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158화 (157/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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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하지 않은 행운

    다음 날이 되어 허동준 기획 실장은 평소에 비해 출근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의 출근이 어찌나 빨랐는지 기획실 직원들이 아무도 출근 하지 않은 사무실에 가장 먼저 출근 했을 정도였다.

    허 실장은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게 어디 갔더라? 정 과장 자리에 있었나? 박 대리 자리에 있었나?"

    잠시 후, 찾고 있던 서류를 발견한 허 실장의 표정이 밝아진다.

    "여기 있네. 내 자리에."

    한참을 찾던 서류가 자신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허 실장.

    그는 꽤나 긴 시간동안 서류와 모니터를 오고가며 계산에 몰입한다.

    그러는 사이 비어있는 사무실에는 하나, 둘 씩 직원들이 출근하고 있었다.

    '헉! 실장님이 벌써 출근을?'

    가장 먼저 출근한 허 실장의 모습에 말단 직원들을 시작으로 박소연 대리와 정희성 과장까지, 놀란 얼굴로 허겁지겁 자신의 자리로 달려가 앉는다.

    이례적인 허 실장의 모습에 서로에 대한 아침 인사도 잊을 정도였다.

    자신의 일에 몰두 하느라 직원들이 출근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허 실장은 하던 일을 모두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정 과장, 이게 우리 구단에 프로모션 요청한 스포츠 용품 업체들 전부지?"

    허 실장의 물음에 정희성 과장이 얼른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선수단 스폰 요청한 업체 말씀이시죠? 총 아홉 개 업체입니다. 그 중에서 세 개 정도 업체가 적합할 것 같습니다."

    정 과장은 평소에 허 실장 거들떠보지도 않는 일에 관심을 보이자, 기억을 더듬어 대답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기획실의 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이 바로 정 과장이었기에 사소한 업무도 그의 손을 거치고 있었다.

    허 실장이 지정만 사장을 보좌하는 사이 기획실의 실세가 된 정 과장.

    그러나 그런 정 과장도 허 실장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의 라인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실장님이니까, 다음번에 있을 진급 심사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게 분명해. 허동준 실장님이 구단 임원으로 승진하시면 그 다음 실장 자리는 나한테 오겠지? 그러려면 튼튼한 라인을 제대로 붙잡은 허 실장에게 잘 보여야 하는 거야.'

    정 과장은 오랜 사회생활 경험을 통해 판단이 끝나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구상하고 있는 허 실장의 곁으로 바짝 다가선다.

    "스폰서 프로모션 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선수단을 스폰하는 업체에 약간의 문제도 있고, 바꿔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뭐, 저희 구단에서 비용을 대는 게 아니라 용품 업체들이 홍보 효과를 노리고, 무상으로 용품들을 지원해 주는 거니까요. 제가 볼 때는 일본계 M사가 아니라면, 미국계 R사나 W사 것을 쓰는 게 괜찮아 보입니다. 선수들 개인 용품은 N사나 A사 것이 인지도가 좋고요."

    정 과장은 허 실장에게 보고의 말을 하면서 박 대리에게 손가락질로 추가 자료를 요구한다.

    자신의 자리에 앉은 채 두 상사의 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박 대리는 얼른 자신의 PC에 저장되어 있던 자료들을 출력하여 두 사람에게 건네준다.

    "아무래도 일본 계 기업이 좋지 않을까요? 가격 대 성능 비면에서는 가장 좋은 편입니다. 인지도 쪽에서는 미국계 기업들이 조금은 우세하고요."

    정 과장에서 박 대리로 이어지는 설명을 모두 전해들은 허 실장은 '으음' 소리를 내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국내 기업은 없어? 본사가 부산에 있는 회사면 더 좋고."

    허 실장은 자신의 질문으로 바빠지기 시작한 정 과장과 박 대리를 바라보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스스로 준비한 자료를 챙겨든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 각종 자료들과 보고서 하나를 챙겨 든 허 실장의 발걸음은 사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유진 씨, 사장님 지금 계신가요?"

    허 실장은 사장실 비서인 김유진에게 인사를 건넨 후, 김유진 비서가 사장실에 인터폰 연락을 취한 것을 확인하고는 사장실 문을 두드린다.

    다른 때와는 다르게 허 실장의 노크 소리는 경쾌하게 들리고 있었다.

    똑똑똑.

    가지런한 노크 소리 후, 안에서 들려오는 지정만 사장의 성난 목소리.

    경쾌했던 허 실장의 노크 소리와는 대조적이었다.

    "들어와!!"

    신경질적인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목소리에 순간 움찔하게 된 허 실장.

    '타이밍 안 좋네. 나중에 다시 올까?'

    사소한 고민을 해보지만, 벌써 때늦은 것이었다.

    비서인 유진이 자신의 방문을 이미 알린 상태이지 않던가. 지 사장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한 차례 날 숨을 길게 내쉰 후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곧장 지 사장의 성난 목소리가 폭풍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구단 예산 집행 내용이 이게 뭐야?! 허 실장, 넌 뭐 한 거야?! 거래처들 배불리는 일을 하고 있어? 구단이 이렇게 방만하게 예산을 관리하니까 그동안 선수단 성적이 엉망이었던 거 아냐? 집행된 예산중에 적어도 10, 20%는 아낄 수가 있었는데 이 따위로 예산을 집행한 거야?! 이거 최종 책임자가 누구야?"

    지정만 사장의 성난 목소리에 허 실장은 목을 움츠리게 된다.

    한 해의 예산 계획을 집적 세우는 기획실의 최종 책임자는 다름 아닌 허 실장 본인이었다.

    하지만 허 실장도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

    '계획이나 기획은 우리 기획실에서 세우지만, 집행은 실무 부서에서 하는 거죠. 감사실도 따로 있는데 기획실에서 총괄할 업무는 아닙니다. 라고 말하고 싶다.'

    허 실장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지 사장의 분노를 한 몸에 받으며 말없이 들고 왔던 보고서를 내밀었다.

    "이건 또 뭐야? 이걸로 때려줄까? 뭔데, 이리 내봐."

    화를 내고 있는 지 사장 본인도 허 실장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금세 화를 누그러뜨리고 허 실장이 건넨 보고서에 관심을 내보인다.

    그러나 허 실장이 건넨 보고서가 흔하디흔한 스폰서 프로모션이라는 사실에 눈에 쌍심지를 켜는 지 사장.

    그 모습을 확인한 허 실장이 타이밍을 재고 있다가 얼른 입을 연다.

    '하나, 둘, 셋. 그래. 지금이야! 이 때 말해야 관심을 돌릴 수 있어!'

    그동안 지 사장을 바로 곁에서 보필한 허 실장만이 포착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말을 꺼낸다.

    "백강호 선수 말입니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 저한테 재밌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가장 먼저 '백강호'라는 이름을 밝히고 나선 허 실장의 말에 순간 분노로 폭발하려던 지 사장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화색이 돈다.

    지 사장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뭐?! 백강호 선수? 뭔데? 한 번 말해 봐."

    백강호라는 만능 키에 얼른 반응하고 있는 지 사장의 태도에 허 실장은 몇 차례나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백강호 선수가 이번에 받을 상금 일부를 기부할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걸 구단의 프로모션과 연결해서 사장님께서 추진하고 계시는 부산시 지역 행사와 합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스포츠 용품 기업들의 스폰서 프로모션과 동시에 진행한다면 비용도 크게 들지 않을 겁니다. 실무 부서에서 까먹은 예산을 조금은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요?"

    허 실장의 준비된 말에 지 사장이 '호오, 괜찮은데?'라고 감탄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다.

    지 사장이 고민하는 사이 허 실장은 쐐기를 박는 말로 자신의 말을 마무리 한다.

    "사장님께서 생각하시는 지역과 연계한 프로젝트에 백강호 선수 같은 스타플레이어를 참여 시키면 좋지 않을까요? 어제 물어보니까 백강호 선수도 시즌 경기에 큰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적극적으로 돕고 싶답니다. 이대호 선수가 FA이후에 외국 리그로 가버린 뒤에 우리 자이언츠에 스타플레이어라고 할 만한 선수가 없지 않았습니까? 이참에 구단에서 백강호 선수를 적극적으로 홍보해서 팀의 프랜차이즈로 키우는 것도 좋은 생각으로 보입니다. 사장님께서 생각하시는 프로모션이나 프로젝트와도 일맥상통하고요."

    허 실장은 준비해둔 질서정연한 말을 모두 마친 후, 굳게 입을 다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을 다했으니 이제 지정만 사장의 결정을 기다리면 될 일이다.

    또한 이것으로 혹시나 실무 부서의 잘못된 예산집행 문제가 자신의 부서로 불똥이 튈 염려도 줄일 수 있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지 사장의 결정이 떨어진다.

    "좋아! 우리 백 선수가 이렇게 갸륵한 생각을 해주는데 구단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허 실장. 지금 당장 시작하도록 해! 대신 몇 가지 사항을 추가하도록 하고."

    그 이후 허 실장의 보고는 지정만 사장의 아이디어가 더해져 곧장 강호에게로 전달되게 된다.

    강호는 구단 측에서 준비한 대로 구장에 나와 포토 그래퍼와 함께 수십 장의 화보용 사진을 촬영한 후, 며칠 뒤 뜻밖의 얘기를 전해 듣게 된다.

    "스폰서 계약이요? 저는 아직 신인 선수인데 그런 걸 맺어도 되는 겁니까?"

    홈구장인 사직에서 열리는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전념하고 있던 강호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 자신을 찾은 허동준 기획실장을 대면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허 실장뿐만 아니라 강호를 후원하고 싶어 하는 스포츠 용품 업체 담당자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사장님과 손 감독님의 허가가 모두 떨어진 내용입니다. 백강호 선수 본인의 의사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거예요. 스폰서 계약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신 후에 신중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세요."

    허 실장의 설명 이후, 브랜드만 말하면 누구나 알만한 다국적 기업의 담당자와 부산에 연고를 둔 국내 스포츠 용품 업체들이 차례로 스폰서 쉽에 대한 내용을 설명해 준다.

    그들은 강호와 자이언츠의 이름으로 시작될 프로모션으로 부산시와 인근 경남 권 도시에서 형편이 어려운 유소년 야구팀과 아마추어 야구팀에게 무상으로 야구 용품을 지원하는 프로모션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더불어서 자이언츠 2군 선수들에게 강호의 이름으로 기증 될 글러브와 유니폼, 야구 모자와 헬멧, 배트를 포함하여 그 밖의 사소한 장비까지도 지원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KBO최저연봉도 받지 못하는 육성 선수로 2군을 경험한 강호로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팀 2군 선수들에게 장비 지원이 있을 거라는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 같이 어렵게 2군 생활을 하는 선수가 한, 두 명 만은 아닐 거야. 1군에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 하나 만으로 버티고 있는 2군 선수들에게 이 정도 지원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해.'

    강호는 본인의 2군 생활을 떠올려 보며, 2군에 남아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동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소액을 기부하고 싶다는 회식 자리에서의 발언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올 줄은 미처 알지 못했던 강호.

    또한 다음으로 전개 될 일 역시 미처 알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백강호 선수, 저희 쪽에서 제안하는 AMC(advertisement model contract)계약서 입니다. 원래 야구 선수들이 시즌 중일 때는 계약해 본적이 없는데 자이언츠 구단에서 이렇게 먼저 제안해 주시니까 저희들도 조금 얼떨떨하네요."

    각 업체 담당자들이 내민 계약서를 내려다보던 강호는 곁에 앉아 있던 허 실장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제가 정말 이런 계약을 해도 되는 겁니까?'

    강호는 그런 의미를 담아 허 실장에게 무언의 조언을 요구한다.

    그런데 강호의 눈빛을 잘못 읽은 허 실장은 강호의 조언 요구를 다른 쪽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왜 그러지? 계약금이 적은 건가? 어디보자. 조금 적기는 하네. 백강호 선수가 거절하면 이번 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가는 거야! 안 돼!'

    허 실장은 갑자기 솟구치는 불안감에 강호를 대신해서 입을 연다.

    "프로모션하고 백강호 선수 AMC계약은 별개 아닙니까? 금액이 이 정도 선밖에 못 미치는 건 우리 백 선수를 무시하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이런 계약금 규모면 저희 구단 법무 팀을 불러서 협의를 다시 해봐야겠어요. 너무 적어~"

    급한 마음이 든 허 실장은 본의 아니게 강호의 매니지먼트 역할을 대신하며 휴대폰을 들어 법무 팀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러자 업체 담당자들의 표정이 급변한다.

    그들 역시 계약금의 상한선을 의논하기 위해 해당부서 결정권자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이었다.

    스폰서 프로모션이 협상 테이블로 변질되자 바빠진 사람들 사이에서 덩그라니 놓이게 된 강호.

    잠시 후, 허 실장의 대처에 두 배 가깝게 높아진 계약금을 확인하며 당혹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한다.

    그러면서 허 실장의 얼굴을 살펴본다. 허 실장은 강호를 향해 한 쪽 눈을 찡긋 윙크해 보이며 속내를 전한다.

    '이 정도면 만족하십니까?'

    허 실장은 그렇게 속내를 담아 테이블 아래로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내보인다.

    그의 행동에서 큰 오해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강호, 그러나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다.

    '기부 좀 하려니까, 웬 광고 계약이야? 돈 좀 쓰려고 했더니. 오히려 큰돈이 생겨버렸네. 2억? 정말 그렇게 큰돈을 나한테 준단 말이야?'

    강호는 허 실장의 도움으로 계약서에 싸인을 하면서도 지금의 상황을 믿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통장에 고스란히 찍혀있는 억 단위의 돈을 확인하고는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강호는 단지 그라운드 위에서만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전반적으로 빠르게 달라진 인생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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