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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틀을 깨다
강호는 3회 말이 되어 또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1회 말 상황과 판박이 같은 상황이 강호에게 주어진다.
1번 타자인 유성철이 1회 말과 다를 바 없이 안타로 출루하고, 2번 타자인 전준오의 번트로 2루까지 출루해 1사 주자 2루의 상황.
1회에도 덕 아웃의 지시로 번트 작전이 나왔던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 김민철 대행이 강호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강호가 득점권 상황에서 타점을 올려주길 바라는 김 대행의 바람이 3회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계석 역시 그 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자, 지금 2대 0으로 자이언츠가 앞선 상황에서 또 다시 전준오의 번트가 나옵니다. 1회 말 상황과 데칼코마니 같아요. 1사 주자 2루의 상황이 또 한 번 백강호 타자에게 주어집니다."
오늘의 캐스터인 한명진 캐스터의 상황 설명 후 해설위원 박재헌이 입을 열었다.
그는 해설위원이나 야구 전문가 중에서 강호에게 가장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해설자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래서인지 TV중계로 경기를 시청하는 자이언츠 팬들은 박 위원의 이어질 말을 기대하게 된다.
"1회 말에서 백강호 타자가 우규명 투수의 4구째 포심을 받아쳐서 큼지막한 홈런을 만들었었거든요. 사실 자이언츠 벤치에서는 홈런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홈런을 예상했으면 전준오 선수에게 번트 지시가 없었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백강호 타자의 홈런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타를 치더라도 타점을 올려주기를 기대하는 바람에서 번트 지시가 나온 겁니다."
박 위원은 우선 번트 작전을 낸 자이언츠 덕 아웃의 의도에 대해 먼저 설명한 후 자신의 주장을 밝힌다.
"제가 볼 때는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 너무 소극적인 플레이를 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어차피 백강호 타자에게 의지하는 거라면 아웃카운트 하나를 낭비할 필요 없이 타자들을 믿고 맡겼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에요. 덕 아웃에서 나온 작전이 그 경기에서 코칭스태프의 의지를 나타내는 부분이 되거든요. 최근 들어 자이언츠 타선이 침체되어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선수들을 믿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너무 백강호 타자에게만 의존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아직 어린 백강호 타자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거든요? 자, 타석에 선 백강호 타자 입장에서는 이런 부담을 떨쳐내고 자기 스윙을 가져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박 위원은 강호의 체력관리나 멘탈 보호를 위해서도 강호에게 부담이 되는 작전은 피해야한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현역 시절 강호와 비슷한 데뷔 시즌을 경험했던 박 위원으로서는 지금 강호가 느낄 부담감이나 중압감이 걱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박 위원의 말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강호의 부담감에 대해 걱정이 생기게 된 자이언츠 팬들.
그들의 걱정 어린 시선이 타석으로 향한다.
"진짜 이러다가 백강호도 슬럼프 오는 거 아냐?"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팬 중 한 명이 걱정스레 입을 뗀다.
그러자 그의 곁에서 함께 경기를 보던 친구가 그럴 리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말 같은 소리를 해! 그러면 자이언츠는 아작이야. 백강호 폼 떨어지면 올해도 자이언츠는 8위로 시즌 마감한단 말이야. 재수 없는 소리 작작하라고."
"네 말이 더 재수 없어. 이 자식아. 8등이라니. 임마. 어서 나무 테이블 세 번 쳐. 어서! 취소하라고!"
두 친구가 다투는 사이 이미 타석에 들어선 강호는 우규명의 초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볼."
주심의 볼 판정을 들으며 강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남은 '홈런'아이템은 단 하나야. 조금은 아낄 필요가 있어.'
강호는 속으로 남은 아이템들 중, 일회용 '홈런'아이템의 개수를 헤아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1회 말 상황은 분위기를 자이언츠 쪽으로 가져오기 위해 아이템을 사용해서 때려낸 홈런이었다.
이제 강호에게 남은 '홈런' 아이템은 단 하나. 강호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이 홈런 하나는 아껴두기로 한다.
'이제 타격 아이템에 기대지 않더라도 3할 대 이상의 타율은 가능해졌으니까. 지금 승부는 내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야. 상태 배터리에서 나와의 승부를 피하고 있어. 1회 말에 때린 홈런 때문인지 승부를 쉽게 가져갈 생각은 없어 보이는구나. 혹시라도 카운트를 잡기 위해서 던지는 공만 노리자.'
강호는 우규명이 던진 2구째마저 볼이 되자 이번 타석에서의 전략을 결정짓는다.
배트를 내기에는 지나치게 벗어나는 코스 선택에서 자신을 상대하는 트윈스 배터리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여차하면 거른다는 생각으로 승부를 회피하려는 거야.'
강호는 3구째마저 볼로 선언되자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제 다음 공인 4구는 보나마나 코스를 크게 벗어나는 공이 될 것이었다. 그런 강호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구종: 포심 패스트볼
구속: 142km
142km의 포심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코스에 찍히고 있었다.
강호는 순간 짧은 판단을 마치고 확연하게 볼로 들어오는 공에 배트를 낸다.
따악.
타격음과 함께 강호가 타석을 박차고 1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의 결대로 밀어 친 타구가 1루수 정성혁의 수비를 뚫고 우익 선상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기 코치님은 내가 남들보다 팔, 다리가 길다고 했어. 2, 3센티 정도 차이지만, 그 사소한 차이가 이런 코스의 공도 안타로 때려낼 수 있게 만드는 거야!'
강호는 1루 베이스를 돌며 조금 전, 타격 상황을 복기하고 있었다.
짜릿한 안타였다.
과거 같았으면 엄두도 못 낼 코스지만, 스스로의 팔이 남들에 비해 조금 길다고 생각하니 못 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타구가 2루타 코스로 흐르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망설임 없이 속도를 높인다.
촤하학!
기 코치에게 배운 대로 과격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이 아니라 대각선으로 슬라이딩 해 들어가는 레그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2루 베이스를 터치한다.
그 후 우익수 김용희가 던진 공이 2루에 닿았지만, 강호의 발이 조금 빨랐다.
"세이프!"
2루심의 세이프 판정 이전에 이미 강호의 1타점 적시타를 예상하고 있던 관중석에서는 열화와 같은 환호가 터져 나온다.
"와아아~ 역시 백강호야! 내가 뭐라 그랬어? 이번에도 장타라 그랬지?!"
자이언츠 홈 팬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각자의 목소리로 강호에게 환호를 보내온다.
한편 중계석에서 자이언츠 관중석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게 된 캐스터가 입을 연다.
"백강호 선수, 오늘 출발이 좋습니다. 1회 말 투런 홈런에 이어서 3회에도 적시타를 때려내네요. 박재헌 위원께서 우려하시는 것과는 다른 내용인데요?"
짓궂게 물어오는 한명진 캐스터의 말에 박재헌 위원은 '허허'하고 헛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백강호 선수는 제가 걱정할만한 선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의 2루타로 타율이 4할 7푼 8리까지 올라갔어요. 이러다 다시 5할 타율로 복귀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OPS도 1.604까지 수직상승하네요. 결과적으로 제 걱정은 괜한 것이 된 거고, 자이언츠 김민철 대행의 작전이 맞아 떨어졌다고 봐야겠네요. 나중에 김민철 대행을 만나면 사과라도 드려야겠습니다."
박 위원은 평소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며 강호의 타격을 칭찬했다.
그의 말에 한 캐스터는 '뭘 사과까지 하십니까. 나중에 식사 한 끼 대접하시죠'라고 제안하며 TV로 중계를 보던 자이언츠 팬들을 웃음 짓게 만들었다.
"괜히 걱정했네. 김민철 대행은 그래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인가 보네. 작전 성공률도 높고, 백강호를 다른 포지션이나 타순으로 성급하게 돌리지도 않고 말이야."
"그러게. 포지션하고 타순을 보장받으니까 백강호 타율도 다시 올라가잖아. 나는 조만간에 백강호가 4할 타율에서 내려올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어. 이러다 진짜 4할로 끝나는 건 아니겠지?"
자이언츠 팬들은 강호의 기록에 대한 기대를 내보이며 남은 경기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본다.
따악.
팬들의 기대 속에 4번 타자로 복귀한 황제인이 타구를 외야로 날려 보낸다.
1회 말 강호의 홈런 후에 타석에 들어섰던 제인은 어이없는 스윙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3회 말 공격에는 달랐다.
"돌아, 돌아!"
강호는 홈까지 달릴 것을 지시하는 3루 베이스 코치의 시그널에 외야를 향해 힐끗 시선을 돌린다.
예전 같았으면 베이스 코치의 지시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홈으로 쇄도했겠지만, 이제는 강호에게도 여유가 생겨 있었다.
타구 위치를 파악한 후에 서서히 속도를 줄여나간다.
그런 강호의 행동은 기 코치의 지도로 개선된 부분이었고, 또한 강호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강호가 이제 여유가 좀 생겼네요. 이제야 좀 우리 팀 주전 유격수 같은데요?"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 타격 코치인 정호종이 김민철 대행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김 대행 역시 여유가 느껴지는 강호의 플레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적극적인 모습도 보기 좋지만, 저런 모습도 필요하지. 아무래도 매번 허슬 플레이를 하다보면 부상위험이 높잖아. 팀 훈련할 때 몇 번 당부해도 경기 때마다 과격하게 플레이하는 모습이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생각을 바꾼 모양이야. 강호 본인이나 팀의 입장으로도 잘 된 일이야."
김 대행의 대답이었다.
사실 김민철 대행이 수석 코치이던 시절에 강호의 거친 플레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프리마켓 시스템의 도움으로 부상 걱정이 없어진 강호는 안전한 플레이보다 1군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심했기 때문에 김 수석의 지도에도 쉽사리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지 못했었다.
강호를 보며 유일하게 걱정되던 점을 스스로 개선한 모습에 크게 안도하게 된다.
'그만큼 강호의 멘탈이 성장했다는 거겠지. 더 이상 불안에 쫓기지도 않는다는 얘기고. 빠른 시간 만에 또 다시 성장해주는구나.'
김 대행은 알아서 다음 단계를 밟아가는 강호를 보며 기특함을 느낀다.
팀 타선 대부분이 부진을 겪고 있는 가운데 강호마저도 부진에 빠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마음도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어. 강호는 그냥 신인 선수가 아니라 데뷔 때부터 완성형 타자였는데. 그 사실을 잊고 있었어.'
김 대행은 제인의 안타로 홈을 밟고 덕 아웃으로 들어온 강호를 가장 먼저 반기고 나선다.
"잘했다. 강호! 이제 진짜 우리 팀 주전 유격수 같네!"
김 대행은 정호종 코치가 자신에게 건넨 말을 흉내 내며 강호에게 찬사를 보냈다.
자신을 향한 칭찬의 말에 강호는 여전히 겸손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다.
어느새 강호는 김민철 대행이나 다른 코칭스태프, 또한 선배 선수들과 후배 선수들까지. 덕 아웃에 자리한 모든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선수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리고 덕 아웃뿐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자이언츠의 모든 팬들 역시 백강호라는 선수에게 믿음을 보내오고 있었다.
"백강호 잘 했다!"
자이언츠 덕 아웃까지 홈 팬이 내지른 응원의 목소리가 전달된다.
그 목소리는 강호의 홈런 덕분에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된 골수팬 김진명의 것이었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지 못하는 강호로서는 그저 자신을 향한 팬들의 목소리 중 하나로 여기며 오늘의 플레이를 되새기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성장을 맞이한 강호는 스스로를 옭아매는 틀을 깨부수고, 새로운 모습으로 도약해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6월 초의 어느 날, 시즌 144경기 중 하나의 경기에 불과했지만, 강호는 이날의 경기를 통해 자이언츠를 대표하는 선수로 발돋움해 나간다.
그리고 이날, 강호의 각성으로 인해 그를 주시하는 시선들은 더욱 많아지게 된다.
경기가 자이언츠의 승리로 끝난 후, 강호가 와이번스의 4번 타자 정의준과 함께 홈런 공동 1위로 올라서게 되는 순간, 모든 언론의 관심과 야구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시선이 강호에게로 향한다.
그것의 시발점이 되는 것은 자이언츠의 구단 본부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지! 우리가 일할 타이밍이 왔어! 허 실장! 당장 기사 싣고! 이상현 단장 불러서 방송국에 전화 돌리라고 해! 뭐 하는 거야?”
지정만 사장은 오늘도 구단 사장실에서 자이언츠의 경기를 관람하다 강호가 1회 말 투런 포를 때리는 것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뜬금없이 소리치기 시작한 지 사장의 행동에 순간 곁에 있던 허 실장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다.
“네? 기사요? 어떤 기사를 말씀하시는 건지.”
“어떤 기사라니?! 당연히 백강호의 8개 부문 타격 타이틀에 관한 거지. 지금 때린 홈런으로 백강호가 홈런 공동 1위가 됐잖아! 그럼 타격 전 부분에서 1등이라고! 당연히 우리 구단이 나서서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려야할 거 아냐? 당장 프런트들 싹 다 소집해서 백강호의 이름이 오늘 경기가 끝나는 대로 야구 방송이나 뉴스, 기사에 실릴 수 있도록 일을 하란 말이야!”
지 사장은 구단 수뇌부들을 소집해서라도 강호의 홈런으로 인한 타이틀 경쟁을 이슈화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의 지시에 허 실장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그렇게 하겠습니다’라 대답하며 사장실 밖으로 나선다.
“이럴 때가 바로 우리 프런트들이 일할 때 아니겠어?! 프런트가 괜히 있는 거야? 선수 기록이나 타이틀도 챙겨주지 못할 거면 프런트가 대체 왜 존재하겠어? 이럴 때야 말로 우리가 일할 때야!”
지 사장은 듣는 이도 없는 사장실에서 홀로 소리치며 또 다시 분주하게 움직인다.
열 일 마다하지 않는 지 사장의 열정으로 강호의 타이틀 경쟁 소식은 빠르게 전파되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