심이야? 만약 자존심을 택한다면 말리지 않겠어. 그것도 네 선택이니까. 하지만 네가 가족 지키는 걸 선택한다면 네가 가진 전부를 고집할 수는 없는 거야.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둘 중 하나를 지켜야 할 때는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니까. 네 자존심이 가족보다 소중하다고 생각되면 후원을 거절하고, 네 힘으로 할머니를 낫게 하면 되는 거야.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니까."

강수는 태호를 단지 어린 아이로 대하고 있지 않았다.

아직 어리지만,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태호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의 돈으로 태호의 할머니를 수술시키고 치료비를 내줄 수는 있지만, 태호 본인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게 가장의 무게일 테니까. 아직 어리더라도 한 가정의 가장이야. 그 사실을 외면하고서 할머니를 수술시킨다면 태호라는 아이에게 상처만 주게 될 거야.'

강수는 태호 본인에게 선택의 공을 넘긴다.

할머니를 낫게 하기 위해 태호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기 보다는 태호 본인에게 선택을 하게 해서 그로 인한 감정들과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게 하려는 것이다.

태호에게 할 말을 모두 마친 강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태호의 대답이 있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 시간은 꽤나 오래 걸리고 있었다.

강수는 흘낏 시선을 돌려 태호를 살펴본다.

태호는 마치 인생 가장 중요한 순간의 결정을 내리는 사람처럼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끝내 한숨을 내쉬고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도와주세요."

"뭐?"

"도와주세요. 저희 할머니요. 살려주세요. 아저씨는 돈이 많아서 저희 할머니 수술비 좀 내도 남아있는 돈이 많잖아요. 저희 할머니 좀 살려주세요."

태호는 자신이 가진 마지막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그것의 정체는 강박관념에 가까울 정도의 고집과 자존심이었다.

태호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 태어나 처음으로 도와달라는 말을 입밖으로 꺼낸다.

'이 녀석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야 깨달은 것을 이 어린 나이에 깨닫고 있구나.'

강수는 태호가 힘들게 꺼낸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가족을 살리길 바라는 어린 태호의 곁으로 다가가 차갑게 식어있는 태호의 손을 붙잡는다.

태호는 자신의 손을 부여잡는 크고 따뜻한 손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강수와 시선을 마주친다.

강수는 그런 태호에게 사심 없이 씨익 웃어 보인다.

태호는 여전히 웃지 않았지만, 강수의 웃음에서 느껴지는 묘한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아직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태호로서는 강수의 웃음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잘 판단할 수가 없었지만,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되어서야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 감정은 바로 동질감이었다.

서로 다르지 않다는,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부류에게서 느껴지는 동질감.

태호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의 여파에 조금은 당황하고 있었다.

강호의 결정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그 후로 평생 동안 계속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고, 서로가 많이 닮아 있는 두 사람은 말없이 손을 맞잡고 병원 복도의 의자 위에 나란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또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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