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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틀을 깨다
1회 초는 원정 팀인 트윈스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강호는 자신의 수비 위치인 유격수 자리에서 경기 전, 기 코치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 중 하나를 떠올렸다.
"강호 너는 동양인 체구 치고는 팔, 다리가 긴 편이야. 심한 차이는 아닌데. 2, 3센티 정도는 더 길다고 봐야할 거야."
기 코치는 줄자로 강호의 팔, 다리를 직접 측정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가 강호의 팔, 다리 길이까지 측정한 이유는 강호의 신장이 기록된 선수 정보에 비해 조금 더 커져 있었기 때문이다.
187cm. 어느새 강호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1cm의 키가 더 커져 있었다.
"20대 중반이 되어서도 키가 자랄 수도 있어.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보고된 경우가 꽤 있으니까, 이상해할 필요는 없어. 뭐 그렇다고 앞으로 키가 계속 자라지는 않을 거야. 강호 너 같은 경우에는 올해 들어 근육 량이 크게 늘어나고, 신진대사가 촉진된 영향이 클 거야. 키가 자랐다기보다는 약간 굽어 있던 골격이 곧게 펴졌다고 보면 돼."
기 코치는 그런 식으로 강호의 신장 증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사실은 프리마켓 시스템의 도움으로 스탯이 대폭 증가하게 되며 신장까지 증가하게 된 경우였지만, 기 코치에게 그런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원래 내 팔, 다리가 평균에 비해 긴 편은 아니었어. 프리마켓 시스템 적용 후에 신장이 2센티가 자라면서 팔, 다리도 조금은 길어졌다는 뜻인데. 야구를 더 잘하기 위한 신체로 개량이 이루어진 걸로 봐야하나?'
강호는 대답해줄 사람 없는 질문을 속으로 던져보며 피식 웃음 짓는다.
프리마켓 시스템 덕분에 청소년 시절 다 자라지 못한 키까지 다시 얻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체중이 97kg까지 늘어나 있었다.
이제 몸무게가 가벼워서 파워가 부족하다는 불평은 못할 정도가 된 것이다.
'단지 스탯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야구를 잘하기 위한 신체로 최적화가 이루어진다니. 신기한 일이야. 단지 신기해해서만 안 돼. 스탯을 더욱 높이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하고, 또 이렇게 최적화된 몸으로 야구를 잘하기 위한 시도도 있어야겠지.'
생각을 정리하며, 정신을 집중한다.
어느새 트윈스의 1번 타자 김용희가 자신을 향해 타구를 날려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타구가 유격수 방면으로 향합니다.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강호는 메시지가 떠오르는 순간, 좌타자인 김용희가 배트를 휘두르는 모습과 투수인 박세준이 던진 공의 궤적과 코스를 확인한다.
'체인지업! 그리고 김용희 타자의 스윙은 노리고 휘두른 타격이 아니라 컨택을 목적으로 한 스윙이야. 이 공이 내 쪽으로 온다고 해도 강한 타구는 될 수 없을 거야.'
강호는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타구 판단을 끝낸 상태였다.
프리마켓 시스템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 이 정도 타구 판단은 순식간에 끝내는 강호였다.
판단과 동시에 그의 발걸음이 오른쪽으로 향한다.
터업.
타구가 글러브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포구 직전에 바운드가 크게 튀는 까다로운 타구였지만, 타구에 끝까지 시선을 두고 있던 강호는 집중력 있게 타구를 붙잡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가 문제였다.
불규칙 바운드를 잡아내느라 오른쪽으로 기울어버린 강호의 모습이 쓰러지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넘어지더라도 송구를 마치고 넘어져야 해. 이대로 넘어지게 되면 타자 주자는 세이프야!'
강호는 불안정한 자세 속에서도 오른팔을 끌어 당겨 1루를 향해 공을 뿌린다.
그와 동시에 강호의 몸은 오른 쪽으로 기운 자세 그대로 쓰러지는 모습이다.
"엇?!"
근처에 있던 3루수 황제인이 놀랄 정도로 과격한 수비동작이었지만, 강호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동작을 마무리한다.
타악.
송구로 인한 팔의 회전력을 이용해서 몸을 회전시키며 바닥에 낙하한 것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바닥에 쓰러질 때에 어깨나 손목 부상을 염려해서 그냥 등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었다.
시스템의 보호로 부상 염려는 없었지만, 오랜 훈련의 결과가 오히려 과격한 착지동작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강호는 송구 동작과 연결된 낙법으로 부상위험이 크게 줄어든 자세로 바닥에 몸이 닿고 있었다.
그 사이 강호가 던진 공이 1루수 김상훈의 글러브로 빨려든다.
"아웃!"
1루심의 아웃 판정에 자이언츠 홈 팬들이 환호를 보내온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부상을 줄이기 위해 회전력을 이용한 강호의 수비 동작이 꽤나 근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자이언츠 덕 아웃 역시 강호의 수비 동작에 탄성을 내뱉게 된다.
"호오, 강호 녀석 수비가 나날이 발전하는 것 같은데요? 강호는 유격수 수비가 천성인 모양입니다. 저 정도면 내야 안타 코스였는데. 저걸 잡아내네요."
제일 먼저 놀란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수비 코치인 서학수 코치였다.
그는 강호의 2군 시절에 직접 수비를 지도했던 2군 코치였지만, 기존 1군 수비코치였던 박한중이 물러나면서 1군 수비코치로 승격되어 있었다.
서 코치의 입장으로서는 오랜만에 직접 보게 된 강호의 호수비에 다른 코치들보다 더 놀라는 모습이었다.
"수비 코치가 그렇게 놀라면 어떡합니까? 강호 수비는 서 코치님이 직접 지도하신 거잖습니까?"
곁에 있던 이동수 배터리코치가 서 코치의 반응에 웃어 보이며 그렇게 되물었다.
그의 말대로 강호의 수비 실력은 서 코치와 함께 만든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당사자가 다른 코치들보다 놀라는 모습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내가 지도했을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2군에 있을 때는 강호의 수비가 좋기는 해도 투박한 구석이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상당히 세련된 수비를 하고 있어. 사임한 박한중 코치 작품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강호 혼자서 연마한 수비는 아니겠지?'
서 코치는 강호의 지금 수비가 물러난 박한중 전 수비 코치의 지도로 인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박 코치가 중점적으로 지도하는 부분과 지금 강호의 수비가 다른 면이 많았고, 또 자신이 2군에서 직접 지도한 것과도 궤를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야, 대체? 강호의 수비 동작을 개선시킨 사람이?'
서 코치는 의문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본다.
혹시나 강호보다 선배인 베테랑 야수들의 도움을 받은 것인가 싶어 그라운드에 시선을 돌리기도 한다.
그런 서 코치의 행동에 한 쪽 구석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기성태 코치가 웃어 보인다.
'그렇게 둘러 보셔도 못 찾을 겁니다. 지금 강호의 수비 동작은 누가 가르친 게 아니라 강호 스스로 터득한 거니까요. 제가 가르친 주루 플레이 때의 기교나 동작을 강호 본인이 수비 동작에 응용한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가르친 것도 아닌 겁니다.'
기 코치는 서학수 코치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다시 시선을 강호에게로 돌린다.
코치마다 전문 분야가 정해져 있고,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77년생인 기 코치에 비해 서학수 수비 코치가 73년 생으로 4년 선배의 위치에 있다.
괜히 나서서 오해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 서학수 수비 코치도 알게 되겠지만, 나는 강호의 주루 플레이만 교정한 걸로 해야겠어. 차라리 강호의 수비력이 좋아진 게 서학수 수비 코치의 공로로 해주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기 코치는 나중에 있을 상황을 그렇게 정리하기로 하고, 이어진 수비 상황에서도 호수비를 펼치는 강호의 플레이에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응용력이 좋아. 가르치는 내용을 빨리 배우는 건 아니지만, 자기화를 잘 해내고 있어. 저런 수비 동작도 어제 가르친 부분을 일정 부분 적용시킨 결과야.'
기 코치는 트윈스의 3번 타자, 카슨의 라인드라이브 성 타구마저 부드러운 수비 동작으로 손쉽게 처리하는 강호의 모습에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인다.
'강호는 머리가 좋은 녀석이야. 자신이 배운 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선수야.'
기 코치의 생각 속에 두 개의 호수비를 보여준 강호는 자이언츠 선발 투수인 박진웅 투수와 글러브를 마주치며 덕 아웃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강호야, 나이스. 덕분에 1회는 쉽게 갔네."
글러브를 마주치며 박진웅 투수가 건넨 감사의 말에 강호가 진하게 미소 짓는다.
"2회에도 끄떡없습니다."
"크크, 그래. 2회에도 부탁한다."
투수인 진웅과 여담을 나누며 덕 아웃으로 돌아온 강호. 그는 자신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하이파이브를 요구하는 코치들과 선배들 중에 기성태 코치 역시 섞여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 코치만 알아볼 수 있게 작게 윙크해보이며 그와 손바닥을 맞부딪힌다.
짜악.
기 코치 역시 기쁜 마음으로 강호와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말없이 강호의 곁에서 물러난다.
'덕분이에요. 기 코치님. 지금 당장 부상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년 시즌에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니 당장 오늘 경기부터 훈련 상황에서 배운 모든 것들을 시험해 볼 생각입니다.'
그것이 강호의 생각이었다.
강호는 훈련을 통해 배운 것들을 다른 훈련 상황이나 연습 상황이 아니라, 실전 경기에서 활용해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런 강호의 변화를 알아차린 일부 자이언츠 골수팬들은 더욱 화려해진 강호의 플레이에 만족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야~ 조금 전에 백강호 수비 봤어? 나는 무슨 김연아 트리플 러츠하는 줄 알았다니까. 몸을 이렇게~해서 몸을 회전시키면서 착지 하던데?"
1루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자이언츠 골수팬, 김진명은 강호의 1회 초 수비동작을 흉내 내며 친구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자 친구인 오진수가 진명의 말에 오류를 지적하며 대꾸했다.
"트리플 악셀이겠지. 트리플 러츠는 아사다 마오고.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지."
"지금 트리플 악셀이고, 러츠로 간에 그게 중요해? 백강호 수비 못 봤어? 이제 백강호가 메이저리그 수비를 하고 있다고. 저 정도 수비에 저 정도 타격이면 FA때 몸값이 얼만 줄 알아? 못해도 100억은 될 거야!"
진명은 친구인 진수의 지적에 강호의 몸값을 거론하는 말로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
그런 진명의 목소리는 꽤나 커서 주변 관중들에게도 모두 들리고 있다.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강호의 FA를 거론하고 나선 진명의 말에 주변 관중들이 강호를 주제로 한 이야기꽃을 피운다.
"하긴 저 아저씨 말이 맞지. 저런 수비에 4할 대 타격인데. 시즌이 끝날 때 타율이 3할대로 떨어진다고 봐도 30-30이 가능한 호타준족의 타자잖아. FA로 풀리면 못해도 100억은 받을 수 있겠네."
"100억이 뭐야? 메이저리그에서 FA전에 포스팅 신청할 걸? 포지션이 유격수잖아. 다른 포지션의 30-30하고, 저런 수비가 가능한 유격수 자리에서 30-30은 차원이 다른 거야. 나는 백강호가 FA전에 무조건 메이저로 간다고 본다."
"하긴, 최상급 수비가 되는 유격수가 타격까지 잘 하는데 메이저로 쉽게 갈 수도 있겠네."
진명은 자신의 말로 시작된 주변 관중들의 갑론을박에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봐? 저 모습들 보여? 내가 한 말이 이렇게 영향력 있는 말이라는 뜻이야. 너는 그것도 모르고 내 말에 토 달기 바쁘지? 이 어리석은 인간아."
진수는 자신에게 콧대를 세우고 있는 진명의 행동에 헛웃음을 짓는다.
"허허, 입 다물고 경기나 보자.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백강호 선수가 다음 타자야. 그렇게 백강호를 잘 알면 이번 타석에서 백강호가 어떻게 할 지도 한 번 맞춰봐."
진명은 자신에게 도발해 오는 친구 오진수의 말에 순간 오기가 생겨난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모든 정보들을 끌어 모아 예측해 보고 있었다.
"우리 강호 선수가 이글스 전에서 9타수 6안타, 5홈런을 때렸거든. 지금 홈런 22개로 홈런 2위까지 올랐잖아.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홈런을 의식할 수밖에 없거든. 하나만 더 때리면 홈런 1위인 정의준하고 동률이잖아? 내가 볼 때는 스윙이 조금 커질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둘 중 하나지. 유인구에 딸려 나오는 삼진을 당하거나, 아니면 외야로 타구를 보내거나."
진명은 그렇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며 주변의 반응을 살핀다.
언제부턴가 진명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주변의 관중들은 지금 역시도 귀를 곤두세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명은 그 모습에서 또 한 번 뿌듯함을 느끼고는 말을 이어나간다.
"그런데 우리 백강호 선수가 헛스윙 삼진 비율이 엄청나게 낮은 타자란 말이야. BB/K비율도 2가 넘는다고. 한 마디로 선구안이 좋고 장타력이 있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마음먹고 휘두르면 웬만한 속구 타이밍에도 정타가 나오는 거고. 강호 선수 장타력을 생각했을 때 홈런이 나올 확률도 높다는 뜻이야. 트윈스 선발 투수인 우규명 투수가 속구 구속이 빠른 편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속구만 노리고 치면 홈런이 나올...!"
따악!
갑작스런 타격음에 진명의 말은 끝맺음을 짓지 못했다.
1사 주자 2루 상황에서 상대 투수 우규명 선수의 포심 패스트볼을 받아친 타구가 좌중간 높은 곳을 향해 뻗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아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주변 관중들과 마찬가지로 말을 마치지 못한 진명 역시 강호의 홈런에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주변 관중들과 얼싸안고 자신의 예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을 자축하는 모습이다.
그런 진명에게 근처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들이 말을 건다.
"와아~ 아저씨 야구 진짜 잘 아시네요. 무슨 해설자 같은 거예요?"
여자들은 귀엽게 웃는 얼굴로 진명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마시고 있던 맥주를 진명에게 한 잔 따라주고 있었다.
주당인 진명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예쁜 아가씨들이 따라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아, 아가씨들이 세분이서 야구 보러 온 모양이네? 내가 옆에서 야구 좀 가르쳐 드릴까요?"
진명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으며 여자들에게 다가서자 곁에서 진명에게 사사건건 시비걸기 바빴던 친구 오진수 역시 잔뜩 기대어린 얼굴로 진명의 곁에 바짝 다가붙는다.
진명과 진수, 이제 30대 중반이 되어가는 두 사람은 여자에 목말라 있는 총각들이었던 것이다.
"자자, 먼저 맥주 한 잔 받으시고요. 나만 마시면 심심하잖아요. 내가 한 잔 드릴게요."
진명은 곁에 앉은 여자의 손에 있는 맥주병을 넘겨받으며 여자들에게 술을 건넨다.
그렇게 강호의 홈런 하나가 자이언츠 관중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가교 역할을 하는 동안에도 경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상황은 이제 3회 말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