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2 / 0335 ----------------------------------------------
비오는 날의 오후
프로야구 선수들이 시즌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휴식 일인 월요일.
강호는 월요일을 그 누구보다 바쁘게 지낸 후, 화요일 아침을 맞이한다.
각 스포츠 업체들과의 광고 모델 촬영과 구단에서 마련한 몇 개의 인터뷰에 응하느라 하루를 어떻게 보낸 지도 모를 정도로 바쁜 휴식 일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화요일이 되어 잠실 원정길에 나서기 위해 일찍부터 집을 나선다.
"강호 후배, 잠을 푹 잔 모양인데? 얼굴이 달덩이처럼 부었어. 어제는 웬일로 경기장에 훈련 하러 안 나오고.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사직에 주차 되어 있는 원정 버스에 오른 강호에게 일찍부터 원정 버스에 오른 문표가 말을 건네 오고 있었다.
강호는 그런 문표의 물음에 답했다.
"사진 찍을 일이 좀 많아서요. 구단에서 지정해준 기자들하고 인터뷰도 해야 했고요."
"오오~ 사진? 인터뷰? 완전 인기 스타 같은데~ 이제 우리 강호 후배 연예인 되는 거 아냐?"
"왜요? 제가 연예인 되면 매니저라도 하시게요?"
"나더러 지금 강호 후배 수발을 들라는 말이야? 나 참, 나를 뭘로 보고. 얼마 줄 건데?"
어느새 문표의 페이스에 말려들기 시작한 것을 느낀 강호는 피식 웃어 보이며 장시간 원정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악력기와 VR안경을 깨내 들었다.
그런데 그 때 창밖으로 화물차 행렬이 보이고 있었다.
주차된 원정 버스 곁을 스쳐 지나는 화물차들은 사직 구장으로 직행하는 모습이다.
"저희가 원정 가있는 동안 구장 내부 공사라도 있는 겁니까? 웬 공사 차량들이죠?"
강호는 문표가 답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고 있었다.
그런데 물음에 대한 답은 문표가 아니라 지금 막 자신의 자리에 앉은 박상현 투수가 대신해주고 있었다.
"공사까지는 아니고, 장비 반입이라던데. 왜 몇 주 전부터 구장 내부 훈련장에 보수 공사가 있었잖아. 훈련실 하나 리모델링한다고. 거기에 반입할 장비들이래."
박상현 투수는 자신의 가방을 머리 위의 보관함에 밀어 넣은 후,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의 말에 문표가 호기심을 내비친다.
"그런 걸 상현 선배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혹시 또 여 코치님께 들은 겁니까?"
"아니, 출근하는 길에 저 화물 트럭 기사들이 구장 내로 어떻게 들어가는지 물어보더라고. 내가 길 안내도 할 겸 무슨 일인지 한 번 물어봤지. 장비 반입이라네."
박상현 투수의 대답에 문표가 '으음'하고 생각에 잠겼고, 그 때 앞좌석에 앉아 있던 안민경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어온다.
"선배님, 혹시 화물에 적힌 상표나 로고 같은 거 못 보셨습니까? 영어로 적혀있지 않던가요?"
백업 포수인 민경의 질문에 상현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맞아'라고 응수하며 기억에 남은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낸다.
"그러고 보니까 영어로 G로 시작해서 뭐 모션 컨트롤러하고, 일렉트로닉 뭐라고 적혀 있던 것 같던데. 왜? 민경이 네가 뭐 좀 알고 있는 게 있어?"
상현의 질문에 이제 모두의 시선은 민경에게로 향한다.
상현의 말에서 곁에 앉은 강호역시 무언가를 깨달은 것인지 과거의 기억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 사이 민경이 상현의 질문에 답했다.
"제가 아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몇 달 전에 2군에 모션 캡쳐 장비하고, 선수 행동 보정 기기가 새로 들어왔는데 말입니다. 그 회사 브랜드가 G로 시작해서 일렉트로닉이라고 끝났던 것 같습니다."
민경의 대답에 강호는 흐릿했던 기억 속에 있던 단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제니 모션 컨트롤러, 제니 일렉트로닉 코퍼레이션(Genie Motion Controller/ Genie Electronic Corporation). 그 회사 모션 캡쳐 장비 말하는 거겠지?"
다른 선수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불쑥 튀어나온 강호의 말에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강호에게로 향한다.
대충 넘겨짚는 말이 아니라 정확한 명칭까지 말하고 있는 강호에게 문표는 '호오'하는 탄성을 내뱉는 모습이다.
"그래, 맞아. 그런데 네가 어떻게 알았어? 모션 캡쳐 장비는 강호 네가 1군으로 올라가고 나서 상동 실내 훈련장에 새로 들여온 장비인데. 2군 선수들은 알고 있어도 1군 선수가 알기는 힘든 건데?"
문표 역시 2군에 있을 때 모션 캡쳐 장비를 사용해본 경험이 있는 것인지 민경과 강호의 말에 긍정하고 나섰다.
근처에 있는 1군 선수들은 처음 듣는 신 장비라서 관심을 내보이게 된다.
"뭔데? 사직에 새 장비 들어왔어? 좋은 거야? 얼마짜린데?"
앞쪽 자리에 앉아 있던 지명타자 채중석이 뒤쪽 자리까지 다가와 흥미를 내보인다.
중석 역시 버스 옆을 지나는 화물 트럭을 봤기 때문에 구장에 반입될 장비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문표는 그런 중석을 향해 대답했다.
"꽤 쓸 만합니다. 사실은 재밌어요. 신기하기도 하고요. 타석에 선 선수나 마운드 위의 투수가 투구나 타격을 할 때의 모션을 분할에서 촬영하는 장치인데, 선수의 장, 단점을 데이터화해서 알려주더라고요. 뭐, 꼭 어렸을 때 했던 IQ테스트 결과지처럼 결과가 나와요. 재밌습니다. 저는 선구안 점수가 꽤 높게 나왔어요. 중석이 형도 선구안 점수가 최고로 나오지 않을까요?"
문표의 설명이 이어지자 주변에 앉아 있던 선수들과 중석은 궁금증이 커지는지 질문 세례를 쏟아 붓는다.
문표는 처음에는 일일이 대답해주다가 나중에는 '오늘부터 설치하는 모양인데 우리가 잠실 원정 다녀오면 설치가 끝나있겠죠' 라고 대꾸하며 대답을 미룬다.
"뭐, 팀에 새 장비가 들어오면 좋은 거지, 뭐. 문표 말 대로면 제법 재미있겠네."
문표에게서 충분한 대답을 들었다고 여긴 중석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나머지 선수들도 문표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새로운 장비 반입을 기대하며 서로 대화를 나눈다.
"구단에서 의욕이 대단하네. 우리가 원정 중일 때 장비도 설치하고. 올해는 투자를 해주려는 건가?"
박상현 투수는 장비 반입보다 구단의 투자 결정에 관심을 보이며 의자에 몸을 기댄다.
홀로 생각에 잠겨 자신의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강호는 예전 상동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때의 강호는 휴식 일을 맞아 상동 주변을 러닝하다가 2군 지원팀 소속의 직원을 만나 모션 캡쳐 장비를 사용했던 기억이 있었다.
'기간제 아이템 효과와 비슷한 기능이 있었지. 결과지가 따로 나온다는 건 듣지 못했는데. 문표 선배 말대로 원정길을 다녀와서 사직구장에도 장비가 설치되어 있으면 스탯을 한 번 측정해 보는 게 좋겠어. 결과지를 수치화 해준다니까 현재 내 스탯들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강호는 과거 상동 지원팀 직원인 이인한 사원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다.
손 감독 체제에서 점점 변화하는 팀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단지 분위기뿐만 아니라 선수단의 기량 향상을 위한 프런트의 시도가 체감되었다.
이 모든 것이 손 감독의 총 사령탑 임명과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중석 선배 말대로 구단의 긍정적인 변화는 좋은 거야. 선수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코칭스태프나 프런트에서 선수들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결국 시즌이 끝났을 때 팀 성적은 바닥을 치게 돼. 최근 몇 년 동안 자이언츠 성적이 그랬던 것처럼.'
강호는 팀에 불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가 팀 성적 향상으로 연결되기를 바라며, 그를 태운 원정버스는 잠실을 향한다.
한편, 기나긴 시리즈 원정에서 돌아온 자이언츠 2군 선수단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소박한 행운에 기뻐하고 있었다.
"감독님. 이게 다 뭡니까? 설마 구단에서 용품 지원 같은 게 온 겁니까? 이번 달은 벌써 지원 쿠폰을 지급 받았잖습니까?"
2군 선수들을 대표해 가장 연장자 중 한명인 2루수 최훈이 묻고 있었다.
최훈은 원래 1군의 주전 2루수였지만, 수술 일정을 잡기 위해 잠시 2군으로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구단에서 보낸 게 아니니까 그렇지."
최훈의 물음에 답하고 있는 것은 새로 2군 사령탑 자리에 앉게 된 양용민 감독이었다.
그는 원래 3군 총괄 코치 자리를 맡고 있었지만, 손성조 감독이 1군으로 올라가면서 후임 감독으로 양용민 총괄을 구단에 추천하면서 새로운 2군 감독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구단이 아니면 이 많은 용품들을 누가 보낸 거예요? 설마 본사에서 보내지는 않았겠죠."
최훈은 자신이 묻고 있으면서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어 보인다.
그가 양 감독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뒤늦게 도착한 2군 선수들이 놀란 눈을 치켜뜬다.
"이거 뭡니까? 어?! 여기 글러브에 제 이름 새겨져 있는데요?"
선수들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용품들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양 감독을 향해 질문하고 있었다.
그러자 양 감독은 크리스마스 날 선물을 전달하는 산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고 있었다.
"1군에서 강호가 보내는 선물이란다. 이번에 강호가 구단 소개로 스포츠 업체들하고 스폰서 쉽 계약을 맺으면서 자기가 받을 일정 금액 대신에 2군 선수단에 물품 지원을 요청했다고 하는구나."
양 감독의 설명에 선수단은 '와아'하는 탄성을 내지른다.
"그럼, 이거 전부 다 강호 선배가 쏘는 겁니까?"
"그래, 그렇다고 봐야지. 나중에 기회되면 강호한테 고맙다고 문자라도 한 통 보내도록 해. 강호가 본인 몫을 덜 받는 대신에 2군 선수단에 선물하는 거니까."
양 감독의 대답에 2군 선수들은 묘한 감흥에 휩싸이고 있었다.
한 때는 한솥밥을 먹던 동료에서 이제는 팀의 간판 타자가 되어버린 강호.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함께 동고동락했던 강호이다.
자신들 역시 강호처럼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렇게 동료 선수들에게 선물을 선사할 수 있는 간판 선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난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강호 선배가 스프링 캠프 때부터 해오던 걸 바로 곁에서 지켜 봤잖아. 나라고 못할 건 없어!'
선수들은 강호가 선사한 용품들을 손에 쥔 채, 각자의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들에게 전달된 야구 용품들은 강호가 본인의 몫을 덜어서 선물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런트 고위 인사에게 지시를 받은 실무 부서 직원이 양 감독에게 부정확한 사실을 알려주었고, 양 감독은 본인이 내키는 대로 해석을 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강호가 직접적으로 물품 지원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허동준 기획 실장이 강호의 기부 의사를 프로모션과 연결시키면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이 물품들은 프로모션으로 스포츠 용품 업체들에게 받아온 물건을 구단 측의 지시로 2군 선수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결과였다.
그런데 양 감독을 시작으로 모든 2군 선수들이 오해를 하게 된 것이다.
'강호는 충분히 그럴만한 녀석이니까. 기특한 녀석.'
양 감독은 본인의 오해로 인해 2군 선수들이 크게 고무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된 강호의 번호로 '고맙다. 강호야. 2군에서도 항상 지켜보마.'라고 시작되는 장문의 문자를 보내는 중이었다.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강호를 육성 군에서 직접 지도하기도 했던 양 감독.
강호에 대한 양 감독의 호감에서 비롯된 2군 선수단의 오해는 점점 강호를 향한 긍정적인 마음으로 발전되어 간다.
후배 선수들은 강호에 대한 선망의 감정을, 선배 선수들은 자신이 하지 못한 선배로서의 도리를 대신한 강호에 대한 고마움이 각자의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1군 무대를 밟게 되면, 강호 선배에게 고맙다는 말을 직접 전해야겠어!'
신인 급 선수들은 각자의 각오를 다지며, 강호와 1군 무대에서 다시 재회하는 그날을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그들의 바람은 무형의 에너지처럼 번져 나가 그렇지 않아도 2군에서 상위권을 달리고 있던 자이언츠 2군 선수단이 더욱 더 크게 도약하는 계기가 된다.
덕분에 항상 자이언츠 선수단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던 1군과 2군 선수들에 대한 실력 격차가 빠르게 좁혀져 가고 있었다.
그 뒤에는 물론 지정만 사장 이하 구단 프런트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있었고, 강호에 대한 선망의 마음은 기폭제 역할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군 선수단의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한 긍정적인 열정의 기운은 '백강호'라는 이름으로 기억된 채 빠르게 커져나가고 있었다.
정작 강호 본인은 모르는 사이 상동에서 시작된 변화들이었다.
6월 25일 화요일. 민족의 아픔이 있었던 기념비적인 날에 상동에서 벌어진 하나의 해프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