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195화 (19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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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혼을 넘겨 받다

황제인과 최훈, 두 선수의 1군 합류가 자이언츠 선수단의 핫이슈가 된 가운데 시간은 빠르게 흘러 선수단은 어느새 고척 경기장으로 이동한 후였다.

서울을 포함한 중부 지방에는 여전히 많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고척 경기장에는 많은 관중들이 찾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내 프로야구 경기장 최초로 돔(dome) 형태로 건설된 고척 경기장은 특유의 지붕 구조로 인해 외부의 기후 상황에 관계없이 경기를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오늘 경기가 히어로즈 전만 아니었다면 하루 더 쉴 수 있었는데, 아쉬워. 돔구장은 이런 게 안 좋단 말이야. 오늘같이 비가 많이 오늘 날에는 온몸이 찌뿌둥 한데도 경기는 정상적으로 해야 하잖아? 안 그래, 강호 후배?"

강호는 송구 훈련 중에 투정어린 말을 건네 오는 문표의 질문에 피식 웃어 보인다.

문표의 말대로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고척 일정만은 취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른 네 곳의 경기 일정이 모두 우천 취소된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몸이 안 좋으시면 감독님께 말씀드리고 라인업에서 빼달라고 하세요. 제가 대신 말씀드릴까요? 사실은 상현 선배님을 쫓아 부산으로 가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강호는 대꾸와 함께 걸음을 옮겨 자이언츠 쪽 덕 아웃으로 향한다.

그 모습에 문표가 급하게 강호의 앞을 가로막는 모습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장난이야, 장난. 그냥 해본 말이라고. 내가 경기하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데? 안 그래도 중심 타선에서 밀린 상태인데 몸 안 좋다고 하면 감독님이 엔트리에서 아예 제외시켜버릴 거야. 상현 선배처럼 말이야."

문표는 허리 통증으로 오늘 경기부터 엔트리에서 제외된 박상현 투수를 거론하며 강호의 어깨를 붙든다.

상현이 오늘부터 엔트리에서 빠지는 사실은 문표와 강호를 포함한 일부 선수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박상현 투수 본인이 그 사실을 문표와 강호에게 알려줬기 때문이다.

시간은 자이언츠 선수단이 아직 숙소에 머물고 있던 조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호가 호텔 프런트에서 받아온 팬들의 선물을 뒤적이고 있던 문표는 문득 궁금해진 점 하나를 묻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상현 선배님은 강호 방에 잘 안 찾으시네. 예전에는 자주 왔었잖아?"

문표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백업 내야수로 이름을 올린 임정이었다.

임정은 본의 아니게 원정 기간동안 박상현 투수와 룸메이트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상현 선배님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허리 통증 때문에 원정 기간 중에는 잠도 잘 못 주무세요."

임정의 대답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한 때 박상현 투수와 같은 방을 쓰기도 했던 대우와 원정 버스에서 항상 상현의 곁에 앉았던 강호로서는 임정의 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상현이 내색하지 않아서 선수단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강호와 대우, 문표조차 그의 부상 정도가 그렇게까지 심해졌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문표가 모든 이들을 대신해서 묻게 된다.

"그 정도면 코치님들한테 알려야지. 최소한 우리들한테라도 알려주던지. 정이 너는 한 방을 쓰면서 그런 사실을 왜 입 다물고 있었던 거야?"

문표의 질타에 임정이 잠시 대답을 망설인다.

선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임정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상현 선배님이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 하셔서 말 못 했습니다. 제가 별 수 있겠습니까? 상현 선배님께서 비밀로 해달라고 하시니 입 다물 수밖에요."

임정은 그렇게 토로한다.

그 때 입구 쪽에 서 있던 임정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반쯤 열려 있던 숙소 방에 들어서던 누군가가 임정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비밀로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입을 다물어야지. 약속한지 얼마나 됐다고 죄다 까발리는 거야?"

웃는 얼굴로 임정에게 나무라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박상현 투수였다.

그런데 박상현 투수의 모습에 의문이 생긴다.

상현은 자신의 짐을 모두 챙겨든 모습으로 강호의 방을 찾은 것이다.

그 모습에 강호의 방에 있던 모든 선수들이 몸을 일으킨다.

"선배님, 어디 가십니까? 이제 한 시간 정도만 있으면 경기장으로 이동해야할 텐데요."

모두를 대신해서 문표가 상현에게 묻고 있었다.

그러자 상현은 피식 웃음 지으며 물음에 대꾸한다.

"너희들은 경기장에 가서 위닝 시리즈 이상 따내도록 해. 나는 오늘부터 엔트리에서 빠지게 됐으니까. 이유는 너희들도 이제 알겠지."

상현은 숙소 방 입구에 선 채로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후배들은 상현의 말에 쉽사리 대꾸하지 못한다.

임정의 얘기를 들어보면 박상현 투수의 허리 통증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특히 강호는 예전, 1군에 갓 올라왔을 때 상현과 한 방을 쓰던 대우의 말을 떠올려 본다.

'허리 통증이 심해서 우시기까지 하던데요.'

몇 달 전, 박상현 투수와 한 방을 사용했던 대우는 그렇게 말했었다.

상현이 허리 통증이 너무 심해서 눈물까지 보일 정도라고. 매일 밤 대우 본인이 상현의 약 심부름과 병수발을 도맡아야 했다고.

대우가 했던 말들이 이제야 떠오르고 있는 강호였다.

'그 후에 허리 통증이 호전되신 게 아니었나? 그럼 그렇게 심한 허리 통증을 안은 채로 1군 경기에 나섰다는 말이야? 그런 상태에서 상현 선배가 올 시즌에 올린 기록은 대체 뭐지?'

강호는 박상현 투수의 올 시즌 기록을 떠올려 본다.

4승 3패 12홀드에 2세이브, 방어율 3.47.

올 시즌 성적만 놓고 보아도 상현이 볼펜 한축을 담당하며 전천후 활약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그 성적이 극심한 허리 통증을 안은 채 기록한 것이라고 하니 새삼 박상현 투수를 다시 보게 된다.

"아마도 시즌 아웃 될 거야. 운이 좋아서 수술이 아닌 약물 치료를 하더라도 시즌 복귀는 힘들 테니까. 치료 약물을 들어보니까 치료용으로 사용할 수는 있어도 시즌 사용이 금지된 약물들이야. 약물 치료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즉시 엔트리에서 제외되겠지."

상현은 모두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숙소를 나서는 순간, 자신은 시즌 아웃될 것이라고.

매일 밤 눈물겨운 통증을 참아내며 마운드에 오르려고 했던 노장의 투혼은 이제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문표가 이를 악무는 모습이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제가 지금 감독님께 찾아가서 따지겠습니다!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선배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요?!"

문표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분개하며 손 감독을 찾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입구에 서 있던 박상현 투수는 그런 문표의 걸음을 짐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문표가 자신을 대신해서 감독님께 나서려고 한 행동은 상현으로서는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보기에 따라서 항명으로 비쳐질 수 있음에도 문표는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대신해서 나서주고 있는 것이다.

"문표, 정신 차려. 작년 일을 되풀이 할 셈이야? 너 작년에 한민이나 준식이 때도 한동현 감독에게 찾아가서 난리를 피웠잖아? 지금 감독님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손 감독님이야. 경거망동할 생각 마!"

상현은 작년의 일을 들먹이며 문표에게 호통 친다.

그의 말에서 다른 선수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한 감독에 대한 문표의 항명에 관한 진실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문표 선배는 본인의 일로 한 감독에게 따진 것이 아니라 한민이나 준식이 같은 후배들을 대신해서 나선 것이었구나. 한 감독은 그런 문표 선배를 1군에서 제외시켜 버린 거고.'

강호는 상현의 말에서 작년에 1군에서 있었던 일을 유추해내고는 문표의 뒷모습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그동안 가볍고, 장난스러운 모습만을 보이던 문표였다.

그런 문표가 사실은 후배들을 지키기 위해 총대를 메고 2군에 머물게 됐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다.

장난스러운 문표의 이면에는 그런 의리가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강호는 문득 예전 훈련 상황에서 문표가 꺼냈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 엄마도 돌아가셨는데? 10년도 더 된 일이야."

문표는 그 때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밝히며 웃음 지었다.

강호는 그 웃음 속에 가려진 문표의 많은 모습들이 감춰져 있다고 느끼며, 두 선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상현 선배님, 지금 내려가시는 길입니까?"

문표는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강호로 인해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입구에 선 상현에게 저지를 당하기도 했고, 평소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강호가 지금 상황에서 나서자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그래야지. 감독님이 벌써 MRI촬영을 예약해 놓으신 모양이야. 곧바로 내려가야 할 것 같아."

"제가 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강호는 상현의 곁으로 다가서며 그가 들고 있던 백 팩을 넘겨받는다.

그러자 문표가 미간을 좁히며 다가선다.

"강호, 뭐하는 거야, 지금?! 상현 선배가 지금 어디 놀라가는 줄 알아? 상현 선배는 이대로 가면 은퇴수순을 밟아야 한다고! 그것도 모르고 지금...!"

문표는 강호를 향해 처음으로 눈을 부라리며 화를 내고 있었다.

강호는 그런 문표를 향해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압니다."

"뭐?!"

"안다고요. 상현 선배님이 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치료에 들어가면 시즌 아웃될 거라고요.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퇴된다는 말은 상현 선배님이 하신 적 없습니다. 그리고 감독님이라면 상현 선배를 이대로 은퇴시키지도 않을 거고요."

강호는 분노로 이성을 잃은 문표에게 그렇게 대꾸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한 강호의 이성적인 말에 문표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다.

문표는 그러면서도 상현이 숙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손을 붙들고 있었다.

이대로 상현이 떠나버리면 다시는 1군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박상현 투수의 모습을 보지 못할까봐 우려하는 문표였다.

그런 문표에게 박상현 투수가 웃는 낯으로 입을 연다.

상현은 자신을 대신해서 화를 내고 있는 문표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자신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순간을 함께 해주려는 강호에게도 역시나 감사하고 있었다.

그런 고마운 감정을 담아 문표에게 마지막 말을 건네었다.

"강호의 말이 맞아. 감독님이 약속을 하셨으니까. 이번 시즌 동안 마운드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구단의 은퇴 압력을 막아주시겠다고. 내년부터 다시 마운드에 올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 그러니까 이대로 끝나는 게 아니야. 나는 다시 마운드에 돌아올 거야. 이대로 야구 인생을 끝내는 일은 없을 거야."

상현은 그렇게 문표에게 마지막 작별을 전하고는 강호와 함께 숙소 방을 나섰다.

잠시 후 감정을 추스른 문표는 뒤늦게 호텔 입구에 나와 박상현 투수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나누려고 했지만, 이미 상현은 부산으로 떠나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강호가 대신하고 있었다.

문표는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호텔 입구로 걸어오는 강호에게 질문을 던진다.

"잘 보내 드린 거야?"

"네. 잘 가셨어요."

문표의 질문에 강호는 짧게 대답했고, 문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호텔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런 문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호가 피식 웃어 보인다.

불현듯 숙소를 떠나기 직전, 박상현 투수가 자신에게 건넨 말이 떠오르는 강호였다.

"문표는 정이 많아서 그래. 사람 사귀는 걸 워낙 좋아하고, 누구에게나 쉽게 정을 주거든. 자기가 알고 있는 친한 사람들이 상처 받거나 힘들어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상현은 강호와 함께 호텔 로비를 나서며 그렇게 문표를 변호해주고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발걸음은 로비를 지나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기던 강호와 상현, 두 사람.

상현은 호텔 입구에 불러놓은 택시에 타려다가 몸을 돌리고는 강호를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넨다.

"강호야, 혹시라도 내가 조금 일찍 치료를 끝내고 돌아오면, 만약 시즌 아웃되지 않고 가을  쯤에라도 돌아올 수 있으면. 늦게라도 가을야구에 합류할 수 있도록, 꼭 팀을 포스트 시즌까지 올려놔 줘야 해. 할 수 있겠지?"

상현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강호는 이성적으로는 그럴 수 없다고, 야구라는 게임은 선수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함께 풀어가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상현의 간절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나니 그렇게 차가운 말로 대답할 수가 없게 되었다.

강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그럴게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는 떠나더라도 팀에는 너나 문표, 대우 같이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충분히 포스트 시즌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야. 운이 좋으면 나도 포스트 시즌에 합류할 수 있을 거고."

상현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는 택시에 오른 뒤에도 할 말이 남은 것인지 잠시 망설이다가 차창을 내린 후에 강호를 향해 마지막 말을 전한다.

"부탁한다. 강호야."

그 말을 남기고 상현을 태운 택시는 숙소에서 멀어져 갔다.

강호는 그 때까지만 해도 상현이 부탁하고 간 것이 무엇인지를 곧장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런데 비에 젖은 문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상현이 부탁하고 간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상현 선배님이 다시 돌아오셨을 때, 마운드에 오르실 수 있도록 팀을 반드시 가을 야구에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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