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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석의 지배자
강호는 순간 망설이게 된다.
상대 투수 카라가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의 정 가운데로 동과하는 포심 패스트볼이었기 때문이다.
구종: 포심 패스트볼
구속: 152km
제구를 포기하고 구위로 찍어 누르려는 속셈인지, 카라의 손을 떠난 공은 정확히 스트라이크 존의 정중앙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순간 판단을 내린 강호의 배트가 벼락같이 움직인다.
따악!
타석을 가득 채우는 타격음에 공을 던진 카라가 순간 움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강호는 1루로 뛰지 않고 있었다.
빠른 강속구에 타이밍이 밀려서인지 타구는 오른쪽 외야로 뻗다가 관중석으로 휘어 나가는 대형 파울 타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왓 더 헬. 이공을 쳤어? 두 번은 던지지 말아야겠네. 백강호라는 타자가 이 정도 구위의 공을 저렇게 큰 타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타자라면, 정면 승부는 위험해!'
와이번스의 1선발, 에이스 투수인 카라는 자신이 강호의 도발에 낚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만심을 내려놓게 된다.
카라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확인한 강호는 속으로 '쳇.' 하고 혀를 차며, 다시금 타격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이것은 고도의 연기였다.
상대 투수인 카라에게 포심을 노리고 있다는 점을 착각하게 만들기 위한 강호의 연기였던 것이다.
'이제 너는 변화구를 던질 거야. 볼 카운트가 2스트라이크 상황이니 하나는 볼 카운트를 버리는 유인구를 던지겠지. 조금 전에 내가 때려낸 파울 홈런이 투구를 위축되게 만들 테니까.'
강호는 카라를 향한 눈빛을 빛내며, 3구째 공을 기다린다.
어차피 기간제 아이템 효과로 구종과 구속, 코스를 미리 읽을 수가 있었다.
상대 배터리와의 복잡한 두뇌싸움은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구종: 체인지 업
구속: 126km
시야에 표시되는 메시지와 함께 3구째 코스를 알게 된 강호.
'볼이구나.'
강호는 3구째를 노려 칠 생각이었지만, 카라의 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계획을 수정한다.
몸 쪽으로 바짝 붙는 체인지업을 타격 하려다가는 무릎이나 발목 쪽에 공을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반 발짝 물러난 채 몸을 피한다.
"볼 원."
주심의 판정과 함께 반쯤 물러났던 강호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공이 날아오는 코스를 미리 알게 되니, 위험한 쪽으로 날아오는 공은 미리 피할 수도 있구나. 야구가 이렇게 쉬울 수도 있다니.'
처음 사용해본 '나는 심판이다' 아이템과 '타석의 지배자' 아이템의 효과에 강호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1회용 타격 아이템들의 효과도 대단했지만, 두 기간제 아이템의 효과를 체감하게 되니 다음 프리마켓 방문 때 다른 것은 몰라도 두 아이템을 재구매 하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어보였다.
강호가 아이템의 효과에 대해 알아가는 사이 카라의 4구째가 뿌려진다.
그 순간, 강호의 눈이 번쩍하고 빛난다.
'이 공이다!'
강하게 드는 확신 속에 카라의 4구째를 타격하고 있었다.
따악!
제대로 맞은 타구가 외야를 향해 강하게 뻗어나가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전력을 다해 1루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 강호. 그 모습을 지켜보는 중계석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쳤습니다! 카라의 커브를 타격한 백강호 선수의 타구가 오른쪽 담장을 향해 뻗습니다! 이명규 우익수가 펜스를 향해 달립니다. 펜스를 직접 때린 타구는 이명규 우익수의 발밑으로 떨어집니다!"
전용제 캐스터의 현장감 넘치는 중계에 이어 이효범 위원이 해설을 더한다.
"지금은 백강호 타자가 슬로우 커브를 노리고 있던 게 아니었거든요. 슬로우 커브 타이밍에 맞추느라 한 템포를 쉬고 배트를 내는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이 커브 공을 펜스를 때리는 2루타로 만들어 내네요. 대단한 타격 재능입니다. 왜 이런 선수가 5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을까요?"
이 위원의 마무리 말이 의문문으로 끝나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전 캐스터가 입을 연다.
"저한테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렇게 물어 보시니까 제가 괜히 백강호 선수에게 미안해지네요. 백강호 선수도 5년간의 무명을 딛고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아픈 시간들이 있었겠습니까? 저렇게 대단한 선수는 그냥 만들어 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갑자기 이 말이 떠오르네요. 백조가 우아한 모습으로 물 위에 떠있기 위해서는 수면 아래로는 쉬지 않고 발길질을 해야 한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백강호 선수의 무명시절이나 현재 역시 그런 노력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장난스럽게 이 위원의 말을 받아 시작했던 전용제 캐스터의 말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각자의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묘한 여운이 담겨 있었다.
그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질문을 던졌던 이효범 위원이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말씀 참 잘하시네요. 미리 준비하신 멘트 아니에요?"
"아닙니다. 말 하는 게 제 직업인데요. 백강호 선수나 다른 선수들이 좋은 성적으로 팬들의 기대에 보답하는 것이 일인 것처럼 제 일은 시청자 분들께 좋은 중계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위원의 물음에 자연스럽게 대답한 전 캐스터는 선수들의 노력을 칭찬하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의 말에 일부 자이언츠 팬들이 심히 동감하게 된다.
그 중, 자이언츠의 최근 좋지 못한 성적에 속이 상해 막걸리를 들이 키고 있던 거제시장의 황동철이 언성을 높인다.
"거, 말 한 번 잘하네. 캐스터는 중계 잘하면 되고 선수는 야구 잘하면 되는데, 자이언츠는 왜 이것 밖에 못하는 거야? 백강호 같은 타자도 있고, 박세준 같은 투수도 있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이 모양이야. 한동현 감독 머리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 마, 확 마! 문학구장 찾아가서 한 감독 군기 좀 잡고 와야 되겠어. 내 차 키 어디 갔어?"
동철의 성난 목소리에 친구인 갑식이 손을 들어 만류한다.
"이 놈은 막걸리 곱게 잘 쳐 먹다가 왜 또 이러는 거야? 술을 너 혼자 마셨어? 똑같이 마셨는데 왜 네만 취하는 거야. 이거 이기적인 놈이네. 취하려면 다 같이 취해야지. 그리고 차 키는 처음부터 안 들고 나왔잖아. 정신 차려라. 이 사람아!"
갑식의 만류에 또 다른 친구인 현승은 오히려 갑식을 말린다.
"왜? 동철이가 맞는 말 했는데. 동철아, 가자! 나는 차 키 가지고 왔다. 내가 당장 문학 구장 가서 트렁크에 들어있는 새우젓을 끼얹어 버리겠어!"
"콜!"
갑식은 성난 목소리와 함께 차 키를 챙기는 현승과, 계속해서 콜을 외쳐대는 동철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친다.
"현승이 너는 재수 씨가 사오라고 한 새우젓을 문학에 뿌리면 어쩌자는 거야?! 여기요! 경찰 아저씨들, 이 인간들 좀 잡아 가세요! 음주 운전을 하겠답니다!"
세 사람이 걸쭉하게 취한 채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은 사이에도 경기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수고했어, 강호. 네 덕분에 카라가 멘탈이 나간 것 같은데? 오늘 1회에 빅 이닝 한 번 만들어 보자!"
홈을 밟고 1득점을 추가로 올린 후 덕 아웃으로 돌아온 강호에게 김민철 수석이 한 말이었다.
그는 잘했다는 의미로 강호의 등을 두들기며 반겨주고 있었다.
강호에게 2루타를 허용한 와이번스 선발 카라가 최근 들어 타격 부진을 겪고 있는 4번 타자 황제인에게 마저 연이어 2루타를 허용하고 만 것이었다.
'제인이가 잘 때린 것도 있지만, 강호의 타석 때 던진 카라의 슬로우 커브가 장타로 연결된 게 카라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거야.'
1회 상황에 대한 김 수석의 생각이었다.
김 수석은 강호의 활약으로 제인이 반사 이득을 얻은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라가 흔들리는 제구력으로 무리하게 제인을 삼진으로 돌려 세우려다가 오히려 2루타를 얻어맞은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오~강호! 점수 팍팍 내란다고 진짜 팍팍 내네. 너처럼 마음먹은 대로 다른 타자들도 점수를 내주면 우리 팀은 지금 선두 경쟁을 하고 있었을 텐데. 우리 선배들이 반성해야 되겠어."
벤치로 돌아와 자신의 자리에 앉은 강호에게 박상현 투수가 다가와 칭찬의 말을 건넨다.
"카라가 포심을 던지다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커브를 던져서 운 좋게 안타를 친 겁니다."
강호는 사실과는 조금 다른 말로 상현의 말에 겸손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이어진 강호의 말은 겸손하지 않았다.
"선배님 손에 들고 계신 음료수 다 드신 겁니까? 더 안 드실 거면 저 좀 주시죠. 목이 좀 마르네요."
강호는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약간은 거만하게 상현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그 행동에 상현은 '푸핫'하고 웃어 보이며 입을 연다.
"아직 입도 안 댔다. 너 다 마셔라. 1타점에 1득점을 기록한 1회의 히어로한테 내가 음료수 하나 못 줄 것 같아? 어차피 이거 내 거 아니야. 저기 냉장고에 들어 있던 거야. 자."
상현은 강호에게서는 드물게 볼 수 있는 장난에 웃음기 띤 얼굴로 대꾸하며, 손수 음료 페트병의 뚜껑을 열어 건네주고 있었다.
강호는 음료를 건네받으며 한 모금 마신 뒤, 상현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제 몫은 다했으니까 상현 선배님도 나중에 불펜으로 마운드에 오르시면 무실점으로 막아주셔야 됩니다."
원정 버스 안에서 상현이 건넨 말들을 상기시키는 강호의 당부에 상현은 '허허'하고 웃으며 대답한다.
"4할 대 타자가 꼴랑 1타점 내고, 프로 생활 20년차인 선배한테 부담 주는 거야? 아직 멀었어. 적어도 2타점은 더 때려내고 그런 소리 해. 강호, 네가 오늘 3타점 때려내면 나도 무조건 무실점으로 막아볼 테니까."
"진짭니까? 만약 제가 3타점 때렸는데 선배님이 실점하시면 어쩌시려고요?"
"악담을 해라. 내가 실점하기를 바라는 거 아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네가 3타점 냈는데 내가 자책점 내주면 네가 내 형이다!"
큰소리치는 상현의 말에 강호는 곁에 앉은 대우의 팔을 팔꿈치로 툭 치며 묻는다.
"대우야. 들었어? 상현 선배가 한 말 말이야."
"어떤 말요? 자책점 내주면 상현 선배님이 강호 선배 동생이란 말이요?"
"잘 들었네. 네가 증인이야. 잘 기억하고 있어라."
상현은 근처에 있던 대우까지 끌어들이는 강호의 행동에 왠지 불안해진다.
'이거 이러다 오늘 15살 어린 형 하나 생기는 거 아냐? 혹시라도 계투로 마운드에 오르면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데?'
상현은 불안한 마음에 스스로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상현의 각오는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경기가 끝났을 때 상현은 강호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 형. 내가 말을 좀 함부로 했네. 다음부터 말조심할게."
"징그럽게 왜 이러십니까? 아까 그 말 때문에 그러십니까? 없던 일로 해드릴 테니까 저리 좀 가십시오. 다른 선배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경기를 승리로 끝내고 아옹다옹하고 있는 두 선배들의 모습에 사건의 증인이었던 대우가 참견하고 나선다.
"약속은 약속 아닙니까? 저더러 증인하라면서요. 저 기억력 좋습니다. 제가 다 기억하고 있어요."
"너까지 왜 이래? 너도 저리가. 내가 4타점이나 때렸는데 왜 이런 고초를 겪어야 되는 거야?"
정색하는 강호의 말에 대우를 대신해서 박상현 투수가 여전히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한다.
"강호 형, 고초라니요? 저 같은 동생 생겨서 싫은 거요? 강호 형, 이참에 밥 한 끼 사쇼. 오늘부터 네가 형이잖아."
이 기회에 덤터기를 씌우려는 상현의 행동에 강호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짓는다.
"저한테 밥 얻어 드시려고, 일부러 점수 내준 건 아니시죠?"
"그게 무슨 억측이야? 형이라는 사람이 동생을 그렇게 의심하면 안 되는 거라고. 내가 40년 밖에 안 살았지만, 그동안 살면서 배웠어. 알려줄게 많으니까 밥 좀 사라고. 여기 인천이잖아. 회 먹으러 가자."
상현의 말에 자신에게 독박을 씌우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강호는 상현과 점점 거리를 둔 채로 걸음을 옮긴다.
"대우야. 우리는 숙소 가서 밥이나 먹자. 상현 선배님은 회 드시러 가신단다."
대우를 이끌고 가버리려는 강호의 모습에 상현은 또 다시 억지를 부린다.
"회 사달라고! 아니, 내가 사줄 테니까 먹으러 가자."
태세를 전환한 상현의 부름에도 대우와 함께 원정 버스에 오르는 강호. 그런 강호를 향해 상현의 마지막 절규가 들려온다.
"회 먹으러 가자. 강호야!"
어느새 강호를 부르는 호칭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는 상현.
잠시 후 그 마저 태운 원정 버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숙소 호텔로 방향을 잡는다.