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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길목에서
자이언츠와 이글스 간의 경기가 열리고 있을 무렵.
장소는 잠시 잠실구장으로 옮겨진다.
시간은 아직 경기가 시작되기까지 몇 시간이 남아 있는 상황.
구 감독의 지시로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선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개인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구 감독은 타격 코치와 투수 코치를 대동한 채 그런 선수들을 누비는 중이었다.
"건오, 스윙할 때 어깨가 흔들린다. 디딤 발에 힘이 없어서 그런 거야. 왼발에 조금 더 힘을 주도록 해."
"네, 감독님!"
구 감독은 타격 훈련 중인 우익수 박건오 선수의 타격 자세를 교정해준 후, 이번에는 외국인 타자 바인스에게로 향한다.
부웅!
바인스의 스윙은 간결하면서 빨랐다.
그런데 구 감독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미간을 좁히며 고민에 빠진다.
그 뒤 통역을 불러 바인스에게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한다.
"바인스, 스윙할 때 하체가 불안해 보여. 신발이 발에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신발 한 번 벗어봐."
야구화를 벗어보라는 구 감독의 지시에 바인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양쪽 신발을 모두 벗어보인다.
그러자 구 감독은 바인스가 건넨 야구화와 바인스의 발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다.
"발볼에 비해서 신발 폭이 작은 편이야. 한국에서 시판되는 신발들은 발볼이 좁은 것이 많아. 서양 체형인 바인스에게는 같은 사이즈라도 넓은 발볼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거나 작은 통증이 있을 수도 있어. 사소한 것 하나가 하체 자세를 무너뜨리는 거야."
구 감독은 통역을 통해 그렇게 설명한 후, 타격 코치에게 바인스의 야구화를 맞춤화로 교체해줄 것을 지시했다.
그 섬세한 배려에 바인스는 맨발인 상태로 감사의 의사를 전달한다.
"캄사합니다. 감독님."
바인스가 어설픈 한국말로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그는 최근 들어 스윙 때마다 발쪽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구 감독이 그 점을 지적하며 맞춤 신발을 지원해준다고 하니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구 감독은 그 후로도 평소에는 체크하지 않았던 선수들의 사소한 부분이나 습관까지 둘러보며 자신이 놓치고 있던 점을 개선해 나간다.
'그동안 놓치고 있던 점이 많았어. 이제는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는 일 없이 선수들의 기량을 100%발휘시킬 수 있어야 해!'
구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며 작은 미소를 짓는다.
다소 이른 출근으로 피곤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팀의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에 웃음짓게 된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 잠실에서 열리는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구 감독의 웃음은 더욱 진해진다.
따악!
바인스에 이어 김재성으로 이어지는 연타석 홈런으로 승부의 추가 2회 말부터 베어스에게 급속도로 기울고 있었다.
'됐어. 이 경기는 우리가 가져오는 경기야.'
구 감독은 오늘 경기를 승리로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히어로즈에는 강호 같은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 경기는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구 감독이 자신의 야구 철학과 팀 컬러를 서서히 변화시키는 사이, 사직에서도 치열한 경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따악!
호쾌한 타격음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관중들의 시선이 곧장 외야를 향해 옮겨진다.
4회 초에 또 한 번 선두 타자로 타석에 선 이글스의 4번 타자 김태준이 때려낸 타구가 담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계석에서는 타구가 떨어지는 위치를 확인한 후 곧장 목소리를 높인다.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는 김태준의 솔로 포가 나옵니다! 오늘 경기는 이제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합니다. 3대 3! 김태준의 솔로 포는 동점 상황을 이끄는 한 방으로 기록됩니다!"
상황을 알리는 조호종 캐스터의 목소리에 이어 곧 양현준 위원이 해설을 더한다.
"이글스의 집중력이 대단하네요. 2회에 1점, 3회에 1점, 그리고 4회에도 점수를 냈어요. 삼자범퇴로 끝난 1회 빼고는 계속해서 득점을 올리고 있어요. 1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자이언츠 쪽으로 넘어간 것 같았거든요. 이렇게 되면 경기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가 없겠네요."
양 위원은 3점차로 뒤지고 있던 경기의 흐름을 바꾼 이글스 타자들의 집중력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득점을 올려야하는 상황에서는 1점의 점수라도 반드시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이글스 타자들의 집중력이 돋보이는 경기였다.
반면에 자이언츠는 1회 말에 기록한 3점에서 득점이 멈춘 상태로 무기력한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선수단을 응원하는 자이언츠 팬들 입장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오늘 뭐하는 거야? 이러다가 역전당하겠네."
"그러게 말이야. 1회 3점 낸 거 홀랑 말아먹고, 역전 당하게 생겼네. 이 정도면 투수 교체해야 하는 거 아냐? 라일리가 내준 볼넷이 벌써 네 개잖아."
팬들 역시 오늘 경기가 어렵게 풀리기 시작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동안 꾸준하게 로테이션을 지켜왔던 라일리가 2회부터 갑작스럽게 제구가 잡히지 않으면서부터 위기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도 더는 라일리를 지켜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수고했다."
손 감독의 지시를 받고 마운드에 오른 여민석 코치가 라일리에게 건넨 말 전부였다.
여 코치가 마운드에 오를 때부터 이미 투수 교체를 직감하고 있던 라일리는 덕 아웃의 의도를 받아들이며 군 말 없이 마운드를 내려간다.
그 후 마운드에 오르는 새로운 투수를 확인한 자이언츠 홈 팬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렇지~! 이럴 때는 대우를 올려야지."
"누구? 권대우? 4회는 금방 지나가겠네. 어디서 저런 투수가 나왔는지 모르겠어. 권대우 나이가 올해로 스물이라며?"
"응. 스물 맞아. 저 정도 방어율이면 마무리나 셋업으로 돌려도 되지 않나?"
팬들은 새롭게 마운드에 오르는 권대우 투수를 확인하며 밝은 목소리로 의견을 교환한다.
권대우 투수.
강호의 원정 숙소 룸메이트이자 올 시즌 자이언츠가 자랑하는 최고의 불펜 투수.
수시로 보직이 변하는 자이언츠 불펜에서 베테랑 투수인 박상현과 더불어 유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투수였다.
5승 1패. 방어율 1.61의 기록만 놓고 보아도 대우가 얼마나 위력적인 공을 던지고 있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대우 본인으로서도 얼떨떨한 1군 성적이었지만, 마운드에 오른 대우는 조금의 어색함도 없었다.
'강호 선배는 타석에 설 때마다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투수를 노려보곤 했어. 나도 그런 투지 넘치는 모습으로 공을 던지면 1군 무대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야. 한 가지만 기억하면 돼.
대우는 프로 생활동안 자신의 롤 모델로 삼은 강호를 떠올리며 냉철한 태도를 유지한다.
원정 때마다 강호의 손에 붙은 것처럼 쥐고 있는 악력기를 따라 사기도 하고, 그가 하는 개인 훈련을 곁에서 흉내 내기도 했다.
그것이 운 좋게 구위가 상승하는 계기가 되어, 이제 대우의 구속은 언더핸드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최고 구속이 148km까지 찍히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냉철한 태도로 투구를 하다 보니 제구력이나 멘탈적인 부분에서도 꽤나 큰 진전이 있었다.
'강호 선배만 따라하면 되는 거야. 강호 선배를 흉내내다보니까 어느새 불펜의 핵으로 자리하게 됐잖아? 구단에서 주는 보너스도 적잖이 챙겼고.'
대우는 올 시즌을 회상하며 속으로 미소를 짓는다.
올 시즌은 아직 어린 대우에게 있어서 가장 특별한 1년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코칭스태프나 선배 선수들, 그리고 팬들에게 대단한 불펜 투수로 인정받는 것은 물론, 간혹 프런트에서 주는 보너스나 격려금들이 내려오기도 했다.
강호보다 많은 연봉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대우의 연봉은 3천만 원을 겨우 넘는 수준.
격려 차원으로 프런트에서 주는 보너스가 생활에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었다.
'단지 돈 문제만이 아니야. 프런트에서 나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야. 이대로 자만하지 않고, 구위를 계속 갈고 닦아 나간다면 내년 시즌에는 선발로 경기를 뛸 수도 있을 거야!'
대우는 꿈을 꾸고 있었다.
올 시즌은 불펜 요원으로 시즌을 준비했기 때문에 선발로 뛸 수 있는 체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올 시즌 동안 구단에 인정을 받아 내년에는 선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선발 투수로서 마운드에 오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대우는 올 시즌을 내년 시즌 도약을 위한 한 해로 삼고 있는 것이다.
'불가능하지 않아! 충분히 가능해. 강호 선배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4할 타율을 유지하고 있잖아? 세상에 불가능이란 결국 없는 거야. 나는 올 시즌을 넘어 내년에는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로 이름을 올릴 거야. 반드시!'
대우는 눈을 빛낸다.
그런 대우의 투지는 그가 뿌리는 공 끝에 담겨 이글스 후속 타선들은 무기력한 모습으로 타석에서 물러서야만 했다.
삼진 두 개, 하나의 범타를 기록하며 이글스의 타선을 삼자범퇴로 돌려세운 대우.
그의 당당한 발걸음이 덕 아웃으로 향한다.
"제법이다. 너 공 던지는 거 보면 나도 투수 할걸 그랬어."
대우는 자신에게 어깨동무를 해오며 말을 건네 오는 선수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강호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피식 웃음 지었다.
"강호 선배가 투수로 데뷔했으면 저희 같은 투수들은 좋지요. 강호 선배 같은 타자가 타석에 있으면 얼마나 긴장되는지 아십니까? 선배가 우리 팀이라서 다행이죠."
강호는 대우의 대꾸에 덩달아 웃음 짓게 된다.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자신을 추켜세워 주는 대우의 말이 밉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대우와 함께 덕 아웃으로 향하는 강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잠시 후, 5회 말 공격 기회에서 타석에 선 강호는 대우에게 전달받은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한 채로 타석에 오른다.
3회에는 아깝게도 펜스 앞 외야 뜬공이 나오며 타석에서 아쉽게 물러나야 했던 강호.
그의 당당한 발걸음이 타석을 향해 옮겨진다.
'주자 1,2루 상황이라 거르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승부하자니 위험하고. 대체 어쩌란 말이야?'
마운드 위에서 강호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하게 된 이글스 투수 송인중이 진땀을 흘린다.
5회 주자 1루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른 송인중은 첫 타자인 전준오를 풀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으로 출루시키며 위기를 자처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타자로 강호가 타석에 오르자 숨 막히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몸에 맞아도 좋다는 생각으로 몸 쪽 승부를 벌일까? 그냥 볼넷? 아니면 몸 쪽 승부?'
송인중 투수는 차연목 포수의 초구 포심 싸인에도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망설이다가 결국 결심을 내리고는 포수 미트를 향해 초구를 뿌린다.
그리고 송인중의 손끝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날카롭게 빛나던 강호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지고 있었다.
'이거다!'
강호는 송인중의 초구에 반응하며 벼락같은 속도로 배트를 냈다.
따악!
타석을 가득 채우는 타격음이 사직구장을 꿰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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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은 작년부터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한국을 떠난 후, 외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라는 것이 1년 간 체류가 가능한 비자여서 이제 몇 달 후면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인생을 계획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벌어서 한국에 돌아오겠다는 뜨거운 열정은 이미 한 풀 꺾인 상황.
수중에 모은 2천만 원의 돈으로 만족하며, 이제 길었던 외국 생활을 마감해가고 있었다.
"송유근, 너 뭐하고 있어? 집에 안 가니?"
테라스의 벤치에 앉아 스마트 폰을 보고 있던 유근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듣기 좋은 미성의 목소리는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묻고 있었다.
유근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말 걸지 마. 지금 중요한 장면 보고 있단 말이야. 너 일할 거 하고, 나한테 관심 꺼."
유근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시크한 말투로 대꾸한다.
그러자 말을 건넨 여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유근이 들고 있던 휴대폰을 획하고 뺏어버린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이리 안 가지고 와? 지금 중요한 장면이라고!"
유근은 자신의 휴대폰을 뺏은 여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화를 내는 모습이다.
여자는 유근을 향해 주먹 감자를 내보이며 비웃어 보인다.
그런데 놀라운 점이 있었다.
유근에게 장난을 걸고 있는 여자의 미모가 보통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여자치고는 꽤나 큰 키에 늘씬한 몸매, 단정한 이목구비에 짧게 자른 숏 커트가 인상적이었다.
남자와 다를 바 없는 옷을 입어 멀리서 본다면 남자로 착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를 가까이에서 본다면 절대 남자라고 착각할 리는 없을 것이다.
선이 고운 예쁜 얼굴에 분홍빛 입술, 눈매가 날카로운 편이기는 하지만 티 없이 맑은 눈동자가 매력적인 여자의 외모였다.
"야, 얼른 달라고!"
유근은 또 한 번 소리치며 여자에게 다가선다.
그가 이런 미인에게 차갑게 구는 이유는 간단했다.
유근은 남자로 태어나 여자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는 성적 취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유근에게 계속 장난을 걸던 젊은 여자는 문득 유근의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행동을 멈추게 된다.
-지금 볼넷이죠? 이글스 입장에서는 좋지 못한 장면이네요. 이제 무사 1, 2루 상황이거든요. 타자가 다름 아닌 백강호 선수에요. 이글스 입장에서는 투수를 바꾸는 것도 고려해 봐야할 것 같아요.
휴대폰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대구 억양이 강한 양현준 위원의 목소리에 여자는 행동을 멈추고 만다.
덕분에 여자의 손에서 휴대폰을 되찾게 된 유근이 분개한 감정을 담아 여자에게 타박의 말을 전한다.
"야, 백진주! 너는 무슨 여자가 그렇게 왈패같이 구냐? 지금 일할 시간 아냐? 어서 일 하러나 가."
유근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진주는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반박하고 나선다.
"야, 너는 무슨 게이가 야구를 보냐? 어울리는 취미생활을 하시지."
"내가 야구를 보던 야동을 보던 네가 무슨 상관이야? 얼른 일하러나 가라고. 이거 중요한 장면이야. 너는 야구 볼 줄도 모르잖아."
유근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진주의 손길을 뿌리친다.
대전 출신인 유근에게 유학 생활동안 유일한 낙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이글스의 야구를 인터넷을 통해 시청하는 것이었다.
호주는 인터넷 인프라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단점이 있어서 중간 중간 중계화면이 끊긴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야, 너 때문에 지금 렉 먹었잖아! 이거 중요한 장면이라고!"
인터넷 전파가 잘 잡히는 가게의 테라스에서 경기를 보고 있던 유근은 갑자기 나타난 진주가 휴대폰을 빼앗아 흔드는 바람에 무한 로딩에 들어간 중계 화면에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는다.
그런 유근에게 진주가 살포시 다가와 사과의 말을 건넨다.
"미안미안. 나는 네가 야구 보는 줄 몰랐어. 근데 이 화면 속에 선수는 누구야?"
진주는 강호가 타석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멈춰버린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진주가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라는 스포츠에 관심을 보이자 끌어 오르던 화를 순식간에 가라앉힌 유근이 친절히 대답해준다.
"백강호라고. 엄청 유명한 선수야. 너는 야구 안 보니까 못 들어봤겠지만."
친절한 표정으로 불친절한 말을 하는 유근의 옆구리에 주먹을 날린 진주.
그 사이 전파가 잡힌 유근의 휴대폰에서는 이글스의 바뀐 투수 송인중이 던진 공을 타격하는 강호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따악!
강한 타격음과 함께 강호가 때린 타구가 외야를 향해 뻗어져 나가자 유근은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다대며 한 숨을 내쉰다.
"아, 어쩐지 불안하더라. 백강호가 타석에 오를 때부터 홈런 칠 것 같더라니. 오늘도 지겠네. 그냥 안 보련다."
유근은 강호의 홈런으로 점수 차가 다시 벌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기 화면을 닫고 걸음을 옮긴다.
그러면서 진주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진주, 수고해라!"
유근은 오늘 따라 왠지 이상해 보이는 진주를 홀로 남겨둔 채 자신의 숙소인 빌라로 걸음을 옮긴다.
한 편, 홀로 남은 진주는 유근의 휴대폰에서 보았던 강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의 휴대폰을 켠다.
한국 포털 사이트에 접속한 진주는 '백강호'라는 이름을 검색하며 자신의 기억과는 많이 달라진 강호의 얼굴을 확인한다.
진주가 기억하던 강호의 모습은 깡마른 몸에 새카맣게 탄 얼굴이 전부였다.
그런데 포털 사이트에 뜨기 시작한 강호의 이미지 사진들은 진주의 기억 속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깡마르고 볼품없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부진 몸으로 자신감 있게 스윙하는 사진들이 연달아서 떠오르는 모습이다.
진주는 기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강호의 눈빛을 확인하며 왠지 코끝이 찡해짐을 느낀다.
"한국에서도 잘 하고 있구나. 다행이다."
진주는 그렇게 홀로 되뇌며 품속에 넣어두었던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 든다.
사진 속에는 엄마의 품에 안긴 채 미소 짓는 강호의 모습과 듬직한 큰 오빠의 얼굴, 그리고 아직은 앳된 모습의 진주가 미소 띤 얼굴로 자리하고 있었다.
한동안 진주는 빛바랜 가족사진을 바라보며 먹먹해지는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여름의 길목에서 한국은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 가운데 호주는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분다.
진주는 싸늘한 바람을 느끼며,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가족사진을 품속으로 고이 갈무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