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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의 바람
김민철 대행은 28일 화요일 경기에 앞서 선수단 모두를 불러보아 하나의 의견을 전달하고 있었다.
"중위권 도약을 위해서는 팀 전력을 짜낼 필요도 있지만, 나는 무리해서 선수단을 운용할 생각이 없다. 오늘부터 주전 선수들의 체력관리를 시작할 테니까 라인업에서 빠지게 될 선수들은 불안해 할 필요 없어. 미리 말해두는데 하루, 이틀 라인업에서 빠진다고 해서 주전 경쟁에서 제외되는 건 아니니까. 체력 안배를 위해서 중석이, 상훈이, 훈이는 오늘 경기 라인업에서 빠졌어. 내일 경기에서는 이름을 올릴 테니까 오늘은 벤치에서 쉬도록 해!"
김 대행은 체력 안배를 위해 이제부터 주전 급 선수들에게 휴식을 부여할 거라는 계획을 밝힌다.
선수들에게 말을 하지 않고 휴식을 부여할 수도 있었지만, 감독이 직접 말하는 것과 아무것도 모른 채 라인업에서 빠지는 것은 선수들의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자신이 라인업에서 왜 제외됐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쉴 수가 있겠는가.
사소할 수도 있는 김 대행의 변화는 그동안 한 감독 체제에서 심리적인 불안감에 쫓기던 선수들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경기가 시작된 후에 선수들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오늘은 편히 쉬겠네. 훈이 너도 좀 편하게 쉬어. 우리 휴식 멤버들은 특별관리가 필요한 거라고."
편안한 자세로 벤치에 앉아있던 채중석 선수는 조금은 떨어져 앉아있던 2루수 최훈을 향해 손짓해 보인다.
1회 초 공격이 시작된 상태였지만, 오늘 경기에서 휴식를 보장받은 중석은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역시나 김 대행에게 휴식을 보장받은 최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석 선배님, 편하신 모양입니다. 저는 이렇게 쉬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감독님이 쉬라고 할 때 편히 쉬어야지. 그게 우리 프로 선수의 사명 아니겠어? 경기할 때 열심히 하고, 쉴 때는 열심히 쉬고. 아까 감독님이 내일 경기에서는 선발 라인업에 올려주신다고 했잖아. 나는 언제 라인업에서 밀릴지 몰라서 불안하게 휴식 일을 보내는 것보다 이렇게 경기 중에 쉬더라도 라인업에 관한 내용을 미리 알고 있으면 훨씬 마음이 편하더라. 훈이 너도 마음 편히 쉬어봐. 마음 놓고 구경하면 우리 팀 경기도 꽤 재밌거든."
중석은 웃음기 띤 얼굴로 최훈 선수의 가슴을 탁하고 처 보인다.
그의 말에 마음이 편해진 최훈 선수의 표정에서 불안함이 가시고, 여유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럼 좀 쉬어볼까요? 안 그래도 요즘 허리 통증이 다시 올라오고 있었는데, 이참에 좀 편하게 있어야겠습니다."
최훈은 그렇게 말하며 벤치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는다.
87년생인 최훈은 올해로 33살이 되어 37살인 중석에 비해 후배이기는 하지만, 이제 그도 고참 선수 대열에 합류한 상태다.
그동안 불안한 주전 경쟁으로 인해 벤치에 앉을 때도 꼿꼿한 자세로 경기를 지켜보곤 했던 최훈이 오랜만에 편한 자세로 경기를 관람하게 된다.
"와아, 이것도 새롭네요. 이렇게 편하게 앉아서 경기를 본 게 언제인가 싶네요. 한동현 감독 부임하고 나서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최훈의 말에 어느새 다가온 1루수 김상훈이 음료수 하나를 건네며 말해온다.
"저희가 그동안 경쟁이 좀 심하긴 했죠. 감독님께서 체력 관리를 해주신다니까 마음이 좀 놓이네요."
상훈 역시 오늘 선발 라인업에서 빠져 있었다.
그의 보직이 1루수인 것을 고려한다면 2군에서 새로 올라온 문표도 있고, 백업 1루수인 이인호도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서 박빙 승부에서 대타로 등판할 것이 아니라면 오늘 경기에서는 편하게 쉬어도 될 것 같았다.
2루수인 최훈에 비해 경쟁이 더욱 심한 1루수인 까닭에 그동안 상훈이 느끼던 스트레스는 보통이 아니었다.
상훈이 휴식 일에도 경기장에 나와 개인 훈련을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 있었다.
"이제 진짜로 체력 안배를 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휴식 일에도 집에서 좀 쉬고, 출근도 지금보다는 조금 늦게 하고요."
상훈의 솔직한 말에 최훈과 중석은 놀라게 된다.
항상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서 개인 훈련에 열중하는 상훈이었다.
그런 그가 사실은 소소한 휴식을 바라고 있었다는 점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너 좋아서 휴식일에 출근하는 거 아니었어?"
중석이 상훈을 향해 묻게 된다.
그러자 상훈이 피식 웃으며 대답하고 있었다.
"설마요. 세상에 일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저도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죠. 이제 제 나이도 31살인데 결혼하려면, 이제 연애도 해야 될 텐데 언제까지 운동장에서만 죽치고 있겠습니까? 주전 자리만 보장되면 데이트도 하고, 결혼도 하고 싶네요."
평소 과묵한 줄만 알았던 상훈의 속내에 최훈이 놀란 감정을 수습하고는 물어본다.
"오오, 여자 친구는 있는 모양이네?"
"아뇨. 없습니다. 지금부터 만들어봐야죠. 그런 의미에서 소개팅 한 번만 해주세요."
"....?"
최훈은 상훈에 대해 여러모로 몰랐던 점을 많이 알게 된다고 느끼며 상훈을 향해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중석과 최훈, 상훈 세 사람이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서로를 새롭게 알아가고 있을 무렵, 타석에서는 끈질긴 승부가 이어지고 있었다.
자이언츠의 1번 타자인 전준오가 6구째에 내야 뜬공으로 물러났지만, 2번 타자인 유성철이 라이온즈 선발 투수의 초구를 공략해서 1루로 출루한 후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강호였다.
강호는 라이온즈의 선발 투수인 정인혁의 눈을 날카롭게 응시하며, 그가 던질 6구째 공을 확인하게 된다.
구종: 체인지업
구속: 121km
존의 외곽을 크게 벗어나는 코스와 구종, 구속 등의 정보가 강호의 시야에 떠오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유인구임을 알게 하는 체인지업 선택에 강호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정인혁의 6구째를 흘려보낸다.
"볼 쓰리."
주심은 정인혁 투수의 6구로 3볼 2스트라이크 상황이 됨을 알린다.
그러자 라이온즈 포수 이치영의 표정이 일그러지게 된다.
'어떻게 된 게 유인구에는 배트 한 번 내질 않냐? 선구안이 많이 좋은 편은 아니라고 하던데. 리포팅 자료가 틀린 거였나 보네. 선구안 한 번 기가 막히네.'
포수 이치영은 10점 만점에 7점 정도로 평가받는 강호의 선구안 능력이 과소평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강호의 BB/K비율이 1.93대로 5할 3푼이 넘는 출루율을 고려한다면 선구안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 승부에서 실제로 상대하게 된 강호는 리포팅 자료의 수치를 뛰어넘는 선수였다.
'이렇게 되면 백강호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해온 전략은 무용지물이 되는 거야. 이대로 볼넷으로 출루하게 놔두면 좋지 않은데. 1회 초부터 1사에 1, 2루 상황을 자처한 채로 자이언츠의 중심타선을 상대하는 것은 최악의 수야. 벤치에서도 좋게 보지는 않을 거야.'
치영은 힐끗 1루 쪽에 자리 잡은 라이온즈 덕 아웃의 분위기를 살핀다.
최근 들어 포수 포지션에서 백업 포수였던 이흥원과의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코스 선택이 실패해서 상대 팀 타자들을 자꾸 주자로 내보내게 된다면 덕 아웃에서 좋게 평가할 리가 만무했다.
4월 대다수의 경기에서 흥원에게 밀려 벤치를 지켜야 했던 이치영 포수, 그가 강호를 처음 상대하게 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4월에 맞상대한 시리즈 첫 경기에서는 치영이 아닌 이흥원 포수가 주전 마스크를 썼던 것이다.
'덕 아웃에서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안타를 내주는 것보다 볼넷을 내주는 것을 더 싫어해. 차라리 안타를 내줄 각오로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밀어 넣자!'
이치영 포수는 결국 강호와의 풀카운트 승부에서 유인구 대신 정면 승부를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이 결정이 패착이 되고 만다.
제구력은 좋은 편이지만, 구위가 뛰어난 편이 아닌 정인현 투수의 공이 치기 좋은 코스로 표시되고 있는 모습에 강호가 미소짓고 있었다.
구종: 포심 패스트볼
구속: 143km
143km의 구속에 무브먼트가 적은 포심, 거기에 코스는 다소 몸 쪽으로 붙기는 하지만, 스트라이크 존 안에 형성되는 치기 좋은 공이었다.
시스템을 통해 정인혁 투수의 7구째를 확인한 강호의 왼쪽 다리가 바깥 쪽으로 열리며 순간 오픈 스탠스 자세가 된다.
그리고 휘둘러진 풀스윙에 인혁이 던진 공이 정확하게 걸려들고 있었다.
따악!!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장타임을 직감하게 만드는 타격음이 타석을 가득 채운다.
그 소리에 강호의 끈질긴 승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계석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쳤습니다! 백강호 타자가 정인혁의 7구째를 받아쳐 엄청난 타구를 만들어 냅니다! 이 타구는 계속 뻗습니다. 좌익수 채수호가 타구 쫓는 걸 포기하고, 자리에 멈춰 섭니다. 타구는 아직도 뻗습니다! 외야석을 완전히 넘기는 장외 홈런이 만들어 집니다! 경기의 흐름을 가져오는 백강호의 투런 포로 자이언츠가 선취점을 먼저 가져갑니다. 백강호 17호 홈런!"
권성호 캐스터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강호의 17호 홈런이 정식 기록되고 있었다.
곁에 앉은 조성한 위원은 권 캐스터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아'하는 탄성과 함께 해설을 더한다.
"지금은 제대로 노리고 쳤어요. 백강호 타자가 타격 시작과 동시에 오픈 스탠스로 타격 자세를 전환했거든요. 상대 배터리가 몸 쪽 승부를 볼 거라는 것을 예상했다는 뜻입니다. 제대로 노리고 친 타구가 대형 홈런으로 만들어지네요. 지금 홈런이 백강호 선수의 17호 홈런이죠? 이제 백강호 선수가 홈런 3위로 올라서게 됩니다."
조 위원의 말과 함께 다시금 권 캐스터가 입을 연다.
"올 시즌 홈런왕 경쟁이 정말 뜨겁습니다. 지금 홈런으로 백강호 선수가 홈런 3위가 됐는데요. 와이번스의 정의준 선수가 올 시즌 21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2위가 베어스의 김재성 선수로 19개를 기록 중에 있고요. 그 뒤가 17개의 백강호 선수입니다. 테인즈 15개, 위즈의 바르테 선수가 14개 순입니다."
"아직은 지켜봐야 하겠지만, 올 시즌 홈런 경쟁이 재미있을 것 같네요. 라이온즈의 최형수 선수도 홈런 13개로 6위에 올라 있습니다. 이번 시즌도 타고투저가 이어지는 가운데 홈런왕 경쟁을 펼치는 타자들의 방망이가 언제까지 불을 뿜어낼지 지켜보는 것도 올 시즌 경기를 지켜보는 재미가 될 것 같아요."
조성한 위원이 해설을 마무리하는 동안 강호의 발걸음이 홈을 밟는다.
"나이스, 강호."
홈을 밟은 강호는 가장 먼저 1루 주자였던 유성철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있었다.
주자였던 성철로서는 강호에게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1군에서의 기록 하나하나가 소중한 성철이어서 자신의 출루가 득점으로 연결되는 것이 즐겁게 느껴진다.
강호는 그런 성철과 함께 자이언츠 덕 아웃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감이 좋아. 스윙이 평소 때보다 더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기분이야. 다음 타석 때에도 이런 식으로 타격을 한다면 또 다시 장타를 때려낼 수도 있을 거야.'
강호는 덕 아웃으로 들어와 선수단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면서 지금의 감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강호의 노력은 3회 초, 선두 타자로 타석에 선 상황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따악!
5구째 승부로 이어진 타격 끝에 또 다시 잘 맞은 타격음이 타석을 채운다.
이번에는 타구 각도가 높지 않은 라인드라이브 성 타구가 외야를 넘어 담장을 향해 내려 꽂히고 있었다.
터엉!
좌중간 깊은 곳의 펜스를 직격하는 타구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좌익수 채수호가 얼른 떨어진 공을 손에 쥔다.
장타 성 코스이기는 했지만, 워낙 강한 타구여서 빠르게 2루로 송구한다면 아웃을 잡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든 채수호 좌익수는 곧장 2루를 향해 전력으로 공을 던진다.
파핫!
채수호의 손에 든 공이 2루를 향해 던져졌을 무렵, 강호의 발은 이제 막 1루 베이스를 밟고 지난 상태였다.
2루를 노리기에는 다소 무리인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강호는 망설이지 않고 2루 베이스를 향해 곧장 달린다.
'이 정도 타구에 2루도 가지 못한다면 팬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전력으로 달리면 2루타가 불가능하지는 않아!'
강호는 머리 위의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속도를 끌어올리며 2루 베이스를 향해 몸을 날린다.
이미 공은 2루수인 백상현의 글러브에 들어와 있었고, 뒤이어 강호의 슬라이딩이 2루 베이스에 닿는다.
일촉즉발의 상황, 백상현의 태그가 강호의 손등에 닿은 후 모든 이들의 시선이 2루심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세이프!!"
2루심심의 판정은 세이프였다.
그 모습에 백상현 2루수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지만, 잠시 후 확인하게 된 비디오 판독 결과 역시 세이프로 판정이 나게 된다.
1회 홈런에 이어 3회에도 장타를 때려내며 자신의 타격 능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는 강호, 2루 베이스를 밟고 선 강호의 손이 자이언츠 원정 팬들을 향해 뻗어진다.
그와 함께 라이온즈 파크는 '백강호'를 연호하는 자이언츠 원정 팬들의 목소리로 가득차고 있었다.
"와아아!!"
아직 경기는 3회 초, 무사 2루의 상황에서 나온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