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199화 (198/335)

0199 / 0335 ----------------------------------------------

변화를 예고하다

하루가 흘렀다.

밤까지 내리던 비는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중부 지역을 제외한 지방 권 도시들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오후가 되자 하나, 둘 씩 비가 걔는 지역이 생겨난다.

광주와 대전에서 경기는 여전히 내리는 비로 인해 우천 취소되었지만, 고척과 잠실, 인천에서 열리는 세 개의 경기는 취소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 관중들이 경기장을 채워나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소는 자이언츠의 경기가 열리는 고척으로 이동한다.

"이야~! 오늘 경기만 이기면 이제 우리 팀이 4등으로 올라가는 거야? 하하, 참. 감개가 무량하네. 이게 얼마만의 4등이야?"

문표의 목소리에 덕 아웃에서 장비를 챙겨들던 일부 선수가 함께 웃음 짓는다.

덕 아웃에 붙어 있는 오늘 경기의 라인업을 확인하던 문표는 자신의 이름이 6번 타순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유격수 글러브를 챙겨들고 있던 강호가 그런 문표의 곁으로 다가선다.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그럼, 그럼. 강호 후배야 붙박이 4번 타자가 됐으니까 이제 타순 경쟁이나 포지션 경쟁이 무덤덤하겠지만, 나 같은 떠돌이 타자는 주전으로 이름 올리는 게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

자신에게 '붙박이 4번 타자'라고 말하는 문표의 말에 강호는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붙박이 4번 타자라고? 내가 벌써 그런 위치가 된 건가?'

강호는 문표의 말을 재차 확인하기 위해 문표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선발 라인업을 확인한다.

오늘 경기부터 또 다시 변화된 타순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호는 변동된 특이점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뜬다.

'제인 선배가 3번으로 들어갔어! 그렇다는 말은 제인 선배가 주전으로 이름을 올리더라도 나를 여전히 4번으로 쓰신다는 뜻이잖아.'

강호는 이제야 문표의 말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게 된다.

기존 4번 타자 황제인의 복귀로 임시로 맡고 있던 4번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우려하던 강호는 자신의 자리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내가 4번 타자야.'

강호는 라인업에서 묘한 여운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쥔다.

그런 강호의 표정 변화를 살피던 문표가 피식 웃음 지으며 강호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강호 후배, 좋겠어. 제인이가 올라오면서 내 지명타자 자리를 위태롭게 만들긴 해도 강호 후배를 밀어내지는 않았네. 뭐 덕분에 스팅이 좌익수 글러브를 껴야겠지만, 스팅이나 나나 자리를 지켰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팀의 4번 타자가 복귀했는데 나 같이 애매한 포지션의 선수가 라인업에 버틴 게 용한 거라고. 흐흐."

문표는 그렇게 말하며 바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황제인의 복귀로 스팅이나 문표 본인의 입지가 확연히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하던 것이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올 시즌 스팅이 기록하고 있는 타율은 2할 9푼 2리, 23홈런에 71타점.

문표는 3할 6리의 타율에 32득점과 35타점, 6홈런을 기록 중에 있었다.

다른 팀에 가져다 놓으면 중심 타선에서도 활약할 수 있는 성적이겠지만, 자이언츠에서는 자리 보존하기도 힘든 성적이었다.

1번 유성철부터 박철, 전준오, 강호, 문표, 황인태, 오진택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수들이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명의 주전 타자들 중 7명이 3할을 기록 중에 있다.

그 중 1번 타자인 유성철은 오늘 경기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물론 휴식 차원이 포함된 라인업 제외였지만, 황제인의 합류로 3할을 때리고 있는 팀의 리드오프에게 휴식을 줄 수 있다는 이점이 생겨난 것이다.

그만큼 올 시즌 자이언츠 타선은 활화산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라인업에서 자리 지키려면 하루에 안타 하나 정도는 꼭 때려야겠어. 3할 타율이 밀리면 주전 경쟁이고 뭐고 힘들어. 오늘 라인업만 해도 그래. 아홉 명 중에 일곱 명이 3할 타자잖아. 뭐 인태나 제인이는 규정 타석에 못 미친다고 해도 3할 타율이 어디 가는 게 아니지. 분발해야겠어. 아자, 아자!"

강호는 말을 하다말고 파이팅을 외치는 문표의 행동에 슬금슬금 그에게서 멀어져 간다.

투지를 불태우는 문표를 덕 아웃에 내버려두고 강호의 발걸음은 경기 전 훈련을 위해 그라운드로 옮겨지고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파악한 문표는 멀리서 김상훈과 송구 훈련 중인 강호를 발견하고는 소리친다.

"김상훈하고 훈련 하면 안 돼! 강호 후배, 내 포지션 경쟁자들하고 놀지 말라니까!"

장난기 다분한 문표의 외침이 일부 자이언츠 원정 팬들에게까지 들렸고, 평소 문표의 장난스러운 언행을 알고 있는 자이언츠 팬들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밝아진 팀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요즘 자이언츠 분위기 좋네. 저렇게 분위기 좋으니까 연승도 달리고 하는 거지."

"내 말이 그거라니까. 한동현 감독 때는 팀 분위기가 너무 어두웠어. 손성조 감독이 감독 자리에 올라서 더 안 좋아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

"손성조 감독이 감독직을 맡는데 왜 분위기가 안 좋아져?"

"나이가 많은 감독이잖아. 괜히 나이 어린 선수들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런 점을 걱정했었지."

"걱정도 팔자네. 올 시즌에 1군에 올라온 젊은 선수들을 누가 다 키웠는데? 2군에서 손 감독이 다 키운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자이언츠의 세대교체는 90%이상 손 감독 작품이라는 얘기지."

팬들은 최근 들어 달라진 팀 분위기를 얘기하며, 자이언츠 팬들의 핫이슈 토론 주제인 세대교체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팀 성적이 중위권 이상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선수단에 한없이 인자한 모습의 자이언츠 팬들이었다.

그런 팬들의 인식 변화는 선수단의 분위기를 만들어준 손성조 감독을 향한 찬사로 이어졌고, 또한 올해 자이언츠가 가장 달라진 점 중에 하나인 구단의 노력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장소는 잠시 자이언츠 구단 본부로 옮겨진다.

최근 들어 지정만 사장 이하 모든 프런트들이 주말까지 반납하고, 업무에 매진하고 있는 자이언츠 구단 본부.

그 중 모든 프런트들을 컨트롤하는 지정만 사장 또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사장님, 전자결제 하실 내용이 꽤나 밀렸습니다. 먼저 결제부터 해주시는 게 어떨까요?"

지 사장에게 업무 결재를 재촉하고 있는 사람은 기획실의 수장인 기획실장, 허동준이었다.

그는 전자결재가 밀리고 있다는 타 부서 부장들과 기획실 직원들의 민원을 들은 후, 총대를 메고 사장실로 걸음을 옮긴 것이다.

불호령을 각오하고, 지 사장을 재촉한 것인데 의외로 지 사장의 반응은 차분했다.

"응? 응. 그래. 내가 결제도 안하고, 이러고 앉았네. 이게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가 힘들다니까."

지 사장은 허 실장의 요구에 그렇게 대꾸하며 업무용 PC로 몸을 돌린다.

자이언츠 사장실에는 총 3대의 컴퓨터가 존재했다.

하나는 지금 지 사장이 마우스를 잡은 사내 인트라넷 전용 컴퓨터였고, 하나는 지 사장의 개인용 노트북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지 사장이 조금 전까지 몰두하고 있던 하나의 컴퓨터였다.

그 컴퓨터가 무슨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지를 잘 알고 있는 허 실장이지만, 호기심이 생겨 슬쩍 모니터 화면을 훔쳐보게 된다.

'또, 또. 대체 사장씩이나 되가지고, 왜 매일 댓글들을 확인하시는 거야? 얼라? 이건 뭐야? 이제는 아이디까지 파서 여론몰이까지 하고 계시네. 무슨 댓글 알바도 아니고.'

허 실장은 속으로 혀를 차며 결제도 미뤄놓고 댓글 읽는 재미에 빠져버린 지 사장의 뒷모습을 노려본다.

모니터 화면에 비친 허 실장의 눈빛을 보게 된 지 사장은 여전히 전자 결제를 승인하면서 등 뒤의 허 실장에게 입을 연다.

"뭘 그렇게 째려보나? 그렇게 직장 상사 노려볼 시간에 너도 여기 앉아서 구단 기사에 선플이라도 달아. 왜 돈 주고 댓글 알바를 쓰나? 우리 구단에 연봉 많이 받는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데. 당장 너부터 구단 기사에 선플 좀 달아."

지 사장의 말에 순간 허 실장은 정말로 그런 일을 해야 되나 고민하는 모습이다.

선플이란 흔히 말하는 '악플'의 반대말로 댓글을 달 수 있는 게시물에 좋은 내용의 댓글을 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 사장은 어느새 인터넷 문화와 용어에 전문가 수준이 되어있는 것이다.

"악성 댓글에는 대댓글로 반박 댓글도 좀 달고. 너무 심한 악플에는 신고도 좀 먹이고. 선수나 코칭스태프 인격 비하하는 댓글들은 캡쳐 해놔. 내가 시즌 끝나고 일괄적으로 고소해버릴 테니까."

"저...정말 이십니까?"

"아니 장난이야. 고소는 무슨 고소. 댓글에 안 좋은 말도 쓸 수 있는 거지. 그래도 캡쳐는 해놔."

"아..예.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허 실장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지 사장의 지시대로 댓글도 달고, 캡쳐도 하며 묘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지 사장이 전자결제를 끝내고 자리로 복귀하자 한숨을 내쉬며 마우스를 주인에게 넘겨준다.

"어디보자. 캡쳐를 이것밖에 못 했어?"

"그게, 생각보다 악성 댓글이 별로 없어서 말입니다."

"악성 댓글이 없다고? 어제 경기부터 악플이 많이 줄었나보네. 좋은 반응이야. 6연패할 때는 프런트나 선수단을 씹어 먹으려고 하던 팬들이 올스타 브레이크 후 3연승까지 달리니까 선플만 달고 있어.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저희가 일을 잘 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 바로 그거야. 우리가 일을 부지런히 하니까 악플도 줄어드는 거라고. 하하하, 가만 보자.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허 실장, 뭐 하고 있어? 얼른 리모컨 이리로 가져와."

"아, 넵."

지 사장은 허 실장과 대화를 주고받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야구 채널을 맞혀둔 TV화면을 켠다.

그의 귓가에 이제 막 선수들의 라인업을 읽기 시작한 캐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자이언츠의 타순입니다. 1번에 우익수 박철, 2번 중견수 전준오, 3번 지명타자 황제인, 4번 유격수 백강호, 5번 좌익수 스팅, 6번 1루수 최문표, 7번은 2루수 황인태, 8번 3루수 오진택, 9번에는 포수 안민경이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캐스터의 타순 설명에 지 사장이 눈썹을 꿈틀하며 입을 연다.

"포수가 안민경이야? 요즘 안민경 포수를 너무 자주 올리는데? 강민수 포수로 가다가 안민경으로 가니까 타선의 무게감이 조금 떨어진단 말이야. 우리 자이언츠에서 강민수를 받쳐 줄 중견 포수가 필요한데. 확 사버려?"

지 사장은 2할 대 초반으로 표시되고 있는 안민경 포수의 타율을 확인하고는 혼잣말로 되된다.

그가 새로운 포수 영입을 고민하고 있을 때, 함께 TV중계를 지켜보던 허 실장이 '어?' 하는 놀란 목소리를 낸다.

"황제인 선수가 복귀했는데 백강호 선수가 그대로 4번이네요?"

주전 라인업에 올라간 황제인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허 실장이 묻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지 사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린다.

"무슨 멍청한 소리야? 우리 구단 4번 자리에 황제인 이름 새겨놨어? 백강호 선수가 잘하면 백강호가 4번 하는 거지! 허 실장은 백강호 선수 올 시즌 기록도 몰라? 지금 당장 나가서 백강호 선수 시즌 기록이나 찾아봐! 아니다. 내가 어제 구단 기사에 댓글 단 거 있으니까 그거 읽으면 되겠네. 잠시만 있어봐."

지 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댓글 전용 컴퓨터로 다가가 어제 기사에 직접 대댓글을 단 댓글을 연다.

곁에 있던 허 실장은 지 사장이 직접 달았다고 말한 댓글에 시선을 모은다.

"윗님, 말하려면 제대로 아셔야죠. 121득점입니다. 백강호 선수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426에 출루율 0.500 장타율 0.988 OPS1.488에 142안타, 40홈런, 67도루, 162타점에 121득점이라고요."

강호의 구체적인 기록을 나열하고 있는 댓글은 다른 팀 팬의 댓글에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허 실장은 댓글의 내용보다 지 사장의 아이디에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국민타자 백강호? 사장님 아이디가 이거였어? 어쩐지 요즘 구단 기사마다 이 아이디로 댓글이 달려있다더니. 사장님 아이디였어? 아이고~'

허 실장은 지 사장의 아이디를 눈여겨본 후 자신을 응시하는 지 사장에게 말을 꺼낸다.

"사장님 말씀대로 4번 자리에는 백강호 선수가 적격인 것 같습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백강호 선수 정도의 기록이면 국민타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 사장은 허 실장이 말한 '국민타자'라는 말에 웃음지어 보인다.

"국민타자? 허 실장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 우리 백 선수 정도면 그 정도 별명은 있어야지. 내가 지금 당장 국민타자 백강호로 보도 기사를 뿌릴까?"

"아니요. 그건 내년 시즌까지는 지켜보시죠."

"무슨 소리야? 허 실장도 좀 전에 말했었잖아? 우리 백 선수가 국민타자에 어울린다고."

"그래도 데뷔시즌 루키한테는 조금 과한 별명이지 않겠습니까? '괴물신인'이나 '4할 타자'정도가 어울리지 않을까요?"

허 실장의 만류에 지 사장의 얼굴이 찡그려지고 있었다.

어느새 강호의 팬이 되어버린 지 사장으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대체 사장님이 언제 백강호 선수의 팬이 된 거야?'

허 실장은 지 사장의 불쾌한 표정에 진땀을 흘리며 주제를 전환할 거리가 없나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그 때 허 실장의 귀에 지금의 상황에 가장 필요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따악!

TV스피커에서 들려오는 호쾌한 타격음에 허 실장이 '어!'하고 탄성을 내뱉었고, 그 행동에 지 사장이 곧장 TV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 진행된 경기는 어느새 강호의 타석으로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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