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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의 바람
강호를 포함한 자이언츠 타선의 뜨거운 타격으로 자이언츠 원정 팬들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런 팬들의 환호는 잠시 후가 되자, 걱정으로 뒤바뀌게 된다.
팀이 6대 3으로 앞선 6회 말의 상황에서 선발 투수인 박진웅이 승계 주자 두 명을 남겨둔 채 마운드를 내려가자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역전당하는 건 아니겠지?"
"아, 나는 벌써부터 불안해. 요즘 자이언츠 불펜이 좀 불안해야지. 권대우나 박상현 말고는 믿을만한 불펜 투수들이 없어. 요즘 가진성도 불안하고, 사준식이나 김영명도 별로잖아."
"그래도 표성태는 괜찮은 것 같던데. 시나리오 쓰던 홍선빈은 2군으로 내려갔잖아."
"그러면 뭐해? 홍성빈, 지터 내리고 누구 올린 줄 알아? 윤길준하고 손명학을 올렸어. 이제 자이언츠 불펜도 세대교체 되나 했더니 아직도 불안한 노땅들한테 의존해야 되고 말이야. 문제야, 문제."
팬들은 박진웅 이후에 오를 불펜들이 팀이 앞서고 있는 상황을 망쳐버리지는 않을까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마운드에 오른 투수가 2군에서 올라온 윤길준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난의 말을 쏟아내게 된다.
"그럼 그렇지. 노땅 투수들을 사랑하는 자이언츠가 웬일로 젊은 투수들을 쓰나 했다. 김민철 대행도 별 수 없네. 윤길준이 뭐 대단할 거 있다고 1군으로 올리는 거야. 그리고 이런 위기 상황에서 올릴 투수가 그렇게 없나? 권대우 있잖아."
"권대우는 안 돼. 요즘 공을 너무 많이 던졌어. 혹시 알아? 윤길준이 전성기 시절처럼 던져줄 지?"
계투로 마운드에 오른 투수가 윤길준 투수라는 사실에 팬들이 각자의 의견으로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는 사이, 윤길준의 연습구를 자신의 유격수 자리에서 확인한 강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길준 선배의 제구력은 문제가 없어. 민수 선배가 미트를 대는 대로 비슷한 코스로 집어넣고 있으니까. 문제는 구위야. 길준 선배가 2군으로 내려간 이유는 제구가 안 되서가 아니라 볼 끝에 힘이 빠져서니까. 과연 2군에서 구위를 얼마나 회복했을까?'
강호는 기대어린 눈빛으로 마운드를 바라본다.
만약 길준의 구위가 살아났다면, 대우와 상현을 제외한 모든 투수들이 부진을 겪고 있는 불펜 상황에 숨통을 트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팀의 입장으로는 한 명의 불펜 투수도 아쉬운 형편이다.
하지만 연습구를 마치고, 포수 미트에 던져진 길준의 초구에 미간을 좁히게 된다.
탁.
포수인 민수의 미트에 닿는 공의 무게감이 약해 보였다.
소리에서 느껴지는 구위도 가벼웠고, 상대 타자인 김정훈 타자가 충분히 해볼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전히 가벼워. 길준 선배의 구위가 회복된 게 아니구나. 그런데 손 감독님께서는 길준 선배를 왜 1군으로 올리신 거지? 1군에서의 콜 업 요청이 있어도 준비가 안 된 선수는 1군으로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 손 감독님의 철학이실 텐데.'
강호는 스트라이크가 되긴 했지만 가벼워 보이는 길준의 초구에 의문을 품게 된다.
강호가 알고 있는 손 감독은 준비가 안 된 선수를 1군으로 올릴 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길준이 던진 초구는 그런 믿음을 깨뜨리는 공이었다.
강호로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길준의 초구를 확인한 자이언츠의 덕 아웃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길준이의 공이 가벼운데요? 저러다가 또 점수를 쉽게 내주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코칭스태프 중 가장 먼저 불안감을 얘기하는 사람은 박한중 수비코치였다.
한 때 한 감독 계 코치로 분류되던 박 코치는 길준의 투구 내용뿐 아니라 최근 자신의 코치 생활 존속에도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감독이 사임을 하면 파벌에 속한 코치들도 따라서 사임하는 것이 업계의 관례였다.
그런데 한 감독이 아무런 사전 교감 없이 자진사퇴해 버리자 남아있는 몇몇 한 감독 계 코치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박한중 코치의 말에 대답하는 안준영 주루코치도 마찬가지였다.
"김 대행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한 감독님이 2군으로 내린 길준이나 명학이를 1군으로 콜 업 시켰을 때는 나름대로 계획이 있어야하는 거 아닙니까?"
안 코치는 박 코치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김 대행의 선수기용을 비난한다.
그런 두 사람의 우려 속에 김민철 대행이 곁에 있는 여민석 코치와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볼 끝이 너무 가벼운데요? 차라리 다른 상황에서 시험 기용하는 게 낮지 않겠습니까?"
투수 코치인 여 코치가 묻고 있었다.
길준을 위기 상황에 등판시킨 것은 투수 코치인 여민석의 의견이 아니라 감독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김민철 대행의 뜻이었다.
경기 전 길준의 구위를 체크해 본 여 코치의 불안감은 당연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김 대행은 여 코치의 물음에 팔짱을 낀 굳건한 모습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한 번 지켜보자고. 볼 끝이 가볍다고 해서 실투만 하는 것도 아니고, 볼 끝이 좋다고 호투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김 대행의 단호한 태도에 여 코치가 한 발짝 물러서게 된다.
여 코치는 김 대행의 단호한 모습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2군의 손 감독님께 길준이에 대한 언질을 받으신 게 있는 모양이구나. 일단 나도 지켜보자.'
여 코치는 자신이 모르는 김 대행과 손 감독과의 사전교감을 짐작하며 마운드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특이사항이라고 할 만 한 건 길준이가 다시 포크볼을 사용한다는 것 외에는 없었는데.'
여 코치가 확인한 길준의 특이점은 예전에 잠시 사용하다가 최근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포크볼을 다시 사용한다는 점 외에 없었다.
그래서 2군으로 내려갔었던 길준이 손 감독의 조련 하에 어떻게 달라진 투구를 할지 궁금해진다.
그런 여 코치의 궁금증 속에 길준의 2구가 포수 미트를 향했다.
따악.
길준이 던진 2구는 파울이 되고 있었다.
몸 쪽을 파고드는 포심에 타자인 김정훈이 순간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 관중석으로 향하는 파울이 되고 만 것이다.
"아아~ 아깝네."
파울을 때린 후 타석에서 잠시 물러난 정훈은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다시 타석에 선다.
파울로 때려내긴 했지만, 공이 가벼워서 제대로만 맞힌다면 담장을 넘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올 시즌에 기록한 홈런이 두 개밖에 없으니까. 다시 때릴 때도 됐지. 3구째는 유인구를 던질 확률이 높으니까 4구째나 5구째에 승부를 보자.'
정훈은 전략을 수정하며 다시 타격 자세를 취한다.
그런 정훈의 예상대로 3구째는 자신의 배트를 끌어 내려는 체인지업이었다.
"볼."
주심의 볼 판정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정훈이 이어진 4구 째 볼 역시 골라내며 자신의 예측대로 승부를 가져간다.
'이제 2볼 2스트라이크야. 볼 카운트를 밀리고 싶지 않으면 이쯤에서 결정구를 던지겠지. 아마도 포심이나 빠른 변화구를 던질 확률이 높아. 지금 던지는 공을 노리고 휘두르자!'
계산을 끝낸 정훈은 이어진 길준의 5구가 스트라이크 존을 파고드는 포심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곧장 배트를 휘둘렀다.
'됐다!'
속으로 장타를 직감한 정훈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몇 초 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부웅!
배트가 허공을 헛치자 타자인 김정훈은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된다.
'분명 포심 궤적이었는데?'
갑작스레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공에 정훈은 한동안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주심의 지시를 받은 후에야 타석에서 물러나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유격수 자리에서 모두 지켜본 강호는 김정훈 타자를 돌려세운 길준의 결정구에 감탄하고 있었다.
'포크볼이었어. 그런데 무브먼트가 엄청나다. 포크볼이 어떻게 저런 횡 이동을 할 수 있는 거지? 슬라이더 정도는 아니지만, 웬만한 투심 궤적보다는 횡 이동 폭이 컸어.'
강호는 길준이 잡아낸 삼진으로 아웃카운트가 무사에서 1아웃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마운드 위의 승부에 정신을 집중한다.
다음으로 타석에 서는 라이온즈의 타자는 포수인 7번 타자 이치영이었다.
그 역시도 김정훈 타자를 돌려세운 포크볼을 목격한 후라 긴장된 표정으로 타석으로 들어서는 모습이다.
'포크볼! 윤길준 투수가 포크볼을 결정구로 던지고 있어. 떨어지는 공은 참아내도록 하자.'
그렇게 마음먹으며 타석에 들어선 이치영 타자.
그러나 그의 타격 계획은 산산이 깨어지고 만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주심의 삼진 판정에 허무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이치영의 얼굴에서 지나간 타석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홈플레이트 전까지는 포심 궤적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아. 홈플레이트 직전에야 횡 이동하며 가라앉는 포크볼을 무슨 수로 골라낸단 말이야?'
치영은 길준이 던진 포크볼이 과거의 그가 던지던 포크볼과는 심한 격차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타석에서 물러선다.
연이어 두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길준.
그는 아무런 감정 동요 없는 얼굴로 다음 타자가 타석에 오르기를 기다린다.
'길준 선배가 포크볼을 컨트롤하고 있어! 포크볼은 제구가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인데. 검지와 중지를 넓게 벌리는 그립 때문에 제구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이 포크볼이 가진 최대 단점이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꽂히는 스플린터와 홈플레이트로 가라앉는 포크볼, 포크볼이라는 건 결국 이 두 가지 내용으로 상대 타자를 속이는 구종. 그런데 길준 선배가 그런 상식을 깨고 포크볼을 제구하고 있어. 9분할 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4분할 정도로는 제구가 가능한 것 같은데.'
길준의 투구 내용을 등 뒤에서 지켜본 강호의 판단이었다.
강호는 제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포크볼을 길준이 컨트롤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다음 타자로 타석에 오른 타자마저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모습에 전율하게 된다.
3타자 연속 삼진이었다.
조금은 가벼운 볼 끝으로 선수단을 불안하게 만들던 길준이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부활의 신호탄을 쏘고 있었던 것이다.
중계를 하는 캐스터의 입장에서는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채수호 삼진! 오랜만에 불펜 등판한 윤길준 선수가 자이언츠의 위기 상황을 완벽하게 막아냅니다! 그리고 이 투구로 윤길준은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합니다!"
권 캐스터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올해로 10년 차가 되는 프로 캐스터인 권성호가 흥분을 금치 못할 정도로 길준의 투구는 인상적이었다.
곁에 앉은 조성한 위원도 연신 '대단합니다'라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권 캐스터의 말에 동감하는 모습이다.
두 사람의 해설 후 중계 화면이 광고 화면으로 전환되는 사이, 당당한 걸음으로 덕 아웃을 향하는 윤길준 투수.
그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다름 아닌 문표였다.
"나이스, 길준이 형! 포크볼이 2군에서 던지던 것보다 더 잘 먹히네요. 마구 같습니다."
반쯤은 진심이 담긴 문표의 장난스러운 말에 길준은 피식 웃으면서 문표가 내민 손뼉을 마주친다.
무사 1, 3루의 위기 상황을 완전히 지워버린 투수치고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그럼, 내가 이 나이에 피 터지게 연습했는데 이 정도도 못 막으면 되겠어? 이것도 못 막을 거면 끼니도 걸러 가면서 구종을 연마한 보람이 없지."
길준의 대답에 문표가 더욱 진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길준이 형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명학 선배는 장난 아니겠는데요? 기대됩니다."
문표는 불펜에서 몸을 풀기 시작한 손명학 투수를 거론하며 길준과의 대화를 마무리한다.
그런 그에게 묘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호오~ 우리 강호 후배 아니야? 그렇게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한테 오는 이유가 뭐야? 뭐 궁금한 거라도 있어?"
문표의 장난스런 말투에 강호는 피식 웃어 보인다.
이미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상태여서 문표가 과장되게 말하는 것처럼 죽을 정도로 궁금한 것은 없었다.
"조종훈 코치님에게 배운 포크볼 맞지요? 윤길준 선배가 던지는 포크볼 말입니다."
조종훈 3군 코치를 거론하고 있는 강호의 말에 문표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사라진다.
그리고는 강호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묻는 문표.
"어떻게 알았어? 길준 선배나 명학 선배가 알려준 거야?"
"굳이 알려줘야 아는 겁니까? 우리 팀에서 저 정도 포크볼을 가진 사람이 누가 또 있겠습니까? 윤길준 선배하고 손명학 선배가 2군에서 콜 업 될 수 있었던 건 저 포크볼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포크볼 연마를 지시한 사람은 손 감독님이고요."
강호는 유격수 수비 위치에서 자신이 추론했던 내용을 문표를 통해 확인해 본다.
과연 자신의 추론이 맞았는지 문표는 뜨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야? 어떻게 안 거야? 누가 알려줬어? 혹시 손 감독님이 개인적으로 전화하신 거야?"
되물어 오는 문표의 말에서 자신의 가정이 모두 맞았다는 점을 확인한 강호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역시, 김민철 대행과 손 감독님 사이에는 긍정적인 연결 고리가 있었어. 김 대행님이 어려운 팀 상황 속에서도 여유를 보인 이유가 거기에 있었구나.'
강호는 오늘 경기 전에 있었던 김민철 대행의 여유로운 모습이 어디에서 근원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김민철 대행의 뒷배가 되는 사람은 다름 아닌 2군 사령탑인 손성조 감독이었던 것이다.
강호는 2군에서 지금의 경기를 관전하고 있을 손 감독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속으로 그를 향한 질문을 던져본다.
'손 감독님, 당신의 능력은 어디까지인 겁니까?'
강호가 본 손성조 감독은 단지 2군 감독으로만 지내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역량 있는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를 떠올릴 때마다 항상 묻고 싶었던 단 하나의 질문을 속으로 던지게 된다.
'언제까지 2군에만 계실 겁니까?'
강호는 한 감독이 사퇴한 빈자리를 손성조 2군 감독이 대신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김민철 대행도 좋은 지도자이긴 하지만 손성조 감독에 비견될 수는 없었다.
'손 감독님, 언제가 되었든 당신이 총사령탑으로 계시는 팀의 4번 타자로 뛰었으면 합니다.'
강호는 손 감독에게 전하지 못한 바람을 마음속으로 갈무리하며, 타석에 올라설 준비를 갖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