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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시작되다
"어?! 선배님. 어디 가십니까? 캡틴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지 말라던데 말입니다. 민수 선배님이 경기 전에는 가급적이면 경기장 안이나 훈련 장소에만 있으라고 했어요."
체력 단련실을 나서는 강호에게 운동을 함께 하던 파트너, 대우가 말을 걸어온다.
대우는 캡틴인 민수의 충고를 전달했고, 강호는 그런 대우에게 대답한다.
"알아. 민수 선배가 체력 단련실에 왔을 때 네 옆에 나도 있었잖아. 나도 들었다고."
강호는 그렇게 대꾸하며 단련실 밖으로 나선다.
"선배님, 저도 같이 가요!"
그런 강호의 곁을 대우가 따라 나서고 있었다.
"너는 왜 따라오는 거야? 내가 화장실 가는 거면 너도 따라서 화장실 갈 생각이야? 짐(GYM)에서 운동이나 하고 있어."
"혹시 화장실 가시는 겁니까? 화장실은 단련실 안에도 있잖아요."
"화장실 가는 거 아니니까 밖으로 나왔지."
"그러니까 저도 따라 나왔죠. 저도 같이 가요, 선배님. 오늘 선수단 분위기가 뒤숭숭해서 혼자 있기가 조금 그러네요.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대우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는 강호의 곁에 따라붙는다.
강호는 더 이상은 대꾸하지 않고 자신이 정한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우는 그런 강호의 뒤를 따른다.
원정 룸메이트인 강호에게 살갑게 굴기는 해도 대우는 의외로 과묵한 구석이 있었다.
원정 때마다 강호와 친분을 쌓은 선수들이 강호의 숙소 방으로 모여들어 이런저런 훈련을 할 때도 할 말이 있을 때 외에는 입을 자주 여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 대우가 1군 생활에서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 선수는 다름 아닌 강호였다.
'강호 선배는 자기 관리가 완벽하니까. 훈련도 철저하고, 사생활도 깨끗하고. 강호 선배만 쫓아다니면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1군 무대에서 낙오하는 경우는 없을 거야!'
강호를 바라보는 대우의 시선은 그러했다.
대우 역시 욕심 있는 선수여서 단지 1군 생존에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팀을 대표하는 불펜 투수를 넘어 팀의 간판으로 자리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2군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강호가 그 길을 먼저 걷고 있다. 보고 따라할 롤 모델이 생기니 야구가 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강호 선배가 하는 악력 운동, 리포팅 자료 분석, VR 트레이닝 훈련, 모의 훈련 같은 모든 것을 따라하는 거야. 튀긴 음식이나 탄산음료, 술, 담배는 멀리하고 여자보기를 돌같이 하면 강호 선배 같은 성적도 꿈은 아닐 거야. 강호 선배를 흉내 내다 보니 어느새 불펜 핵심 투수로 자리 잡고 있는 거잖아.'
대우의 생각대로 이미 그는 1군 무대를 처음 밟은 패전 처리 조 루키에서 팀의 승리를 지키는 핵심 투수로 부상해 있었다.
1점대 중반의 방어율과 낮은 승계 주자 실점율을 자랑하며, 이제 자이언츠 팬들이라면 강호와 더불어 '권대우'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강호의 일이라면 모든 것이 궁금한, 아직 스무 살의 대우였다.
강호가 그런 대우를 달고 이동한 곳은 사직 구장의 자이언츠 쪽 덕 아웃이었다.
혹시 김민철 대행 체제의 새로운 라인업이 붙어있을까 하는 생각에 들른 것이다.
"어?! 선배님. 타순 라인업이 확 바뀌었는데요? 선배님하고, 제인 선배님 빼고는 다 바뀐 것 아닙니까?"
대우가 감독 지정석 근처에 붙어있던 24일짜 선발 라인업을 확인하고는 말을 붙인다.
강호는 라인업을 보지 않아도 자신의 수비 포지션이 유격수로 변경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상태창을 열어 확인했던 포지션이 SS로 바뀌어있는 것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대우의 말대로 타순 역시 그대로라면 강호 본인은 오늘 유격수 수비의 3번 타순으로 선발 출정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인업에서 빠져있던 채중석 선배하고, 중호 선배님이 다시 타순에 올라왔네요."
대우의 말을 듣고는 강호가 라인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한 감독 체제에서는 외면당하던 중석과 중호 등 일부 베테랑 타자가 벌서부터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다면 1군과 2군을 오르내리던 다른 고참 선수들도 1군으로 콜 업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한 때 마무리였던 손명학 선배나 윤길준 선배가 1군으로 다시 콜 업 될 수도 있겠구나.'
강호는 몇 차례 1, 2군을 오르내리던 두 투수들의 이름을 떠올리다가 한동안 잊고 있던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아! 그러고 보니까 문표 선배도 콜 업 될 수 있겠구나!"
강호는 불현듯 떠오른 문표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며 그의 1군 콜 업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월등한 타격 능력을 갖춘 문표가 1군으로 콜 업 되지 못한 것은 그의 취약한 수비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문표 선배가 한 감독과 사이가 좋지 못해서 한 감독이 문표 선배를 콜 업 시지키 않고 있었던 거잖아. 그렇다면 문표 선배를 좋게 평가하는 김민철 대행 체제에서는 문표 선배도 1군 무대를 밟을 수 있을 거야.'
강호는 한 때 죽마고우처럼 지내던 문표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웃어 보인다.
그의 말과 행동에 대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고 있었다.
"문표 선배님이요? 문표 선배는 수비 포지션이 애매해서 2군에 계시는 거 아닙니까?"
문표와 한 감독 사이의 일을 알지 못하는 대우로서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우에게 '너는 몰라도 돼'라고 대꾸하며 덕 아웃을 벗어나는 강호,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김상훈 선수나 일부 선수들이 수비 훈련을 하고 있는 그라운드 위였다.
2군에서 함께 했던 문표를 1군 무대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상훈을 향한 강호의 목소리는 밝게 느껴진다.
"상훈 선배님. 저도 같이 훈련해도 되겠습니까?"
"아, 강호 너는 언제든지 환영이지. 오늘은 외야 자리에서 시작할까?"
강호의 웃는 얼굴을 본 상훈은 본인 역시 강호를 따라 웃으며 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업 포수 안민경과 백업 우익수 박철 등이 함께하고 있었다.
강호가 합류하며 넷이 된 선수들은 그렇게 공을 주고받으며 경기 전 훈련에 전념한다.
한 편 포지션이 투수여서 경기 전에 어깨를 함부로 쓰면 안 되는 대우가 송구 훈련에 참가할 수 없게 된 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저는 잊으신 겁니까? 저도 여기 있다고요!"
강호와 선배들을 향해 그렇게 외친 대우는 잠시 후, 주전자 당번으로 지정돼 음료수를 나르게 된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 홈에서 맞이하는 타이거즈와의 시리즈 2차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직에서 벌어지는 자이언츠와 타이거즈, 타이거즈와 자이언츠의 시리즈 2차전 중계를 맡은 캐스터 조호준입니다. 해설에는 박재헌 위원과 김신우 위원께서 함께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인사말로 중계를 시작한 조호준 캐스터는 곧바로 경기 전 있었던 굵직한 사건에 대해 입을 연다.
"오늘 양 팀 경기에 앞서 충격적인 소식이 있었습니다. 기자회견을 통해서 자이언츠 감독인 한동현 감독이 자진 하차 의사를 밝혔는데요. 너무도 갑작스러운 하차 발표가 아닐까 합니다."
중계를 시작하자마자 조 캐스터는 오늘 야구계의 핫 이슈인 자이언츠의 한동현 감독 자진하차 기자회견을 거론하고 나섰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김신우 위원이 곧바로 입을 연다.
"정말 뜻밖의 하차 소식이었어요. 아직 시즌 초반이거든요. 한동현 감독이 올 시즌 2위에서부터 출발한 팀 성적이 10위까지 하락하는 걸 보면서 심리적인 부담이 컸던 것 같아요. 오늘부터는 김민철 수석이 감독 대행으로 자이언츠의 경기를 운용할 예정입니다."
김 위원이 말을 끝낸 후 박 위원에게 바통을 넘긴다.
박 위원은 미리 준비된 멘트로 김 위원의 말을 받았다.
"한동현 감독 체제에서는 잦은 라인업 실험이 있다 보니 선수들 간에 불협화음이 좋지 못한 경기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김민철 대행 체제에서 선수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 바닥을 치고 올라갈 지, 아니면 좋지 못한 분위기가 이어질 것인지가 결정될 거 같아요."
박 위원의 말 이후에도 세 사람은 한동안 감독이 갑작스럽게 자진 하차한 자이언츠가 겪을 어려움에 대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러는 사이 양 팀 간에 4번째 맞대결이 시작되고 있었다.
퍼엉.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 성수제의 초구를 지켜 본 강호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수제 선배의 구위가 좋아. 연습구를 던질 때 로케이션도 나쁘지 않았고. 타이거즈 타자들이 좌완 투수에 대한 타율이 우투수일 때보다 2푼 이상 떨어지니까 오늘 경기는 쉽게 풀어나갈 수 있겠어!'
강호는 선발 투수 성수제의 초구를 통해 오늘 경기 향방을 예측해 본다.
타이거즈 타자들은 로케이션 투구가 가능한 좌완 투수에게 약한 면이 있었다.
오늘 자이언츠 선발로 마운드에 오른 성수제 투수가 그런 면모를 가진 투수 중에 한 명이었던 것이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강호의 예상대로 성수제 투수는 타이거즈의 1번 타자 노수강을 5구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오늘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팀의 의지를 대표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성수제 투수의 힘찬 투구를 지켜보던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는 오늘 경기를 낙관하는 긍정적인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수제가 컨디션이 좋네요. 오늘 경기는 이겨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민석 투수 코치는 수제가 잡은 첫 아운 카운트를 확인하며 오늘 경기를 승리로 가져오겠다는 욕심을 내보인다.
오랜만에 보는 여 코치의 의욕적인 모습에 감독 대행 자리를 맡은 김민철 대행이 피식 웃음 짓는다.
한 때 자이언츠에서 팀의 중심 타자와 에이스 투수로 함께 생활하기도 했던 두 사람이다.
이제는 대행 자리이기는 하지만 감독과 코치 자리에서 나란히 마주한 채 팀의 승리를 바라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인생이 선사해주는 묘한 인연의 끈에 웃음 지으며 김 대행은 장난스럽게 대꾸하게 된다.
"왜? 내가 첫 감독하는 날 승리라도 안겨주고 싶은 거야?"
"그래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민철 선배님이 감독이 되신 날인데 투수들을 닦달해서라도 승리를 만들어 드려야지요. 오늘 수제가 공 던지는 거 보니까 4실점 이상은 안 내줄 것 같은데 타자들만 제 몫을 해주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경기죠."
여 코치의 말에 곁에 있던 타격 코치 정호종이 입을 연다.
"아하, 이거 왜 이러시나? 올 시즌에 타자들이 제 몫을 못한 경기가 몇 경기나 된다고. 오늘 투수 쪽에서 4실점 이상 안 할 것 같다고 했지? 그럼 타자 쪽에서는 5타점 이상 때려낼 테니까 두고 보라고."
정 코치 역시 살갑게 말하며 오늘의 낙승을 장담한다.
두 코치의 호언장담을 듣고만 있던 김 대행이 웃음기 띈 얼굴로 입을 연다.
"내가 코치들을 데리고 경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점쟁이들을 데리고 경기를 하는 모양이네. 경기는 끝나봐야 아는 거지. 코치라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결과를 속단하면 되겠어? 우선은 경기에 조금 더 집중하자고."
김 대행은 양손을 뻗어 두 코치의 등을 두들기며 그렇게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내심 두 코치가 내보인 의욕이 고맙게 느껴지는 김민철 대행이었다.
그리고 그런 세 사람이 덕 아웃 내로 전파하는 긍정적인 기운이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사이에 퍼져 나간다.
"오늘 경기는 이기자."
"당연한 거 아닙니까? 오늘은 이겨야죠. 꼴찌 자리는 하루면 족합니다."
선수들은 저마다 각오를 다지면서 의욕을 불태운다.
한 감독이 하차한 후 긴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빠르게 팀 분위기가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덕 아웃의 분위기 변화가 그라운드 위까지 전달된 것인지 선발 투수 성수제가 타이거즈 타선을 삼자 범퇴로 돌려세우며 기분 좋은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타이거즈의 1회 초 공격은 자이언츠 선발 성수제 투수가 깔끔하게 삼자 범퇴로 막아냅니다. 이제 자이언츠의 1회 말 공격으로 넘어갑니다."
중계석에서는 이제 곧 자이언츠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어서 조 캐스터는 자이언츠의 라인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자이언츠의 타순입니다. 1번 타자 전준오, 2번 타자 유성철, 3번 유격수 백강호, 4번에는 황제인, 5번 지명타자 채중석, 6번 캡틴 강민수, 7번 타자 김상훈, 8번에는 최훈, 9번에는 김중호 선수의 순입니다."
자이언츠의 변화된 라인업을 빠르게 읽어 내린 조 캐스터는 곧 두 위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김민철 대행의 체제에서 변화된 흐름을 감지하고 있는 조 캐스터였기에 달라진 라인업에 대해 두 위원들이 해설을 더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멘트를 넘긴다.
그리고 두 위원들의 라인업 코멘터리 속에 자이언츠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