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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장소는 원정 숙소로 정해진 호텔로 이동한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어진 이동을 끝내고, 숙소에 내린 자이언츠 선수단은 서울에 도착한 감상평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게 서울은 비가 더 내리네. 부산은 양호한 거였어. 이 정도면 오늘 경기도 어렵겠는데?"
지명타자인 채중석이 버스에서 내리며 꺼낸 말이 오늘 중부 지방의 날씨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착각하고 있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중석이 내린 다음으로 버스에서 내린 문표가 그 점을 바로 잡아 준다.
"무슨 소립니까? 히어로즈 홈구장이 고척이라는 점을 까먹은 겁니까? 오늘 경기는 돔 경기라고요."
문표의 지적에 중석은 '아, 그렇지!'라고 대답하며, 민망해 한다.
중석이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는 사이 모든 선수들은 숙소로 이동해 여장을 푼다.
그것은 코칭스태프도 마찬가지였다.
손 감독을 포함한 모든 코칭스태프는 숙소 방에 여장을 푼 후 손 감독의 방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손 감독이 미리 코칭스태프 회의를 예견해 두었기 때문이다.
"불펜 조는 어때? 특별히 몸이 안 좋은 선수는 없겠지?"
회의를 진행한지 꽤나 시간이 경과한 후 손 감독은 불펜 코치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불펜 코치는 손 감독이 1군 감독이 되며 기존의 이용진 코치에서 조민욱 코치로 바뀐 상태였다.
조 코치는 94년 고졸우선지명으로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94년부터 2007년까지 자이언츠에서만 현역으로 뛰다 은퇴한 후 코치 생활 역시 자이언츠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나가고 있었다.
현역으로 뛸 때 홈경기 15연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하며 '안방 불패'의 위엄을 보여주기도 했고, 94년 데뷔 시즌에는 최연소 완투승을 기록하며 데뷔 시즌 10승 투수에 오르기도 했었다.
많은 자이언츠 팬들은 조 코치의 전성기가 조금만 더 길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을 가진 이들이 아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조민욱 코치가 자이언츠 1군 불펜 코치가 되어 손 감독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상현이가 좋지 않습니다. 비가 계속 내려서 습도가 올라가서인지 허리 쪽 통증이 며칠 전부터 재발한 모양입니다. 당분간 마운드에 올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민욱 코치는 불펜 조의 최고참 투수인 박상현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박상현 투수는 80년생, 올해로 마흔 살의 나이로 자이언츠 불펜을 지탱하는 최고참 투수의 위치에 있었다.
올 시즌 불펜에서 4승 2패 12홀드 2세이브, 방어율 3.47을 기록하며 자이언츠 불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조 코치는 그런 박상현 투수의 고질적인 부상인 허리 통증에 대해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다른 선수들과 생활할 때는 허리 통증이 있다는 것을 특별히 보여주지 않고 있었지만, 최근 박상현 투수의 허리 통증은 심각할 정도였다.
손 감독은 자이언츠 불펜의 핵심 중에 한 명인 박상현 투수에게 이상이 있다는 조 코치의 말에 걱정스럽게 묻고 있었다.
"많이 안 좋은 거야?"
"사직에 있을 때 엑스레이를 한 번 찍어봤는데, 허리 쪽 디스크 증상이 도드라진다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염증도 심한 것 같고요. 담당의가 CT촬영을 권했었는데 상현이 본인이 거절했습니다. 본인은 심각한 증상이 아니라고 고집피우는 중이에요."
조 코치는 이미 트윈스와의 사직 경기가 있었을 때 박상현 투수와 함께 구단 지정 병원에 다녀온 후였다.
그 때 CT촬영을 해보려 했지만, 선수 본인이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엑스레이 촬영에만 만족해야 했다.
투수 출신인 조 코치는 박상현 투수의 걱정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현역 생활 당시 조 코치 역시 부상으로 고생한 시기가 있었고, 그로 인해 기량이 급감하는 시련을 당하기도 했었다.
부상으로 전성기를 빠르게 마감해야 했던 조 코치이기 때문에 박상현 투수의 허리 부상이 염려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흔 살 노장 투수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현역 때 내 입장과 상현이의 입장은 다르니까. 20대 투수의 부상은 구단 입장에서도 기다려줄 수 있는 거지만, 40대 투수의 부상은 곧 은퇴로 이어지게 돼. 상현이가 우려하는 건 그런 점이겠지.'
박상현 투수를 바라보는 조 코치의 생각이었다.
조 코치나 박상현 투수 본인뿐만 아니라 모든 코칭스태프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상현이 허리 수술을 받게 된다면 이번 시즌동안은 마운드에 오를 수가 없게 되고, 다음 시즌 역시 재활 일정을 소화해야 되서 마운드 등판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다.
42살이 되는 내후년쯤에야 재활이 끝나 마운드에 복귀할 수 있겠지만, 그 때는 이미 은퇴를 결정해야할 정도로 나이가 들어버린다.
상현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수술 일정을 조금 미루더라도 폼이 유지되고 있는 올 시즌을 어떻게 해서라도 버텨볼 작정인 것이다.
홀로 지독한 통증을 이겨내고 있는 노장투수의 각오가 느껴져서인지 코칭스태프 중 누구도 박상현 투수를 엔트리에서 제외시키자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 감독만은 달랐다.
"상현이를 이번 시리즈에서 제외시켜. 그리고 사직으로 돌아가는 대로 MRI촬영을 받게 하고, 디스크 증상은 CT보다 MRI를 찍는 게 확실하니까."
손 감독은 과감하게 결정을 내린다.
그의 말에 조 코치가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다.
"상현이 본인이 거부하면 어떻게 할까요? 상현이가 MRI촬영을 거절할 겁니다. 본인은 올 시즌을 계속 이어나가길 원하고 있어요."
"상현이 녀석에게는 내가 말해보도록 하지. MRI촬영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상현이를 마운드에 올리지 않을 거야. 통증이 심한 걸 억지로 참아내면서 공을 던져봐야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게 돼. 차라리 올해에 시즌 아웃되더라도 선수 생활을 조금 더 이어갈 수 있다면 그 쪽을 선택하려 들겠지. 내가 잘 말해보겠네."
손 감독의 말에 조 코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자신이 해야 할 어려운 일을 팀의 총사령탑인 손 감독이 맡아준다고 하니 한시름 덜게 된다.
박상현 투수의 고집은 그만큼이나 예민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남은 팀 일정을 위해서라도 박상현 투수를 마운드에 올리는 것이 좋아. 하지만 선수 본인을 위해서라도 CT촬영을 해봐야만 해. 감독님은 올 시즌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상현이의 치료를 우선할 생각이신 거야. 단기적으로는 분명 손해가 되겠지만, 장기적인 팀 입장에서는 분명 이득이다.'
그것이 조 코치의 생각이었다.
박상현 투수의 부상을 모른척하고 마운드에 올린다면, 당장 불펜진이 위태로운 자이언츠의 팀 성적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중이 되어 박상현 투수의 허리 부상이 크게 터져버린다면 팀 분위기가 급격히 나빠질 수가 있다.
코칭스태프가 선수의 부상을 알고 있음에도 엔트리에서 빼지 않았다는 것을 선수들이 알게 된다면 선수단 사기가 떨어지고, 코칭스태프를 불신하는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손 감독은 그런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박상현 투수를 엔트리에서 빼고 병원 행을 결정한 것이었다.
단지 박상현 투수의 개인적인 일만은 아닌 것이다.
"상현이의 일은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고, 타자들 쪽은 어떻게 됐어? 2군에서 연락은 없었던 거야?"
다음 주제로 회의를 이어가는 손 감독의 발언에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어 나간다.
그러다 잠시 회의 중간의 휴식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난 누군가가 '어!'하는 소리를 내며 손 감독에게 다가온다.
그는 바로 기성태 코치였다.
회의동안 묻는 말 외에는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던 기 코치가 손 감독의 휴대폰을 손에 들고는 그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감독님. 전화가 오는 것 같은데요. 한 번 받아 보시겠습니까?"
기 코치의 말에 손 감독의 시선이 기 코치의 손에 들린 본인의 휴대폰으로 옮겨진다.
회의 중에는 휴대폰을 항상 무음으로 해두는 손 감독이어서 방치된 휴대폰에는 여러 개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역시 무음 모드의 휴대폰에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손 감독은 기 코치에게서 자신의 휴대폰을 건네받으며 아무 소리도 없이 전화를 수신하고 있는 휴대폰을 연다.
"손성조 입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로 통화를 시작한 손성조 감독.
곧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려든다.
"도착했다고? 그래, 알았어."
손 감독의 이어진 통화 내용에 전화를 건넸던 기성태 코치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도착? 누가 이곳 숙소에 왔다는 이야긴가?'
기성태 코치의 의문 속에 손 감독의 통화는 끝이 나고, 기 코치는 곧장 손 감독에게 묻고 있었다.
"누굽니까? 전화번호는 입력이 안 된 번호던데요."
기 코치의 질문에 손 감독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대꾸하고 있었다.
"한 가지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게 되는 거야. 그게 삶의 이치니까."
자신의 물음에 선문답으로 답하는 손 감독의 말에 기 코치는 여전히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다.
그 시간, 각자의 숙소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선수들 중 몇몇이 누군가의 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방의 주인은 방문자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고, 방문자들은 그런 방주인의 무관심 속에 방 한 켠을 차지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강호 후배, 뭐 재밌는 거 없어? 경기 전까지 시간 떼울만한 거 말이야."
강호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은 문표였다.
그는 좌익수 유성철과 오진만, 임정 등의 2군 출신 선수들을 이끌고 강호의 숙소 방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가 그런 문표의 질문에 답한다.
"제가 재밌는 걸 가지고 있을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강호의 되물음에 문표는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해보이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 전혀. 내가 절간에 와서 고기를 찾고 있었네. 강호 후배 방에 들어와서 재미를 논하다니. 나도 제정신이 아니네."
문표의 대꾸에 강호는 흘러가는 목소리로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라고 대꾸하며 손에 들고 있던 전력 분석 자료에 시선을 돌린다.
그런 강호에게 또 다시 말을 건네 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번에는 문표가 아닌 진만이었다.
"강호 선배님. 조금 전에 보니까 호텔 프런트에 강호 선배 선물 같은 게 도착해 있던 것 같던데요? 제가 프런트에 내려가서 가져다 드릴까요?"
강호에게 건넨 말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사자가 아닌 문표였다.
"뭐? 강호 선물? 또 팬레터야? 내 건 없었어?"
"네, 전혀요. 저라도 선배님께 팬레터를 써드릴까요?"
"됐어. 인마. 나는 남자한테 편지를 받으면 알러지가 돋아난다고. 나 의외로 섬세한 사람이야. 사내자식은 저리 꺼지도록 해."
진만의 장난스러운 말에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문표.
강호는 두 사람을 지나쳐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런 강호를 향해 문표가 물어온다.
"어디가?"
"프런트에 제 선물이 도착했다지 않습니까? 가져 와야죠."
강호의 대꾸에 문표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침대 맡에 앉아 있던 진만이 몸을 일으킨다.
"선배님, 쉬고 계십시오.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심부름꾼을 자처하는 진만의 말에 강호는 고개를 내젓는다.
강호가 자신의 숙소 방을 나서기 전, 진만에게 건넨 말은 이것이었다.
"나는 후배한테 심부름 안 시켜."
진만에게 그렇게 말을 남긴 후, 숙소 방을 나가버리는 강호.
그가 남기고 간 말 한 마디가 후배들에게 묘한 여운으로 남는다.
팀의 4번 타자이다 올스타전 MVP가 되었음에도 강호는 여전히 자신만의 룰을 지켜나가는 모습이었다.
후배들이 2군에서 경험했던 모습대로 오만하지 않고, 겸손한 강호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강호 선배는 자신의 위치가 올라가더라도 쉽게 변하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저런 모습을 보고 배우도록 하자.'
진만은 강호가 남기고 간 한 마디 말에 하나의 깨달음을 얻으며 강호의 자세를 보고 배우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그런 진만에게 말을 건네 오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후배한테 심부름 잘 시켜. 진만아, 편의점 가서 먹을 거 좀 사와. 이 선배 배고프다."
진만의 감동을 깨는 말을 던지는 사람은 다름 아닌 문표였다.
강호와 지나치게 비교되는 문표의 말에 진만은 아무 말 없이 말을 건넨 문표를 내려다본다.
문표는 강호의 침대에 누워 그런 진만을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가서 핫바랑 마이쭈 좀 사와. 콜라도 꼭 사오고~ 자, 여기 만원 줄게."
진만은 얼떨결에 문표가 건넨 만 원짜리 지폐를 받아들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1층 로비에 내려온 강호는 프런트를 향해 걸음을 옮기다가 호텔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익숙한 인물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뜬다.
"선배님!"
강호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들에 반기며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강호야, 잘 있었어?"
강호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 오는 두 사람.
그들은 수술과 재활 일정으로 2군에 내려가 있던 3루수 황제인과 2루수 최훈이었다.
둘 중 강호의 인사를 반갑게 받은 사람은 먼저 걸어오고 있던 황제인이었다.
인사를 위해 고개를 숙였던 강호의 몸이 제자리를 찾은 후, 그의 눈빛이 제인의 시선과 마주친다.
황제인과 강호.
몇 년 간 팀을 지탱했던 과거의 4번 타자와 지금의 4번 타자가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