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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츠의 힘
자이언츠 선발 성수제는 6회에도 마운드에 오르고 있었다.
2회 상황부터 갑작스레 흔들리던 제구력이 잡히기 시작한 수제는 5이닝 동안 2실점만 내주며 호투하고 있었다.
투구 수는 아직 77개로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투수 교체를 고민하던 여민석 투수코치는 6회 초에도 수제를 올리기로 결정을 내린다.
"6회에도 수제로 가시죠. 5회까지 잘 막아줬는데 퀄리티 스타트할 기회는 주시는 게 어떨까요?"
여 코치가 6회에 올릴 투수를 고민하던 김민철 대행에게 한 말이었다.
김 대행은 여 코치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었다.
"좋아. 성수제로 가자. 대신 불펜에 한 명 정도는 준비시켜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여 코치가 시험하고 싶은 투수 있으면 준비시켜 둬. 그리고 위기 상황을 막을 투수도 한 명 준비시키고."
"그럼 결국 불펜 가동시키라는 말씀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진성이하고, 지터를 준비시키겠습니다."
가진성과 지터를 준비시킨다는 여 코치의 말에 김 대행이 움찔하게 된다.
2군에서 갓 올라왔을 때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지터가 최근 들어 다시 구위가 떨어지면서 불펜으로 전환시킨 상태였다.
김 대행은 한 감독이 남긴 유산이나 다를 바 없는 지터를 올린다는 말에 조금은 꺼림직 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의 표정을 읽은 여 코치가 피식 웃어 보이며 재차 입을 연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터말고 이틀 전에 콜 업 시킨 규민이를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래. 지터는 다음에 경기를 완전히 내줬을 때 테스트하기로 하지. 9대 2 상황이긴 하지만, 괜히 구위가 떨어지는 지터를 올렸다가 추격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어. 오늘만큼은 불안한 경기를 하고 싶지 않아."
김 대행은 자신이 감독으로써 치루는 첫 경기부터 스스로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길 수 있는 경기는 확실히 이기고, 테스트 하고 싶은 선수가 있을 때는 완전히 내준 경기나 지금보다 더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을 때나 시험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한 감독처럼 급진적인 선수운용보다는 보수적으로 선수들을 기용하는 것이 장기적인 선수단 운영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만약 수제가 이번 이닝에서 2점 이상 내주면 교체하도록 하고, 1실점까지는 수제에게 맡겨보자고."
김 대행이 팀이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도 수제를 마운드에 올리는 이유였다.
좋은 투구 내용에도 올 시즌 전적 2승 4패로 불운했던 수제의 퀄리티 스타트를 챙겨주려는 의도였다.
마운드에 오르는 수제 역시 그 점을 느끼고 있었지만, 다시금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에 긴 한숨을 토해내게 된다.
그가 사실 이렇게까지 부담감을 갖는 이유는 단지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득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서며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수제야, 내 아들. 선배들 사이에서 기죽지 말고 밥 꼭 챙겨먹어야 해."
수제의 엄마는 삶의 풍파에 거칠어진 손으로 현관문을 나서던 수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쥔다.
그리고 그녀가 수제의 손을 놓았을 때는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수제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올해로 26살이 되는 성수제 투수는 여전히 자신을 아이처럼 대하는 엄마의 행동에 짜증을 내려다 이내 입을 다물게 된다.
아버지 없는 빈자리를 홀로 채우기 위해 또래의 엄마들에 비해 10년 이상 나이 들어 보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말을 삼키게 된다.
"...엄마 나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 어디 가서 밥 안 굶으니까 그렇게 걱정 안하셔도 돼요. 그리고 이 돈은."
수제는 이번만큼은 매일같이 엄마가 건네는 만 원짜리 지폐를 돌려주려 했지만, 자신을 향한 엄마의 눈빛을 마주하며 또 한 번 말을 삼키게 된다.
자신을 뒷바라지 하느라 너무도 왜소해진 엄마의 어깨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건네는 돈을 마다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할게요. 근데 오늘은 하루 쉬시면 안돼요? 몸도 안 좋다면서요."
"그래도 일은 나가야지.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그보다 우리 아들 오늘 선발이지? 엄마가 시장에서도 경기 꼭 챙겨볼게."
엄마의 살가운 말에 왠지 마음이 짠해진 수제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게 된다.
"경기 보지 마세요. 오늘 경기도 질 수 있잖아요. 어차피 질 경기 뭐 하러 보시려고요?"
수제는 퉁명스러운 말로 엄마의 손길을 뿌리치며 현관문을 나선다.
그런 그의 손에는 엄마가 건넨 꾸깃꾸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구겨진 만원 한 장은 마운드에 오른 수제의 유니폼 주머니 속에 마치 부적처럼 들어 있는 상태였다.
'엄마는 또 경기를 보고 계시겠지. 그렇게 보시지 마라해도 항상 챙겨보시니까. 이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수제는 어느새 만루까지 몰려버린 6회 초 상황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미 김 대행이 말했었던 1실점을 내어준 상태였고, 9대 3. 1사 만루의 위기 상황을 자처해 버린 스스로를 원망하게 된다.
그런 수제의 눈에 마운드를 향해 올라오고 있는 여민석 투수코치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오늘도 여기까지 밖에 못했구나. 오늘 경기만큼은 엄마에게 아들이 잘하고 있다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대로 마운드를 또 내려가는구나.'
그렇게 낙심하고 있는 수제에게 다가온 여민석 코치가 말을 건네 온다.
그런데 여 코치의 손에는 공이 쥐여져 있지 않았다.
그 모습에 수제는 설마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수제야 두 명만 더 잡으면 돼. 네 손으로 한번 이닝을 마무리 해봐. 팀이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이잖아. 대신 1실점 하면 바로 교체할거야. 그러니까 이대로 물러서지 말고 네 공을 한번 던져봐!"
여 코치는 그렇게 말하며 수제의 어깨를 툭 하고 쳐 보인다.
격려의 의미를 담은 여 코치의 손길을 통해 수제는 단 하나의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기고 싶다. 2승 4패, 1군에 올라온 이후로 엄마에게 보여드린 성적표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어. 오늘만큼은 꼭 이기고 싶다!'
그것이 1회에 공을 던질 때부터 수제가 가지고 있던 단 하나의 욕심이었다.
하지만 그 욕심으로 인해 평정심이 깨지고, 투구마저 흔들리고 있다.
수제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이 위기 상황을 정말 막아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으로 인해 더욱 마음이 흔들리게 된 성수제 투수.
문득 그의 귓가에 홈 팬들의 응원소리와 웅성거리는 소음을 뚫어내고 이목을 끌게 만드는 소리 하나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툭, 툭.
시선을 돌린 곳에는 유격수 자리에 선 강호가 글러브를 들어 자신의 가슴을 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수제가 자신을 돌아보자 강호는 가슴을 두들기던 글러브를 수제를 향해 내밀어 보인다.
그 후 글러브를 좌우로 움직이며 수제의 시선을 유도하고 있었다.
강호의 행동은 마치 수제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선배 뒤에는 우리 야수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믿고 공을 던지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낼 테니까요.'
수제는 강호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피식 웃음 짓게 된다.
강호의 진지한 행동이 잔뜩 긴장하고 있던 수제를 웃음 짓게 만든 것이다.
'그래, 믿고 던질게. 승부를 피하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이제 2군 유망주가 아니라 진짜 프로선수니까. 더 이상 엄마에게 못난 모습만 보일 수는 없잖아.'
마음을 굳힌 수제는 포수 강민수의 싸인을 확인한 후 전력으로 공을 던진다.
5회까지 77개의 공을 던진 수제의 투구 수는 어느새 112구째로 늘어나 있었고, 어쩌면 오늘 경기에서 마지막으로 상대하게 될 타자인 타이거즈 대타 김성빈을 향해 전력투구를 펼쳐 보인다.
따악!
하지만 김성빈 타자의 배트에 걸려버리는 공에 수제의 얼굴이 사색이 될 무렵, 자신이 맡은 유격수 자리에서 눈빛을 빛내던 강호가 타구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타악.
강한 타구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대쉬한 강호의 글러브가 김성빈이 때린 그라운드 볼을 막아내고 있었다.
앞으로 전진 하던 자세로 쓰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1루나 2루로 공을 뿌리기에는 늦은 상황. 짧은 시간 동안 판단을 마친 강호가 포수인 강민수를 향해 공을 토스한다.
콰당.
그 후 강호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고, 공을 넘겨받은 포수 강민수는 홈을 밟은 후, 1루를 향해 공을 던진다.
"아웃!"
주심의 아웃 판정에 이어 1루심 역시 아웃을 선언한다.
빠른 강습 타구를 향해 몸을 날린 강호의 판단이 6, 2, 3으로 연결되는 더블 플레이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와아!!"
"막았어! 저걸 막아내네!"
자이언츠 홈 팬들에게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오고, 반대로 타이거즈 원정 팬들에게서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라운드 위로 쏟아지는 각양각생의 응원과 격려, 탄성의 소리를 들으며 강호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바닥에 손바닥을 댄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의 손이 내밀어지고 있었다.
"고맙다. 강호야. 네 덕분에 막아냈어."
손을 내민 선수는 투수인 성수제였다.
강호는 수제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몸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수제의 감사 인사에 대꾸하려 했지만, 괜한 공치사가 될까봐 입을 다물고는 수제와 함께 덕 아웃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런 강호를 향해 수제가 왼 주먹을 내밀고 있었다.
좌완투수인 수제가 내민 왼 주먹을 바라보며 강호는 자신의 오른 주먹을 내밀어 그가 내민 주먹과 맞부딪힌다.
타악.
강호는 이 한 번, 주먹을 맞부딪히면서 두 사람 사이에 해야 할 감사의 말과 대답을 모두 끝냈다는 생각을 가진다.
'우리는 프로 선수야. 지나친 감사의 말도, 겸손의 말도. 경기 중에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거야. 단지 경기 내용으로 말하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며 덕 아웃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강호.
그 후 7회와 8회에도 많은 상황들이 발생하며 양 팀의 점수는 어느새 12대 7까지 늘어나게 된다.
양 팀 투수들은 잘 던졌지만, 타자들이 집중력 있는 승부를 펼친 결과였다.
타격 기회에서 황제인, 강민수, 김상훈의 추가 홈런이 터져 나오며 이 경기에서 자이언츠가 때려낸 홈런은 1회 초 강호와 중석이 때린 홈런을 더해 다섯 개가 되어 있었다.
또한 수비 상황에서도 멋진 플레이들이 이어졌다.
6회 초, 강호가 보여줬던 호수비에 버금가는 좋은 수비들이 선배 선수들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상훈이, 훈이! 고맙다. 덕분에 막아냈어."
8회 초 자이언츠의 수비상황에서 또 다시 만들어진 만루 위기 상황을 막기 위해 특명을 받고 마운드에 올랐던 투수조 최고참 박상현 투수가 야수들을 향해 고마움을 표한다.
그는 아웃카운트 2개를 잡기 위해 무려 29개의 공을 던지며,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호수비를 펼친 2루수 최훈과 1루수 김상훈에게 감사를 표하며 글러브를 맞부딪히는 모습이다.
시간은 또 다시 지나 9회 초가 되었을 때 수비를 위해 유격수 자리에 다시 나선 강호는 오늘 경기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프리마켓 시스템의 도움을 받으며 다른 선수들에 비해 편하게 경기를 치르다보니 어느새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는지 몰라.'
강호는 속으로 여태껏 해본 적 없는 생각을 가지면서,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그동안 경기를 치루며 강호의 시선은 항상 상대 배터리를 살피거나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들을 주시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외야를 막론하고 자이언츠 덕 아웃과 상대팀 선수들의 얼굴, 심지어 관중석의 팬들까지 시야가 확장되어 경기장 안의 모든 모습들을 살피게 된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팀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 아이템을 사용해서 손쉽게 팀 승리를 일굴 수 있다는 기대는 착각이었어. 결국 팀 순위는 10위까지 떨어지고 말았으니까.'
강호는 9회 초, 경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마운드에 오른 권대우 투수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아직 스무 살의 대우는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모습으로 타이거즈 타선을 상대하기 위해 공을 뿌리고 있었다.
투구와 함께 대우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마치 잔상처럼 강호의 시야에 들어온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8구째로 이어진 대우의 집요한 승부 끝에 주심이 삼진을 선언하고 있었다.
타이거즈의 대타로 나선 서동욱 타자가 혀를 빼물며 타석에서 물러나는 모습이다.
그리고 다음 타석에 오른 타자는 상대 팀의 4번 타자인 나지환 타자.
따악.
5구째 승부 끝에 중전 안타를 치고 나가는 나지환 타자의 집중력 있는 승부로 다시 9회 초 1아웃은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연결된다.
뒤이어 오른 5번 타자 이범화마저 볼넷으로 출루하고, 6번 타자 안치형에게는 몸에 맞는 공을 던지고 마는 대우.
또 다시 만루 위기를 자처하는 대우의 불안한 모습에 결국 덕 아웃에서 여민석 투수 코치가 마운드를 오른다.
"대우야. 여기서 홈런 맞아도 역전 당하는 건 아니잖아. 맞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승부해. 너무 피하지 말고. 유인구 승부에 집착하지 말고 민수가 요구하는 싸인대로 결정구를 던지면 쉽게 끝나는 경기야. 알겠지? 할 수 있어! 우리, 오늘 경기는 꼭 이기자."
어깨를 툭 치며 하고 있는 여 코치의 말은 아직 어린 대우의 가슴을 움직이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대우는 '네! 꼭 이기겠습니다'라고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답하며,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는 모습이다.
여 코치가 마운드에서 내려가고, 타이거즈는 마지막 승부수를 걸게 된다.
그 모습에 중계석에서는 대타로 오르는 선수의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아! 지금 김주한 선수를 대타로 올리네요. 김주한 선수 시즌 초반에 얻은 허벅지 부상으로 1달 넘게 엔트리에서 빠져 있었거든요. 9회 초, 만루 상황에서 타이거즈가 준비한 대타 카드가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해봐야겠습니다."
중계석의 목소리와 함께 대타 김주한을 상대하기 위한 대우의 초구가 뿌려진다.
따악.
초구는 3루 관중석을 넘기는 파울이 된다.
그리고 2구는 배트를 딸려 나오게 만들 의도로 던진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지만, 노련한 타자인 김주한은 그 공을 걸러낸다.
3구째 역시 볼, 4구째는 파울 타구를 만들어내며 상황은 2볼 2스트라이크 상황이 만들어진다.
"후우."
자신이 던지는 공 하나에 많은 것이 달려있는 승부의 순간, 대우는 크게 심호흡하며 5구째 공을 뿌린다.
이 공은 대우가 지금 상황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스트라이크 존 아래쪽을 걸치고 들어가는 보기 드물 정도로 제구가 잘 된 공이었다.
"볼."
그러나 주심의 판정은 볼이된다.
포수 강민수가 공을 잡은 글러브를 한동안 회수하지 않을 정도로 아까운 코스의 볼 판정에 혀를 빼물게 된다.
'대우야. 풀카운트야. 이제는 승부를 보자!'
민수는 마스크 안에 가려진 눈빛을 빛내며 권대우 투수에게 공을 돌려준다.
그리고 이어진 민수의 싸인에 대우가 놀란 눈으로 눈을 치켜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이후 던져진 대우의 6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김주한의 몸 쪽에서 스트라이크 존안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백 도어 슬라이더에 타자 김주한의 배트가 휘둘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악.
벼락같은 타구에 순간 타이거즈 원정 팬들이 함성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페어타구로 빠져나갈 듯한 타구를 기어코 잡아낸 3루수 황제인의 수비에 자이언츠 홈 팬들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제인은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여 3루 베이스를 직접 밟아 3루로 향하는 2루 주자를 잡아내고는 곧장 몸을 돌려 1루수 김상훈을 향해 역동적인 송구를 선보인다.
"세이프!"
안타깝게도 1루심의 판정은 세이프였다.
발 빠른 타자 주자 김주한의 다리가 더블 플레이를 막은 것이었다.
그 사이 3루 주자가 홈을 통과했고, 이제 12대 8까지 추격을 허용한 상황에서 9회 초 2사 주자 1, 2루의 상황이 연결된다.
'다들 집중하자고, 아웃카운트 하나면 돼. 아웃 하나면 우리가 이 경기를 이기는 거야.'
캡틴 강민수는 모든 야수들에게 더욱 집중해줄 것을 제스쳐를 통해 요구하며 다음 타자를 상대하기 위한 전략을 세운다.
그런 그의 시선이 문득 마운드 위의 투수와 자이언츠 덕 아웃을 번갈아보게 된다.
'투수 교체는 없는 모양이구나. 좋아. 대우와 함께 이 상황을 마무리하자!'
덕 아웃에서 움직임이 없는 것을 확인한 민수는 타이거즈의 다음 타자 김호영을 상대하기 위한 싸인을 낸다.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대우와 타이거즈 타자 간의 풀카운트 승부.
자신의 수비 자리에서 스무 살 신인 투수인 대우의 진땀나는 승부를 지켜보던 강호는 오늘 경기에서 느낀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비록 오늘 경기에서 이긴다고 할지라도 완벽한 승리로 평가되지는 않을 거야. 그럼에도 오늘의 경기가 가치 있게 느껴지는 건 하나의 승리를 올리기 위해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선수들이 하나가 되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투지가 우리 팀에게 필요했기 때문이야.'
강호는 오늘 경기에서 느낀 감정들을 가슴 깊이 갈무리하며 곧장 오른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경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구가 유격수 방면으로 향합니다.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시스템의 물음을 시야에서 지워내며 빠르게 몸을 움직인 강호의 글러브가 빠져나갈 듯이 튕겨지는 김호영 타자의 타구를 쫒는다.
터억.
글러브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든 타구를 확인한 강호는 곧장 오른손을 뻗어 글러브 속 공을 붙잡는다.
'1루는 무리야!'
타자 주자 김호영의 빠른 발과 역동작에 걸린 자신의 수비 자세를 고려한다면 1루 송구로 아웃을 잡아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 때 강호의 귀에 투수 권대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2루! 2루!!"
대우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강호가 던진 공이 2루 베이스를 향한다.
공을 받아야할 2루수 최훈이 아직 2루 베이스에 도착해 있지 않았지만, 그가 공을 잡아낼 것이라는 믿음으로 공을 던진 강호.
그리고 그의 믿음에 보답하는 최훈의 투혼 넘치는 플레이가 완성된다.
촤하학.
1루 주자가 슬라이딩하는 것과 동시에 어렵사리 공을 잡아낸 최훈 역시 2루 베이스를 향해 슬라이딩해 들어간다.
거의 동시에 2루 베이스에 닿은 두 선수의 모습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2루심에게로 향한다.
경기의 결과를 손에 쥔 2루심은 역동적인 모습으로 판정을 내린다.
"아웃!!"
판정은 아웃이었다.
이것으로 오늘 경기는 자이언츠의 12대 8 승리로 결정이 나게 된 것이다.
"우와아!!"
무사히 위기 상황을 막아낸 최훈 2루수가 마운드 위의 권대우 투수에게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간다.
뿐만 아니라 캡틴 강민수를 포함한 모든 야수들이 마운드 위의 대우를 향해 뛰어든다.
강호 역시 승리를 지켜낸 대우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시리즈 중에 벌어지는 많은 경기 중 한 경기일 뿐이었지만, 오늘 팀이 얻은 승리는 무척이나 값지게 느껴진다.
모든 팀 선수들이 마운드 위에 부둥켜안은 채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무렵, 덕 아웃에서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김민철 감독 대행의 눈빛이 빛난다.
그는 오늘 경기를 통해 선수들이 그동안 잊고 있던 투지와 팀의 색깔을 되찾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수들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이게 바로 자이언츠라는 팀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경기를 시작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