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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의 추억
이글스와의 4차전 경기, 5월의 마지막 경기였던 이 경기는 강민수가 때린 만루홈런의 선취점을 끝까지 지켜내며 자이언츠의 6대 2 승리로 끝이 났다.
이로서 팀 전적은 22승 28패가 되며 중위권 도약을 위한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5월 31일의 경기는 외국인 선수 웨이버 공시와 코치진의 인사이동 문제로 하마터면 와해될 뻔했던 선수단 분위기를 단 번에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경기로 기억된다.
언론에서도 웨이버 공시와 코칭스태프의 인사이동 문제를 거론하면서 캡틴 강민수가 때려낸 만루 홈런으로 자이언츠에 감돌던 불안요소가 사라졌음을 대대적으로 알린다.
그런 언론의 뒤에는 부지런히 제 일을 다 한 자이언츠 지정만 사장과 수뇌부들이 있었다.
"일해라, 일! 이럴 때 일해야지 언제 일하겠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언론을 이용할 줄도 알아야 돼. 마침 강민수가 만루 홈런을 때려주잖아. 이런 걸 기사화하고, 방송사에 얘기해서 부각을 더 시키란 말이야. 그래야지 팬들도 '아~자이언츠가 잘 하고 있구나'하고 안심할 거 아니야? 그리고 나한테 똥 대가리라는 댓글이 안 달릴 거 아냐? 안 그래, 이 똥 대가리들아!"
지정만 사장은 그렇게 수뇌부들에게 일갈하며 구단 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해내고 있었다.
그의 지휘아래 열심히 일을 시작한 수뇌부들은 오늘도 자정이 지날 때까지 퇴근도 미룬 채 각 언론사들에게 보도 자료를 보내는 것과 함께, 구단에 유리한 방송을 내보내기 위해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한 편 선수단은 6대 2 승리라는 좋은 기억을 안은 채 숙소로 정해진 유성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승리를 따낸 선수단은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많은 대화가 오고가고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소란스럽게 말을 꺼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문표였다.
"아아,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거야. 이 최문표가 1안타라니. 못해도 멀티 히트는 때려 줬어야하는 건데. 아쉬워. 캡틴도 만루 홈런을 때려내고, 강호 너도 타점을 기록했는데 나도 홈런 하나 정도는 쳤어야 했던 거야."
자신의 백 팩을 걸쳐 메고 숙소 방으로 향하던 강호는 곁에서 시종일관 떠들고 있는 문표의 말에 결국 대꾸를 하게 된다.
문표의 말에 대꾸를 시작하면 그의 페이스에 말려든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속상하다는 듯이 말하는 문표의 말투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표가 바라는 내용의 말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치시지 그러셨어요? 오늘 스윙하던 거 보니까 작정하셨던데요. 저한테 홈런 스윙한다고 타박하셔 놓고는 본인이 홈런 스윙을 하고 그러세요?"
자신을 타박하는 강호의 말에 문표가 움찔하며 이내 특유의 너스레로 대답한다.
"아하하, 내가 강호 후배는 못 속이겠네. 강호 후배가 20홈런을 때린다니까 나도 욕심이 좀 나더라도. 그래도 올해가 프로 15년차인데 20홈런 정도는 때려줘야지 않겠어? 대체 20홈런을 언제 기록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야."
"20홈런을 때린 적은 있으시고요. 없으니까 기억 못 하시는 거 아니에요?"
강호의 되물음에 순간 문표가 발끈해서 소리친다.
"무슨 소리야 지금? 내가 2008년, 2014년에 20홈런 때린 걸 모르는 거야? 15년차 선배의 기록을 무시하는 거야, 지금?"
발끈하며 대답하는 문표의 되물음에 강호가 피식 웃어 보인다.
"기억 잘 하시네요. 좀 전에는 기억 못 하신다면서요? 그 정도면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네요."
"뭐? 하하. 또 들켰네. 사실 나 내 기록은 다 기억하고 있어. 다른 사람 기록은 다 잊어도 내 건 잊으면 안 되는 거야."
문표는 그렇게 대답하며 또 다시 본인의 야구 강론을 펼쳐 보인다.
그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숙소 방으로 돌아온 강호.
언제 따라왔는지 숙소 문을 열고 있는 강호의 뒤로 대우가 따라붙는다.
"너 언제 온 거야?"
갑작스레 나타난 대우를 향해 묻자, 그가 씨익 하고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선배님 뒤에 있었는데요. 문표 선배가 08년, 14년에 20홈런 때렸다는 것도 다 들었습니다. 제가 안 보이시던가요?"
강호는 장난스럽게 말해오는 대우를 향해 '응, 너 잘 안보여.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평소에도 잘 안보여'라고 답해주며 숙소 방문을 열었다.
그 후 다시 시간은 흘러 하루의 시간이 지났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난 강호는 간단한 스트레칭과 세안 후에 정해진 일정대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 강호의 숙소 방으로 시간이 지나자 친분을 쌓은 선수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대우야, 너클볼 한 번 맞춰봐. 어제는 정말 최악이었어. 너클볼에 타이밍을 맞출 수가 없더라니까. VR안경으로 너클볼을 많이 봐둬야겠어."
대우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어느새 주전 우익수로 자리 잡게 된 유성철이었다.
그는 외국인 선수 두 명이 웨이버 공시되며 가장 큰 반사이익을 얻고 있는 선수 중에 한 명이었다.
주전 우익수로 자리 잡은 것은 물론이고, 타격에서도 2할 9푼 대의 준수한 모습을 보이며, 빠른 발을 이용한 주루 플레이와 수비 능력에도 합격점을 받아 어느새 팀의 2번 타순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 장타력이었는데 장타력도 5할 5푼은 넘기고 있어서 크게 나쁘다는 평가는 아니었다.
"선배님. 너클볼은 어제 공부하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제 한동안은 배현수 투수 상대할 일도 없잖아요. 다른 팀에 너클볼러가 있는 것도 아닌데요."
증강현실 훈련 프로그램에 너클볼 입력을 요구하는 성철의 말에 대우가 반박하고 나선다.
그의 말에 곁에 앉은 문표가 '맞아, 맞아'하며 대우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대우 말이 맞네. 뭐 하러 너클볼을 공부해? 하려면 어제 했어야지. 오늘 이글스 선발은 이월형이잖아. 차라리 이월형이 던지는 체인지업이나 커브를 미리 공부하는 게 좋지 않아?"
문표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어느새 강호의 주도하에 시작된 훈련 스케줄을 코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앗! 내가 지금 무슨 짓을?'이라고 말하며 얼른 태도를 바꾼다.
"이 재미없는 후배 놈들아! 내가 왜 숙소 방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원래 경기 전에는 푹 쉬는 거야! 그것도 몰라? 이렇게 공부하고 훈련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이러다가 여름 되면 죄다 퍼져버릴 걸. 그러니까 훈련 그만하고 나랑 놀아달라고!"
너무 훈련에만 매진하는 선수들의 행태에 문표가 결국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런 문표의 말에 대꾸하는 것은 강호나 대우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연장자인 박상현 투수였다.
"문표, 이리 와서 나랑 놀아. 내가 놀아줄게."
최고참 투수 박상현의 말에 문표가 '아,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혀를 날름 내민다.
"선배님이 놀아주신다고요? 말씀만 들어도 재미없이 느껴지는데요. 뭐하고 노시렵니까? 윷놀이나 제기차기라면 사양입니다."
문표는 상현이 나이가 들었다는 점을 장난스럽게 지적하며 대꾸했다.
그의 말에 상현은 '허허, 그러다 맞는 수가 있어'라고 말하며 손가락을 까닥까닥 해 보인다.
그 행동에 문표는 별 수 없이 상현의 곁으로 다가가게 된다.
"이것봐. 예쁘지? 내 딸이야. 나 닮아서 예쁘지 않아?"
상현이 문표를 불러 한 행동은 자신이 부적처럼 들고 다니는 가족사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큰 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고 있는 상현의 말에 문표는 이렇게 대꾸하고 있었다.
"선배님 닮아서 별로 안 예쁜데요. 안타깝네요. 형수님을 닮았어야 하는 건데. 형수님을 닮았으면...악!"
결국 문표는 박상현 투수에게 꿀밤을 맞고 나서야 '장난이었어요. 완전 예쁩니다. 이 정도면 걸 그룹 시켜도 되겠어요'라고 자신의 말을 정정한다.
그 때 한 쪽에서 두 사람의 행태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가 입을 연다.
그는 최근 들어 연애를 시작한 김상훈 1루수였다.
"부럽네요. 저도 그런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상훈의 말에 문표가 피식 웃으며 되묻는다.
"그 전에 결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냐? 상훈이 너 아직 미혼이잖아. 연애 시작했다고 벌써 결혼 생각을 하는 거야? 결혼 한 번 해봐. 미혼이었다는 게 행복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
상훈을 타박하던 문표의 말에 곁에 있던 박상현 투수가 다시 그의 머리에 꿀밤을 때린다.
"그러는 문표 너도 결혼 아직 안했잖아. 뭐 해본 거처럼 말을 하는 거야. 결혼 해봐. 생각보다 나쁘지 않으니까."
박상현 투수는 그렇게 결혼 전도사가 되어 두 사람에게 자신의 가족사진을 보여준다.
어느새 박상현 투수의 양 옆에는 문표와 상훈이 자리 잡아 그의 가족사진을 보고 있었다.
"상현 선배님도 그렇게 가족사진 가지고 다니시네요. 저도 지갑에 가족사진 넣고 다닙니다!"
그 때 대우가 자신의 지갑 속에 고이 들어있던 가족사진을 꺼내든다.
사진 속에는 대우와 비슷한 인상의 중년 신사와 인상이 고운 중년 여성, 그리고 대우의 모습이 화목하게 담겨 있었다.
"..."
어느새 훈련을 멈춘 채 네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강호. 그는 대우가 꺼낸 사진을 바라보더니 '잠시 나갔다올게'라고 말하며 숙소 방을 벗어난다.
"선배님, 어디 가십니까? 저도 같이...!"
밖으로 나서는 강호를 따라 나서려던 대우. 문표는 그런 대우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없이 고개를 내젓는다.
강호의 모습이 숙소 방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이야기를 꺼낸다.
"뭐하는 거야? 강호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잖아. 어딜 따라나선다고? 그냥 혼자 있게 내버려 둬."
문표는 대우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며 그렇게 꾸짖었다.
이미 2군에서 강호의 가정사에 대해 알게 된 문표는 지금 강호가 느낄 감정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대우 역시 강호의 가정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차'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실책을 나무라게 된다.
한편 숙소 방을 벗어난 강호는 호텔 로비에 나와 주변을 돌아본다.
주변에 자신을 제외한 사람은 호텔 직원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강호가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가족, 가족이라. 내 가족은 형 하나만 생각하고 살았었는데.'
강호는 가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 형, 강수의 얼굴을 그려보며 지갑 속에 들어있는 사진 한 장을 꺼내든다.
그 사진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큰 형인 강수, 그리고 강호. 또 한 명, 앳된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3남매와 함께 찍은 사진은 이제는 강호에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아픈 추억이 되어 지갑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진을 바라보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잘 지내고 있겠지?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너는 나만큼이나 의지가 강한 녀석이니까. 이곳이 아니더라도,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라도 잘 이겨낼 거라 믿는다. 진주야.'
강호는 애써 가슴 속에 묻고 있던 동생의 이름을 지갑 속 사진과 함께 꺼내보며 과거를 회상해본다.
지나간 과거가 너무도 아파서 잊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왔었다.
어쩌면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더욱 앞만 보고 달려왔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면 잊어질 줄 알았기에, 바쁘게 살다보면 자연스레 잊혀질 줄 알았던 기억은 준비하지 않은 시간에 찾아와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괜찮아 질 줄 알았다. 원하는 걸 이루면 모두 괜찮아질 줄 알았어!'
강호는 가슴을 후벼 파는 과거의 기억에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1군 무대에서 팀의 간판타자로 활약하게 된 강호.
조금씩 막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며 한동안 회상에 잠긴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다잡고 발걸음을 돌린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추억이라는 단어로 나약해질 때가 아니야. 내 목표는 아직 달성된 게 아니잖아.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야. 내가 가야할 곳은 아직 더 멀리 있어!'
강호는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며 지갑 속으로 사진을 다시 집어넣었다.
갑작스레 자신을 뒤흔든 과거의 기억을 지갑 속으로 돌려놓으며 자칫 아픈 기억으로 흔들릴 뻔했던 마음 역시 추스른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숙소 방으로 돌아간 강호, 그런 강호에게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대해주는 선, 후배 선수들.
그들의 시간은 또 다시 흘러 이글스와의 5차전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