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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에서의 하루
강호는 무더운 바깥 날씨와는 다르게 비교적 시원한 실내 훈련장에서 1일 감독이 되어 모교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강호가 유격수인 까닭에 선수들의 수비 자세를 지도하는 것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선수들의 수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손성조 감독조차도 강호의 2군 시절 수비력을 인정한 바가 있을 정도였다.
"수비를 볼 때 감에 의존하는 야수 유형이 있고, 기본기에 충실한 유형의 야수가 있어. 그런데 기본기에 충실하다고 해서 감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니거든. 그러니까 기본기를 우선으로 갈고 닦은 다음에 수비에 확신이 들었을 때 조금씩 직감을 활용하는 수비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좋아. 그런 수비는 최소 프로 구단에 입단하고, 1군에서 자리를 잡은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프로 팀 코칭스태프는 직감에 의존한 수비를 하는 선수들보다는 기본기에 충실한 수비수들을 좋아하니까. 너희들도 시간이 지나면 프로 팀에 입단해야할 테니까 현장 위주로 준비해두는 게 좋겠지?"
얼굴은 진지하지만, 나름의 유머를 섞어가며 지도하는 강호의 모습에 일부 선수들이 웃음 짓는다.
아직 10대 중반의 어린 선수들에게는 자신들의 우상이자, 학교 선배이기도 한 강호의 모든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자신들을 지도해주는 강호의 목소리나 태도들, 사소한 행동까지도 큰 의미를 부여하며 강호가 알려주는 모든 것들을 흡수해 나간다.
일부 선수들은 강호의 지도 내용을 놓치지 않기 위해 스마트 폰 카메라로 촬영하는 열정을 보일 정도였다.
강 감독은 그런 선수들의 열정어린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짜식들. 내가 지도할 때는 하품이나 하던 것들이.'
강 감독은 평소 자신이 지도하던 선수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진 선수들의 태도에 미소 짓는다.
다소 얄미운 모습이기는 해도, 선수들에게는 이런 자극이 필요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호가 모교에 방문해 줌으로써 아직 어린 선수들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프로무대에 대한 목표의식을 심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베어스 2군에서 방출당하고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강호.
그의 성공 스토리는 모든 야구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특히나 강호와 선, 후배 관계에 있는 어린 선수들에게는 그런 감동이 더욱 극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수비 훈련은 여기에서 끝내고, 타격 훈련을 시작할 테니까 각자가 평소에 연습한 타격폼을 잡아보도록 해. 내가 감독님과 함께 돌아다니면서 자세를 봐줄 테니까."
수비 훈련에 대한 대략적인 개요를 마쳤다고 생각한 강호는 곧 타격 훈련으로 돌입한다.
오늘 행사는 1일 감독으로서 잠시잠깐 지도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노하우를 전수해줄 수는 없었다.
1일 감독 행사가 끝나면 학교에 잔뜩 몰려든 팬들과 싸인회 같은 행사일정도 잡혀 있었던 이유로, 선수 지도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호는 선수들을 지도하며 긍정적인 기운을 전달받고 있었다.
특히나 강호가 타격을 지도해 줄 때 더 큰 열정을 내보이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그들의 앳된 바람과 열정이 본인에게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번 행사를 통해 강호 역시 배우는 게 있었다.
'내가 신인 선수로서 배우기만 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가르치는 입장이 되니까 오히려 쉽게 이해가 되는 구나. 이전에는 왜 이걸 알지 못했을까?'
강호는 이번 행사를 통해 처음으로 지도자의 입장에 서며 새로운 것들을 배워가고 있었다.
배우는 입장에서는 알 수 없었던 지도자의 마음과 생각들을 알게 되는 계기였다.
올스타 MVP이자 지역 연고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인 강호에게 지도를 받게 된 어린 선수들도 배우는 게 많은 하루였고, 강호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와서 지도를 해야겠구나. 어린 선수들에게 지도를 하다 보니 그동안 대략적으로만 느끼고 있던 야구지식과 노하우들을 체계화할 수가 있게 됐어.'
강호가 얻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감으로나마 느끼고 있던 부분들을 나이가 어린 선수들에게 쉽게 설명해주는 과정에서 스스로 이론화하고, 체계화시키며 스스로만의 야구 이론을 정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는 이번 모교 프로모션 행사에 잘 참여했다 느끼며, 모두가 기쁜 1일 감독 행사를 순조롭게 진행해 나간다.
그런데 그런 강호의 눈에 들어오는 한 선수가 있었다.
한창 웃음꽃을 피우며 강호와의 훈련에 집중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조금은 외진 구석에서 홀로 배트를 붙들고 있는 키 작은 아이.
아직은 한창 성장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왜소한 몸매에 작은 키와 까만 피부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강호는 키 작은 그 아이가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를 금세 알아차렸다.
외소한 몸과는 다르게 아이의 거친 눈빛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과거 강호의 2군 시절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강호는 마치 자신의 옛날 모습을 닮아 있는 아이의 모습에 호기심을 보인다.
그런 강호의 눈빛을 읽은 것인지 곁에 있던 강태성 감독이 강호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건넨다.
"주태호라고, 작년부터 야구부에 들어온 녀석인데 파워나 섬세함은 아직 부족해도 타격에 재능이 있는 녀석입니다. 송구 능력도 뛰어나고요. 가끔 투수로도 마운드에 세우는데 이런 저런 자질이 많은 녀석이에요."
강 감독은 그렇게 태호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며, 더욱 작은 목소리로 내용을 덧붙인다.
"태호는 소년 가장입니다. 할머니하고 함께 지내는데 몸이 편찮으셔서 태호가 동생들을 돌보면서 학교를 다닌다고 하네요. 태호의 사정이 딱해서 야구부에 넣어주기는 했는데, 고등 야구부까지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집안 사정 때문에 곧 야구를 그만둬야할 것 같아요."
강 감독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렇게 귓속말을 끝낸다.
그의 말에 강호는 태호의 지금이 과거 자신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만약 자신에게 형이라는 버팀목이 없었더라면 올스타전 MVP의 영예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태호라는 어린 선수에게는 그런 버팀목조차 없어 보였다.
'나보다 어렵게 야구를 하는 녀석들도 종종 있었지. 그런 녀석들은 2군 무대에조차 오르지 못한 채 생계를 위해 야구를 포기해야만 했어. 내가 그 사실들을 잠시 잊고 있었구나.'
강호는 곁에 있는 강 감독에게 지금 당장 든 생각을 귓속말로 전한다.
강호의 말은 꽤나 긴 것이어서 강 감독이 한참동안 들어야할 정도였다.
"아, 예. 알겠습니다."
강 감독이 자신의 말을 모두 납득한 것으로 보이자 강호는 걸음을 옮겨 실내 훈련장의 구석에서 배트를 쥐고 있는 태호에게로 다가간다.
강호가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태호는 약간은 경계하는 눈빛과 동경의 눈빛이 공존하는 복잡한 눈빛으로 강호를 올려다본다.
그런 태호의 거친 눈빛마저 자신의 과거를 닮았다고 여긴 강호는 피식 웃음 짓게 된다.
강호의 사심 없는 미소에 태호가 경계심을 풀기 시작하자 강호는 손을 내밀며 태호에게 말을 건다.
"배트 한 번 줘볼래?"
"네?"
"네가 쓰는 배트 말이야. 이 형한테 한 번 줘볼래?"
"네..여기."
강호는 태호가 건넨 알루미늄 배트를 받아들고는 직접 타격폼을 취하며 태호에게 이런저런 타격 기술을 알려준다.
그가 알려주는 타격 기술은 기본기에 입각해 자신의 노하우를 녹여낸 정석 타격폼이었기 때문에 태호와 같은 어린 선수들이 알아두면 좋을 내용이었다.
주변에서 각자의 타격 폼을 잡고 있던 선수들도 강호와 태호의 주변으로 몰려들며 강호가 알려주는 타격 기술을 익혀 나간다.
강호는 그런 선수들에게도 시선을 돌리며 자신이 알고 있는 노하우를 최대한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을 이어나간다.
"기교나 감에 의존한 타격도 재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해놓은 코스로 자기 스윙을 가져갈 수 있는 타자가 제대로 된 타자라고 할 수 있어. 프로 투수도 100번 중에 다섯 번 정도의 실투는 던지게 되어 있어. 실투라는 것은 결국 스트라이크 존 정 가운데로 들어오는 치기 쉬운 공이잖아. 타자가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를 타점으로 잡고 스윙을 연습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상대 투수의 실투를 노리기 위해서 수천 번, 수만 번의 스윙을 연습하는 거야. 투수는 그 실투를 줄이기 위해 수만 개의 공을 던지는 거고. 그러니까 기본기를 연마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다보면 어느새 기교나 기술 같은 것들은 따라오게 돼 있어."
강호는 가장 정론에 입각한 야구 이론을 알려주며, 선수들의 잘못된 타격 폼이나 스윙을 교정해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구석에 동 떨어져 있던 태호는 어느새 다른 선수들과 함께 뒤섞인 채 강호의 훈련법을 따르고 있었다.
강 감독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강호 선수는 정말 좋은 선수구나.'
강 감독은 조금 전, 강호가 자신에게 건넨 귓속말을 떠올리며 감동에 젖어들었다.
강호는 혹시나 아이들이 들어 태호에게 상처가 될까 귓속말로 태호를 후원할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강호는 태호의 후원자가 될 것을 강 감독에게 귓속말로 말하며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벌써 예전부터 그랬어야 했는데, 구단에서 먼저 나서는 바람에 기부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큰돈을 벌고 말았었지. 이제 그 돈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알 것 같다.'
강호는 과거 회식 자리에서 허동준 기획 실장에게 밝혔던 기부 의사를 실현할 때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진다.
단지 태호 뿐만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에서 야구라는 꿈을 꾸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야구를 포기하는 많은 유소년 선수들을 후원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강호는 이 생각만큼은 구단에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직 어린 선수들에게는 자신이 공공연히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할 수도 있었고, 다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이유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강호는 그 점을 고려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유소년 선수들을 남몰래 도울 생각을 가진다.
'그냥 글러브 몇 개, 야구 배트 몇 개만 전해주는 후원이 아니라 학비나 훈련비, 살아갈 수 있는 생활비를 후원해주는 진짜 후원이 되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야구를 포기하게 될 테니까. 그 처절한 느낌을 아직 어린 선수들에게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아. 본인들이 선택한 가난이 아니잖아.'
강호는 그렇게 우연한 기회로 구단의 도움으로 생겨난 거액의 돈을 사용할 사용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어차피 광고 모델 계약으로 받은 2억이라는 돈은 형에게 줄 생각을 했었던 돈이었다.
형이 거절한 그 돈을 사용할 곳이 마땅치 않아 통장에 넣어두고만 있었는데, 가장 적절하게 사용할 곳을 찾은 것 같아 기분이 밝아진다.
강호는 따뜻해지는 마음을 담아 어린 선수들에 대한 지도를 끝내고, 구단에서 진행한 프로모션 일정 중 싸인회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정을 마친 후 귀가하게 된다.
구단에서 지원해준 벤 차량이 오르기 직전, 강호는 다시 구석진 자리에서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태호에게 다가가 몇 마디 말을 건넨 뒤 재촉하는 허 실장과 함께 학교를 떠난다.
한편 강호가 떠나기 전, 몇 마디 당부의 말을 전해들은 태호.
그는 이날까지만 해도 강호가 건넨 당부의 말에 대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몇 마디 말로 기운을 차릴 정도로 태호의 어린 삶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병든 노모를 수발하며, 아직 어린 동생들의 밥을 차려줘야 하는 태호.
그는 또 다시 힘든 하루를 보낸 후, 월요일이 되어 다시 낡은 가방을 챙겨들고 학교로 향한다.
그리고 이제 일상처럼 느껴지고 또 그렇게 되길 원하는 야구부에 발걸음을 옮겼을 때, 태호는 자신의 삶이 조금씩 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소식을 처음 전해 준 사람은 태호에게 처음으로 야구라는 꿈을 실어준 야구부 감독인 강태성 감독이었다.
"태호야, 후원자가 생겼다."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해오는 강 감독의 말에 태호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후원자라는 말의 의미는 알았지만, 그 단어가 자신과 관련된 단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네?"
"너를 후원하고 싶다는 분이 생겼어. 앞으로 너에게 매 달 장학금을 전달하시겠다는구나. 이제 네 학비나 훈련비는 그 분이 전달하시는 장학금으로 모두 해결할 수가 있어."
태호는 자신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존경하는 강 감독의 말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가 자신을 후원한다는 말인가.
자신에게는 돈 많은 가족이나 친척은 전무했고, 심지어 부자라는 존재를 만나본 적도 없는 태호였다.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요?"
"이름이나 신분은 밝히지 않았어. 너는 그냥 '키다리 아저씨'라고 여기며 야구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알겠지? 우리 포기하지 말고 야구만 생각하도록 하자!"
강 감독의 대답에 태호는 불현듯 어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강호가 자신의 배트를 넘겨받으며 해주었던 이야기들, 특히나 모든 행사 일정을 마치고 학교를 떠나던 강호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 자신에게 해줬던 말이 강 감독의 말에 오버랩 되어 떠오르고 있었다.
"포기하지 마, 절대로! 기회는 언제든지 생겨날 테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
강호가 자신의 손을 붙잡은 채 건넸던 말.
그 때는 그저 어른들이 흔하게 하는 말 중에 하나로 치부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자신에게 건넸던 강호의 말,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오직 진심만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태호는 그 때 강호가 전해준 단 하나의 감정을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며 마치 주문처럼 그 말을 되뇌어 본다.
"포기하지 마, 절대로!"
강호가 전해 준 짧은 말은 아직 어린 태호의 꿈을 지탱해주는 주문으로 각인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 태호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선수들이 강호의 후원금으로 혜택을 보기 시작한다.
강호의 후원금으로 태호를 포함한 어린 선수들의 꿈이 조금씩 영글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