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164화 (16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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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휴식

장소는 여전히 자이언츠 구단 본부였다.

긴장된 마음으로 사장실에 들어선 허 실장의 눈에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지정만 사장의 얼굴이 비쳐지고 있었다.

"대체 작년까지는 구단 본부 인사를 어떤 식으로 관리한 거야? 구단 예산 관리고, 자금 관리고, 인사 관리고 제대로 한 게 아무 것도 없었던 거야?"

지정만 사장은 책상 가득 쌓여있는 서류들을 헤치고 나와 분통을 터뜨린다.

허 실장이 얼핏 살펴보니 각종 예산 자료들과 자금 자료, 프로젝트 진행 권과 부장 급 이하 간부 사원들의 인사 관리 자료 등이 대거 쌓여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자료들의 공통점은 모두 지정만 사장이 구단 사장으로 취임하기 이전의 자료들이라는 것이었다.

'작년까지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사장님이 화내실 만도 하지. 구단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으니까.'

허 실장은 전임 사장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지 사장의 분노를 이해하게 된다.

작년까지 사장 자리에 있었던 전임 사장은 구단 관리에 큰 애착이 없었다.

프로야구 구단이라는 사업체는 영리적인 성향보다는 이미지 마케팅 사업의 성격이 강하다.

프로 야구 구단 중에서 흑자가 가능한 몇 안 되는 구단 중에 하나가 자이언츠라는 평가도 있지만, 다른 영리 사업체들과 비교해본다면 순이익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국내 스포츠 구단의 현실이었다.

본사에서는 비영리 사업체로 봐도 무방한 프로야구 구단에 본사의 핵심 인사를 보내지는 않았다.

본사 임원들이 경쟁에서 밀린 후에 마지막으로 가게 되는 곳이 바로 자이언츠 구단 사장 자리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이다.

구단을 총괄해야하는 사장부터가 그릇된 인식을 가졌으니 그 아래 단장 이하 임원들과 간부 직원, 말단 직원들까지 조금은 마음가짐이 허술해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간혹 거래처나 납품 업체들에게 뒷돈을 받아 챙기는 선임, 책임 급 인사들이 있을 정도였다.

"물갈이가 필요하겠어.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지만, 지금의 자이언츠 구단은 전면적인 물갈이가 필요해!"

지 사장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책상 위에 놓아둔 사직서 네 개를 꺼내 보인다.

집어 든 사직서 4개를 허 실장의 면전에 내어 보이며 묻는 지 사장.

"이게 뭔 줄 알아?"

"사...표로 보입니다."

"그래, 사표야. 내가 구단 예산 집행 내역과 자금 사용 내역들에 대한 감사를 시작하니까 실무 부서 대리 2명하고 과장 2명이 사직서를 냈어. 지금 이게 무슨 뜻 같아?"

지 사장의 물음에 허 실장은 곧장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쉽게 꺼내지는 못했다.

그를 대신해서 지 사장이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찔리는 게 있다는 거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지정만 사장.

그 후에도 지 사장은 인사 변동과 예산 책정에 관한 각종 불만을 토로하며 한동안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런 지 사장을 바라보던 허 실장은 자신이 가지고 온 설문지가 어쩌면 지 사장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때야! 지금 이 때가 선수단 설문지를 내밀 타이밍인 거야!"

허 실장은 지정만 사장에게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속내를 실행으로 옮기고 있었다.

뜨거운 의지로 두 주먹을 불끈 쥔 지정만 사장의 손에 보고서와 설문지를 내민 것이다.

"구구절절 옮으신 말씀입니다. 사장님의 현명한 판단과 결정을 돕기 위해서 제가 따로 준비한 게 있습니다."

허 실장은 그렇게 말하며 눈빛을 빛낸다.

회식 자리에서 술김에 말한 내용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것이지만, 허 실장은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마침 사장님이 업무 개혁 의지를 밝히셨으니 선수들의 건의를 내치기는 힘든 타이밍이야. 본인이 말씀하신 것도 있으니까 설문지를 가져온 게 괜한 일은 아닐 거야!'

허 실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선수들의 설문지를 내밀고 있었다.

허를 찌르는 허 실장의 노련한 타이밍 포착에 지정만 사장은 본의 아니게 설문지들을 받아들게 된다.

"이게 뭐야? 무슨 보고서야?"

"구단의 중심은 바로 선수들 아니겠습니까? 제가 사장님의 깊은 심정을 모두 읽은 건 아니지만, 이런 설문서가 사장님 판단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일을 좀 진행해 봤습니다."

지 사장의 물음에 허 실장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대답하며, 지 사장이 설문지 읽기를 기다린다.

"어디보자...자이언츠 선수단 설문에 대한 보고서? 설문 내용을 현실화할 수 있는 필요 예산이 12억? 뭐가 이렇게 많아? 1군 선수들 모두 합쳐도 27명밖에 안 되는데. 설문 내용 현실화 비용이 12억이 말이 되기나 해?"

지정만 사장은 허 실장이 직접 작성한 보고서를 모두 읽은 후 버럭 소리친다.

그런 지 사장의 모습에 허 실장은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가, 양 손으로 지 사장이 든 설문지를 가리키며 대꾸하는 모습이다.

"자세한 내용은 선수들이 직접 작성한 설문지에 나와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까?"

허 실장의 제안에 지 사장은 '으음'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선수들이 작성한 설문지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한다.

지 사장은 설문지를 읽어나가며 보고서에 쓰여 있는 12억의 예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선수들의 소박한 건의내용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양말이 구멍 난 것을 꿰맬 수 있도록, 실과 바늘을 지원해 달라고? 아니 연봉을 몇 억씩이나 받는 프로 선수가 구멍 난 양말을 꿰매 신으면 되겠어? 이건 스폰 받는 용품 업체에 새 양말을 지원해 달라고 하면 되잖아."

"네, 그러겠습니다."

"또 이건 뭐야? 유니폼 여벌이 부족하다고? 경기 끝난 후에 세탁하는 도우미 같은 거 따로 없어?"

"그게...제가 알기로는 유니폼이나 개인 의류는 선수들이 직접 세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 FA 100억 시대가 지난 게 언젠데 아직까지 선수들이 본인의 유니폼을 직접 세탁하나?! 지금 당장 빨래 잘하는 주부 사원이라도 채용해서 선수들 유니폼을 세탁할 수 있게 하면 되잖아!"

"그게..구장에 따로 세탁기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없으면 사면 될 거 아냐?"

"그 예산 문제가..아무래도 선수들 유니폼이나 양말 등을 모두 세탁하려면 대용량 세탁기가 몇 대나 필요할 것 같은데요."

"예산이 부족하면 중고 세탁기를 사면되지. 중고 세탁기 얼마 안 해! 다섯 대를 사도 백만 원이면 산단 말이야. 우리 구단에서 백만 원도 없어?!"

"아, 그 정도는 있습니다."

"그럼, 뭐해? 당장 구입해서 선수들 유니폼, 양말, 모자 같은 의류 세탁할 수 있는 도우미를 채용하면 되잖아. 지금 당장 알바 천국에 올려!"

"넵!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 사장은 호탕한 결정으로 선수들의 설문지를 빠르게 처리해 나갔다.

허 실장은 그런 지 사장의 곁에 선 채 그의 지시 사항을 빠짐없이 메모하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경기 중에 공용 장비가 부족하다고? 배트나 글러브 여분이 없어? 이게 무슨 소리야? 얼마 전에 2군 경기장에 용품 지원했잖아. 1군에는 용품을 지원하지 않은 거야?"

지 사장의 질문에 허 실장은 기억을 더듬어보며 대답했다.

"1군 선수들은 아무래도 고액 연봉을 받기도 하고요. 따로 용품 구매 쿠폰을 매달 지급받고 있습니다. 한 달에 1인당 20만 원 정도일 겁니다."

선수단에게 용품 구매 쿠폰을 매달 지급하고 있다는 말에 지 사장은 문뜩 궁금해진다.

"20만원이면 적은 돈은 아니네. 선수들 방망이 하나가 얼마지?"

"20만 원정도 할 겁니다."

"뭐? 그럼 쿠폰으로 방망이 하나 사면 끝이란 말이야? 경기 보니까 하루에 배트 두 개도 깨먹고 하던데, 그럼 한 달 쿠폰으로 배트 하나 사면 끝이네. 선수 모자나 헬멧, 글러브는 무슨 돈으로 산단 말이야?"

"그게...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러니까 선수들 성적이 제대로 나올 리가 있겠어? 제대로 된 지원도 없이 선수 장비를 자비로 구입하고, 세탁도 선수 본인이 직접 하는 여건에서 무슨 좋은 성적을 기대하나?"

지 사장은 그렇게 호통을 치면서 본인의 스마트폰을 꺼내 선수용 장비의 가격을 검색해 본다.

배트부터 시작해서, 헬멧과 글러브 등을 살펴보던 지정만 사장은 미간을 깊게 찡그리는 모습이다.

"이것 봐. 제대로 된 글러브 하나에 30만원이 넘는데 20만 원짜리 쿠폰이 가당키나 한 거야? 이번에 프로모션 들어간 용품 업체들에게 요청 좀 해봐. 홍보 제대로 해줄 테니까 1군 선수들에게 무상으로 장비 스폰 좀 해달라고 말이야."

"네, 그러겠습니다."

"이런 건 프런트에서 진즉에 챙기고 있어야 되는 내용들 아니야? 이런 소소한 것까지 사장이 지시하기 전에는 우리 구단 프런트들은 아무 일도 안 한다는 말이야?"

지 사장은 혀를 차면서 나머지 몇 장 남지 않은 설문지를 읽어 내려간다.

그러다가 '최문표'라는 이름이 쓰인 설문지에서 멈추고 있었다.

"실내 훈련장에 증강현실 기반 훈련기기를 설치해 달라고? 그걸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으로 연동할 수 있도록 선수들에게 지원을 해주고?"

지 사장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표의 건의 사항에 미간을 좁혀 보인다.

그러자 수첩에 지 사장의 지시를 메모하고 있던 허 실장이 '아!'하는 탄성을 지르며 대답했다.

"이번에 사직 구장에도 모션 캡쳐 장비를 반입하지 않았습니까? 증강 현실이니까 AR 기기들을 설치해 달라는 뜻 같습니다. 요즘 스포츠 선수들의 모습을 4D촬영한 증강현실 훈련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있는데 그걸 말하는 것 같습니다."

허 실장의 대답에 지 사장은 문표의 건의 내용을 이해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지금 최문표라는 선수가 우리더러 증강현실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해 달라는 얘기야?"

"글쎄요. 개발까지는 아니고, 그런 장비들이 있으면 설치해달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제가 지금 최문표 선수에게 전화해 볼까요?"

"아니, 됐어. 그러니까 최문표 선수가 건의가 12억짜리 건의란 말이지?"

"정확하게는 11억 9천만 원입니다. 나머지 선수들께 천만 원이고요. 아직 구체적인 예산을 산정한 게 아니라서 변동 사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 사장은 허 실장의 보고를 들으며 남은 설문지를 모두 읽어내려 갔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책상 위의 자료들을 뒤져 올 시즌 예산 자료를 다시 확인한다.

"올해 선수들에게 지원할 수 있는 남은 예산이 2억 규모네. 모든 건의 사항은 수용하기 힘든 예산이야."

"그렇습니다. 본사에 추가 예산을 요구하는 게 어떨까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본사에서 추가 예산을 줄 것 같아? 지금 예산도 줄이려는 마당에."

지 사장은 허 실장의 제안을 일축한 후, 깊은 생각에 잠긴다.

'결국 돈 문제구나. 구단에 부족한 예산을 본사 지원 없이 추가 확보하는 방법이 없을까?'

한동안 고민하던 지 사장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곁에 있던 허 실장에게 물어본다.

"구단의 최대 매출처가 어디야?"

자이언츠 구단의 최대 매출처를 묻는 지 사장의 질문에 허 실장은 곧바로 대답한다.

"관중 수입입니다. 사직구장 관중 수입이 저희 구단 최대 매출처이지 않습니까?"

"그래. 바로 그거야! 올 초에 세웠던 예산 계획은 우리 팀의 최대 성적을 중위권으로 예상하고 세운 계획이잖아. 만약 우리 팀이 3위 이상의 상위권으로 도약하면 관중 매출이 어떻게 되겠어?"

지 사장은 밝은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답이 너무 쉬운 질문이라 허 실장은 속으로 '당연히 오르겠죠'라고 대답하면서 입 밖으로는 쉽사리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 사장의 질문에 무언가 함정이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런데 함정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머리로 어떻게 기획 실장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당연히 오를 거 아냐? 여기가 어디야? 부산 아냐? 야구 도시 부산! 우리 자이언츠가 상위권으로 도약하면 홈경기 전석 매진된다는 구도 부산. 예산이 부족하면 더 벌면 되지. 허 실장, 우리 지금부터 돈 벌 궁리를 해보자고!"

지 사장은 그렇게 외치면서 쾌재의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모습이 왠지 두렵게만 느껴지는 허 실장. 그는 오늘도 변함없는 하나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퇴근 시간이 더 늦어지겠네.'

지금 이 순간부터 일복이 터져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는 허동준 실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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