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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길목에서
시간은 또 흘렀다.
27일 목요일에 진행되었던 베어스와의 치열했던 단판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고 사직으로 돌아온 자이언츠 선수단은 곧장 28일 금요일 경기를 준비해야만 했다.
새벽 늦은 시간에 퇴근했었던 선수들은 오후가 되어서야 속속들이 경기장에 출근하고 있었고, 그들과는 관계없이 오전 일찍 경기장에 출근한 몇몇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도 있었다.
그 무리 중에는 강호 역시 섞여 있었다.
또한 웬만해서는 일찍 출근하지 않는 편인 문표 역시 강호의 곁에 함께 하고 있었다.
"강호 후배, 이게 믿어져? 내 선구안 수치가 100점 만점에 76점이라니. 이런 밋밋한 숫자에 내가 만족할 것 같아? 다시 해봐야겠어."
문표는 곁에 있는 강호에게 불퉁한 목소리로 불만을 토하며 결과지를 보여준다.
강호가 확인해본 문표의 결과지를 간추려본다면 다음과 같았다.
최문표 age:33
컨택 정확도:72.4
컨택 방향성:66.8
운동 능력:72.1
순간 근력:68.6
근 지구력:71.5
근력 유지:76.7
선구안 정확도:76.4
선구안 방향성:73.1
강호가 자신의 결과지를 확인하는 사이 문표는 다른 선수를 체크하고 있는 테스트 기사에게 다가간다.
"아무리 봐도 결과지가 잘못된 것 같네요. 선구안 점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 근력 수치가 68밖에 안 된다니. 이건 확실히 잘못 된 겁니다. 다시 한 번만 해봅시다. 장비 설치한지 얼마 안 되서 기계가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네. 2군에서 재봤을 때는 이거보다 좋게 나왔다고요."
재측정을 요구하고 나선 문표의 행동에 테스트 기사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 동안, 그런 문표의 어깨를 누군가가 붙들었다.
문표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뒤늦게 출근한 채중석 선수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문표, 지금 이 선배들 줄 선거 안 보여? 너 정도 파워로 68점 나온 거면 많이 나온 거지? 그럼 얼마를 기대하는 거야? 그리고 2군에서 벌서 재봤다며? 뭐 하러 또 재려는 거야? 썩 뒤로 물러서."
조소를 담은 중석의 말에 문표는 한 발짝 물러서면서도 입으로는 중석의 말을 받아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강호 후배는 근력 수치가 최상급으로 나왔다니깐요. 92점이요. 제가 강호 후배보다 못 할게 뭐가 있어서 68점 밖에 안 나온단 말입니까? 심지어 강호 후배는 선구안 점수가 98점이 나왔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강호의 측정 결과를 트집 잡고 나선 문표의 말에 중석은 '응, 말이 되네'라고 답하며 스탯 측정을 위해 걸음을 옮긴다.
중석이 각종 장비를 착용하고, 실내 훈련장의 타석에 서자 먼저 측정을 하고 있던 1루수 김상훈이 결과지를 받아든 채로 물러선다.
그는 문표의 곁으로 다가와 자신의 결과지와 문표의 것을 비교해보더니 장난스럽게 웃음 지었다.
"뭡니까? 문표 선배. 컨택 정확도가 72밖에 안 돼요? 저보다 2나 낮으시네요. 근력이나 지구력도 저보다 낮으시고요. 이 결과지를 감독님께서 보시면 1루수 경쟁은 정해지는 거 아닙니까?"
문표와 자신과의 측정 결과를 비교하며 장난스럽게 말해오는 상훈의 목소리에 문표가 화들짝 놀라 묻는다.
"그러네! 이 결과지를 감독님이 보실 수도 있겠네! 그럼 더더욱 다시 측정해야지. 젠장. 내가 이런 핫바리 같은 수치가 나온 게 말이나 돼?"
자신의 테스트 결과를 승복하지 못한 채 이를 가는 문표의 행동에 상훈이 웃음 띤 얼굴로 대꾸했다.
"뭐, 강호가 측정한 결과지 보니까 다 믿을 만하던데요. 제 결과지도 제가 생각하던 거랑 비슷하게 나왔어요. 그만 결과를 받아들이세요."
상훈의 말에 문표는 인상을 일그러뜨린다.
그의 말대로 새 장비 설치가 끝나는 대로 누구보다도 빠르게 측정을 마친 강호의 수치를 보니 신 장비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문표와 상훈은 강호의 결과지를 확인한 상태.
뒤늦게 출근한 선배 선수들은 상훈의 말을 듣고는 강호의 곁으로 다가선다.
"왜? 뭐 얼마나 좋게 나왔길래? 강호야, 네 결과지 한 번 보여줘 봐."
모든 선배들의 시선이 강호의 결과지로 향한다.
딱히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어서 강호는 선배들에게 자신의 결과지를 내민다.
선배들이 보게 된 강호의 결과지에는 각종 도표와 그래프, 그리고 수십 개의 항목과 수치들이 일목정연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다수의 전문 용어와 영어들을 한글로 해석하여 간추려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백강호 age:24
컨택 정확도:92.7
컨택 방향성:90.1
운동 능력:91.4
순간 근력:92.3
근 지구력:92.7
근력 유지:91.9
선구안 정확도:98.6
선구안 방향성:98.9
각종 수치들 중에서 실질적인 타격 능력을 수치화한 8개의 목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직구장의 실내 훈련장에 새롭게 들여온 장비는 일명 PCC(Player Comparison Condition)그래프라고 이름 붙여진 결과지로 선수들의 신체 능력을 데이터화하여 출력해준다.
최고치를 100으로 두고, 최소치를 10으로 설정한 PCC그래프에서 강호의 결과지에 표기된 수치는 모두 최상급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치들을 나타내고 있었다.
프리마켓 시스템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치들과 큰 차이는 없었다.
몇 가지 차이가 있다면 주력이나 수비, 송구, 멘탈 등의 수치는 따로 확인할 수 없었고, 대신 운동 능력이나 근력 유지도 등의 수치로 운동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선구안을 나타내는 지표들이 최상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상태창에 표기되어 있는 80의 선구안 스탯과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강호는 처음 결과지를 받았을 때 속으로 상태창을 열어 프리마켓 시스템의 것과 비교해 보았다.
백강호(24)
포지션:SS
컨 택:96.6
파 워:90
선구안:80
주 력:93.9
수 비:97
송 구:80
멘 탈:91.5
경기 중이 아닐 때는 스킬 보정치가 적용도지 않아 PCC그래프보다 다소 낮은 스탯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과지에 나와 있는 98.6의선구안 정확도나 98.9의선구안 방향성과는 큰 차이가 있는 80의 선구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차이는 지금 강호에게 적용되고 있는 하나의 기간제 아이템 때문이었다.
강호에게 적용 중인 두 개의 기간제 아이템.
그 중 투수가 던진 공의 구종과 구속을 확인할 수 있는 '타석의 지배자'는 시뮬레이션 상황에서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타석 상황에서 스트라이크 존을 확인할 수 있는 '내가 심판이다' 아이템은 시뮬레이션 상황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내가 심판이다(30일)]
:30일 동안 타석에서 스트라이크 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타석의 지배자(30일)]
:30일 동안 타석에서 투수가 던진 공의 구종과 구속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이템 설명에서도 확인할 수도 있듯이 공을 던지는 주체가 투수여야만 적용되는 '타석의 지배자'와는 다르게 '내가 심판이다'는 타석에 서는 것만으로도 스트라이크 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기간제 아이템의 적용을 받아 시뮬레이션 상황에 임하다보니 최상 치에 가까운 선구안 수치가 찍히게 된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선배 선수들로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뭐 죄다 90점이네. 학교 다닐 때 반에서 1등하는 놈들 성적표가 이랬었는데. 강호가 야구 잘하는 이유가 결과지에 다 나와 있네. 그런데 강호 너 선구안이 이렇게 좋았어? 선구안 좋다고 떠들고 다니던 문표도 76밖에 안 나왔던데? 그러고 보니까 중석 선배는 선구안이 얼마나 나오려나? 우리 팀에서 선구안하면 중석 선배잖아."
누군가의 목소리에 실내 훈련장 안의 모든 선수들의 시선이 시뮬레이션 중인 중석에게로 쏠린다.
중석에 대한 시뮬레이션 측정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선수들은 중석의 결과지가 나오자마자 곧장 테스트 기사에게로 물려들었다.
"어?! 뭐야? 너희들 저리 안 비켜? 그 결과지 내 거라고!"
중석은 거대한 몸으로 후배 선수들을 헤치며 결과지를 들고 있는 선수에게로 다가간다.
그런데 하필이면 중석의 결과지를 받아들고 있던 사람은 문표였다.
"푸핫! 이게 뭡니까? 중석 선배, 선구안이 76.5이네요. 저보다 정확히 0.1높으신데요?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선배 눈도 나이를 먹나봅니다. 이제 안경 쓰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큰 소리로 웃으면서 결과지를 건네는 문표의 행동에 중석은 미간을 좁힌다.
그러면서 문표의 말이 신경 쓰였던지 가장 먼저 기록지의 선구안 정확도를 찾아보고 있었다.
채중석 age:36
컨택 정확도:67.4
컨택 방향성:63.6
운동 능력:63.9
순간 근력:79.8
근 지구력:66.4
근력 유지:72.1
선구안 정확도:76.5
선구안 방향성:80.9
중석의 결과지는 크게 나쁜 수치 그래프를 나타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강호와 비교해 본다면 상당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나 중석의 최대 장점으로 거론되고 있는 선구안에서 생각보다 낮은 수치가 찍혀 있었다.
강호와 비견될 수 있는 중석의 높은 선구안 수치를 기대하던 다른 선수들로서는 조금은 의외의 결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중석은 결과지에 큰 의견이 없어 보인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문표 너도 1년만 더 지나봐라. 30대 후반 되면 하루하루가 다르다고. 시력 떨어지거나 순간 대처 능력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야. 문표 너도 내년이면 30대 중반이지? 네가 내 나이 되면 결과지 확인하기도 싫을 정도로 운동 능력이 떨어져 있을 걸?"
중석은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으로 문표의 말에 대꾸하고 있었다.
중석 스스로는 야구 선수로서 황혼기를 지나고 있는 자신의 나이로 결과지에 나온 수치 정도면 꽤나 괜찮은 스탯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후배 선수들도 묘한 설득력을 담은 중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다.
그 중에 강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중석 선배의 말이 옳아. 다른 직업에 비해서 운동선수들은 유독 직업 수명이 짧은 편이야. 지금 나만 해도 25살에 1군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니 10년 정도만 지나도 기량이 급속도로 떨어지게 될 거야. 프리마켓 시스템이 적용되고 있을 때 0.1의 스탯이라도 더 올려둬야 하는 이유야.'
강호는 중석이 스쳐지나가 듯이 꺼낸 말을 가슴 속에 새긴다.
운동 능력이 곧 업무 능력으로 귀결되는 운동선수에게 나이를 먹는 것과 그로 인해 운동 능력이 저하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은 은퇴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지루한 싸움이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단지 경쟁에서 이기는 것 이상의 것을 얻기 위한 노력이 모든 운동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강호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결과지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며 그 사실을 확신한다.
선수들이 PCC그래프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이미 시계 바늘은 정오를 훨씬 지나 오후를 알리고 있었고, 모든 자이언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가 경기장에 출근해 있었다.
이제 주말 시리즈 첫 경기를 시작하기까지는 몇 시간 남지 않은 상황.
손 감독은 모든 선수들을 불러 모아 경기 준비에 나선다.
"모두들 PCC그래프로 결과 확인은 했겠지? 측정한 데이터는 라인업이나 엔트리를 짤 때는 반영하지 않을 거야. 각자의 신체 능력을 알 수 있는 지표 정도로만 참고하도록 해."
손 감독은 우선 새로 반입한 장비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밝히며 선수들을 불러 모은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잠실에서는 비가 내린 덕분에 잘들 쉬었겠지? 이제부터 우리 팀도 상위권 경쟁에 돌입하게 될 거야. 4위 팀인 히어로즈와 승패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상황이니까 이번 시리즈 결과에 따라서 다음 달에 우리가 상위권으로 치고 나갈 수 있을지, 아니면 5할 승률에서 밀려날 것인지를 예측해볼 수 있을 거다."
손 감독은 이번 시리즈 결과에 따라 팀이 상위권으로 도약할 지 아니면, 다시 하위권 팀으로 분류될지가 달려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그의 지적은 대다수 야구 전문가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인터넷 기사에는 자이언츠의 상위권 도약에 대한 추측기사들이 실리기 시작했고, 야구 전문 방송에서도 5위로 도약한 자이언츠가 여름이 시작되며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관심 있게 다루고 있었다.
이것 또한 지정만 사장 이하 프런트들의 노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여론이었지만, 경기장에 있는 선수들로서는 알 길 없는 내용이었다.
4위 팀인 히어로즈는 시리즈 승패 38승 34패를 기록하며 3위권 도약을 넘보고 있었고, 자이언츠는 잠실에서 열린 베어스 경기를 승리로 이끌며 36승 35패로 5할 승률을 넘긴 상태.
이번 시리즈 경기 결과로 양 팀 간의 순위가 뒤바뀔 수 있을 정도로 승패 마진이 좁혀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번 시리즈는 양 팀 간의 맞대결이 아니라 오랜만에 맞상대하게 된 7위 팀 이글스와의 사직 홈 경기였다.
손 감독은 그러한 사실들을 열거하며 본론을 밝힌다.
"이제부터 훈련체계를 조금씩 변화시킬 거야. 곧 여름이 시작되니까 야외에서의 훈련 량은 줄이고, 주로 실내 훈련장에서의 훈련으로 대체하게 될 거야. 선수들은 각자 체력 관리를 잘 해주고. 체력이나 폼이 떨어지는 선수들은 주전 선수여도 상동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해!"
손 감독은 주전 선수들도 성적이 떨어지면 2군으로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의 선언에 잠시 눈치를 살피던 후배 선수들은 선배 선수들이 '네!'하고 힘 있게 대답하자 그들을 따라서 목소리를 높인다.
베테랑 선수들 역시 한 때는 2군에 머물렀던 적이 있어서 손 감독의 선수기용 방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손 감독의 말에 불만을 품는 선수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번 시리즈는 반드시 우리가 가져와야 해! 모두 잘 알아들었나?"
손 감독의 물음에 선수들은 다시 한 번 '네!'라고 힘차게 답하며, 곧이어 이어진 경기 전 훈련에 돌입한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사직구장에서 시작될 이글스와의 시리즈 3차전 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