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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55경기
강수는 동생과 하루의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월요일 일정을 비워두었다.
바쁜 작업 일정으로 동생의 올스타전을 작업 현장에서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본 것이 미안했던 것이다.
이번 일정은 몇 주 전부터 고객들과 약속해둔 일정이었기 때문에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강수로서는 취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호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한편 그런 형과 마주하게 된 강호 역시 조금은 난감한 기분이었다.
며칠 전, 프리마켓에 다녀온 후 집에서 홀로 밥을 먹으며 언젠가 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리라 마음먹었던 강호.
그런데 막상 자리가 마련되니 고맙다는 말을 입 밖으로 쉽게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이 쉽게 안 나오는구나. 고맙다고 말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손발이 오글거려서 말을 꺼낼 수가 없네.'
강호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마련한 형과의 식사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형에게 '고맙다'라는 말이나 '사랑한다'라는 표현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막상 그 단어를 입에 올리려고 하니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다물게 된다.
오늘을 위해서 많은 생각과 연습을 해두었지만, 막상 형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미리 해두었던 생각들이 무용지물이 되고 있었다.
그런 강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강수로서는 형으로서 올스타전에 가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괜한 말로 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 두 형제가 밖에서 밥을 먹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네. 우리가 이렇게 비싼 소고기 집을 온 게 얼마만이야?"
형인 강수의 물음에 강호는 속으로 하고 있던 생각을 정리하며, 무심결에 대답의 말을 꺼낸다.
"형, 처음이야. 우리가 소고기 먹으러 나온 적이 어디 있어?"
"뭐? 나는 먹은 기억 있는데? 강호 너랑 먹은 게 아니었나?"
"나랑 언제 소고기를 먹었다 그래?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베어스에 입단해서 서울에 있다가 방출당한 다음에는 바로 군에 입대했는데. 제대하고는 자이언츠 입단 준비하느라 밖에서 음식 사먹어 본 적도 없잖아."
강수는 동생의 일목요연한 설명에 괜히 더 미안해진다.
어린 시절 동생들과 고생을 함께 하기는 했었지만, 강수 본인의 사업이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종종 비싼 외식을 한 기억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밝힌다면 왠지 동생인 강호가 무척이나 서운해 할 것 같았다.
'이래나 저래나 미안한 일이 한 두 개가 아니네.'
강수는 그렇게 드는 생각을 정리하며 겉으로는 '허허'하고 웃어 보인다.
형의 그런 모습에 차라리 이런 대화가 편하다고 여긴 강호가 준비해 두었던 선물을 테이블 위로 꺼내 들었다.
아까부터 강호가 커다란 꾸러미를 들고 있던 것이 궁금했던 강수는 마침 잘 됐다는 표정으로 강호에게 물어온다.
형제는 서로에게 진심을 터놓기에는 아직은 어색함이 많았다.
"형, 이거."
강호는 나름대로 포장한 물건을 형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강수가 기대어린 표정으로 묻는다.
"이게 뭔데?"
"풀어봐."
가타부타 설명없이 선물을 풀어보라는 강호의 말에 강수는 강호가 내민 선물에 손을 뻗는다.
강수는 혹시나 동생이 고가의 선물을 산 것이라면 그것을 환불시킬 생각이었다.
동생이 오랜시간 고생한 대가를 너무 손쉽게 써버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호 역시 형의 그런 생각을 읽고 있었다.
강호가 내민 선물, 그 포장지에 든 물건을 꺼내든 강수는 양손으로 그것을 들어올린다.
"이거 배트잖아? 야구 배트.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형은 비싼 선물 해줘도 안 받잖아. 그래서 가져왔어. 하나는 올스타전에서 사용했던 거고, 하나는 40홈런 때릴 때 사용한 배트야."
"아!"
강수는 포장지에 들어 있는 두 개의 배트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 동생의 말에 '아'하는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올스타전 배트라면, 강호가 올스타전 홈런왕을 차지했을 때 사용한 배트일 것이고 40홈런을 때릴 때 사용한 배트는 결국 자이언츠 최초 40-40달성 때의 배트라는 의미가 된다.
배트에는 정성들여 새겨놓은 강호의 싸인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걸 나한테 줘도 돼? 구단에서 달란 말 안 해? 구단 최초 기록 세울 때 사용한 배트잖아."
강수는 동생에게 가장 의미 있는 물건 중에 일부를 받으면서 그것을 자신이 받아도 되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동생의 갸륵한 마음이 고마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 형에게 강호 역시 마주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기록은 내가 세운 건데 구단이 왜 배트를 달라 그래? 40홈런 홈런 볼은 구단이 알아서 챙겨 갔겠지만, 배트는 내 돈 주고 산거야. 달란다고 해도 안 줘. 그러니까 형이 가져."
"아 진짜? 근데 이거 팔면 수백만 원은 받겠다. 백강호 40홈런 기념 배트하고, 올스타전 홈런왕 때 배트잖아. 두 개 다 팔면 한 천만 원 정도 받지 않을까? 야구팬들 사이에 경매 올리면 말이야."
형은 기분이 좋은 것인지 평소에 잘 하지 않는 농담까지 하며 기뻐하는 모습이다.
형의 말이 온전히 장난인 걸 알고 있는 강호 역시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런데 말은 장난을 담고 있었지만, 강호의 표정은 장난스럽지 않았다.
"돈 필요하면 팔아서 써. 형이 그러고 싶으면 뜻대로 해도 돼."
"뭐? 팔긴 누가 팔아? 그냥 해본 말이지. 고맙다. 강호야. 형이 잘 보관하고 있을게."
강수는 강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동생의 야구 인생에서 큰 의미가 되어줄 기념비적인 두 개의 배트를 챙겨 둔다.
그런 형의 감사 인사에 강호는 진한 미소로 화답한다.
'아니, 형. 내가 고맙지. 형이 나를 지켜주지 않았으면 그런 무대에 설 수도 없었을 테니까.'
강호는 형에게 전하지 못한 감사 인사를 마음으로 되새기며 오랜만에 형과 함께하는 시간을 뜻있게 보낸다.
그리고 시간은 하루를 거슬러, 장소는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선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올스타 브레이크의 짧은 휴식을 보내는 동안, 자이언츠 구단은 여전히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바쁜 것은 선수들이 아니었다.
지정만 사장 이하 프런트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와 형이 난생처음 함께 소고기 집을 방문하기 하루 전 날의 구단 사장실 풍경이었다.
"아이고 속 쓰려~ 누가 나한테 술을 먹인 거야? 허 실장, 너는 옆에서 안 말리고 뭐했어? 나 술 못 마시는 거 알잖아."
지 사장은 베어스 사장에게 문자를 보낸 후, 습관적으로 허 실장을 나무라고 있었다.
강호와 함께 경남중 프로모션 행사를 끝내고 구단 본부로 돌아온 허 실장은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시작되는 지 사장의 잔소리에 빙긋이 웃어 보인다.
'사장님이 마셔놓고는 왜 나한테 그러십니까? 이 땡볕에 서구까지 가서 일하고 온 사람한테 너무하시네.'
허 실장은 입 밖으로는 꺼낼 수 없는 불평을 속으로 토로하며 더욱 진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행동은 스스로의 불만을 참아내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아직 어젯밤의 숙취가 남아있는 지 사장에게는 꼴 보기 싫은 모습일 뿐이다.
"너 약 먹었어? 직장 상사가 몸이 안 좋다는데 왜 그렇게 웃어? 내가 몸 안 좋다고 하니까 아주 좋아 죽겠지? 이참에 내가 속 쓰려서 병원에 입원이라도 했으면 좋겠지?"
"아닙니다. 사장님. 어제 지시하신 대로 백강호 선수와 함께 지역 프로모션 행사는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자신의 구박에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하는 허 실장의 대답에 지 사장은 순간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면서 속으로 '내가 어제 그런 지시를 했다고?'라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모습이다.
딱 봐도 술김에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지 사장의 모습에 허 실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아...내가 직장 상사 술주정을 가지고 일인 줄 알고, 이 더운 날에 땀나도록 뛰어다녔구나. 아이고, 억울해.'
허 실장은 지 사장의 취중 업무 지시로 강호가 어떤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나 강호와 함께 경남중 행사를 진행하면서 재밌는 일도 많았고, 강호의 팬이라고 말하는 많은 미인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며 업무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풀고 돌아왔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다.
특히나 강호의 팬 싸인회 때 몰려드는 여성 팬들을 온몸으로 막으면서 그들과 함께 호흡했던 순간은 40대의 허 실장으로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다음에 우리 백 선수가 팬 싸인회 할 때는 꼭! 내가 주관을 해야겠어. 백 선수 팬들 중에 미인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허 실장은 앞으로 강호와 더욱 친하게 지내야 겠다고 다짐하며, 자신이 사장실을 찾은 용무를 밝힌다.
"사장님, 백강호 선수가 올스타전 MVP로 선정되지 않았습니까? 올스타 홈런레이스에서 홈런왕이 되기도 했고요. 18일 경기에서 연패를 끊은 것도 있고, 백강호 선수 올스타 MVP선정으로 6연패에 대한 팬들의 비난을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경남중 프로모션에서 지역 유소년 야구팀에 야구용품을 증정하기도 했고요. 그 자리에 백강호 선수가 1일 감독을 맡기도 하고, 팬 싸인회도 진행했잖습니까? 그런 모습들을 사진으로 많이 찍어왔으니까 괜찮은 보도 기사 몇 개 정도 내면 6연패 논란은 어느 정도 잠재워지지 않을까요?"
숙취로 아픈 속을 부여잡고 있던 지 사장은 허 실장의 제안에 눈을 크게 뜬다.
그런 지 사장의 눈빛에는 '네가 웬일로 쓸 만한 얘기를 하는 거야?'라는 의문과 칭찬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렇지! 일은 그렇게 하는 거지. 오! 허 실장. 요즘 들어 업무 능력이 아주 일취월장이야. 지금이 6연패를 덮을 최적의 타이밍이지!"
지 사장은 허 실장을 칭찬하며 몸을 일으킨다.
칭찬의 말을 듣긴 했지만, 허 실장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가 나이가 몇 살인데 일취월장입니까? 이제 저도 40대 중반이에요.'
허 실장은 속으로 항변하고 있었지만, 지 사장의 칭찬이 듣기 싫지는 않았다.
칭찬에 인색한 편인 지 사장이기 때문에 숙취에 시달리고 있을 때라도 칭찬을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래서 더욱 의욕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제가 미리 언론에 뿌릴 보도 자료도 만들어 뒀습니다. 세 개 정도 만들었는데 한 번 보시겠습니까?"
"정말이야? 이리 내봐."
지 사장은 자신이 시키지 않아도 기특한 일을 해놓은 허 실장에게 반색하며 그가 내민 보고서를 받아든다.
허 실장의 말대로 과연 6연패를 덮을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기사 내용을 강호의 사진 자료를 잘 첨부해서 만들어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료들은 사실 허 실장이 만든 것이 아니라 경남중 프로모션에 참여하지 않은 기획실 직원들이 사무실에 남아 만든 것이었다.
지 사장은 그런 자료들을 주욱 읽어보며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좋아! 아주 잘 했어. 이대로 보도 자료를 내면 되겠어. 이대로 기사를 쫙 뿌리면 이제 6연패에 대한 비난도 쏙 들어가게 될 거야!"
지 사장은 칭찬의 의미를 담아 허 실장의 어깨를 툭하고 두드리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그런 후 숙취 속에 불타오르는 업무 의욕을 마음껏 발산한다.
"속 쓰려도 일은 하자! 일해라, 일! 아이고, 속 쓰려. 안 되겠다. 허 실장, 당장 컨디션 좀 사와 봐."
지 사장은 의욕을 불태우다 말고,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은 채 허 실장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허 실장은 그런 지 사장의 모습에 어이를 상실한 모습이다.
"사장님, 그런 일은 김 비서 시키고 저희는 중요한 일을 해야죠. 그리고 컨디션은 술 마시기 전에 드셔야하는 겁니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김 비서가 출근을 왜 하나? 너나 나 같은 유부남들이나 회사에 있는 거지. 그리고 컨디션이 술 마시기 전에 마시는 거면 네가 술 마시기 전에 나한테 사주지 그랬어? 잔말 말고 어서 사와!"
지 사장은 아픈 배를 부여잡은 채 허 실장에게 끝까지 숙취음료 심부름을 시킨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나 화장실 좀'이라고 말하며, 사장실 내부에 있는 화장실로 직행하는 모습이다.
화장실로 사라지는 지 사장의 뒷모습을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허 실장.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짓는다.
'아니, 일요일에 비서는 쉬게 하면서 왜 우리 기획실 식구들은 일을 시키는 거야? 하여튼 속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허 실장은 지 사장이 화장실로 사라진 사이 양손으로 주먹 감자를 만들어 굳게 닫힌 화장실 문을 향해 쏘아올린 후, 스스로의 행동이 우스워 웃게 된다.
‘그래도 재밌었어. 오늘같이 일할 수 있으면 주말에 일하는 보람은 충분히 있어.’
허 실장은 오늘 강호와 함께한 보람 있는 일들을 또 하나의 추억으로 간직하며,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주말을 반납한 채 부지런히 일하는 구단 프런트들의 일정이 흘러가는 것과 동시에 시즌 일정은 후반기 첫 경기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