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197화 (196/335)

0197 / 0335 ----------------------------------------------

투혼을 넘겨 받다

자이언츠와 히어로즈, 두 팀 간의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은 7회 초 1사 만루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히어로즈는 자이언츠의 4번 타자인 강호를 고의사구로 거른 것에 이어 대타로 타석에 선 황제인 마저 거르는 과감한 결정을 하기에 이른다.

1사 만루 상황을 자처하며 6번 타자인 최문표에게 승부를 걸기로 한 것이다.

그런 히어로즈의 극단적인 작전 속에 타석에 선 문표.

그의 표정은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강호와 제인이를 거르고 나와 승부를 보겠다고? 좋아, 내가 그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겠어!'

문표는 눈빛을 빛내며 자신을 향해 던져진 명길관의 초구부터 배트를 내고 있었다.

그의 타격을 확인한 양 쪽 덕 아웃에서 순간 경악성이 울려 퍼진다.

"저런!"

"어서 막아!"

자이언츠와 히어로즈, 양 팀 덕 아웃 중 조금 더 놀라는 쪽은 히어로즈 덕 아웃이었다.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이언츠 쪽 덕 아웃에서 별다른 작전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조금은 배제하고 있던 작전이 문표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든 번트(sudden bunt), 흔히들 기습 번트라고 부르는 번트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자를 한 루 더 진루시키기 위해 타자가 희생 번트를 하는 보통의 번트 작전과는 다르게, 기습 번트는 타자 본인도 1루에서 세이프 될 목적으로 대는 번트였다.

그만큼 번트에 대한 숙련도와 이해도, 높은 정확도를 요구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뛰어, 홈으로!"

3루 베이스 코치가 외치는 목소리에 순간 멈춰져 있던 그라운드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문표의 기습 번트가 덕 아웃에서 나온 작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강호를 포함한 주자들의 대쉬가 빠른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루 주자인 박철이 홈으로 파고들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문표의 번트는 기묘한 곳을 찌르고 있었다.

투수인 명길관과 3루수 김민섭의 사이로 빠르게 굴러간 타구를 먼저 손에 쥔 것은 투수가 아닌 3루수 김민섭이었다.

투수 근처에 떨어진 번트를 투수가 아닌 야수가 주워들었다는 것은 주자와 승부를 벌이기에는 늦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김민섭 3루수는 홈으로 쇄도하는 박철과의 승부를 포기하고, 죽을힘을 다해 1루로 뛰고 있는 문표를 잡기 위해 1루수 최태연에게 공을 송구한다.

"아웃!"

1루심의 판정은 아웃이었다.

문표가 사력을 다해 1루로 뛰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아웃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의 판단으로 팀은 1타점을 올릴 수 있게 되었고, 2대 1로 뒤지고 있던 상황은 이제 2 대2. 동점이 된다.

"와아아!"

"잘 했다. 최문표! 안타가 안 되면 번트라도 좋아! 점수만 내자!"

자이언츠 원정 팬들은 문표의 결정에 찬사를 보내며 오랜만의 득점을 기뻐한다.

이제 양 팀이 동점이 된 가운데 7회 초 2사 2, 3루의 상황이 팀의 캡틴인 강민수에게로 연결된다.

6월에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7월 중순부터 다시 타격감을 끌어올리고 있던 자이언츠의 캡틴 강민수.

시즌 타율 2할 8푼 1리에 17홈런과 61타점을 기록 중에 있었다.

오늘 경기의 가장 중요한 승부처가 될 수도 있는 민수의 타석 상황에 자이언츠 원정 팬들이 목소리를 더욱 높인다.

"강민수 안타! 강민수 안타!"

"한 점만 더 내자! 안타 한 번 때려줘요, 강민수 선수!"

뜨거운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오는 팬들의 바람 속에 캡틴 강민수가 타석에 선다.

민수는 자신에게 또 하나의 타점을 기대하는 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금 전 덕 아웃에서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민수의 기억은 지독히도 점수가 나지 않았던 3회 초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수 선배."

민수는 자신의 지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벤치 자리에 앉아 있다가 곁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는 무슨 일인지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문표의 얼굴이 들어오고 있었다.

"문표, 무슨 일이야? 얼굴이 왜 그래? 화장실 가고 싶어? 화장지 빌려줄까?"

민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곁에 앉는 문표에게 장난스럽게 물어본다.

평소에 비해 지나치게 무거워 보이는 문표의 기분을 가볍게 해주기 위한 나름의 유머가 담긴 민수의 물음이었다.

그런데 문표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오늘 경기, 이깁시다."

뜬금없는 문표의 당부에 민수는 피식 웃어 보인다.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이기자는 얘기야? 당연히 이겨야지. 지려고 경기하는 선수가 세상에 어딨겠어?"

"그렇죠. 지고 싶은 선수는 없겠죠. 그래서 오늘 경기를 이기자는 겁니다. 히어로즈 선수들도 이기려고 들 테니까요."

문표의 이어진 말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민수는 장난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문표의 행동에 관심을 보인다.

그런 민수의 표정 변화를 확인한 문표가 말을 이어간다.

"오늘 박상현 선배님이 부산으로 가기 전에 저한테 해준 말이 있습니다."

박상현 투수를 거론하는 문표의 말에 민수는 표정을 굳힌다.

한 때 자이언츠 투수진의 기둥이기도 했고, 20년의 세월동안 팀의 마운드를 지켰던 박상현 투수의 엔트리 이탈은 팀의 주장인 민수로서도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했다.

민수는 문표의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상현 선배 수술 일정이 잡혀서 시즌 아웃되더라도 구단의 은퇴 압력을 막아주겠다고요. 내년이 되던, 내후년이 되던 상현 선배가 돌아올 자리를 지켜주겠다고 하셨답니다."

민수는 문표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문표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하는 거라 여긴 것이다.

이윽고 문표의 말이 결론에 도달한다.

"저는 그 시기를 조금 더 앞당겼으면 좋겠습니다. 내년이나 내후년이 아니라요. 우리가 올 시즌에 가을 야구만 할 수 있으면 박상현 선배도 1군 복귀를 좀 더 서두르지 않겠습니까? 재활이 아무리 힘들다고는 해도, 전반기 내내 허리 통증을 참아낸 상현 선배라면 그 정도 재활 훈련, 몇 달이면 끝내지 않을까요?"

문표의 말은 확신이나 믿음보다는 바람에 가까웠다.

그것이 잘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장인 민수의 입장으로서는 섣부르게는 대답을 할 수 없게 된다.

"상현 선배 배웅은 제가 아니라 강호가 해드렸습니다. 그런 건 원래 저희 선배들의 일 아닙니까? 우리 선배들이 그런 것도 제대로 못했으니까 경기라도 이겨야죠. 그래야 후배들 볼 낯도 있는 겁니다."

문표의 말은 그렇게 끝맺음 되었다.

민수는 문표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여태껏 고민하다가 타석에 선 지금에서야 의미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 사이 상대 투수의 초구가 뿌려지고, 잠시 주춤거리던 민수는 배트를 내지 못한 채 주심의 판정을 기다린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초구 판정은 스트라이크였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판정이라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타격 자세를 잡는다.

'경기를 이기자고? 그건 당연한 일이야. 문표, 우리 프로 선수들은 그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주어진 경기는 반드시 이기려고 애써야 된다.'

민수는 3회 초 상황에서 문표에게 해주지 못했던 대답을 지금에서야 찾아내며 길관의 2구를 맞이한다.

"볼."

길관의 2구는 볼이 된다.

민수는 유인구임이 뻔한 길관의 백 도어 슬라이더를 걸러내며, 생각을 이어간다.

'하지만 문표 네 말도 일리는 있어. 상현 선배나 나, 그리고 문표 너 같은 베테랑 선수들이 할 몫을 강호 같은 신인 선수들에게 미뤄둬서는 안 되는 거야. 선배 선수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민수는 문표가 던진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아낸 상태였다.

그 확신을 담아 명길관 투수의 3구째를 향해 배트를 휘두른다.

따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민수의 발걸음이 1루로 향한다.

길관의 투심을 통타한 민수의 타구가 유격수 김아성의 키를 살짝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민수의 안타에 3루 주자였던 강호가 손쉽게 홈으로 들어오고, 2루 주자인 황제인 마저 빠르게 홈으로 파고든다.

"세이프!"

중견수 한정음이 던진 송구를 받아낸 포수 박동현이 태그를 시도했지만, 주심의 판정은 세이프가 된다.

민수의 안타로 2타점이 만들어져 이제 상황은 4대 2, 자이언츠가 시종일관 끌려가던 경기를 7회에 뒤집는데 성공한 것이다.

"와아아아!!"

"잘했다, 강민수! 역시 캡틴이야!"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환호 속에 민수가 1루 베이스를 밟고 선다.

그는 문득 자이언츠 덕 아웃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문표와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문표, 이 경기는 우리가 가져오는 거야. 우리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선수니까. 경기마다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건 프로의 자세가 아냐. 하지만 네가 말한 대로 상현 선배가 돌아왔을 때 마운드에 오를 최소한의 기회를 마련해 주는 건, 우리 후배들이 해야 할 몫이야. 그러니까 이 경기는 우리가 꼭 이긴다!'

민수는 문표와 마주친 시선을 거두며 1루 베이스에서 발을 뗀다.

1루로 출루를 했으니 주자가 된 상태였다.

비록 2사 상황이긴 하지만, 한 점이라도 더 만들어내기 위해 주장인 자신부터 의지를 내보일 생각인 것이다.

민수의 이런 의도는 다음 타자로 타석에 선 인태가 내야 뜬공을 때려내며 무산되고 말았지만, 덕 아웃에서 민수의 의욕적인 주루 플레이를 지켜본 후배 선수들에게는 꽤나 큰 의미가 되고 있었다.

'민수 선배의 리드 폭이 평소보다 눈에 띄게 늘어났어. 이번 경기를 이기고 싶다는 의도겠지.'

강호는 자신의 유격수 글러브를 챙겨 들며 조금 전 캡틴 강민수가 보여준 승리 의욕을 머릿속으로 되새겨 본다.

그것은 다른 후배 선수들도 마찬가지여서 각자의 글러브를 챙겨들고 그라운드에 나서는 선수들은 평소보다 조금 더 기합 든 모습으로 힘차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 야수들의 투지는 표면화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승리에 대한 갈망이 바이러스처럼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세준에게 마운드를 넘겨받은 투수는 성수제 투수였다.

성수제 투수는 원래 2군에서 활약하던 선수로 올 시즌 1군에 이름을 올린 후 팀의 4선발과 5선발을 오가며 6승 6패, 방어율 4.12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손 감독은 박상현 투수를 재활 군으로 내리면서 5선발이었던 성수제를 불펜으로 돌리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2군 투수들을 시험할 바에는 이미 검증이 끝난 선발 자원을 불펜으로 돌리는 과감한 결정이었다.

'계투로 마운드에 오르는 건 오랜만이네. 2군에 있을 때는 자주 있었던 일이었는데.'

마운드에 오른 성수제 투수는 오랜만에 복귀한 불펜 투수로서 첫 공을 뿌린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판정은 스트라이크였고, 그 후 다른 선수들의 투지를 넘겨받은 수제 역시 호투를 선보이며 히어로즈의 7회 말을 네 타자 만에 종료시키고 있었다.

이어서 8회 말에는 위기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강호의 호수비 도움 덕분에 1실점으로 이닝을 막아낼 수가 있었다.

이제 양 팀 스코어는 4대 3.

자이언츠가 한 점을 앞선 가운데 9회 말, 정규 이닝의 마지막 상황이 시작되고 있었다.

팀이 한 점을 앞선 세이브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전반기 동안 마무리 보직을 번갈아 맡았던 손명학이나 윤길준, 표성태 등이 아니었다.

"후우."

대우는 9회 말 근소한 리드를 이어가는 팀의 마지막 수비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 또한 선수단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실점 없이 이닝을 종료시키고 싶은 바람이 강한 상태.

반대로 그에 따른 부담감 역시도 큰 상황이었다.

'좋아! 내게 클로저의 임무가 맡겨졌어. 이 상황에서 나를 마운드에 올린다는 것은 후반기 동안 내가 마무리로 활약할 수 있는지를 점검한다는 의미일 거야. 감독님의 기대대로 실점 없이 경기를 종결시켜야만 해!'

대우는 각오를 다지며, 타석에 오른 상대 타자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시한다.

9회 말 히어로즈의 첫 타자로 타석에 오른 선수는 4번 타자 데이비드.

대우는 첫 상대부터 어려운 타자를 맞이하며 망설임 없이 공을 뿌린다.

휘이익.

마치 뱀의 움직임을 연상케 하는 기묘한 무브먼트의 공이 포수 미트를 향해 뿌려진다.

그런데 초구를 노리고 있었던 것인지 데이비드의 배트가 대우가 던진 공의 궤적을 정확하게 쫓고 있었다.

'안 돼!'

데이비드의 배트 타격을 확인한 대우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껑충 뛰어오른다.

따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데이비드의 타구가 빠른 속도로 좌중간을 향해 뻗어져 나가고, 정타를 허용한 대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간다.

그런데 그 때 이변이 일어났다.

터억!

유격수인 강호의 글러브가 좌중간을 관통하고 있던 데이비드의 타구를 낚아챈 것이었다.

데이비드의 타구가 좌중간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것을 확인한 강호가 잔뜩 움츠리고 있던 몸을 펴며 마치 농구 선수가 슬램덩크를 하는 자세로 타구를 막아내는 모습이었다.

족히 2미터는 넘게 뛰어오른 것 같은 강호의 점프력에 놀랄 사이도 없이 타구를 막아낸 강호가 투수인 대우에게 공을 돌려준다.

놀란 눈빛의 대우와 시선이 마주친 강호는 피식 웃음 지으며 특유의 행동을 해보이고 있었다.

탁, 탁!

자신의 가슴을 치며 야수들을 믿으라고 신호를 보내오는 강호.

그의 행동을 마주하게 된 대우 역시 옅은 미소를 짙게 된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우는 뒤이어 나온 대타 이택성과 6번 타자 김민섭을 연달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오늘 경기의 승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4대 3.

전문가들이 난타전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경기는 의외의 결과로 자이언츠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이 승리는 모든 팬들의 시선이 고척으로 향한 가운데에서 얻어낸 값진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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