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172화 (171/335)

0172 / 0335 ----------------------------------------------

여름의 길목에서

이글스 선수단.

21세기 초반만 해도 투타의 밸런스가 조화롭다는 평가를 받던 대전 연고의 팀이다.

그러나 2010년도 이전부터 시작된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의 엇박자 속에 이제는 매 경기마다 드라마를 써나가는 하위권 팀으로 전락해 있었다.

그들이 써나가는 드라마가 건전한 드라마라기보다는 재미는 있지만, 정서에는 안 좋은 막장 드라마라는 평가가 지배적인 가운데 이글스 팬들 역시 그 사실을 인정해가고 있었다.

그런 이글스 팬들을 일컬어 세상에 둘도 없는 보살 팬들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이글스의 최근 10년 성적은 극도로 좋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이글스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로 선수들의 결집력이 낮다는 점을 매번 지적한다.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매해마다 주장 이하 모든 선수들이 삭발 투혼을 펼쳐가며 집중력 있는 플레이를 기원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6월 초에 있었던 자이언츠와의 맞대결에서 시리즈 스윕을 당하며 자이언츠와의 시즌 전적을 6전 전패로 기록하게 된 이글스 선수단.

그들은 그 뼈아픈 패배로 또 한 번 삭발 투혼을 감행하며 절치부심을 다짐하기에 이른다.

"다들 오늘 경기만큼은 정신 바짝 차려! 오늘까지 지면 7전 7패야. 특정 팀한테 약점을 보여서는 5강 경쟁은 물건너 가는 거야. 다들 알겠지?"

팀의 캡틴인 1루수 김태준이 후배 선수들을 향해 당부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이미 숙소를 나서기 전, 감독의 당부가 있었던 상태여서인지 캡틴 김태준의 말을 듣는 이글스 선수들은 눈빛에 한 가득 독기를 품고 있는 상태였다.

"네!"

선수들의 힘찬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김태준은 자신의 글러브를 챙겨들고는 원정 팀 훈련 시간으로 정해진 훈련에 돌입한다.

후배 선수들 역시 자신들의 장비를 챙겨든 채 힘찬 발걸음으로 사직구장의 그라운드를 밟는다.

그런 이글스 선수단의 기합 든 모습에 먼저 훈련에 돌입했던 자이언츠 선수단의 눈빛에 이채가 감돈다.

이글스 선수단의 투지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문표였다.

"쟤네들 왜 저러는 거야? 전에는 와이번스에서 저랬던 것 같은데. 베어스도 그랬던 것 같고. 왜 우리하고 경기하는 팀들은 다들 독사눈을 하고 달려드는 거야? 쟤네들 눈빛만 보면, 여기가 야구장인지 전쟁터인지 모르겠네."

문표는 혀를 끌끌 차며 곁에 있던 강호에게 말을 건넨다.

강호는 문표의 물음에 간단한 말로 답하며 상황을 정리한다.

"올 시즌 시리즈 전적이 전패니까요. 이를 갈 만도 하죠. 우리 팀도 약한 팀이 있잖습니까?"

강호의 되물음에 문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지. 다이노스! 올해도 역시나 시리즈 전적에서 깔끔하게 발리고 있지. 2승 7패였나? 다이노스한테 스윕패 당한 것만 아니었어도 우리 팀이 벌써 4위로 올라갔지, 아마?"

문표의 말대로 올 시즌 이글스가 자이언츠에게 약세를 보이는 것처럼 자이언츠 역시 다이노스에게 약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올 시즌에만 국한된 부분이 아니라 다이노스 창단 이후부터 계속되는 징크스로 굳혀졌다는 점이다.

공룡만 만나면 작아지는 자이언츠.

그것이 두 팀 간의 먹이사슬을 대변하는 문장일 것이다.

구단이나 팀 입장에서는 징크스와 같은 팀 역학 관계일 테지만, 팀을 지켜보는 팬들 입장에서는 그런 사소한 내용으로 자존심이 상해 응원하는 팀을 버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왠지 저런 모습을 보니까 더 지기 싫은데? 오늘 경기는 내가 제대로 한 번 보여주겠어!"

서슬 퍼런 이글스 선수들의 눈빛을 바라보며 자신의 각오를 밝히는 문표.

강호는 그런 문표에게 그가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전한다.

"선배님 오늘 타순에서 빠지셨잖아요. 경기에 출전 못하실 텐데 무슨 수로 보여준다는 말입니까?"

강호는 문표가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지적하고 나섰다.

그의 말대로 평소 지명타자나 1루수로 3번 출장하던 문표의 이름은 오늘 라인업 카드에서 빠져 있었다.

강호가 알려준 말에 문표 본인도 그 사실을 떠올린 것인지 '쳇, 그럼 다음 기회에'라고 말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 어느새 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 경기의 중계는 잠실 베어스 전에 이어 같은 방송사에서 중계를 주관하고 있었고, 캐스터 역시 같은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6월 28일 금요일, 사직에서 열리는 자이언츠와 이글스, 이글스와 자이언츠 간의 시리즈 3차전 중계를 맡은 조호종 캐스터입니다. 해설에는 양현준 위원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중계석에서는 조호종 캐스터의 소개 멘트로 경기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잠실에서는 김신우 위원과 박재헌 위원이 공동 해설을 맡았었지만, 이번 사직 전에서는 양현준 위원 혼자 해설을 맡고 있었다.

그는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 1회 초 이글스 공격 이후 진행된 1회 말, 자이언츠 공격이 시작되자 곧장 해설의 말을 꺼낸다.

양 위원은 오늘 경기에서 자이언츠의 키 플레이어로 강호의 이름을 꼽고 있었다.

"오늘 자이언츠 타선은 백강호 선수의 활약 여부에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3번 타순에 있던 지명타자 최문표 선수가 라인업에서 빠지고, 2군에서 콜 업 된 전준오 선수가 3번 자리에 중견수로 기용됐거든요. 기존 중견수였던 유성철은 좌익수로 가고요. 최근 들어서 1번 유성철, 2번 박철. 이 두 테이블 세터의 활약이 좋으니까 이런 기용도 해볼 수 있는 겁니다. 한동안 2군에 있던 전준오 선수가 3번으로 기용된 만큼 팀의 4번 타자인 백강호 선수가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봐야할 겁니다."

양현준 위원은 오늘 자이언츠의 타순이 변경된 부분을 집어주며, 강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근거로 내세운 이유가 3번 자리에 새로 기용된 전준오를 거론하고 있으니 캐스터인 조호준 입장에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세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지금 하신 말씀은 언뜻 봐서는 전준오 선수의 기용으로 백강호 선수의 타석이 중요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요. 그렇다면 전준오 선수가 키 플레이어인 건 아닐까요?"

조 캐스터는 양 위원의 말에서 허술한 내용을 발견하고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자 양 위원은 '허허'하고 웃음 지으며 곧장 자세한 설명을 더한다.

"중심타선을 놓고 말할 때 3, 4, 5번을 꼽습니다. 중심 타선의 시작이 3번부터라는 이야기인데 오늘 자이언츠 타선은 오랜만에 1군 복귀한 전준오 선수가 3번에 자리하면서 조금은 실험적인 중심타선을 가동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타선의 무게감이 작지 않은 점은 1번에 유성철, 2번 박철의 테이블 세터진이 좋은 활약을 하고 있고, 4번과 5번에 백강호와 스팅으로 이어지는 팀의 해결사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제가 이글스 배터리 입장이라면 4할에 30-30을 치고 있는 백강호 선수나 장타율 9할 대의 스팅 선수를 상대할 바에는 3번의 전준오 선수를 상대할 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승부가 3번으로 몰리게 되면 상대적으로 4번 자리에 있는 백강호 선수가 더 부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양 위원의 설명은 길었지만, 그럼에도 조 캐스터는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설명은 길었어도 양 위원의 말에서 알맹이는 쏙 빠진 것 같은 허전함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인 차 한 번 묻게 된다.

"혹시 자이언츠 3번 타순에 최문표 선수가 있었어도 백강호 선수가 키 플레이어이지 않을까요?"

조 캐스터의 질문에 양 위원은 잠시 침묵하다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요즘 자이언츠 타선에서 제일 무서운 타자가 백강호 선수 아닙니까? 사실 리그 전체를 통틀어도 백강호 선수만큼 부담스러운 타자는 없을 겁니다. 다른 타선에 누구를 세우던 저는 4번 백강호 선수를 키 플레이어로 뽑았을 겁니다."

양 위원의 대답에 조 캐스터는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결국 3번 타순과 관계없이 강호가 키 플레이어라는 양 위원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의 지난 발언이나 태도들이 이해되고 있었다.

"양 위원님은 백강호 선수를 참 좋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결론을 내리는 조 캐스터의 말에 양 위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허허'하고 웃음 짓는다.

조 캐스터는 양 위원의 그런 태도가 긍정의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묻지 않은 채 경기 내용에 집중한다.

두 사람이 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1번 타자로 나선 유성철은 삼진으로 물러났고, 2번 타자 박철이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오랜만에 1군 복귀한 전준오가 이글스 선발 투수의 초구를 받아치는 내야 타구를 때려낸다.

딱.

약간은 먹힌 소리와 함께 그라운드를 찍은 전준오의 타구가 3루수 손강민의 글러브에 빨려든다.

손강민 3루수는 2루로 향하는 주자 박철을 흘낏 바라보고는 2루에서는 늦었다고 판단한 것인지 곧장 1루를 향해 길게 공을 뿌린다.

그런데 여기에서 실수가 발생하고 만다.

타자주자 전준오의 빠른 발을 의식한 손강민 3루수의 송구가 지나치게 강했던 까닭에 공이 1루수 김태준의 글러브를 훌쩍 넘는 악송구가 되고 만 것이다.

"앗!"

1루수 김태준의 '앗'하는 소리와 함께 2루에 멈췄던 박철이 3루로 달리기 시작했고, 1루 베이스를 밟고 지나쳤던 타자주자 전준오는 곧장 2루로 향한다.

뒤늦게 공을 잡은 1루수 김태준이 2루로 공을 뿌린다.

"세이프."

2루심이 느긋한 목소리로 세이프를 선언하고 있었다.

태준의 공이 2루수의 글러브에 들어가는 것보다 전준오의 발이 한참 빨랐던 것이다.

전준오의 타구에 병살타를 예감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던 자이언츠 홈 팬들의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우게 된다.

"와아아!"

2만 8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을 거의 가득 채운 홈팬들의 함성이 터져나온다.

득점권 상황에서 다음 타자로 나서는 선수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홈팬들의 함성은 더욱 거셌다.

"백강호 홈런!"

"백강호, 넘겨 버려라!"

홈팬들은 강호의 응원가가 끝난 이후에도 연신 그의 이름을 목놓아 소리치며 득점권 상황을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팬들의 엄청난 환호 속에 타석에 선 강호.

그의 매서운 눈동자를 마주하게 된 이글스 투수 에릭은 마른침을 삼킨다.

'그냥 거를까?'

강호의 눈빛을 마주한 에릭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었다.

유니폼을 터뜨릴 듯이 불거져 나온 강호의 팔뚝 근육과 두터운 대 흉근, 그리고 자신을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비어있는 1루를 채우더라도 볼넷으로 내보냈으면 하는 바람마저 생겨난다.

이대로 강호에게 승부를 보려다가는 제대로 한 방을 얻어맞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포수 차연목의 초구 싸인과는 다른 코스를 향해 공을 던지는 에릭 투수.

에릭의 초구를 타석에서 확인한 강호는 배트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구종: 포크볼

구속: 121km

에릭의 초구 포크볼 선택은 크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코스 선택이 문제였다.

고의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강호외 왼발을 내딛고 있는 지점을 향해 급속도로 떨어지는 포크볼로 인해 강호는 타석에서 한 걸음 물러선다.

그런데 그 사소한 행동으로 다음 상황이 연결되고 있었다.

파핫.

강호가 한 걸음 물러서자 뒤늦게 에릭의 공이 터무니없이 바닥을 찍고 빠지는 와일드 피치라는 것을 깨달은 차연목 포수가 급히 몸을 움직인다.

그러나 그의 포구 동작은 한 템포 느린 것이어서 바닥을 찍고 튄 공이 차연목의 보호대를 스치며 등 뒤로 빠져버린다.

그 모습을 확인한 강호는 얼른 3루 주자를 향해 신호를 보낸다.

"홈, 홈!"

자신을 향해 빠르게 손짓하는 강호의 모습에 잠시 망설이던 3루 주자 박철이 그대로 홈을 파고든다.

그리고 2루에 있던 전준오 역시 3루로 향한다.

공이 빠진 것을 확인한 에릭이 얼른 홈을 커버하고 나섰지만, 3루 주자 박철의 발이 조금 더 빨랐다.

"세이프."

주심의 세이프 선언과 함께 이번 경기의 첫득점이 기록된다.

아쉽게도 투수의 와일드 피치로 인한 득점이라 강호의 타점으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대신 한 가지 이점이 생겨난다.

'주자 2, 3루 상황에서 주자 3루 상황으로 바뀌었으니 나를 거를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강호는 혹시라도 상대 배터리가 자신을 고의사구로 내보낼 것을 염려하다가 이제는 주자 상황이 고의사구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린다.

이글스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1사에 주자가 2, 3루에 있는 상황이라면 1루를 채워 다음 타자에게 병살타를 유도할 수도 있겠지만, 주자가 3루 상황에서 굳이 주력이 좋은 강호를 1루로 출루시켜 더 큰 위기 상황을 자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약 1루로 출루한 강호가 2루 도루를 시도한다면 복잡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2루와 홈을 동시에 노리는 홈 스틸도 가능했고, 스퀴즈 번트도 가능할 것이다.

강호의 단독 도루 후 외야 플라이를 노려 손쉽게 득점하는 것 역시 가능했다.

주자 2, 3루 상황에서 강호를 출루시키는 것과는 훨씬 다른 상황들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왓 더 퍽!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전 상황에서 고의사구로 백강호를 내보내는 건데. 1회부터 꼬이는구나!'

이글스의 에이스 역할을 도맡고 있는 선발 투수 에릭은 오늘 경기가 어렵게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강호를 향해 2구째 공을 던졌을 때 그 예감은 곧 확신이 된다.

구종: 체인지업

구속: 125km

강호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살짝 몸 쪽 아래로 가라앉는 코스를 확인하고는 곧장 배트를 휘두른다.

이미 경기 전 리포팅 분석을 통해 에릭의 체인지업만을 노리고 타석에 섰던 강호로서는 지금의 공이 가장 완벽한 공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강호의 선 굵은 상체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시작으로 어깨 뒤로 당겨 두었던 배트가 벼락같은 스피드로 휘둘러진다.

따악!!

홈 팬들의 응원 소리를 뚫어낼 정도로 강한 타격음이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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