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122화 (122/335)

0122 / 0335 ----------------------------------------------

바람이 시작되다

강호의 홈스틸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위치가 가장 가까웠던 3루수 최현이었다.

그는 강호가 홈을 향해 달리는 것과 동시에 마운드 위의 투수에게 소리를 지른다.

"홈! 홈! 홈!!"

최현 3루수의 급한 외침이 내야를 가득 채운다.

그의 목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이미 세트 포지션 후 투구 동작에 들어가 있던 광헌이 달리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도루를 시도하는 주자의 특성상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에 스타트를 끊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다.

보통의 경우 투수가 세트 포지션이나 와인드업 상태에서 투구 동작으로 연결되는 찰나의 순간에 도루를 감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강호는 이보다 조금 더 빠른 타이밍으로 홈을 파고들고 있었다.

강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홈으로의 도루가 2루나 3루 도루와 같은 방식이라면 절대로 도루에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무슨 상황인가요? 갑자기 그라운드가 어수선한...아! 백강호 선수 홈스틸!!"

김광헌 투수와 황제인 타자의 대결에만 집중하고 있던 중계석에서는 이제야 강호의 홈 쇄도를 발견하고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런디 전 캐스터가 강호의 홈스틸을 중계하고 있을 때는 이미 강호의 손끝이 홈을 훑고 지나간 다음이었다.

그보다 앞서 투수 김광헌이 던진 공이 포수 이재훈의 미트에 도착해 있었고, 태그 역시 끝난 상황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주심에게로 향하게 된다.

'아 씨! 뭐야?! 못 봤는데. 대체 언제 홈으로 들어온 거야?'

주심인 나광진 심판은 순간 판정을 망설이고 있었다.

타자인 제인의 몸에 가려 3루에서 뛰어드는 강호의 홈 승부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모두가 결과를 궁금해 하는 상황에서 주심인 나광진 본인도 결과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못 봤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태그보다는 주자 터치가 빨랐던 것 같은데? 백강호가 이미 홈을 한참 지나있기도 하고. 세이프 아닐까?'

결국 나광진 주심은 자신이 목격한 정황을 토대로 판정을 내리기로 한다.

이런 그의 판정은 사실 찍은 거나 다름이 없는 판정이었다.

"세이프."

약간은 자신 없어 하는 주심의 판정에 직접 태그 했던 이재훈 포수가 곧바로 항의하고 나선다.

"아웃입니다! 태그가 먼저 됐다고요! 비디오, 비디오!"

이재훈 포수는 와이번스 덕 아웃을 향해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는 손가락 제스쳐를 취해 보인다.

그 모습에 와이번스 덕 아웃에서는 비디오 판독을 요구했고, 주심은 결과를 판정하기 위해 판독실로 걸음을 옮겼다.

주심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본인이 정확히 보지 못한 판정을 와이번스 쪽에서 비디오 판독 요구를 했으니 판독실에서 정확하게 판단하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판독실에 도착해서도 그는 쉽사리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것은 중계석의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각도에서는 제대로 판단이 어렵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봐야할 것 같네요."

전 캐스터의 말 이후에 중계화면에서는 다른 각도로 강호의 홈스틸을 촬영한 영상을 재생한다.

하지만 바뀐 화면에서도 아웃, 세이프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했다.

"거의 동 타이밍이네요. 나광진 주심의 세이프 판정도 이해가 되고, 이재훈 포수의 비디오 판독 요청도 이해가 가는데. 이건 심판진이 판단하기에 따라서 세이프를 줄 수도 있고, 아웃을 줄 수도 있는 판정 같아요."

이효범 위원은 연속해서 재생되는 서로 다른 각도의 화면을 통해서도 답을 내지 못하고, 결국 판단을 심판진에게 넘긴다.

심판의 판정에 대해서는 중계진이 너무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부 방침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 박빙의 상황에 대해서는 심판진의 의견을 존중하는 중계석이었다.

모두의 시선은 결국 한참 동안 판독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모습을 드러내는 주심에게로 향하게 된다.

"세이프."

주심의 판정은 결국 원심 그대로였다.

그 판정에 3루 쪽 덕 아웃과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와아아!!"

"강호가 홈 스틸을 성공시켰어?!"

"혼자 다 하네. 혼자 다 해."

선배 선수들은 강호의 어깨를 두들기며 칭찬의 말을 쏟아냈고, 자이언츠 원정 팬들은 드디어 터진 팀의 첫 득점에 기뻐한다.

그 점수가 3연속 도루를 성공시키며 홈스틸로 만들어낸 점수라는 사실에 더욱 흥분하게 된다.

침체되어 있던 덕 아웃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강호의 모험이 성공이라는 결실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백강호 선수! 팀의 첫 득점을 신고하는 홈스틸에 성공합니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자이언츠가 드디어 1득점을 신고하며 이제 팀 스코어는 5대 1로 따라붙습니다!"

원심을 유지한 주심의 판정에 중계석의 전 캐스터가 곧 바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 이효범 위원이 오늘 강호의 도루 기록을 확인하며 해설의 말을 더한다.

"홈스틸이 인정되면서 오늘 백강호 선수가 기록한 도루가 다섯 개로 늘어났어요. 시즌 35호 도루에요. 도루 부분에서는 백강호 선수가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서네요. 2위권 경쟁자들과 거의 10개 차입니다."

이 위원은 강호의 이번 홈스틸로 35호 도루가 기록되고 있음을 알린다.

트윈스의 김용희, 위즈의 이대현, 타이거즈의 노수강, 강한율 등의 2위권 경쟁자들과 10개 이상의 차이를 벌리며 도루 부문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는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더욱 무서운 점은 4월에 14개를 기록했던 강호의 도루가 5월에는 21개로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이 위원은 추가로 아직 6월까지는 일주일이 남은 시점에서 강호의 도루 기록이 보기 드문 페이스를 달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제 김광헌 투수의 대처가 중요해지거든요? 백강호 선수의 연속 도루 성공에 이은 홈스틸로 분위기가 자이언츠 쪽으로 넘어왔습니다. 와이번스 쪽에서는 결정을 내려야할 것 같아요. 김광헌 투수에게 그대로 마운드를 맡길 것인지 아니면 흐름을 끊을 수 있는 불펜 진을 재가동할 지를 말입니다."

이 위원의 말이 있은 직후, 와이번스 덕 아웃에서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오른다.

"황제인까지만 상대하고, 투수를 교체할 거야. 백강호의 홈스틸은 잊어버리고, 타자에게만 집중해. 이제는 주자도 없는 상황이잖아."

투수코치의 당부에 광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투수코치가 어깨를 두들기고 내려간 후, 광헌은 타석에 서있던 황제인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강호의 득점으로 자칫 자이언츠에게 넘어갈 뻔 했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여기서 와이번스 덕 아웃은 발 빠른 조치를 감행한다.

김광헌을 내리고, 셋업 투수인 박성배를 올린 것이다.

새롭게 마운드에 오른 박성배 투수는 베테랑다운 노련한 피칭으로 5번 타자 강민수와 대타 채중석을 범타로 돌려세우며 위기 상황을 마무리한다.

이 후 세이브 상황이 아님에도 9회 초, 마운드에 오른 와이번스의 마무리, 박희준의 강력한 구위가 다시 끌어오를 뻔 했던 자이언츠의 타선을 잠재운다.

경기 결과는 1대5. 강호의 홈스틸에도 반전 없이 자이언츠의 완패로 경기가 끝나고만 것이었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후,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며 원정 버스에 오르게 된다.

"야, 누가 위즈 팀 경기 결과 아는 사람 없어? 어떻게 됐어, 그 쪽은?"

버스에 오른 박상현 투수가 먼저 버스에 타고 있던 선수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의 물음에 앞쪽 자리에 앉아 있던 채중석 선수가 한숨을 내쉬며 답한다.

"이겼어요. 위즈는 하필 이럴 때 4연승을 한답니까? 이제 우리 팀이 꼴찌라고요."

상현의 질문에 대꾸하는 중석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원정 버스에 속속들이 몸을 싣는 모든 선수들이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팀이 꼴찌로 떨어졌는데 기분이 좋은 선수는 없을 것이다.

강호 역시 오늘 경기에서 맹활약을 펼쳤음에도 어두운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로 이동한다.

그런 강호에게 박상현 투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팀이 최근 몇 년 동안 하위권으로 분류되기는 했어도 시즌 초반부터 꼴찌를 한 적은 없었는데. 올해는 완전히 글러먹었네. 조만간 코칭스태프들의 인사이동 얘기가 표면화 되겠어. 제일 먼저 한 감독에 대한 책임론도 나올 거고 말이야."

상현은 마치 예언처럼 코칭스태프의 인사이동 문제를 거론하고 나선다.

한 때 2군 선수들을 통해 접하게 된 코칭스태프의 인사이동 소문이 곧 현실화될 거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이언츠에서 20년 동안 공을 던진 박상현 투수로서는 구단 고위층에서 지금의 사태를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그의 확신대로 자이언츠 구단 본부에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소는 구단 본부로 옮겨진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이라고 한 것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구단 사장실에 모인 수뇌부들은 웬일인지 존댓말로 서두를 꺼내고 있는 지정만 사장의 어조에 놀란 눈을 크게 뜬다.

항상 반말로 일관하던 지 사장이었다.

그가 구단 수뇌부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기도 했고, 직급도 가장 높아서 반말하는 게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 사장이 갑작스럽게 말을 높이니 이번 회의 주제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심각성을 짐작하게 된다.

'오늘은 기사 댓글에 욕 달린 것 때문에 모이라고 한 건 아닌 모양인데?'

'이제야 비상대책회의 다운 회의를 진행할 생각이신가 보네. 그런데 주제가 뭐야?"

사장실에 모인 간부 사원들과 임원들은 각자의 생각들을 눈빛으로 주고받으며 지 사장이 갖고 온 주제가 무엇인지를 추측해보고 있었다.

그 때 이상현 단장이 모두의 얼굴을 한 눈에 담으며 비틀린 미소를 짓는다.

'바보같으니라고. 뭐긴 뭐겠어? 팀 성적이 10위까지 떨어졌는데 당연히 팀 성적과 관련된 거 아니겠어?'

이 단장은 이번 회의는 10위까지 하락한 팀 성적을 주제로 마련된 대책회의라고 확신했다.

그의 확신대로 곧 이어 꺼낸 지 사장의 말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 경기로 우리 팀의 성적이 10위까지 떨어졌어요. 팀 기사마다 팬들의 댓글이 초토화된 것은 물론이고, 구단 홈페이지도 마비되었습니다."

지 사장은 먼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로 서두를 떼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이상현 단장이 곧바로 입을 연다.

며칠 전부터 팀이 10위까지 성적이 떨어졌을 때의 변명을 준비하고 있던 이 단장이었기에 반박하는 말에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사장님. 아직은 시즌 초반입니다. 저희의 당초 전략은 여름부터 순위 레이스를 시작하자는 거였습니다. 아직은 체력을 비축할 때에요. 그리고 백강호 선수나 권대우 선수, 가진성, 사준식, 김영명, 표성태, 유성철, 박철, 안민경 같은 2군에서 올라온 신인급 선수들이 제 역할을 다해주고 있습니다. 시즌이 후반으로 갈 수록 우리 팀의 성적이 올라갈 것은 분명한 일일 겁니다. 예전부터 구단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1군 선수들과 2군 선수들의 기량 차이가 눈에 띄게 좁혀져 있지 않습니까? 6월부터는 반등이 시작될 겁니다."

이상현 단장의 이성적이고, 막힘없는 말에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지정만 사장만큼은 오히려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럼 한 가지 물읍시다. 6월부터 반등한다면 어디까지 올라갈 거 같아요? 시즌 초반에 이렇게 욕을 먹을 정도면 못해도 1, 2위 경쟁은 하고 있겠네요. 안 그렇습니까?"

허를 찌르는 지 사장의 지적에 이상현 단장은 순간 말문이 막힌다.

'어서 대답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질 거야.'

이 단장은 나름의 대답을 찾기 위해 분주히 머리를 굴려본다.

그러나 그가 급조한 대답보다는 지 사장의 뒤이은 질문이 조금 더 빨랐다.

"6월에 우리 팀이 반등하지 못하면 이상현 단장이 책임지고 옷을 벗을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미리 사직서를 써놓고 회의를 시작해야겠네요. 허 실장. 준비해뒀던 거 가져와."

"네."

'사직서'를 거론하는 지 사장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표정이 굳어진다.

이어서 허 실장이 미리 준비해둔 사직서 양식을 모두에게 분배하자, 더 이상 지 사장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은 없어졌다.

"우리 내기를 하는 것이 어때요? 많이 양보해서 6월에 우리 팀이 3위까지 올라간다면 내가 이 사직서에 내 이름을 써놓겠습니다. 반대로 팀이 6월 동안 3위까지 올라가지 못한다면 이 단장이 책임을 지도록 하세요."

"...."

지 사장의 말에 이 단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이사급 이상의 임원들은 총회에서 해임 안을 결정하게 된다. 사직서를 쓴다고 해서 곧장 퇴사 처리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자리를 놓고 팀 순위를 올려놓으라는 지 사장의 말에는 답할 수가 없었다.

지금 지 사장의 굳은 얼굴을 보니, 이 자리에서 사직서에 이름을 써넣으면 곧장 해임 처리를 추진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왜? 짤리는 건 싫은가 보네. 그럼 헛소리 준비할 시간에 팀 성적 올릴 궁리를 하지 그랬어? 팀 순위가 이 지경이 되고, 선수단 내에 코칭스태프 인사이동 소문이 떠돌 때까지 당신을 대체 뭘 한 거야?! 어! 입이 있으면 말들을 해보라고!!"

타앙!

지 사장은 결국 회의 테이블을 내려치며 분노를 표출한다.

모두에게 존댓말로 대했던 지 사장의 태도는 고작 몇 분 만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 역정을 낸 지 사장은 다시금 자리에 앉으며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자리에 앉은 지 사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모든 회의 참석자들을 훑고 지나간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거야? 또 다른 게 있는 건가?'

'단지 팀 성적에 대해 화내려고 부르신 게 아닌 모양인데...'

이 단장을 포함한 모든 수뇌부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지 사장의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잠시의 침묵 후, 드디어 지정만 사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분들을 오라고 한 것은 한동현 감독의 해임 안을 논하기 위해서예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는 지정만 사장. 그가 던진 말의 내용에 모두의 얼굴이 급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한다.

한동현 감독의 해임 안. 드디어 모든 증거 수집을 끝낸 지정만 사장이 나락으로 떨어진 팀을 위한 승부수를 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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